안중근(安重根)이 하바로프스키에서 다시 연추로 온 것은 해가 바뀐 1909년 1월이었다. ‘병가상사(兵家常事)’라는 한번의 패전(敗戰)으로 언제까지나 좌절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구국(救國)의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을 모았다. 그리하여 결행한 것이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선혈로 기록되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이다.
안중근은 1909년 3월 5일(음력 2월 7일), 연추 하리(下里) 마을에서 생사를 같이하며 구국운동에 투신하는 동지 11인과 단지동맹을 결행하고 ‘조국 독립회복과 동양평화 유지’를 위하는 목적으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했다. 단지동맹을 결성했던 하리는 현재 크라스키노 쮸카노바 마을에서 훈춘방향으로 가는 길목이다.
대부분 의병 출신인 ‘동의단지회’ 맹원은 20대 중후반 혹은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명단은 김기룡·강순기·정원주·박봉석·유치홍·김백춘·백규삼·황영길·조응순·김천화·강창두 등이다. 이날 12인의 애국 청년들은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잘라 태극기에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쓴 뒤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안중근의 약지가 잘린 수형(手形)은 이때 단지로 그리 되었다.
안중근은 단지한 12인의 피를 발(鉢)에 모아 직접 서천동맹(誓天同盟)하여 결성하는 단지동의회의 취지문을 혈서했다.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취지문〉
‘오늘날 우리 한국 인종(人種)이 국가가 위급하고 생민(生民)이 멸망할 지경에 당하여 어찌 하였으면 좋은 방법을 모르고 혹 왈(曰) 좋은 때가 되면 일이 없다하고, 혹 왈 외국이 도와주면 된다거나, 이 말은 다 쓸데없는 말이니 이러한 사람은 다만 놀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의뢰하기만 즐겨하는 까닭이라.
우리 이천만 동포가 일심단체(一心團體)하여 생사를 불고한 연후에야 국권을 회복하고 생명을 보전할지라.
그러나 우리 동포는 말로만 애국이니 일심단체이니 하고 실지로 뜨거운 마음과 간절한 단체가 없으므로 특별히 한 회(會)를 조직하니 그 이름은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라. 우리 일반 회우(會友)가 손가락 하나씩 끊음은 비록 조그마한 일이나 첫째는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빙거(憑據)요, 둘째는 일심단체하는 표(標)라. 오늘날 우리가 더운 피로써 청천백일하에 맹세하오니 자금위시(自今爲始)하여 아무쪼록 이전의 허물을 고치고 일심단체하여 마음을 변치 말고 목적을 도달한 후에 태평동락을 만만세로 누리옵시다.’
안중근은 이〈동의단지회 취지문〉에서 외국이 도와주면 독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오로지 2천만 동포가 일심단체가 되어 생사를 뛰어넘어야 국권을 회복하고 생명을 보전할 수 있는 것임을 천명했다.
단지동맹자 명단은 자료에 다라 다소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이 분야 전문가인 윤병석 인하대학교 명예교수의 명단을 취한다. 윤병석 교수는 “안중근이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 뒤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명단을 될수록 밝히려 하지 않았고 언급한 명부도 심문 때마다 약간씩 성명을 달리한 경우가 있다. 현재 명백한 것은 안중근 의사와 결의형제를 맺었던 김기룡과 딘지와 혈서한 태극기를 보관하였던 백규삼 그리고 황영길·조응순·강순기·강창두 정도다. 다음 12인의 동맹자 명부는 1909년 12월 12일자 사카이 경시[境警視]의 단지동맹에 관한 신문 결과 보고 전문을 비롯하여 동년 12월 20일자 미조부찌 다까오[溝淵] 검찰관 심문조서, 1910년 2월 7일자 여순공판시 안중근 의사 답변 속기록, 1911년 7월 5일자 블라디보스톡 일본총영사 보고서, 1920년 일제가 작성한 조응순공술서 등을 종합 작성한 것”이라면서 12인이 손가락을 잘라 쓴 혈서는 “동맹의 1인인 백규삼이 보관하고 있었으나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이 안중근 의사의 옥중 유언에 따라 1912년 1월 이전 동맹자들에게 청하여 인수 보관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안중근과 맹원들이 선혈로 쓴 ‘한국독립기’와 단지동맹 때 자른 손가락 기타 서류는, 독립운동가들과 러시아 지역 한국인들에게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는 “배일배는 신을 숭경하듯이 하고 새로 조선에서 오는 자는 일부러 와서 예배를 청하는 자 조차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안중근은 단지동맹의 의미를《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 다음해 정월 연추 방면으로 돌아와 동지 열 둘과 상의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이제까지 일을 이룩한 것이 없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할 길이 없다. 생각건대 특별한 단체가 없다면 무슨일이든 목적을 이루기가 어렵다. 오늘 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같이 하여 표적을 남긴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뭉쳐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쳐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고 하였더니 모두가 좋다고 따랐다. 이에 열 두사람은 제각기 왼손 새끼손가락을 끊고 그 피로써 태극기의 앞면에 네 글자를 크게 쓰기를「대한독립」이라 하고는 다 쓴 다음에〈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불러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흩어졌다.’
단지동맹은 의병재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당장 일제와 싸우는 것보다 장기적인 계획을 추진하고자 결성되었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의병을 조직해 일제와 전쟁을 하려는 것이었다. 안중근과 의형제를 맺고 의병 활동을 함께해 온 김기룡은 뒷날 노령 지역에서 한국인사회주의운동을 했고, 안중근 의병부대에 참가했던 조순웅은 고려공산당의 한인부(韓人部) 위원과 한국독립단 부단장으로 활동했다. 황영길은 대한민회 연추지방회 사무원과 훈춘 의용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의용군 1300여 명을 조직하여 경원, 은성 등의 국경지방 습격을 주도했다. 백규삼은 훈춘 조선인 기독교우회 회장, 안중근 유족 구제회 간부 등을 지내면서 항일구국투쟁을 전개했다.
안중근의 ‘동의단지회’ 결성은 이 지역 한국인 세력의 판도에도 중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이 지역 한국인사회는 분열되어 있었다. 이범윤 세력과 최재형 세력 간에 대립이 심화되었고, 여기에 그동안 의병항쟁을 방관하다시피 해온 러시아 당국이 일제의 압력으로 탄압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러시아 당국은 한국인들의 군사훈련과 무기소지를 금지하고, 의병의 무기를 압수하는가 하면 의병 본부의 해체를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 이상 의병항쟁이 어렵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면에서 조직된 안중근의 단지동맹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는 의지가 담겼다고 할 수 있다.
“단지동맹은 안중근이 친로파로 단정한 이범윤, 최재형파와 결별을 선언하는 동시에 대내외에 안중근세력의 건재함을 선포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러한 측면에서 연추한인일심회는 단지동맹을 결성하기 위한 하나의 포석으로 그의 정치적 역량이 노령사회에서 확고하게 인정받는 시금석이 되었던 것이다.”
안중근은 ‘패전지장’의 좌절을 극복하고 줄기찬 노력 끝에 해삼위 지역 한국인사회의 지도자로 일어섰다. 순수한 열정과 투철한 구국정신이 많은 동포들을 움직이고, 특히 의협심이 강한 청년들이 그의 휘하에 들어왔다. 안중근과 동지들은 1909년 3월 약 3백명의 의병을 동원하여 다시 의병 활동을 전개하고, 이 지역에 들어와 밀정노릇을 하고 있는 일진회 무리를 색출하기도 했다. 안중근은 이 해 봄과 여름 사이에 국내에 들어와 동정을 살피려는 계획을 모색했으나 경비 부족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는 안중근이 은밀하게 한국에 들어와 활동했다는 기록도 있다.
『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전기』5.반일의병항쟁 ⑸
○ 선혈로 맺은 ‘단지동맹(斷指同盟)’
안중근(安重根)이 하바로프스키에서 다시 연추로 온 것은 해가 바뀐 1909년 1월이었다. ‘병가상사(兵家常事)’라는 한번의 패전(敗戰)으로 언제까지나 좌절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구국(救國)의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을 모았다. 그리하여 결행한 것이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선혈로 기록되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이다.
안중근은 1909년 3월 5일(음력 2월 7일), 연추 하리(下里) 마을에서 생사를 같이하며 구국운동에 투신하는 동지 11인과 단지동맹을 결행하고 ‘조국 독립회복과 동양평화 유지’를 위하는 목적으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했다. 단지동맹을 결성했던 하리는 현재 크라스키노 쮸카노바 마을에서 훈춘방향으로 가는 길목이다.
대부분 의병 출신인 ‘동의단지회’ 맹원은 20대 중후반 혹은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명단은 김기룡·강순기·정원주·박봉석·유치홍·김백춘·백규삼·황영길·조응순·김천화·강창두 등이다. 이날 12인의 애국 청년들은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잘라 태극기에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쓴 뒤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안중근의 약지가 잘린 수형(手形)은 이때 단지로 그리 되었다.
안중근은 단지한 12인의 피를 발(鉢)에 모아 직접 서천동맹(誓天同盟)하여 결성하는 단지동의회의 취지문을 혈서했다.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취지문〉
‘오늘날 우리 한국 인종(人種)이 국가가 위급하고 생민(生民)이 멸망할 지경에 당하여 어찌 하였으면 좋은 방법을 모르고 혹 왈(曰) 좋은 때가 되면 일이 없다하고, 혹 왈 외국이 도와주면 된다거나, 이 말은 다 쓸데없는 말이니 이러한 사람은 다만 놀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의뢰하기만 즐겨하는 까닭이라.
우리 이천만 동포가 일심단체(一心團體)하여 생사를 불고한 연후에야 국권을 회복하고 생명을 보전할지라.
그러나 우리 동포는 말로만 애국이니 일심단체이니 하고 실지로 뜨거운 마음과 간절한 단체가 없으므로 특별히 한 회(會)를 조직하니 그 이름은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라. 우리 일반 회우(會友)가 손가락 하나씩 끊음은 비록 조그마한 일이나 첫째는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빙거(憑據)요, 둘째는 일심단체하는 표(標)라. 오늘날 우리가 더운 피로써 청천백일하에 맹세하오니 자금위시(自今爲始)하여 아무쪼록 이전의 허물을 고치고 일심단체하여 마음을 변치 말고 목적을 도달한 후에 태평동락을 만만세로 누리옵시다.’
안중근은 이〈동의단지회 취지문〉에서 외국이 도와주면 독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오로지 2천만 동포가 일심단체가 되어 생사를 뛰어넘어야 국권을 회복하고 생명을 보전할 수 있는 것임을 천명했다.
단지동맹자 명단은 자료에 다라 다소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이 분야 전문가인 윤병석 인하대학교 명예교수의 명단을 취한다. 윤병석 교수는 “안중근이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 뒤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명단을 될수록 밝히려 하지 않았고 언급한 명부도 심문 때마다 약간씩 성명을 달리한 경우가 있다. 현재 명백한 것은 안중근 의사와 결의형제를 맺었던 김기룡과 딘지와 혈서한 태극기를 보관하였던 백규삼 그리고 황영길·조응순·강순기·강창두 정도다. 다음 12인의 동맹자 명부는 1909년 12월 12일자 사카이 경시[境警視]의 단지동맹에 관한 신문 결과 보고 전문을 비롯하여 동년 12월 20일자 미조부찌 다까오[溝淵] 검찰관 심문조서, 1910년 2월 7일자 여순공판시 안중근 의사 답변 속기록, 1911년 7월 5일자 블라디보스톡 일본총영사 보고서, 1920년 일제가 작성한 조응순공술서 등을 종합 작성한 것”이라면서 12인이 손가락을 잘라 쓴 혈서는 “동맹의 1인인 백규삼이 보관하고 있었으나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이 안중근 의사의 옥중 유언에 따라 1912년 1월 이전 동맹자들에게 청하여 인수 보관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안중근과 맹원들이 선혈로 쓴 ‘한국독립기’와 단지동맹 때 자른 손가락 기타 서류는, 독립운동가들과 러시아 지역 한국인들에게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는 “배일배는 신을 숭경하듯이 하고 새로 조선에서 오는 자는 일부러 와서 예배를 청하는 자 조차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안중근은 단지동맹의 의미를《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 다음해 정월 연추 방면으로 돌아와 동지 열 둘과 상의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이제까지 일을 이룩한 것이 없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할 길이 없다. 생각건대 특별한 단체가 없다면 무슨일이든 목적을 이루기가 어렵다. 오늘 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같이 하여 표적을 남긴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뭉쳐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쳐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고 하였더니 모두가 좋다고 따랐다. 이에 열 두사람은 제각기 왼손 새끼손가락을 끊고 그 피로써 태극기의 앞면에 네 글자를 크게 쓰기를「대한독립」이라 하고는 다 쓴 다음에〈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불러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흩어졌다.’
단지동맹은 의병재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당장 일제와 싸우는 것보다 장기적인 계획을 추진하고자 결성되었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의병을 조직해 일제와 전쟁을 하려는 것이었다. 안중근과 의형제를 맺고 의병 활동을 함께해 온 김기룡은 뒷날 노령 지역에서 한국인사회주의운동을 했고, 안중근 의병부대에 참가했던 조순웅은 고려공산당의 한인부(韓人部) 위원과 한국독립단 부단장으로 활동했다. 황영길은 대한민회 연추지방회 사무원과 훈춘 의용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의용군 1300여 명을 조직하여 경원, 은성 등의 국경지방 습격을 주도했다. 백규삼은 훈춘 조선인 기독교우회 회장, 안중근 유족 구제회 간부 등을 지내면서 항일구국투쟁을 전개했다.
안중근의 ‘동의단지회’ 결성은 이 지역 한국인 세력의 판도에도 중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이 지역 한국인사회는 분열되어 있었다. 이범윤 세력과 최재형 세력 간에 대립이 심화되었고, 여기에 그동안 의병항쟁을 방관하다시피 해온 러시아 당국이 일제의 압력으로 탄압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러시아 당국은 한국인들의 군사훈련과 무기소지를 금지하고, 의병의 무기를 압수하는가 하면 의병 본부의 해체를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 이상 의병항쟁이 어렵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면에서 조직된 안중근의 단지동맹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는 의지가 담겼다고 할 수 있다.
“단지동맹은 안중근이 친로파로 단정한 이범윤, 최재형파와 결별을 선언하는 동시에 대내외에 안중근세력의 건재함을 선포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러한 측면에서 연추한인일심회는 단지동맹을 결성하기 위한 하나의 포석으로 그의 정치적 역량이 노령사회에서 확고하게 인정받는 시금석이 되었던 것이다.”
안중근은 ‘패전지장’의 좌절을 극복하고 줄기찬 노력 끝에 해삼위 지역 한국인사회의 지도자로 일어섰다. 순수한 열정과 투철한 구국정신이 많은 동포들을 움직이고, 특히 의협심이 강한 청년들이 그의 휘하에 들어왔다. 안중근과 동지들은 1909년 3월 약 3백명의 의병을 동원하여 다시 의병 활동을 전개하고, 이 지역에 들어와 밀정노릇을 하고 있는 일진회 무리를 색출하기도 했다. 안중근은 이 해 봄과 여름 사이에 국내에 들어와 동정을 살피려는 계획을 모색했으나 경비 부족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는 안중근이 은밀하게 한국에 들어와 활동했다는 기록도 있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