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극작가 임종상(林鐘相)이 쓴 역사소설「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는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 순간 안중근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안중근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권총을 틀어잡은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그러나 그의 예리한 눈길은 순초도 왜놈들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여전히 그 늙다리가 키 큰 재정대신과 나란히 맨 앞에서 사열하고 있다. 군악대의 환영곡 소리가 귀 따갑게 울린다.
"저 늙은 놈이 틀림없다. 아, 민족의 원수 놈을 이제야 만났구나! 네놈만 쏴버리면……."
안중근의 눈앞으로 연한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 속에서 손을 높이 흔들며 달려오는 딸 현생, 아들 분도의 모습이 저 멀리에 나타났다. 그 뒤로 웃음을 머금은 아려가 보였다.
"아, 내 이제야 저 혈육들의 품으로……."
순간 그들의 허상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바람이 휘몰아쳤다. 천봉산의 굽은 노송이 비바람을 맞아 무섭게 설레이고 있었다.
"왜 바람이 부는가, 제발 불지 말아다오. 제발……."
그는 속이 편안치 않아 이맛살을 찌푸리고 앞을 내다보았다.
안개 걷힌 그의 눈앞에 여전히 사열하고 있는 이등(伊藤)과 러시아 재정대신의 꺽두룩한 모습이 확 안겨왔다.
이등이 제법 매우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코코프체프와 무엇인가 간간이 이야기하면서 의장대 앞을 틀 차리며 지나간다.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몰골이 눈앞으로 확 안겨왔다. 그는 주머니 속의 권총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지금 쏠까?"
그는 망설였다. 숲처럼 빼곡하게 정렬한 의장대 사이로 총을 쏘기에는 불리할 것 같다. 주머니 속에 틀어잡았던 권총을 놓고 손을 뽑았다.’
안중근은 망설이지 않았다.《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의 표현에 의하면 ‘곧바로 뚜벅뚜벅 걸어서 용기 있게 앞으로 나가 군대의 대열 바로 뒤에 이르러 앞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운명의 순간, 하늘이 마련해준 순간이 다가왔다.
《안응칠역사》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는 과정과 그 구체적인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러시아 관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이 긴, 조그만 늙은이가 염치도 없이 감히 하늘과 땅 사이를 누비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것이 틀림없이 늙은 도둑 이토일 것이다"라고 생각한 나는 곧 바로 단총(短銃)을 뽑아 들고 그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통렬하게 네 발을 쏘았다.
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의아심이 크게 일어났다. 내가 이토의 얼굴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만일 다른 사람을 쏘았다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었다.
뒤쪽을 향해 다시 총을 겨누었다. 걸어나오는 일본인들 중에서 가장 위엄이 있어 보이는 앞장선 자를 향해 세 발을 쏘았다. 그리고 만일 죄 없는 자를 쏘았다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달려온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안중근은 ‘그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통렬하게 세 발’을 쏘았다. 이때 쏜 총탄은 세 발이었다. 안중근은 재판장의 심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러시아 헌병대의 대열 중간쯤의 지점으로 갔을 때, 이토는 그 앞에 열지어 있던 영사단 앞에서 되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헌병대의 열 사이에서 안으로 들어가 손을 내밀고 맨 앞에서 행진하고 있는 이토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향해 십 보 남짓의 거리에서 그의 오른쪽 상박부를 노리고 세 발 정도를 발사했다. 그런데 그 뒤쪽에도 또 사복을 입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혹시 이토가 아닌가 생각하고 그 쪽을 향해 두 발을 발사했다. 그리고 나는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
안중근은 이때 약간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실제로 경황이 없어 제대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안중근이 먼저 쏜 총탄은 세 발이었다. 한국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쓰러졌다. 세 발의 총탄은 어김없이 이토의 복중에 명중했다. 안중근이 갖고 있던 총기(銃器)는 벨기에제 브라우닝식 M1890 7연발 권총(拳銃)이었다.
이토에게 세 발을 쏘아 명중시킨 안중근은 이어서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모리 야쓰지로[森泰二郞], 만철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지[田中淸太郞] 등 세 사람을 연달아 쏘아 이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박은식(朴殷植)은《안중근전(安重根傳)》에서 “권총으로 여섯 발을 연달아 쏘았는데, 헛방 없이 모두 명중시켰으니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이는 안중근의 담력과 사격술(射擊術)이 천하에 둘도 없이 뛰어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고 찬양했다. 안중근의 사격술은 과연 뛰어났다.
나카무라 기쿠오[中村菊男]의《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는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 당시 이토의 총상(銃傷)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오야마[小山] 의원의 진단에 의하면 이토는 총탄 세 발이 모두 들어간 곳만 있을 뿐 나온 구멍이 없이 몸 안에 박혀 있는 맹관총창(盲管銃創)인데, 첫번째 탄환은 우상박(右上膊) 중앙 외면에서 그 상박을 관통하여 제7늑골을 향해 수평으로 들어가 가슴 안에 다량의 출혈을 유발시켰다. 두번째 탄환은 오른쪽 팔꿈치 관절 바깥쪽으로부터 그 관절을 관통하여 아홉번째 늑골에 들어가 흉막을 관통해서 왼쪽 늑골 밑에 박혔으며, 세번째 총탄은 상복부의 중앙에서 우측으로부터 들어가 죄측 복근(腹筋)에 박혔다.’
안중근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사격술은 순식간에 이토를 즉사하게 하고 한 발은 수행하던 하야시의 팔과 어깨를, 또 한 발은 가와카미의 팔에, 나머지 한 발의 탄환은 다나카의 다리를 맞췄다. 과연 절륜의 사격 솜씨였다.
○ 이토 히로부미, 유언 없이 현장에서 최후 맞아
적도(敵盜)들이 쓰러지는 것을 지켜본 안중근은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세 번 불렀다’고《안응칠역사》에 기록했다. 안중근은 국적(國賊) 이토 히로부미와 그 수하들을 총살하는 일이 ‘하늘의 뜻’이라 믿었다.
동양에서는 고대부터 천명사상(天命思想)이 전해왔다. 악인이 법망을 피하거나 법망을 뛰어넘어 못된 짓을 할 때면 하늘이 일정한 형벌을 내린다는 인식이었다.《서경(書經)》에서는 ‘백성이 하고자 하는 바를 하늘은 반드시 쫓는다.[民之所欲 天必從之]’라고 했고,《대학(大學)》에서는 ‘민중의 마음과 뜻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민중의 마음과 뜻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得衆測國 失衆測失衆國]’고 했다. 맹자(孟子)는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반드시 죄를 물어야 한다.(以討虐民之罪)’고 주장했다. 모두 천명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다. 자기 나라의 군주가 포악무도해도 ‘백성 학대하는 죄’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 동양사상의 요체이거늘, 하물며 일본인들이 침략해 국권을 오로지하고, 조선의 백성을 살육하는 마당이라면 이것을 방치하고 방관하는 것을 어찌 하늘의 뜻이라 하겠는가? 그래서 안중근은 자신의 의거를 하늘에 고하는 심경으로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세 번 외쳤던 것이다.
안중근은 의거 뒤 러시아 헌병들에게 끌려가 국경지방재판소에 구치되었을때 벽에 걸린 그리스도 상(像)에 절하고 성호를 그은 뒤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한국어로 기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중근은 재판 과정에서, 그때까지는 이토의 죽음을 알지 못한 상태여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계제가 아니었다고 진술했다.
안중근의 총격으로 환영식장은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로 변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동양 3국은 물론 러시아에서까지 최고의 실력자로 알려진 일본 정계의 거물이 불시에 피살되었으니 보통 사건이 아니었을 것이다.
미요시 도오루[三好徹]가 쓴『사전(史傳)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안중근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차가운 공기를 찢는 총성이 울렸다. 총성은 연속적으로 울렸다. 그와 동시에 이토의 몸이 튕겨지듯 흔들렸고, 이어 무언가 의지할 것을 찾는 듯 뒤로 물러섰다. 거의 틈도 없이 다시 총성이 울렸다. 이토의 뒤에 있던 가와카미, 모리, 다나카 세 명의 몸이 휘어졌다. 이토의 약간 앞에 있던 코코프체프가 돌아보며 오른손을 내밀어 이토를 부축하려 했다. 무로타, 후루타니, 나카무라 만철 총재가 달려와 이토를 부축했다. 무로타 등은 코코프체프의 지시를 받아 이토를 열차내 객실로 옮겼고, 중앙의 큰 테이블에 모포를 겹쳐 깔고 즉석 침대를 만들었다. 이를 보고 있던 코코프체프는 소파에 있던 쿠션을 가져와 이토의 머리 아래로 넣어줬다.’
천벌을 받은 이토(와 그 무리)는 목숨이 경각에 달려 열차내 객실로 옮겨지고,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들에게 포위되어 권총을 빼앗긴 채 끌려갔다. 이때 안중근을 끌고간 러시아 장교는 니콜라이 니키포로프 기병 1등 대위와 노그라조프 기병 1등 대위, 바데츠키 보병 중위 등이었다.
박은식(朴殷植)의《안중근전(安重根傳)》은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안중근이 러시아군에 피체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수천 명의 군대는 모두 흩어져 도망치거나 했지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으며, 헌병과 장교들은 칼을 차고 멍하니 서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참 지난 뒤 탄환이 떨어지게 되니 총성이 멎었다. 군중은 그제야 몰려들어 안중근의 권총을 빼앗아 헌병에게 넘겨주었다. 안중근은 곧 라틴어로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고 포박당했다.
안중근은 손뼉을 치고 큰 소리로 웃으며 "내가 도망칠 줄 아느냐? 내가 도망칠 생각을 했다면 죽음터에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하얼빈시의 러시아 재판소에 붙들려 들어가게 되었다.’
안중근은 처음부터 적도들을 처단하고 당당하게 이토의 죄상과 일제의 한국침략 죄악을 밝힘으로써 한국의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할 생각이었기 대문에 피신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옥중투쟁을 통해 만국공법의 원칙을 밝히고 국제 열강의 지지를 받아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고자 현장에서 순순히 피체되었다.
열차 특실로 옮겨진 이토는 피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에 숨졌다. 당년 69세였다. 수행중이던 의사와 거류민단의 일본인 의사가 응급치료를 했지만 워낙 총상이 깊어서 회생이 불가능했다. 이토는 숨지기 전 몇 마디를 남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여러 가지 자료와 정황으로 볼 때 현장에서 절명한 것 같다는 주장도 있다.
‘의사인 고야마[小山善]는 거류민 대표 중 한 명으로 와 있던 일본인 의사와 러시아인 의사의 도움을 받아 이토의 옷을 벗겼다. 오른쪽 가슴과 복부에서 선혈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의사들은 상처에 거즈를 댔고, 이토에게 브랜디를 권했다.
무로타는 이토를 치료하면서 "저도 총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이 정도로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라고 힘을 북돋으려 했다. 무로타는 미토번 출신으로, 메이지유신 무렵 도쿠가와 막부 진영과 싸울 때 오른쪽 어깨에 총을 맞았었다. 이토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자네보다는 내가 많이 맞았네."
이토가 말했다. 무로타가 이토의 손을 잡았다. 이토가 물었다.
"누가 쏘았지?"
"아직 모릅니다."
"나는 이제 글렀네. 또 누구 다친 사람은 없는가?"
"모리가 부상한 것 같습니다."
"모리도 당했는가?"라고 말한 뒤 이토 히로부미는 눈을 감았다.
의사들이 피하주사를 놨고 붕대를 감았으나, 이토는 고통스럽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때 러시아 측에서 대한제국인 한 명을 저격범으로 체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무로타가 이를 알리자 이토가 신음하듯 "그런가? 어리석은 녀석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사람들이 들은 이토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토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후루타니가 이토의 입에 귀를 대고 "각하, 뭔가 유언을……." 이라고 말했다. 대답이 없었다.
무로타가 쥐고 있던 이토의 손에서 맥박이 점차 약해졌고, 오전 10시 완전히 멈췄다.’
여기서 인용한 미요시가 쓴 책『사전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일본인이 쓴 각종 저서에는 피격된 이토가 위스키를 찾아 마셨다거나, 자신을 저격한 사람이 한국인임을 알고 “바보 같은 놈”이라고 했다거나 수행원들의 안부를 묻는 등 ‘위인의 면모’를 보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작된 것으로 사실과 다르다.
이토는 안중근이 쏜 세 발의 총탄에 관통상을 입고 얼마 뒤 곧바로 절명했다. 그만큼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떤 말이나 유언도 남길 수 없었다.
한편 채가구역에 남아서 거사를 대기하고 있던 우덕순은 갑자기 시내 경비가 삼엄해진 것을 보고 거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26일 안중근이 의거를 성공시킨 직후인 12시경에 러시아 헌병들에게 피체되어 구금되었다. 우덕순은 안중근에게 자기가 하얼빈역을 맡아 이토를 처단하겠다고 나섰다가 안중근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하얼빈역세어 거사가 실패했을 경우 채가구역에서 2차로 거사하기로 임무를 맡았다가 방아쇠 한 번 당겨보지도 못한 채 체포되었다. 어찌 보면 ‘불운한 지사(志士)’였지만, 안중근이 가장 믿었던 애국심이 강하고 심기가 곧은 의혈 청년이었다.
『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전기』6 하얼빈의거 ⑶
○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 세발의 탄환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다.
북한의 극작가 임종상(林鐘相)이 쓴 역사소설「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는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 순간 안중근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안중근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권총을 틀어잡은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그러나 그의 예리한 눈길은 순초도 왜놈들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여전히 그 늙다리가 키 큰 재정대신과 나란히 맨 앞에서 사열하고 있다. 군악대의 환영곡 소리가 귀 따갑게 울린다.
"저 늙은 놈이 틀림없다. 아, 민족의 원수 놈을 이제야 만났구나! 네놈만 쏴버리면……."
안중근의 눈앞으로 연한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 속에서 손을 높이 흔들며 달려오는 딸 현생, 아들 분도의 모습이 저 멀리에 나타났다. 그 뒤로 웃음을 머금은 아려가 보였다.
"아, 내 이제야 저 혈육들의 품으로……."
순간 그들의 허상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바람이 휘몰아쳤다. 천봉산의 굽은 노송이 비바람을 맞아 무섭게 설레이고 있었다.
"왜 바람이 부는가, 제발 불지 말아다오. 제발……."
그는 속이 편안치 않아 이맛살을 찌푸리고 앞을 내다보았다.
안개 걷힌 그의 눈앞에 여전히 사열하고 있는 이등(伊藤)과 러시아 재정대신의 꺽두룩한 모습이 확 안겨왔다.
이등이 제법 매우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코코프체프와 무엇인가 간간이 이야기하면서 의장대 앞을 틀 차리며 지나간다.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몰골이 눈앞으로 확 안겨왔다. 그는 주머니 속의 권총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지금 쏠까?"
그는 망설였다. 숲처럼 빼곡하게 정렬한 의장대 사이로 총을 쏘기에는 불리할 것 같다. 주머니 속에 틀어잡았던 권총을 놓고 손을 뽑았다.’
안중근은 망설이지 않았다.《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의 표현에 의하면 ‘곧바로 뚜벅뚜벅 걸어서 용기 있게 앞으로 나가 군대의 대열 바로 뒤에 이르러 앞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운명의 순간, 하늘이 마련해준 순간이 다가왔다.
《안응칠역사》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는 과정과 그 구체적인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러시아 관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이 긴, 조그만 늙은이가 염치도 없이 감히 하늘과 땅 사이를 누비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것이 틀림없이 늙은 도둑 이토일 것이다"라고 생각한 나는 곧 바로 단총(短銃)을 뽑아 들고 그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통렬하게 네 발을 쏘았다.
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의아심이 크게 일어났다. 내가 이토의 얼굴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만일 다른 사람을 쏘았다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었다.
뒤쪽을 향해 다시 총을 겨누었다. 걸어나오는 일본인들 중에서 가장 위엄이 있어 보이는 앞장선 자를 향해 세 발을 쏘았다. 그리고 만일 죄 없는 자를 쏘았다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달려온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안중근은 ‘그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통렬하게 세 발’을 쏘았다. 이때 쏜 총탄은 세 발이었다. 안중근은 재판장의 심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러시아 헌병대의 대열 중간쯤의 지점으로 갔을 때, 이토는 그 앞에 열지어 있던 영사단 앞에서 되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헌병대의 열 사이에서 안으로 들어가 손을 내밀고 맨 앞에서 행진하고 있는 이토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향해 십 보 남짓의 거리에서 그의 오른쪽 상박부를 노리고 세 발 정도를 발사했다. 그런데 그 뒤쪽에도 또 사복을 입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혹시 이토가 아닌가 생각하고 그 쪽을 향해 두 발을 발사했다. 그리고 나는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
안중근은 이때 약간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실제로 경황이 없어 제대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안중근이 먼저 쏜 총탄은 세 발이었다. 한국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쓰러졌다. 세 발의 총탄은 어김없이 이토의 복중에 명중했다. 안중근이 갖고 있던 총기(銃器)는 벨기에제 브라우닝식 M1890 7연발 권총(拳銃)이었다.
이토에게 세 발을 쏘아 명중시킨 안중근은 이어서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모리 야쓰지로[森泰二郞], 만철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지[田中淸太郞] 등 세 사람을 연달아 쏘아 이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박은식(朴殷植)은《안중근전(安重根傳)》에서 “권총으로 여섯 발을 연달아 쏘았는데, 헛방 없이 모두 명중시켰으니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이는 안중근의 담력과 사격술(射擊術)이 천하에 둘도 없이 뛰어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고 찬양했다. 안중근의 사격술은 과연 뛰어났다.
나카무라 기쿠오[中村菊男]의《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는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 당시 이토의 총상(銃傷)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오야마[小山] 의원의 진단에 의하면 이토는 총탄 세 발이 모두 들어간 곳만 있을 뿐 나온 구멍이 없이 몸 안에 박혀 있는 맹관총창(盲管銃創)인데, 첫번째 탄환은 우상박(右上膊) 중앙 외면에서 그 상박을 관통하여 제7늑골을 향해 수평으로 들어가 가슴 안에 다량의 출혈을 유발시켰다. 두번째 탄환은 오른쪽 팔꿈치 관절 바깥쪽으로부터 그 관절을 관통하여 아홉번째 늑골에 들어가 흉막을 관통해서 왼쪽 늑골 밑에 박혔으며, 세번째 총탄은 상복부의 중앙에서 우측으로부터 들어가 죄측 복근(腹筋)에 박혔다.’
안중근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사격술은 순식간에 이토를 즉사하게 하고 한 발은 수행하던 하야시의 팔과 어깨를, 또 한 발은 가와카미의 팔에, 나머지 한 발의 탄환은 다나카의 다리를 맞췄다. 과연 절륜의 사격 솜씨였다.
○ 이토 히로부미, 유언 없이 현장에서 최후 맞아
적도(敵盜)들이 쓰러지는 것을 지켜본 안중근은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세 번 불렀다’고《안응칠역사》에 기록했다. 안중근은 국적(國賊) 이토 히로부미와 그 수하들을 총살하는 일이 ‘하늘의 뜻’이라 믿었다.
동양에서는 고대부터 천명사상(天命思想)이 전해왔다. 악인이 법망을 피하거나 법망을 뛰어넘어 못된 짓을 할 때면 하늘이 일정한 형벌을 내린다는 인식이었다.《서경(書經)》에서는 ‘백성이 하고자 하는 바를 하늘은 반드시 쫓는다.[民之所欲 天必從之]’라고 했고,《대학(大學)》에서는 ‘민중의 마음과 뜻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민중의 마음과 뜻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得衆測國 失衆測失衆國]’고 했다. 맹자(孟子)는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반드시 죄를 물어야 한다.(以討虐民之罪)’고 주장했다. 모두 천명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다. 자기 나라의 군주가 포악무도해도 ‘백성 학대하는 죄’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 동양사상의 요체이거늘, 하물며 일본인들이 침략해 국권을 오로지하고, 조선의 백성을 살육하는 마당이라면 이것을 방치하고 방관하는 것을 어찌 하늘의 뜻이라 하겠는가? 그래서 안중근은 자신의 의거를 하늘에 고하는 심경으로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세 번 외쳤던 것이다.
안중근은 의거 뒤 러시아 헌병들에게 끌려가 국경지방재판소에 구치되었을때 벽에 걸린 그리스도 상(像)에 절하고 성호를 그은 뒤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한국어로 기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중근은 재판 과정에서, 그때까지는 이토의 죽음을 알지 못한 상태여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계제가 아니었다고 진술했다.
안중근의 총격으로 환영식장은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로 변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동양 3국은 물론 러시아에서까지 최고의 실력자로 알려진 일본 정계의 거물이 불시에 피살되었으니 보통 사건이 아니었을 것이다.
미요시 도오루[三好徹]가 쓴『사전(史傳)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안중근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차가운 공기를 찢는 총성이 울렸다. 총성은 연속적으로 울렸다. 그와 동시에 이토의 몸이 튕겨지듯 흔들렸고, 이어 무언가 의지할 것을 찾는 듯 뒤로 물러섰다. 거의 틈도 없이 다시 총성이 울렸다. 이토의 뒤에 있던 가와카미, 모리, 다나카 세 명의 몸이 휘어졌다. 이토의 약간 앞에 있던 코코프체프가 돌아보며 오른손을 내밀어 이토를 부축하려 했다. 무로타, 후루타니, 나카무라 만철 총재가 달려와 이토를 부축했다. 무로타 등은 코코프체프의 지시를 받아 이토를 열차내 객실로 옮겼고, 중앙의 큰 테이블에 모포를 겹쳐 깔고 즉석 침대를 만들었다. 이를 보고 있던 코코프체프는 소파에 있던 쿠션을 가져와 이토의 머리 아래로 넣어줬다.’
천벌을 받은 이토(와 그 무리)는 목숨이 경각에 달려 열차내 객실로 옮겨지고,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들에게 포위되어 권총을 빼앗긴 채 끌려갔다. 이때 안중근을 끌고간 러시아 장교는 니콜라이 니키포로프 기병 1등 대위와 노그라조프 기병 1등 대위, 바데츠키 보병 중위 등이었다.
박은식(朴殷植)의《안중근전(安重根傳)》은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안중근이 러시아군에 피체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수천 명의 군대는 모두 흩어져 도망치거나 했지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으며, 헌병과 장교들은 칼을 차고 멍하니 서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참 지난 뒤 탄환이 떨어지게 되니 총성이 멎었다. 군중은 그제야 몰려들어 안중근의 권총을 빼앗아 헌병에게 넘겨주었다. 안중근은 곧 라틴어로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고 포박당했다.
안중근은 손뼉을 치고 큰 소리로 웃으며 "내가 도망칠 줄 아느냐? 내가 도망칠 생각을 했다면 죽음터에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하얼빈시의 러시아 재판소에 붙들려 들어가게 되었다.’
안중근은 처음부터 적도들을 처단하고 당당하게 이토의 죄상과 일제의 한국침략 죄악을 밝힘으로써 한국의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할 생각이었기 대문에 피신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옥중투쟁을 통해 만국공법의 원칙을 밝히고 국제 열강의 지지를 받아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고자 현장에서 순순히 피체되었다.
열차 특실로 옮겨진 이토는 피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에 숨졌다. 당년 69세였다. 수행중이던 의사와 거류민단의 일본인 의사가 응급치료를 했지만 워낙 총상이 깊어서 회생이 불가능했다. 이토는 숨지기 전 몇 마디를 남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여러 가지 자료와 정황으로 볼 때 현장에서 절명한 것 같다는 주장도 있다.
‘의사인 고야마[小山善]는 거류민 대표 중 한 명으로 와 있던 일본인 의사와 러시아인 의사의 도움을 받아 이토의 옷을 벗겼다. 오른쪽 가슴과 복부에서 선혈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의사들은 상처에 거즈를 댔고, 이토에게 브랜디를 권했다.
무로타는 이토를 치료하면서 "저도 총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이 정도로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라고 힘을 북돋으려 했다. 무로타는 미토번 출신으로, 메이지유신 무렵 도쿠가와 막부 진영과 싸울 때 오른쪽 어깨에 총을 맞았었다. 이토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자네보다는 내가 많이 맞았네."
이토가 말했다. 무로타가 이토의 손을 잡았다. 이토가 물었다.
"누가 쏘았지?"
"아직 모릅니다."
"나는 이제 글렀네. 또 누구 다친 사람은 없는가?"
"모리가 부상한 것 같습니다."
"모리도 당했는가?"라고 말한 뒤 이토 히로부미는 눈을 감았다.
의사들이 피하주사를 놨고 붕대를 감았으나, 이토는 고통스럽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때 러시아 측에서 대한제국인 한 명을 저격범으로 체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무로타가 이를 알리자 이토가 신음하듯 "그런가? 어리석은 녀석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사람들이 들은 이토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토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후루타니가 이토의 입에 귀를 대고 "각하, 뭔가 유언을……." 이라고 말했다. 대답이 없었다.
무로타가 쥐고 있던 이토의 손에서 맥박이 점차 약해졌고, 오전 10시 완전히 멈췄다.’
여기서 인용한 미요시가 쓴 책『사전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일본인이 쓴 각종 저서에는 피격된 이토가 위스키를 찾아 마셨다거나, 자신을 저격한 사람이 한국인임을 알고 “바보 같은 놈”이라고 했다거나 수행원들의 안부를 묻는 등 ‘위인의 면모’를 보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작된 것으로 사실과 다르다.
이토는 안중근이 쏜 세 발의 총탄에 관통상을 입고 얼마 뒤 곧바로 절명했다. 그만큼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떤 말이나 유언도 남길 수 없었다.
한편 채가구역에 남아서 거사를 대기하고 있던 우덕순은 갑자기 시내 경비가 삼엄해진 것을 보고 거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26일 안중근이 의거를 성공시킨 직후인 12시경에 러시아 헌병들에게 피체되어 구금되었다. 우덕순은 안중근에게 자기가 하얼빈역을 맡아 이토를 처단하겠다고 나섰다가 안중근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하얼빈역세어 거사가 실패했을 경우 채가구역에서 2차로 거사하기로 임무를 맡았다가 방아쇠 한 번 당겨보지도 못한 채 체포되었다. 어찌 보면 ‘불운한 지사(志士)’였지만, 안중근이 가장 믿었던 애국심이 강하고 심기가 곧은 의혈 청년이었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