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할머니 보고싶어!

-_ㅜ 2011.04.23
조회119

 

날씨가 좋은 토요일 오후입니다.

 

 저는 25살 평범한 여자 직장인입니다.

문득 제가 살아온 삶과 그리고 나의 분신이셨던 분이 사무치게 생각나

이렇게 가슴이 답답한 마음에 글이라고 써서 풀어보고자 글을 올려봅니다.

 

 

제 인생사 얘기가 지겨우실 분도 있으시겠지만 그저 그냥 한 사회인의 이야기라 혹은 지인이야기라

생각 하시고 읽어주세요 ^-^

 

 

저는 어렸을때부터 사업을 하시는 부모님을 대신하여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런 할머니는 나의 엄마이자 아빠이자 친구이자 분신이었고

어렸을때는 할머니 옆이 아니면 잠도 잘못자는 그런 어리광쟁이었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어린시절. 지금은 기억도 잘 안나지만

참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유복한 시절이었던것은 확실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던 초등학교 3학년때

사업하시던 아버지는 계단에서 미끄러지셔서 뇌출혈이 오셨고

1년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시게 되었죠

어린나이에 무슨일인가 했었죠.

저희는 슈퍼를 했었습니다. 동네 슈퍼처럼 작은 슈퍼가 아닌 좀 규모가 있는 슈퍼였죠.

많은 돈을 벌지 않았지만 평범한 서민생활.

 

 

.

.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안 사실은 아버지가 입원하신 병원비가 한달에 4천만원정도

각종 수술과 재활치료 입원비 .

 

의식이 돌아온 아버지는 하반신마비

 

 

 

그렇게 저는 병원생활을 시작했지요. 일하시는 어머니를 대신해 대소변 도와드리고 식사 드리고

9인실 병실 안에는 저에게 모든게 낮설고 무섭고

아마 보신분들도 많으실텐데 뇌쪽을 다치신 분들은

기도 확장을 위에 목에 구멍을내고 가래제거와 같이 작은 호수로 음식을 넣어드려야 합니다.

직접 삼킬수가 없는 환자분들이 태반이거든요

다행히 저희 아버지는 식사는 가능했고

아버지의 잔심부름과 간병인을 대신해서 안해본일이 없었습니다.

장애가 있는 동생을 데리고 병원에서 생활을 한게..

 

3..

 

3년이란 시간동안 많이 지칠데로 지치신 어머니는 ..그렇겠지요 아무리 돈을 번다고 해도

생활비와 그 큰 병원비를 매달 감당하시기란 정말 힘든일이셨겠지요.

그 친한척하던 친척들과 지인들도 등을 돌린지 오래..

그리고 우리가 밥줄이었던 슈퍼는 엄청난 빛을 남긴채 부도가 났고

어머니 또한 가출을..

 

 

 

그떄나이 저는 초등학교 6학년

 

강제 퇴원하신 아버지.

누구의 도움없이는 거동자체가 안되시는.

그런 아버지를 할머니는 묵묵히 간호하셨고.

 

쇠약해져가는 당신의 몸은 생각안하고

자신병원비아껴 아버지 먹을것을 사다 드리곤 하셨죠

 

그러다 살던집도 경매로 넘어가

저희는

10평정도의 작음 임대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작은방은 아버지혼자

그리고 큰방은

할머니 언니 나 동생 이렇게 다섯식구 생활하게 되었고

전학과동시에 사춘기와 방황을 하게 된 저는

 

집에 안들어가기 일수고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리고 다닌것 같습니다.

참 바보같은 짓이었단걸 이제야 압니다.

 

 

그런 저인데도 항상 제편이되어주고

어디가서 기죽지말라고 쌈지돈을 항상 주머니에 넣어주시고

그당시 저는 왜 그게 당연하다고 느꼈을까요..?

그돈이면 할머니의 약값이 된다는걸 왜모르고 흥청망청 주는데로 더달라고 하면서 다 써버렸을까요..?

 

 

 

할머니는 아버지 그리고 장애가 있는 동생을 함께 지켜내시고 계셨습니다..그렇게 약하신 몸으로

 

그러던 어느날 문득 할머니를 유심히 보게 된 저는 .

내 엄마도 내 아빠도 내친구 내 분신이었던 그분이 그저 한없이 약하신 분이 되어 슬픈표정의 할머니를

보는 순간 이건 아니다 싶어..

요양원에 편지를 넣어  1년동안 편지를 써서..아버지를 요양원에 입원하게 했고..

할머니의 짐을 조금이나마 그리고 아버지를 좀더 편하게 모시기 위한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저도 나이가 차 20살이 되어

아르바이트란걸 시작했습니다.

첫월급을 타자마자 제가 한일은.. 할머니의 계량한복을 사는 일이었죠..

초등학교 3학년때 할머니에게 드린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죠.

그당시 현*대자동차에서 상상화그리기대회가 열렸었는데 그림을 그리면서 1등하면 할머니 계량 한복해드린다고 약속을 드리고 또 드리고 결국 입상도 못했지만 그래도 돈벌면 해준다고 했었던 약속이었죠

 

그걸 9년이 흐른 후에야 지켰습니다.

 

그옷을 사다드린날 그걸 꼭 손에 쥐시곤 연신 고맙다 미안하다 고맙다 미안하다

아직도 그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정말 죽을때 까지 잊지 못할 모습이죠.

 

그러다 저희집은 모두 성인이 되어 임대아파트에서 살수 없게 되었고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에 살던 임대아파트에는 노인정도 있고 친구분들이 많아서 모두 일을 나간뒤 할머니께서

적적하지 않으셨을 텐데 이사한곳은 친구분들도 없고

외진 곳이라 교통편도 매우 불편해 할머니가 나가시기란 어려운 일이시라

항상 집에 계셨습니다.

 

 

그런 제가 24살이 되던해..

어느정도 직장에 자리잡고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음식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날

할머니가 이상하다는걸 느꼇습니다. 평소에 심장이 안좋으셔서 혈압약과 심장약을 항상 드시고 계셔서

가끔 제가 청심환을 사다 드리곤 했는데 그걸보고 이건 누가 준겁니까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할머니가..이상했죠..

하지만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고

 

가출하셨던 어머니가 돌아오시고

저희는 희망을 안고 다시 시작을 하자는 마음을 살았습니다.

근데

고부갈등이라고하죠

저희 할머니와 어머님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왜그런지는 정말 어렸을때부터 생긴 갈등이라 알수가 없었지만

두분은 이유없이 서로를 멀리 하셨지요.

 

저는 엄마가 참으로 원망 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이정도로 크게 된거 엄마가 아닌 할머니고 우리 삼남매와 그리고 아버지를 지켜주시고

이정도로 생활을 하게 해주신 분은 할머니인데 ..

고생이란 고생은 혼자 다하신 그런 분이신데

 

그래도 갈등을 골이 깊어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희집은

할머니와 저

언니와 동생 엄마

이렇게 마치 편을 갈라놓은것처럼 집에서는 거의 서로 대화가 없이 지냈죠

 

 

 

 

그러던 2010년 봄

나의 꿈이고 희망인 나의 분신이 정말. 내곁을 떠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치매가 오셨죠..

매일을 눈물도 보냈습니다.행복하게 해드리겠다는 약속을 자꾸 잊으시려고 하는 할머니에게

저는 최선을 다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가족들이 외면해도 나는 할머니는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고

아침에 일어나 옷갈아입혀 드리고 아침챙겨드리고 출근하고

퇴근해서 온방의 오물을 치우면서도 할머니 목욕을 시켜드리면서 항상 웃었습니다.

힘들다는 생각 안했습니다. 짜증도 나는 날도 많았지만 아픈 할머니를 보면 눈물이 앞을가려서

웃어야 했습니다...그래도 힘은 들었지요..

저희집은 아침에 할머니를 제외한 모든 식구 일을해서 집에 아무도 없습니다.

장애가 있는 동생도 학교를 다니기 때문이죠..

 

그러다 저도 지쳤었다봅니다. 아니 미쳤던거죠.

할머니에겐 자식이 저희아빠 포함해서 삼남매이셨죠

고모는 가끔 오셔서 돈이나 음식을 주셨고

큰아빠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으셨죠. 저희 아버지가 다치신 그 이후로. 쭉.

정말 싫어하는 분이십니다 저는 나중에 성공해서 정말 당당히 서고 싶었죠.

 

그런 자식들인데 그렇게 할머니를 혼자두게 만든 사람들인데

할머닌 치매가 온 당시에도

보고싶으시다고 그렇게 이름을 부르셨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할머니는 이제 저조차도 알아보시지도 식사도 거동도 아무것도 못하시는 상황..

근데 그분들은

제가 전화도 드리고 말씀도 해드렸지만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런 할머니가 너무 불쌍하고 싫어.

'그게 무슨 자식들이야., 찾지마. 이렇게 아픈데 왜그래? 차라리 이럴거면 죽어 '

'이럴거면 죽어' 참 저도 사람이 아니었죠 . 아프신 할머니께 한다는 소리가 정말

이말은 정말 죽을때까지 후회로 남아 아직도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러다 할머니는 상태는 악화되어 제 힘으로는 간호가 어려워졌습니다.,

누워만 계시니 욕창도 생기고

노인요양원을 알아보고

등급판정을 받아 일주일정도면 집근처 요양원에서 편히 모실수 있게 되어 한시름 놓았습니다.

저또한 힘들겨워

친구와 술한잔하며 신세 한탄을 하고 있던 어느 밤.

언니에게 할머니일을 부탁하곤 친구와 얘기 하던중

언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 할머니가 식사 이거 드림되?'

'응 그거 드려 요즘 식사 잘 못하시니까 약도 꼭 드리고'

 

그렇게 전화를 끊고

5분정도 흘럿나

언니에게 다시 전화가 와

' 아 언니 왜. 오늘 나좀 늦어 오늘만'

'..할머니가..이상해...'

'왜?'

'숨을 안쉬어..할머니가..'

 

저는 그순간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병원을 갔는지도..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제가 병원앞에 와있더군요

응급실로 뛰어가 할머니는 찾았습니다.

울고있는 언니를 뒤로한채

 

근데 병원응급실 구석에 하얀 천으로 덮어있는 분이 할머니란 언니말

저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미친사람처럼 응급실을 해짚고 다녔죠..

근데 그 사람이 저희 할머니더라구요

그렇게 저는 꿈도 희망도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고생만 하고 살다가 그렇게 아프고 고생스럽게 돌아가신 할머니를 보는순간

너무 억울하고 너무 슬퍼서 너무 불쌍하고 너무 후회스러워서

미친사람처럼 그렇게 응급실에서 울어댔습니다.

 

잘못했다고 일어나 달라고 일어나 달라고 무릎 꿇고 빌었죠..

아무 말 없으시던 할머니의 손이 그립습니다..

 

그렇게 장례식이 치뤄졌고

코빼기 안보이던 큰집식구들과 친적들이 모였고

저는 그냥 구석에서 울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한달같았던 3일이지나

집에와서 할머니와 같이쓰던 방을 보면서

지금까지 그렇게 슬픈적은 없었던것같습니다.

짐정리는 하던도중

 

 보자기에 싸여진 옷을 보고 뭔가 하고 열어보니..

제가 사드린 한복이었고..

 사촌오빠 결혼식때 딱 한번 입으시고 그동안 한번도 입지 않은채 그대로..

아까워서 어떻게 입냐는 할머니 말이 귓가에 맴돌았고

그걸또 끌어안고 울었죠

 

3일장에 그옷을 가지고가 태우면서

맘껏입으라고 할머니께 드리고 집으로 와

방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할머니 서랍을 정리했습니다.

 

그러다 통장하나가 나왔는데 열어보는 순간

할말이 없더군요

 

5년동안 노인연금 나오신 돈을 일푼도 안쓰시고 고대로 꽁꽁 싸매서 두셨더군요.

먹을것 안먹고 입을것 안입고.

그저 그돈을 희망이라 생각하시고 갖고 게셨다고 생각하니 참 저는 할말을 잃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요양원 일찍 못보내 드린건데.

근데 이돈이 있었네 .

이걸 뭐에 쓰려고 안썻데?

혼잣말을 하면서 그저 흐르는 눈물.

끝까지 베푸시고만 간 당신에게 저는 할말이 없습니다.

사랑하고 죄송한다는 말밖에 드릴수가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할머니와 같이 지냈던 방에서 지냅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당장이라고 제이름을 부르면서 엣날얘기도 해주시고 손잡아 주실것 같아 너무 힘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후회로 남습니다.

한마디 말이라고 잘해드릴걸. 아프실떄곁에 더 있어드릴걸

일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곁을 지켜 드려야 했는데.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할머니 생각이 나는 날에는 그저 하루가 죄인같아

그 베푸신 사랑에 조금이나마 갚지 못한.제가 너무 밉고 할머니께 죄송스럽습니다.

있을때 잘하라는 말..

 

정말 뼈저리게 느낀 2010년

저는 지금도 문득 힘드네요

5월이면 1년인데.

 참 아직도 그 큰사랑에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입니다.

 

 

  지금도 마음이 참 아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