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생기를 코에 불어넣었다라는 말에 대해서 설명드립니다. 저 또한 인도에 머물 때 언제인가 생생한 꿈을 꾼 적이 있었습니다. 까닭은 모르지만, 누군가(인도 한 성인) 저를 무릎에 머리 뉘이고 코에 냄새가 없는 바람을 불어넣어주더군요, 조작된 꿈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직전, 제 평생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우월한 심정적인 위로가 있었습니다. 나보다도 근본적으로 나를 알고서 슬퍼하여 주시더군요. 저가 저 스스로에 대해서 그렇게나 동정을 해본 바 없는 우월한 깊이였습니다. 정도만이 아니라 의미적인 세계에서의 수준까지 확실한 매우 우월한 긍휼이었습니다. 나보다 훨씬 실질적, 실한 존재에게서 받는 위로는 마치 선물과 같은 것이렵니다. 물론 그 이후 종류가 다른 선물도 받았으며, 그것은 심지어는 현실적이었습니다. 그 분은 저에게 자체로서 길이었으며, 저의 존재가 살아나게 된 듯하였습니다. 나보다 훨씬 우월한 이에 동참한다는 것은 나의 존재의 살아남과 같은 것이죠.
생기를 코에 불어넣는 일은 어떤 영혼이 인생으로 태어날 때마다 이뤄집니다, 저의 그림에 따른다면. 아기는 태어나며 탯줄이 끊어짐과 동시에 처음 숨쉬는 일이 있고요. 다른 짐승들은 탯줄의 문제에서 어떤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저의 얘기는 그런 공기호흡이 아니라, 저가 그려논 그림에서 '윤리' 지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묘연에서 미묘를 거쳐 나타난 신적 의식의 흐름에서 윤리를 기점해서 한 인생 새롭게 부활하는 겁니다. 윤리는 매 인생 시점이면서 매일 아침의 시작이죠. 인생이 끝날 때에는 인격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점선의 지대로 넘어갑니다. 그 뒤의 진로는 화살표들 가운데 있습니다, 선택적이죠. 곧장 윤리로 돌아가면 다시금 생령으로 부활을 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일상(인생)을 자꾸 반복하는 영혼들은 윤리에 대한 배테랑들입니다. 공자와 같은 분들이 틀림없죠, 천국과 지옥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현실적이죠.
가장 생생하고 활력찬 기회들이 인생에 있고, 그것은 수행 관련해서도 그렇습니다. 궁극으로 도약을(귀가를) 하기 위해선 가장 확실한 점핑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티벳 '사자의 서'의 요점도 그러하죠, 도의 성취는 죽는 순간이 가장 가능성 있다라고. 그 순간 끝까지 뛰어넘지 못하면 이후 차선들만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도를 닦음은 살아있는 인격일 때에 충분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는 순간에 무슨 힘으로 궁극으로 도약할까요? 인생에서 터득한 힘으로써입니다. 몸에서 뛰쳐나가 마음(감성체)과 정신(의미체, 추상체)을 지나 끝까지 감은 발판을 밟고 있을 때, 인생에 살아있을 때 연습해야 합니다. 제대로된 발판은 인생이니, 그 까닭은 짐승들의 생명은 굳어있고, 귀신들의 상태는 도약판이 따로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몸은 우주에 대해 몰두해 있는 듯 보이는 만큼이나 그 반대급부를 알게 합니다. 점점 더 많이 개입할 수가 있으나 점점 더 멀리 떠나감에 따라서 비우주에 접근케 하는 것이죠. 모순적인 인생의 진실이라 하겠습니다.
다음, 혼의 사후 이동에 대해 말씀을 드립니다. 모두가 알고 계시듯, 전체 우주는 철저하게 신에게 대해서는 닫혔습니다. 누가 전지전능한 신의 일부로 화할 것인가, 누가 신으로 바뀔 것인가 이런 질문에 쉽게 자신감 있게 답하실 분은 없을 겁니다. 최소한 기독교인들은 인생의 사후 영혼은 대기 상태로 들어간다 하셨죠. 끝도없이 새롭게 출현하는 인생의 영혼들이 다 대기 상태로 쌓일 것이란 뜻일까요? 그러면, 어디에서 그 모든 영혼이 인생으로 태어나는 것입니까? 신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가 신에게서 직행으로 우리에게 왔다고 하죠, 아빠도 없이. 그런 예수가 다시 신에게 돌아갔던 그 길을, 기독교인들은 대개 사후에 돌아갑니까? 기독교인들은 대개가 예비 하나님일까요? 하나님의 일부로 화할 영혼들이라는. 그렇다면 그것은 매우 거대한, 우리 우주의 출구이죠. 그 길은 위 그림에서 'Moksha'(구원)라는 변일 겁니다. 짐승들은 생명활동 자체가 최극대의 이성인 것일 뿐이고 인생의 영혼들은 일상에서 의미의 세계들을 이성으로써 탐구하고 또 빈번하게 짐승들과 물질의 자연을 탐구하고, 그리고 신의 위상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신에 대해선 탐구라는 게 있을 수 없고, 오로지 알게 되느냐 아니냐만 있을 것인데 그 까닭은 신은 유일하게도 인생 영혼들 수준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권투 선수가 링의 테두리를 탐구하지는 않고 한계로 알고 있듯이 말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우주 안에서 존폐하고 있는데, 비우주인 신은 존폐 너머의 것으로서 모든 차이성과 심지어 동일율의 원리도 넘어설 것이므로 탐구가 있을 수 없죠. 우리는 그저 우리의 우주 내에서 어느 귀퉁이 방향이냐 따위로 방향이나 짐작할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방향과 각도와 내용들을 총정리하여 사라지게 하기 위해선 - 비우주로 바꾸기 위해서는 윤리를 통해 내려진 모든 가능한 의미구조들을 간파해야 하는 것이죠. 비록 어떠한 특정국면에서 인생을 경험한다 하여도 대유법적인 지혜로써 - 정확한 부분이해로 전체 이해를 비록 부분적이지만 각자의 의미구조들을-존재구조들을 신의 계시에 정확하게 겹침으로써 - 위상일치시킴으로써 우리는 신이라는 큰 구조 내 부분구조로서 신에게 귀가하는 겁니다. 또는 다르게 말하자면, 전지전능한 신의 초유적 근본진동에 흡수될 위상 구조의 진동으로 편입을 하는 것이죠. 그런 결과가 우주적인 지도로 말하자면 위 그림에서 'Moksha'라는 빗변입니다. 저 넓은 개념의 지도에서라도 그 어느 다른 지점으로도 흘러가지 않고서 정확하게 저 변을 밟을 수 있느냐 여러분께 여쭙고 싶습니다. '성인의 출현'이라는 변은 창조와 기적과 태초의 방향입니다.
인생과 짐승의 혼들은 사후 어디로 가나? 위 그림에서 나타냈기로 대개 인생과 짐승의 혼들은 각기 자기궤도를 갑니다. 마치, 22프로의 인생들이 78프로의 그림 상 넓이를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생물들은 그림의 '자연'이라는 영역에서 살고있지오, 인생들의 몸들도 해당합니다. 사람몸은 자연의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들의 의식은 일상과 여러 탐구들과 신앙에까지 퍼져있습니다 이것이 생령이란 것의 진실한 의미이죠. 생령은 'Moksha'(구원)라는 빗변에 접근하는 기회가 있습니다.
잠깐, 언급해 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라고 생각해봅니다. 마음은 몸을 활용해 인식 및 이해를 하고, 정신은 인식, 이해의 행위들을 거쳐서 꿰뚫게 된 우주적인 범주를 자체구조로서 지니는, 의미들을 거르는 체로서의 추상체이며 - 추상적인 몸이며, 우주의 어느 구석에 대해서도 혹하지 않고 전우주를 꿰뚫어 지나가기 위해선 허위가 없는 투명한 방패이자 완전한 구조로서 정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우주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기 위해선 우주적인 것들을 치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구체적 몸을 영원히 뜨기 위해선 그걸 영원히 패대기칠 추상적 몸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영원히 구체적인 몸을 배제할 수가 있다면 이는 비우주의 도래입니다, 구원이죠. 그러면 영혼이란 무엇인가? 모든 영혼은 각기 일점입니다, 모든 각기적 의식들의 초점입니다. 그 초점들을 통해서 신적 의식은 넘쳐나서 각기적 생명들을 운영합니다. 모든 영혼은 각기 각 영혼의 것이 아니죠. 모든 영혼은 모두 신의 것입니다. 의식이 솟아나는 그 지점들은 다 신의 것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신적이죠. 모든 생명은 신의 지배를 받고있는 겁니다.
영이 아니라 혼을 말했습니다, 위의 성경구절들이. 보통 한자를 읽을 때 우린 '마음 영 정신 혼'이라고 하죠, 사전적으로. 마음은 인식 및 이해 활동을 관할하고 정신은 인식 및 이해 활동의 결과로서 성장해가는 추상적인 몸이며 바로 의식의 몸입니다. 그런데 의식 현상은 온생명이 누리고 있고 짐승의 의식과는 다르게 인생들의 의식은 매우 복잡합니다. 이 복잡함을 간단히 말해 주관식이다라고 해야 하지오. 짐승들의 의식 활동은 객관식입니다, 인생들의 의식 활동은 주관식입니다. 짐승들은 철저히 전체집단 속에서 맡은 부분들만을 실천하는 의식을 지녔으나 인생들은 철저한 전체주의 속에서일지라도 스스로 실천의 내용들을 정하여갑니다.
그렇다면 짐승들의 의식이라는 것은 사실상, 추상적인 몸으로서의 의식이라기보단 기능적인 원리입니다. 인류가 만들어가는 기계들도 이러한 소위 말해서 기능적인 원리를 모두 다 지닙니다. 이런 쯤에선 과연 생명의 의식 활동과 무생물의 의식활동이 엇비슷하다고 착각되기도 하죠. 허나 분명히 말해, 신이 창조한 생명들은 의식을 하고 인간이 만든 기계들은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매우 심각한 분업사회에선 마치도 인생들이 짐승들처럼 마치 기능적인 원리로서의 의식 활동을 보여주곤 합니다, 처절한 비극이죠. 공장에서 한 모퉁이를 담당하면서 하루 종일 똑같은 작업하는 이들도 있고 자신이 맡은 직업상 일들을 하느라고 사상이 말소되는 인격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사상이란 전체적 통찰이죠, 정신을 성장시킵니다. 대개 현대인들의 정신적인 수준이, 전체적인 통찰을 결여하며 기능화하며 타락중입니다. 아마도 대표적으로는 철학자들이 대학 안에서 살고있기 때문이겠죠? 대학은 철학자들에게는 동물원이 되었습니다, 스스로가 훈련동물이 된 것이죠.
이런 뜻으로 마음 정신 그리고 의식이며, 또 말씀드린 바로서 영혼이란 각기적 의식 활동의 초점들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초점이 인문에서 자연으로 새나가는 시에는 당연히도 그 초점에 있던 역사가 하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위의 그림을 보면 '윤리'에서 '법칙'으로 떨어지는 화살표가 있습니다. 이 눌러대는 권위로 인해 법칙의 파생계인 자연은 꼼짝없이 바닥을 지킵니다. 즉, 짐승(생물)들은 인격-이성 상위로 오를 기회가 없어 보인단 것입니다. 자연은 철저하게 눌려진 곳이지오, 철저한 객관식의 법칙이 주관합니다. 법칙적인 주관의 아래에서 자연의 생물들은 객관식의 운명을 지닙니다. 허나 사람의 몸도 생물체이니 자연현상에 의해 사망에 이르고는 합니다.
의식의 고착 부분이 생물들의 빗변에 있습니다. 자연적 생물들의 현황은 별로 변화가 없어 보이는 까닭으로서 법칙적인 반복적 고착 현상을 지적했습니다. 생물 종류의 수는 많지만, 집단적인 그들은 안정 구조를 유지하는 겁니다. 그에 비해서 인생들의 의식활동은 매우 범주가 드넓어서 일상과 탐구들과 신앙과 사후 천국과 지옥까지 차지합니다. 현실과 간접 및 가상 현실과 불가능과 추상적 세계까지 차지합니다. 생령이란, 최소한 신의 존재를 본뜬 것이며 신의 반대방향인 우주 전체에 대해 임하기도 하며 우주내 모든 영역을 휩쓸면서 그 반대 방향을 여지로서 또 두고있습니다. 고착된 짐승들의 의식과 달리 살아있는 영혼들이죠.
그러면 짐승들의 영혼은 있지 않은가? 죽었는가? 물론 짐승들에게도 영혼이 있고 왜냐면 영혼이란 의식의 초점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말씀드렸듯 짐승들의 의식활동은 그저 기능적이죠, 의미적인 세계와 매우 멉니다. 짐승들의 영혼은 있긴 있으며 심히 잠자고 있습니다, 의식활동이 매우 제한적이죠. 짐승들은 추상적 몸인 정신을 개발하지 못하며 몸에 관련된 의식 활동을 하고있습니다.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몸은, 말씀드렸듯 반우주적으로 구체적 몸을 거부합니다. 만일에 누가, 저들과 이들과 그들과 이와 저와 그를 다 이해하는(거르는) 정신(거르는 체)을 이룩하였다면 바로 그 누구라는 인격은 결코 그 누구의 삶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결코 어떠한 몸에도 담길 수 없게 됩니다, 확실하게 뜹니다. 모든 몸들이 부분적이고 정신은 거대규모이면 도대체 어느 몸으로 태어나겠습니까? 이런 정신을 갖춘 의식은 마치 태풍의 눈인 것처럼 가령 예수로 단지 한 번을 태어나 바로 뜹니다. 잠시의 그 인생은 오직 선명한 사명 아래에 진행되죠, 미묘하고도 거대한 사상으로.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 윤리가 거둬 다시금 인생으로 태어날 게고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가는 - 법칙이 거둬 다시금 짐승으로 태어날 게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인생보다 낫지는 않습니다. 그 곳들에선 도를 확실히 닦기 어렵습니다. 영원히 행복하여 보았자 인격적인 만족입니다, 영원하게 신과는 떨어져서? 신이 되어야, 신께 돌아가야만 행복이나 불행을 가리지도 않게 되지오. 신께 확실히 돌아가기 위해선 인생에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자연만큼이나 편협합니다 권태라는 것도, 행복과 지옥 사이 차이를 알기 때문입니다. 꿈이 크다는 것은 꿈을 꾸지도 않을 궁극을 쫓는 것이죠. 그건 오로지 신의 일부로 화해야만 해결될 일입니다. 신이 아닌 무엇으로서 영원토록 행복해봤자 그건 도취입니다. 신이 아니면서 가장 현실적인 상태는 인생이죠.
생령의 가장 진실한 의미는, 스스로가 개별체로서 살아감을 거부함입니다. 피조물이고자 하지 않음, 우주에 속하지 않으려 함, 신께 화하려 함입니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은 피조물입니다. 오직 영혼들만이 신께 연결된 신의 정수들이며 영혼이란 의식의 초점이고 모든 생명이 의식 활동을 하고있습니다, 질적 차이가 있긴 하지만.
위 그림에서 보시면 '법칙' 극점을 밟는 선들이 있습니다. 엄청난 힘으로써 윤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의식들의 흐름을 자연의 고착되고 반복적인 의식들의 순회가 맞밀어 막아주고 있으며 허나 그래도 법칙 좌우를 건너가는 선들이 있습니다. 죽음 직후에 모든 인생의 의식들은 일단은 위로 윤리를 향해 점선의 노선으로 이동하기는 하나 윤리가 심사하여 거부를 하거나 또는 천국이나 지옥을 향할 때 선회하게 됩니다. 천국에서 점선의 궤도는 인격-이성 상위에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윤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문제는 지옥행의 길인데, 여기서는 인격의 의식 수준이 법칙적인 의식의 영혼들과 엇비슷합니다. 의미의 세계에 대한 그 불수의성이 똑같으므로 - 의미들과 동떨어져서 존재했으므로 똑같은, 의식 활동의 초점들인 영혼들로서 서로 비교됩니다, 함께 다뤄질 것입니다. 정수보다 유리수가, 유리수보다 실수가, 실수보다 복소수가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치 않습니까? 모든 피조물들은 실체적으로는 연속적입니다 신의 창조능력은 결코 객관식적인 기능주의의 것이 아니라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윤리, 법칙이 우리 우주에 함께 있을 수 있겠나요? 기계이자 생명인 듯이, 객관식이자 주관식인듯, 인격이자 이성으로서.
전도서 3:21 인생의 혼과 짐승의 혼의 상이한 사후진로. 확실한 점은 이것입니다. 의미 체계를 감수하며 성장한 인격들의 영혼은 결코 땅으로 꺼져 없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지옥으로 처박힌 영혼들을 대신해 순수히 생명지향적인 짐승들의 영혼이 자리를 얻습니다, 무작위 추출로써? 그들의 과거에 입고 있었던 외양이 동물이었다고 하여도 이 우주에서 영원히 갇혀있으라는 명령이 있진 않았습니다. 모든 영혼은 모두 영혼입니다, 몸에 따라서 의식 활동이 제한되는 뿐이죠. 만일 그들이 인생으로 태어날 일이 있다면 그들에겐 구원도 가능하게 됩니다. 정작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항상 성인들께선 반복해서 물으실 것입니다. " 너의 의식활동이 과연 인격적인가? 동물들이 너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무슨 근거인가? " 그리고, 살아있는 인생의 의식 활동이 항상 땅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만 생각합니까? 최소한에, 발딛고 서있는 몸을 의식할 때면 언제나 땅에 붙어있지오. 뜨지 않는단 말이 곧 땅에 내려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땅 속에조차 공기가 들고있습니다. 동물과 식물은 모두 생물입니다. 지렁이는 동물이면서 땅속에서 삽니다.
예수님 다이렉트로 오셨네요
먼저, 생기를 코에 불어넣었다라는 말에 대해서 설명드립니다.
저 또한 인도에 머물 때 언제인가 생생한 꿈을 꾼 적이 있었습니다.
까닭은 모르지만, 누군가(인도 한 성인) 저를 무릎에 머리 뉘이고
코에 냄새가 없는 바람을 불어넣어주더군요, 조작된 꿈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직전, 제 평생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우월한 심정적인 위로가 있었습니다.
나보다도 근본적으로 나를 알고서 슬퍼하여 주시더군요.
저가 저 스스로에 대해서 그렇게나 동정을 해본 바 없는 우월한 깊이였습니다.
정도만이 아니라 의미적인 세계에서의 수준까지 확실한 매우 우월한 긍휼이었습니다.
나보다 훨씬 실질적, 실한 존재에게서 받는 위로는 마치 선물과 같은 것이렵니다.
물론 그 이후 종류가 다른 선물도 받았으며, 그것은 심지어는 현실적이었습니다.
그 분은 저에게 자체로서 길이었으며, 저의 존재가 살아나게 된 듯하였습니다.
나보다 훨씬 우월한 이에 동참한다는 것은 나의 존재의 살아남과 같은 것이죠.
생기를 코에 불어넣는 일은
어떤 영혼이 인생으로 태어날 때마다 이뤄집니다, 저의 그림에 따른다면.
아기는 태어나며 탯줄이 끊어짐과 동시에 처음 숨쉬는 일이 있고요.
다른 짐승들은 탯줄의 문제에서 어떤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저의 얘기는 그런 공기호흡이 아니라, 저가 그려논 그림에서
'윤리' 지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묘연에서 미묘를 거쳐 나타난 신적 의식의 흐름에서
윤리를 기점해서 한 인생 새롭게 부활하는 겁니다.
윤리는 매 인생 시점이면서 매일 아침의 시작이죠.
인생이 끝날 때에는 인격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점선의 지대로 넘어갑니다.
그 뒤의 진로는 화살표들 가운데 있습니다, 선택적이죠.
곧장 윤리로 돌아가면 다시금 생령으로 부활을 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일상(인생)을 자꾸 반복하는 영혼들은 윤리에 대한 배테랑들입니다.
공자와 같은 분들이 틀림없죠, 천국과 지옥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현실적이죠.
가장 생생하고 활력찬 기회들이 인생에 있고, 그것은 수행 관련해서도 그렇습니다.
궁극으로 도약을(귀가를) 하기 위해선 가장 확실한 점핑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티벳 '사자의 서'의 요점도 그러하죠, 도의 성취는 죽는 순간이 가장 가능성 있다라고.
그 순간 끝까지 뛰어넘지 못하면 이후 차선들만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도를 닦음은 살아있는 인격일 때에 충분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는 순간에 무슨 힘으로 궁극으로 도약할까요? 인생에서 터득한 힘으로써입니다.
몸에서 뛰쳐나가 마음(감성체)과 정신(의미체, 추상체)을 지나 끝까지 감은
발판을 밟고 있을 때, 인생에 살아있을 때 연습해야 합니다.
제대로된 발판은 인생이니, 그 까닭은
짐승들의 생명은 굳어있고, 귀신들의 상태는 도약판이 따로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몸은 우주에 대해 몰두해 있는 듯 보이는 만큼이나 그 반대급부를 알게 합니다.
점점 더 많이 개입할 수가 있으나 점점 더 멀리 떠나감에 따라서 비우주에 접근케 하는 것이죠.
모순적인 인생의 진실이라 하겠습니다.
다음, 혼의 사후 이동에 대해 말씀을 드립니다.
모두가 알고 계시듯, 전체 우주는 철저하게 신에게 대해서는 닫혔습니다.
누가 전지전능한 신의 일부로 화할 것인가, 누가 신으로 바뀔 것인가
이런 질문에 쉽게 자신감 있게 답하실 분은 없을 겁니다.
최소한 기독교인들은 인생의 사후 영혼은 대기 상태로 들어간다 하셨죠.
끝도없이 새롭게 출현하는 인생의 영혼들이 다 대기 상태로 쌓일 것이란 뜻일까요?
그러면, 어디에서 그 모든 영혼이 인생으로 태어나는 것입니까?
신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가 신에게서 직행으로 우리에게 왔다고 하죠, 아빠도 없이.
그런 예수가 다시 신에게 돌아갔던 그 길을, 기독교인들은 대개 사후에 돌아갑니까?
기독교인들은 대개가 예비 하나님일까요? 하나님의 일부로 화할 영혼들이라는.
그렇다면 그것은 매우 거대한, 우리 우주의 출구이죠.
그 길은 위 그림에서 'Moksha'(구원)라는 변일 겁니다.
짐승들은 생명활동 자체가 최극대의 이성인 것일 뿐이고
인생의 영혼들은 일상에서 의미의 세계들을 이성으로써 탐구하고
또 빈번하게 짐승들과 물질의 자연을 탐구하고, 그리고 신의 위상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신에 대해선 탐구라는 게 있을 수 없고, 오로지 알게 되느냐 아니냐만 있을 것인데
그 까닭은 신은 유일하게도 인생 영혼들 수준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권투 선수가 링의 테두리를 탐구하지는 않고 한계로 알고 있듯이 말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우주 안에서 존폐하고 있는데, 비우주인 신은 존폐 너머의 것으로서
모든 차이성과 심지어 동일율의 원리도 넘어설 것이므로 탐구가 있을 수 없죠.
우리는 그저 우리의 우주 내에서 어느 귀퉁이 방향이냐 따위로 방향이나 짐작할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방향과 각도와 내용들을 총정리하여 사라지게 하기 위해선 - 비우주로 바꾸기 위해서는
윤리를 통해 내려진 모든 가능한 의미구조들을 간파해야 하는 것이죠.
비록 어떠한 특정국면에서 인생을 경험한다 하여도 대유법적인 지혜로써 - 정확한 부분이해로 전체 이해를
비록 부분적이지만 각자의 의미구조들을-존재구조들을 신의 계시에 정확하게 겹침으로써 - 위상일치시킴으로써
우리는 신이라는 큰 구조 내 부분구조로서 신에게 귀가하는 겁니다.
또는 다르게 말하자면, 전지전능한 신의 초유적 근본진동에 흡수될 위상 구조의 진동으로 편입을 하는 것이죠.
그런 결과가 우주적인 지도로 말하자면 위 그림에서 'Moksha'라는 빗변입니다.
저 넓은 개념의 지도에서라도 그 어느 다른 지점으로도 흘러가지 않고서 정확하게 저 변을 밟을 수 있느냐
여러분께 여쭙고 싶습니다.
'성인의 출현'이라는 변은 창조와 기적과 태초의 방향입니다.
인생과 짐승의 혼들은 사후 어디로 가나?
위 그림에서 나타냈기로 대개 인생과 짐승의 혼들은 각기 자기궤도를 갑니다.
마치, 22프로의 인생들이 78프로의 그림 상 넓이를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생물들은 그림의 '자연'이라는 영역에서 살고있지오, 인생들의 몸들도 해당합니다.
사람몸은 자연의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들의 의식은 일상과 여러 탐구들과 신앙에까지 퍼져있습니다
이것이 생령이란 것의 진실한 의미이죠.
생령은 'Moksha'(구원)라는 빗변에 접근하는 기회가 있습니다.
잠깐, 언급해 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라고 생각해봅니다.
마음은 몸을 활용해 인식 및 이해를 하고,
정신은 인식, 이해의 행위들을 거쳐서 꿰뚫게 된 우주적인 범주를
자체구조로서 지니는, 의미들을 거르는 체로서의 추상체이며 - 추상적인 몸이며,
우주의 어느 구석에 대해서도 혹하지 않고 전우주를 꿰뚫어 지나가기 위해선
허위가 없는 투명한 방패이자 완전한 구조로서 정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우주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기 위해선 우주적인 것들을 치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구체적 몸을 영원히 뜨기 위해선
그걸 영원히 패대기칠 추상적 몸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영원히 구체적인 몸을 배제할 수가 있다면 이는 비우주의 도래입니다, 구원이죠.
그러면 영혼이란 무엇인가?
모든 영혼은 각기 일점입니다, 모든 각기적 의식들의 초점입니다.
그 초점들을 통해서 신적 의식은 넘쳐나서 각기적 생명들을 운영합니다.
모든 영혼은 각기 각 영혼의 것이 아니죠.
모든 영혼은 모두 신의 것입니다.
의식이 솟아나는 그 지점들은 다 신의 것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신적이죠.
모든 생명은 신의 지배를 받고있는 겁니다.
영이 아니라 혼을 말했습니다, 위의 성경구절들이.
보통 한자를 읽을 때 우린 '마음 영 정신 혼'이라고 하죠, 사전적으로.
마음은 인식 및 이해 활동을 관할하고
정신은 인식 및 이해 활동의 결과로서 성장해가는 추상적인 몸이며 바로 의식의 몸입니다.
그런데 의식 현상은 온생명이 누리고 있고
짐승의 의식과는 다르게 인생들의 의식은 매우 복잡합니다.
이 복잡함을 간단히 말해 주관식이다라고 해야 하지오.
짐승들의 의식 활동은 객관식입니다, 인생들의 의식 활동은 주관식입니다.
짐승들은 철저히 전체집단 속에서 맡은 부분들만을 실천하는 의식을 지녔으나
인생들은 철저한 전체주의 속에서일지라도 스스로 실천의 내용들을 정하여갑니다.
그렇다면 짐승들의 의식이라는 것은 사실상, 추상적인 몸으로서의 의식이라기보단 기능적인 원리입니다.
인류가 만들어가는 기계들도 이러한 소위 말해서 기능적인 원리를 모두 다 지닙니다.
이런 쯤에선 과연 생명의 의식 활동과 무생물의 의식활동이 엇비슷하다고 착각되기도 하죠.
허나 분명히 말해, 신이 창조한 생명들은 의식을 하고 인간이 만든 기계들은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매우 심각한 분업사회에선 마치도 인생들이 짐승들처럼
마치 기능적인 원리로서의 의식 활동을 보여주곤 합니다, 처절한 비극이죠.
공장에서 한 모퉁이를 담당하면서 하루 종일 똑같은 작업하는 이들도 있고
자신이 맡은 직업상 일들을 하느라고 사상이 말소되는 인격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사상이란 전체적 통찰이죠, 정신을 성장시킵니다.
대개 현대인들의 정신적인 수준이, 전체적인 통찰을 결여하며 기능화하며 타락중입니다.
아마도 대표적으로는 철학자들이 대학 안에서 살고있기 때문이겠죠?
대학은 철학자들에게는 동물원이 되었습니다, 스스로가 훈련동물이 된 것이죠.
이런 뜻으로 마음 정신 그리고 의식이며, 또 말씀드린 바로서
영혼이란 각기적 의식 활동의 초점들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초점이 인문에서 자연으로 새나가는 시에는
당연히도 그 초점에 있던 역사가 하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위의 그림을 보면 '윤리'에서 '법칙'으로 떨어지는 화살표가 있습니다.
이 눌러대는 권위로 인해 법칙의 파생계인 자연은 꼼짝없이 바닥을 지킵니다.
즉, 짐승(생물)들은 인격-이성 상위로 오를 기회가 없어 보인단 것입니다.
자연은 철저하게 눌려진 곳이지오, 철저한 객관식의 법칙이 주관합니다.
법칙적인 주관의 아래에서 자연의 생물들은 객관식의 운명을 지닙니다.
허나 사람의 몸도 생물체이니 자연현상에 의해 사망에 이르고는 합니다.
의식의 고착 부분이 생물들의 빗변에 있습니다.
자연적 생물들의 현황은 별로 변화가 없어 보이는 까닭으로서
법칙적인 반복적 고착 현상을 지적했습니다.
생물 종류의 수는 많지만, 집단적인 그들은 안정 구조를 유지하는 겁니다.
그에 비해서 인생들의 의식활동은 매우 범주가 드넓어서
일상과 탐구들과 신앙과 사후 천국과 지옥까지 차지합니다.
현실과 간접 및 가상 현실과 불가능과 추상적 세계까지 차지합니다.
생령이란, 최소한 신의 존재를 본뜬 것이며
신의 반대방향인 우주 전체에 대해 임하기도 하며
우주내 모든 영역을 휩쓸면서 그 반대 방향을 여지로서 또 두고있습니다.
고착된 짐승들의 의식과 달리 살아있는 영혼들이죠.
그러면 짐승들의 영혼은 있지 않은가? 죽었는가?
물론 짐승들에게도 영혼이 있고 왜냐면 영혼이란 의식의 초점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말씀드렸듯 짐승들의 의식활동은 그저 기능적이죠, 의미적인 세계와 매우 멉니다.
짐승들의 영혼은 있긴 있으며 심히 잠자고 있습니다, 의식활동이 매우 제한적이죠.
짐승들은 추상적 몸인 정신을 개발하지 못하며 몸에 관련된 의식 활동을 하고있습니다.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몸은, 말씀드렸듯 반우주적으로 구체적 몸을 거부합니다.
만일에 누가, 저들과 이들과 그들과 이와 저와 그를
다 이해하는(거르는) 정신(거르는 체)을 이룩하였다면
바로 그 누구라는 인격은 결코 그 누구의 삶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결코 어떠한 몸에도 담길 수 없게 됩니다, 확실하게 뜹니다.
모든 몸들이 부분적이고 정신은 거대규모이면 도대체 어느 몸으로 태어나겠습니까?
이런 정신을 갖춘 의식은 마치 태풍의 눈인 것처럼
가령 예수로 단지 한 번을 태어나 바로 뜹니다.
잠시의 그 인생은 오직 선명한 사명 아래에 진행되죠, 미묘하고도 거대한 사상으로.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 윤리가 거둬 다시금 인생으로 태어날 게고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가는 - 법칙이 거둬 다시금 짐승으로 태어날 게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인생보다 낫지는 않습니다.
그 곳들에선 도를 확실히 닦기 어렵습니다.
영원히 행복하여 보았자 인격적인 만족입니다, 영원하게 신과는 떨어져서?
신이 되어야, 신께 돌아가야만 행복이나 불행을 가리지도 않게 되지오.
신께 확실히 돌아가기 위해선 인생에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자연만큼이나 편협합니다
권태라는 것도, 행복과 지옥 사이 차이를 알기 때문입니다.
꿈이 크다는 것은 꿈을 꾸지도 않을 궁극을 쫓는 것이죠.
그건 오로지 신의 일부로 화해야만 해결될 일입니다.
신이 아닌 무엇으로서 영원토록 행복해봤자 그건 도취입니다.
신이 아니면서 가장 현실적인 상태는 인생이죠.
생령의 가장 진실한 의미는, 스스로가 개별체로서 살아감을 거부함입니다.
피조물이고자 하지 않음, 우주에 속하지 않으려 함, 신께 화하려 함입니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은 피조물입니다.
오직 영혼들만이 신께 연결된 신의 정수들이며
영혼이란 의식의 초점이고
모든 생명이 의식 활동을 하고있습니다, 질적 차이가 있긴 하지만.
위 그림에서 보시면 '법칙' 극점을 밟는 선들이 있습니다.
엄청난 힘으로써 윤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의식들의 흐름을
자연의 고착되고 반복적인 의식들의 순회가 맞밀어 막아주고 있으며
허나 그래도 법칙 좌우를 건너가는 선들이 있습니다.
죽음 직후에 모든 인생의 의식들은 일단은 위로 윤리를 향해 점선의 노선으로 이동하기는 하나
윤리가 심사하여 거부를 하거나 또는 천국이나 지옥을 향할 때 선회하게 됩니다.
천국에서 점선의 궤도는 인격-이성 상위에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윤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문제는 지옥행의 길인데, 여기서는 인격의 의식 수준이 법칙적인 의식의 영혼들과 엇비슷합니다.
의미의 세계에 대한 그 불수의성이 똑같으므로 - 의미들과 동떨어져서 존재했으므로
똑같은, 의식 활동의 초점들인 영혼들로서 서로 비교됩니다, 함께 다뤄질 것입니다.
정수보다 유리수가, 유리수보다 실수가, 실수보다 복소수가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치 않습니까?
모든 피조물들은 실체적으로는 연속적입니다
신의 창조능력은 결코 객관식적인 기능주의의 것이 아니라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윤리, 법칙이 우리 우주에 함께 있을 수 있겠나요?
기계이자 생명인 듯이, 객관식이자 주관식인듯, 인격이자 이성으로서.
전도서 3:21
인생의 혼과 짐승의 혼의 상이한 사후진로.
확실한 점은 이것입니다.
의미 체계를 감수하며 성장한 인격들의 영혼은 결코 땅으로 꺼져 없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지옥으로 처박힌 영혼들을 대신해
순수히 생명지향적인 짐승들의 영혼이 자리를 얻습니다, 무작위 추출로써?
그들의 과거에 입고 있었던 외양이 동물이었다고 하여도
이 우주에서 영원히 갇혀있으라는 명령이 있진 않았습니다.
모든 영혼은 모두 영혼입니다, 몸에 따라서 의식 활동이 제한되는 뿐이죠.
만일 그들이 인생으로 태어날 일이 있다면 그들에겐 구원도 가능하게 됩니다.
정작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항상 성인들께선 반복해서 물으실 것입니다.
" 너의 의식활동이 과연 인격적인가? 동물들이 너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무슨 근거인가? "
그리고, 살아있는 인생의 의식 활동이 항상 땅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만 생각합니까?
최소한에, 발딛고 서있는 몸을 의식할 때면 언제나 땅에 붙어있지오.
뜨지 않는단 말이 곧 땅에 내려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땅 속에조차 공기가 들고있습니다.
동물과 식물은 모두 생물입니다.
지렁이는 동물이면서 땅속에서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