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로 시작되는 주민등록번호는 북한에서 온 사람에게 붙여주는 숫자이다. 남한 사회에서 살아가려고 애쓰지만 서로를 속여 가며 그들끼리도 불신감이 쌓여간다. 전승철은 삶을 견딜 수 있을까. 박정범 감독은 주인공과 연출을 동시에 해내면서, 한국 사회의 어둠을 스크린 위로 끌어 올린다.
탈북자 전승철은 전단지를 돌리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숙영을 좋아하지만, 비루한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승철과 같이 사는 탈북자인 경철은 탈북자들의 돈을 모아 몰래 북한 가족에게 보내주는 브로커 일을 하다가 삼촌에게 사기를 당하게 된다. 승철에게 자신이 숨겨놓은 돈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review :
바로 며칠 전에도 폴란드 오프플러스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을 포함해,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 마라케시국제영화제 대상,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타이거상 수상을 기록한 박정범 감독의 장편 데뷔작 <무산일기>를 보았다. <무산일기>는 박 감독이 2008년에 만든 21분짜리 단편 <125 전승철>을 127분 분량의 장편으로 확대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두고 외국에서는 “영화가 오늘날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인간성의 심연을 간명하고 처연하게 그려낸 걸작”이라고 호평했다. 나는 <무산일기>가 오랫동안 길이 회자될 걸작의 반열에 오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무산일기>가 대단한 수작이며, 데뷔작을 이 정도의 퀄리티로 내놓은 박정범 감독이 무서운 신인임은 분명하다.
그가 <무산일기>에서 연출, 제작, 주연, 각본의 1인 4역을 했다는 점에서 3년 전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이 연출, 편집, 주연, 각본을 맡아 성과를 이루어낸 기억이 떠오른다. (하나 더 공통점을 언급한다면 용산전자상가를 영화 속 공간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국내보다 먼저 외국에서 인정을 받았던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연출의 방식과 연기의 톤 등을 비교한다면 <무산일기>는 <똥파리>와 대척점에 서 있다. <똥파리>가 뜨겁게 분출하는 용암과 같다면 <무산일기>는 금방이라도 갈라질 듯 위태위태한 살얼음판의 느낌이다.
<무산일기>를 보고 나오며 나는 ‘포스트 이창동’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동안 홍상수와 김기덕의 흔적이 보이는 영화들은 몇 편 있었다. <가능한 변화들>, <낮술>, <여덟 번의 감정>, <질투는 나의 힘>의 유머 코드는 홍상수 작품들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잔혹하면서도 카타르시스가 상당한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장철수 감독은 한때 김기덕 감독의 연출부에 있었다. 나는 <무산일기>를 보면서 이창동을 생각했다. 역시나 <무산일기>의 박정범 감독은 <시>의 조감독 출신이었다. 그는 이창동 감독이 <시>의 각본을 쓰는 잠깐의 쉬는 기간 동안 <무산일기>의 각본을 썼다.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려는 듯 정지 쇼트에서도 미세하게 흔들리는 화면과 롱테이크의 빈번한 사용, 주인공인 전승철의 뒷모습을 자주 비추는 카메라는 박정범 감독의 스승인 이창동의 유산일 것이다.
===== 여기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 영화보실 분들은 관람 후 읽으실 것을 추천합니다. ==
<무산일기>에 대한 지적 사항으로는, 사건들이 촘촘히 엮인 느낌이 잘 들지 않는다는 것, 박정범 감독의 연기가 (일반 관객이 보기에는 크게 거슬리지 않지만 노련한 관객들의 눈에는 슬쩍 보일 정도로) 몇 장면에서 포인트를 놓쳤다는 것, 승철이 두 번째로 깡패들에게 맞는 장면에서 액션의 합이 정확하게 맞지 않았던 것 정도이다. 관객에 따라서는 배경음악이 단 한 곡도 삽입되지 않은 것이 불만일 수 있겠다.(사실 이것도 이창동과 닮은 부분이다.)
그러나 <무산일기>는 단점들을 압도하는 빛나는 성과들로, 그 자체가 보석 같은 작품이다. 이 영화에 출연하는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는 상당히 뛰어나다. 승철의 친구 경철 역의 진용욱, 승철이 호감을 가진 숙영 역의 강은진, 박 형사 역을 맡은 박정범 감독의 실제 아버지 박영덕, 심지어 승철이 유일하게 마음을 여는 대상인 개 ‘백구’의 연기조차 놀라울 정도다. (몹시도 ‘하얀’ 개 백구는 ‘도덕적 무결성’의 상징으로 <무산일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인물 전승철을 직접 맡은 박정범 감독의 연기도 위에 언급한 몇 장면을 제외하면 수준급이지만, 그의 연기는 연출 기법과 조화를 이룬 효과가 크다. 소심해 보이도록 하기 위해 선택한 바가지 머리, 거의 없는 얼굴 클로즈업, 적은 대사는 오히려 부당한 현실을 묵묵하고 소심하게 감내하는 승철 캐릭터에 제격이었다. 승철의 심리 표현이 공간의 활용을 통한 연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특이하다. 승철이 깡패들에게 맞고 커터칼에 찢어진 패딩 점퍼를 그대로 입은 채 절벽 같은 계단에 있는 장면이 그런 예이다. 카메라의 초점도 확실히 맞지 않는 상태에서, 배경 음악도 직접적인 대사도 없어 그 건조함이 피가 말릴 정도다. 값싼 감상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인물이 겪는 심연을 건져올리는 뛰어난 장면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탈북자를 다룬 몇 편의 작품들이 차별과 편견에 집중했던 것에서 나아가, <무산일기>는 탈북자의 욕망을 전면에 드러내기도 한다. 승철은 같은 교회를 다니는 숙영을 좋아한다. 초반부, 승철이 유일한 친구인 경철의 옷을 빌려 입고 교회에 달려가는 장면을 나는 유심히 보았다. 철거촌 위로 십자가를 매단 교회가 보이고 경철은 스크린의 우측 하단에서 등장하기 시작해 좌측 언덕을 올라가 점점 작아지면서 교회로 향한다. 폐허 같은 철거촌의 모습이 승철의 내면을 말하고 있다면 (승철이 좋아하는 숙영이 다니는) 폐허의 수면 위에 위치한 교회는 승철의 희망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면 십자가가 전깃줄 위로 뻗어있지 않고 아래에 놓여있다.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생각하면, 이 답답해 보이는 미장센은 승철이 품고 있는 욕망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칼끝이 무엇보다도 남한의 자본주의 사회를 겨누고 있음은 여러 장면에서 목격된다. 관련해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본다.
1. 교회에 가려는 승철이 성경책을 집어들자 카메라는 그 아래에 ‘8만원’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이는 유흥업소 명함을 비춘다. 정직하게 살기 위해 애쓰는 승철이지만,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그 유흥업소 명함을 돌리는 일을 하기도 한다. ‘유흥업소 명함 위의 성경책’은 천민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종교에 보내는 야유와 같다.
2. 생계를 위해 벽보를 붙이다 깡패를 만나 도망가던 승철은 무단횡단을 하게 되고, 경찰에 적발돼 범칙금 통지서를 받는다. 주민등록번호를 물어보던 경찰은 - 탈북자를 의미하는- 뒷자리의 ‘125’를 확인하고 통지서를 주면서 빈정거리듯 ‘돈 많아요?’라고 물어본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어떻게든 살기 위해 쫓기다가 무단횡단을 해버린 승철의 사정을 아는 관객에겐 이 장면이 허탈한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3. 승철은 피라미드 같은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다. 그는 ‘125’의 주민번호로 구별되어 탈북자라는 이유만으로 해고당하고, 경쟁업소 깡패들을 피해 유흥업소 벽보를 붙이고 전단지를 돌리는 위험한 일을 한다. 다른 일을 하고 싶어도 그런 일 밖에 할 수 없는 그는 그나마 얻은 일자리에서도 ‘반품’되는 수모를 겪는다. 밀린 수당을 달라는 그의 마지막 애원에 고용주는 그가 붙이지 못한 현수막 제작비가 그의 수당보다 더 비싸다며 막무가내로 그를 내쫓는다. 그가 고용주들 앞에서 매번 하는 말처럼 그는 잘 하려고 했다. 다만 상대를 물어뜯어야 살아남는 정글 같은 사회에 맞지 않게 정직했을 뿐이다.
4. 거리에서 버려진 개 ‘백구’를 승철은 집에 데려온다. 집에서 개를 키울 수 없다며 백구를 내다버린 경철과 승철이 승강이를 벌이고, 백구를 찾으러 승철이 뛰쳐나간 후 경철이 시건방진 자세로 보는 TV에서는 개그콘서트에 출연한 개그맨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다들 집에 10억 씩은 있잖아요.” 이어지는 장면에서 승철은 단돈 만원에도 팔리지 않았던 백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다.
5. <무산일기>에서 승철과 숙영의 관계 변화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숙영은 도우미를 알선하는 노래방 카운터에서 일한다. 승철은 숙영에게서 캔 2개로 맥주 3잔을 만들어 속여 파는 법을 배운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숙영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계속한다. 노래방 손님의 지저분한 짓거리를 목격한 승철이 자신만의 방법으로 방해를 해 큰 싸움이 일어나자, 숙영은 되레 승철에게 왜 간섭했느냐고 핀잔을 준다. 숙영은 그런 식으로 내내 승철을 무시하고 냉정하게 대한다. 어느 날, 잠시 쉬는 시간을 틈타 노래방 도우미들과 디스코리듬의 찬송가를 함께 부르던 승철을 숙영은 끝내 해고한다.
이후 승철이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두고 한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된 숙영은 180도 달라진 태도로 승철에게 접근한다. 나는 승철에 대한 숙영의 태도가 달라진 이유를 ‘상처의 공통 분모’가 아니라 ‘부도덕함의 공유’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영화 내내 정직해서, 바로 그 정직함 때문에 남한 사회에 적응을 못하던 승철이었다. 마침내 자신의 숨겨진 죄악을 드러내자 그동안 자신을 투명인간처럼 여겼던 위선자들이 친구 하자고 한다. 정직하지만, 그 누구도 알아주지 못한 채, ‘외롭게’ 사는 것이 옳은가. 부도덕하지만 속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바른 길인가. <무산일기>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은 불편하고 무겁다.
후반부, 승철은 경철이 부탁한 돈을 훔쳐 새로 정장을 사입고, 머리도 깔끔하게 손질한다. 숙영의 권유에 따라 성가대의 일원이 되고, 숙영과 스파게티를 같이 먹는 사이가 되고, 그녀가 일하는 노래방에 다시 나간다. 그러나 왠지 승철은 그리 행복하지 않아 보인다. 승철은 결국 순수 대신 실리를 택하고 그 대가를 치룬다.
단 한 컷으로 처리한 라스트 신의 롱테이크는 잠시 숨조차 멎게 할 정도로 쉽게 잊기 힘든 장면이다. 편의점에 맥주를 사러가는 승철의 뒤를 따라 가던 카메라는 남한의 자본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결과의 이면을 그토록 간결하고도 명징하게 보여준다. 결국 승철이 ‘그것’을 모른 척 지나칠 때 관객으로써 느끼고 있던 죄책감 섞인 불편함은 무기력함으로 이어졌다. (이창동이 그랬던 것처럼 이런 불편함의 미덕이 <무산일기>을 격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 속의 승철은 부도덕하게 변해갔지만, 승철을 담는 카메라는 그를 미화하지도 섣불리 비난하지도 않는다.)
<무산일기>를 보기 전, 나는 - 특정한 개인이 아닌 - 인간의 인간성 자체에 대한 실망 때문에 극도로 우울한 상태였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해 답이 나오지 않아 정신적인 위기감이 들던 중 보게 된 <무산일기>는 비평의 관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수작이었지만,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는 고통스러운 영화였다. 원래는 일요일 조조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무척 피곤하고 쓸쓸해져서 그냥 집으로 오고 말았다. 내리 3시간동안 낮잠을 자도 두통은 여전했다. (물론 승철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열심히 살아가려 하는 데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삶과, 그런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허구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 때문에.
[영화] 무산일기
story(네이버에서 펌) :
125로 시작되는 주민등록번호는 북한에서 온 사람에게 붙여주는 숫자이다. 남한 사회에서 살아가려고 애쓰지만 서로를 속여 가며 그들끼리도 불신감이 쌓여간다. 전승철은 삶을 견딜 수 있을까. 박정범 감독은 주인공과 연출을 동시에 해내면서, 한국 사회의 어둠을 스크린 위로 끌어 올린다.
탈북자 전승철은 전단지를 돌리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숙영을 좋아하지만, 비루한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승철과 같이 사는 탈북자인 경철은 탈북자들의 돈을 모아 몰래 북한 가족에게 보내주는 브로커 일을 하다가 삼촌에게 사기를 당하게 된다. 승철에게 자신이 숨겨놓은 돈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review :
바로 며칠 전에도 폴란드 오프플러스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을 포함해,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 마라케시국제영화제 대상,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타이거상 수상을 기록한 박정범 감독의 장편 데뷔작 <무산일기>를 보았다. <무산일기>는 박 감독이 2008년에 만든 21분짜리 단편 <125 전승철>을 127분 분량의 장편으로 확대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두고 외국에서는 “영화가 오늘날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인간성의 심연을 간명하고 처연하게 그려낸 걸작”이라고 호평했다. 나는 <무산일기>가 오랫동안 길이 회자될 걸작의 반열에 오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무산일기>가 대단한 수작이며, 데뷔작을 이 정도의 퀄리티로 내놓은 박정범 감독이 무서운 신인임은 분명하다.
그가 <무산일기>에서 연출, 제작, 주연, 각본의 1인 4역을 했다는 점에서 3년 전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이 연출, 편집, 주연, 각본을 맡아 성과를 이루어낸 기억이 떠오른다. (하나 더 공통점을 언급한다면 용산전자상가를 영화 속 공간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국내보다 먼저 외국에서 인정을 받았던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연출의 방식과 연기의 톤 등을 비교한다면 <무산일기>는 <똥파리>와 대척점에 서 있다. <똥파리>가 뜨겁게 분출하는 용암과 같다면 <무산일기>는 금방이라도 갈라질 듯 위태위태한 살얼음판의 느낌이다.
<무산일기>를 보고 나오며 나는 ‘포스트 이창동’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동안 홍상수와 김기덕의 흔적이 보이는 영화들은 몇 편 있었다. <가능한 변화들>, <낮술>, <여덟 번의 감정>, <질투는 나의 힘>의 유머 코드는 홍상수 작품들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잔혹하면서도 카타르시스가 상당한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장철수 감독은 한때 김기덕 감독의 연출부에 있었다. 나는 <무산일기>를 보면서 이창동을 생각했다. 역시나 <무산일기>의 박정범 감독은 <시>의 조감독 출신이었다. 그는 이창동 감독이 <시>의 각본을 쓰는 잠깐의 쉬는 기간 동안 <무산일기>의 각본을 썼다.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려는 듯 정지 쇼트에서도 미세하게 흔들리는 화면과 롱테이크의 빈번한 사용, 주인공인 전승철의 뒷모습을 자주 비추는 카메라는 박정범 감독의 스승인 이창동의 유산일 것이다.
===== 여기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 영화보실 분들은 관람 후 읽으실 것을 추천합니다. ==
<무산일기>에 대한 지적 사항으로는, 사건들이 촘촘히 엮인 느낌이 잘 들지 않는다는 것, 박정범 감독의 연기가 (일반 관객이 보기에는 크게 거슬리지 않지만 노련한 관객들의 눈에는 슬쩍 보일 정도로) 몇 장면에서 포인트를 놓쳤다는 것, 승철이 두 번째로 깡패들에게 맞는 장면에서 액션의 합이 정확하게 맞지 않았던 것 정도이다. 관객에 따라서는 배경음악이 단 한 곡도 삽입되지 않은 것이 불만일 수 있겠다.(사실 이것도 이창동과 닮은 부분이다.)
그러나 <무산일기>는 단점들을 압도하는 빛나는 성과들로, 그 자체가 보석 같은 작품이다. 이 영화에 출연하는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는 상당히 뛰어나다. 승철의 친구 경철 역의 진용욱, 승철이 호감을 가진 숙영 역의 강은진, 박 형사 역을 맡은 박정범 감독의 실제 아버지 박영덕, 심지어 승철이 유일하게 마음을 여는 대상인 개 ‘백구’의 연기조차 놀라울 정도다. (몹시도 ‘하얀’ 개 백구는 ‘도덕적 무결성’의 상징으로 <무산일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인물 전승철을 직접 맡은 박정범 감독의 연기도 위에 언급한 몇 장면을 제외하면 수준급이지만, 그의 연기는 연출 기법과 조화를 이룬 효과가 크다. 소심해 보이도록 하기 위해 선택한 바가지 머리, 거의 없는 얼굴 클로즈업, 적은 대사는 오히려 부당한 현실을 묵묵하고 소심하게 감내하는 승철 캐릭터에 제격이었다. 승철의 심리 표현이 공간의 활용을 통한 연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특이하다. 승철이 깡패들에게 맞고 커터칼에 찢어진 패딩 점퍼를 그대로 입은 채 절벽 같은 계단에 있는 장면이 그런 예이다. 카메라의 초점도 확실히 맞지 않는 상태에서, 배경 음악도 직접적인 대사도 없어 그 건조함이 피가 말릴 정도다. 값싼 감상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인물이 겪는 심연을 건져올리는 뛰어난 장면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탈북자를 다룬 몇 편의 작품들이 차별과 편견에 집중했던 것에서 나아가, <무산일기>는 탈북자의 욕망을 전면에 드러내기도 한다. 승철은 같은 교회를 다니는 숙영을 좋아한다. 초반부, 승철이 유일한 친구인 경철의 옷을 빌려 입고 교회에 달려가는 장면을 나는 유심히 보았다. 철거촌 위로 십자가를 매단 교회가 보이고 경철은 스크린의 우측 하단에서 등장하기 시작해 좌측 언덕을 올라가 점점 작아지면서 교회로 향한다. 폐허 같은 철거촌의 모습이 승철의 내면을 말하고 있다면 (승철이 좋아하는 숙영이 다니는) 폐허의 수면 위에 위치한 교회는 승철의 희망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면 십자가가 전깃줄 위로 뻗어있지 않고 아래에 놓여있다.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생각하면, 이 답답해 보이는 미장센은 승철이 품고 있는 욕망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칼끝이 무엇보다도 남한의 자본주의 사회를 겨누고 있음은 여러 장면에서 목격된다. 관련해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본다.
1. 교회에 가려는 승철이 성경책을 집어들자 카메라는 그 아래에 ‘8만원’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이는 유흥업소 명함을 비춘다. 정직하게 살기 위해 애쓰는 승철이지만,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그 유흥업소 명함을 돌리는 일을 하기도 한다. ‘유흥업소 명함 위의 성경책’은 천민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종교에 보내는 야유와 같다.
2. 생계를 위해 벽보를 붙이다 깡패를 만나 도망가던 승철은 무단횡단을 하게 되고, 경찰에 적발돼 범칙금 통지서를 받는다. 주민등록번호를 물어보던 경찰은 - 탈북자를 의미하는- 뒷자리의 ‘125’를 확인하고 통지서를 주면서 빈정거리듯 ‘돈 많아요?’라고 물어본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어떻게든 살기 위해 쫓기다가 무단횡단을 해버린 승철의 사정을 아는 관객에겐 이 장면이 허탈한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3. 승철은 피라미드 같은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다. 그는 ‘125’의 주민번호로 구별되어 탈북자라는 이유만으로 해고당하고, 경쟁업소 깡패들을 피해 유흥업소 벽보를 붙이고 전단지를 돌리는 위험한 일을 한다. 다른 일을 하고 싶어도 그런 일 밖에 할 수 없는 그는 그나마 얻은 일자리에서도 ‘반품’되는 수모를 겪는다. 밀린 수당을 달라는 그의 마지막 애원에 고용주는 그가 붙이지 못한 현수막 제작비가 그의 수당보다 더 비싸다며 막무가내로 그를 내쫓는다. 그가 고용주들 앞에서 매번 하는 말처럼 그는 잘 하려고 했다. 다만 상대를 물어뜯어야 살아남는 정글 같은 사회에 맞지 않게 정직했을 뿐이다.
4. 거리에서 버려진 개 ‘백구’를 승철은 집에 데려온다. 집에서 개를 키울 수 없다며 백구를 내다버린 경철과 승철이 승강이를 벌이고, 백구를 찾으러 승철이 뛰쳐나간 후 경철이 시건방진 자세로 보는 TV에서는 개그콘서트에 출연한 개그맨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다들 집에 10억 씩은 있잖아요.” 이어지는 장면에서 승철은 단돈 만원에도 팔리지 않았던 백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다.
5. <무산일기>에서 승철과 숙영의 관계 변화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숙영은 도우미를 알선하는 노래방 카운터에서 일한다. 승철은 숙영에게서 캔 2개로 맥주 3잔을 만들어 속여 파는 법을 배운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숙영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계속한다. 노래방 손님의 지저분한 짓거리를 목격한 승철이 자신만의 방법으로 방해를 해 큰 싸움이 일어나자, 숙영은 되레 승철에게 왜 간섭했느냐고 핀잔을 준다. 숙영은 그런 식으로 내내 승철을 무시하고 냉정하게 대한다. 어느 날, 잠시 쉬는 시간을 틈타 노래방 도우미들과 디스코리듬의 찬송가를 함께 부르던 승철을 숙영은 끝내 해고한다.
이후 승철이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두고 한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된 숙영은 180도 달라진 태도로 승철에게 접근한다. 나는 승철에 대한 숙영의 태도가 달라진 이유를 ‘상처의 공통 분모’가 아니라 ‘부도덕함의 공유’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영화 내내 정직해서, 바로 그 정직함 때문에 남한 사회에 적응을 못하던 승철이었다. 마침내 자신의 숨겨진 죄악을 드러내자 그동안 자신을 투명인간처럼 여겼던 위선자들이 친구 하자고 한다. 정직하지만, 그 누구도 알아주지 못한 채, ‘외롭게’ 사는 것이 옳은가. 부도덕하지만 속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바른 길인가. <무산일기>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은 불편하고 무겁다.
후반부, 승철은 경철이 부탁한 돈을 훔쳐 새로 정장을 사입고, 머리도 깔끔하게 손질한다. 숙영의 권유에 따라 성가대의 일원이 되고, 숙영과 스파게티를 같이 먹는 사이가 되고, 그녀가 일하는 노래방에 다시 나간다. 그러나 왠지 승철은 그리 행복하지 않아 보인다. 승철은 결국 순수 대신 실리를 택하고 그 대가를 치룬다.
단 한 컷으로 처리한 라스트 신의 롱테이크는 잠시 숨조차 멎게 할 정도로 쉽게 잊기 힘든 장면이다. 편의점에 맥주를 사러가는 승철의 뒤를 따라 가던 카메라는 남한의 자본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결과의 이면을 그토록 간결하고도 명징하게 보여준다. 결국 승철이 ‘그것’을 모른 척 지나칠 때 관객으로써 느끼고 있던 죄책감 섞인 불편함은 무기력함으로 이어졌다. (이창동이 그랬던 것처럼 이런 불편함의 미덕이 <무산일기>을 격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 속의 승철은 부도덕하게 변해갔지만, 승철을 담는 카메라는 그를 미화하지도 섣불리 비난하지도 않는다.)
<무산일기>를 보기 전, 나는 - 특정한 개인이 아닌 - 인간의 인간성 자체에 대한 실망 때문에 극도로 우울한 상태였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해 답이 나오지 않아 정신적인 위기감이 들던 중 보게 된 <무산일기>는 비평의 관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수작이었지만,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는 고통스러운 영화였다. 원래는 일요일 조조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무척 피곤하고 쓸쓸해져서 그냥 집으로 오고 말았다. 내리 3시간동안 낮잠을 자도 두통은 여전했다. (물론 승철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열심히 살아가려 하는 데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삶과, 그런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허구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 때문에.
악몽을 복기하듯, 그날 나에게 독약 같던 그 영화를 다시 생각해 본다.
현수막을 혼자서 걸려는 승철의 버둥거리던 팔은 나의 몸을,
경철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백구의 안간힘은 나의 마음을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