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린 <물의 정거장> 문학동네, 2003

bright_02011.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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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경린 <물의 정거장> 문학동네, 2003

 

 

스무살땐가 스물한살땐가.

처음 전경린을 접하고 나서부터 마음이 선선해지거나 정리해야할 것들이 생길 땐 꼭 그의 책을 고르게 된다.

전경린. 필명인지 본명인지 모르겠지만 이름을 부를 때의 울림이 작가의 소설들처럼 애잔하다.

 

요즘 보면 참 책 광고들이 많다.

몇몇 책들은 원작이 되어 영화화되고 그래서 이슈도 되고.

그래서 나오는 신작들, 그리고 베스트셀러들을 보면

패션이 유행을 타듯 책들도 유행따라 돌아가는 것 같다.

나는 유행안타는 것이 좋다. 갑자기 이 말은 왜 했지.. 아무튼.

 

나는 책을 곱씹는 타입이라서 빨리빨리 읽지 못한다. 심지어 만화책도 한권에 한시간은 기본.

그렇다고 느리게 읽는다하여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읽고나서 며칠 정도 문득문득 인상깊었던 구절을 떠올리고 스르륵 한번 훑어보기도 하고. 

한껏 음미하고 정리하고 내 감성으로 섞어낼 때 그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뭐 그렇다고 내가 모든 책을 그렇게 읽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래서 한동안 책 읽는게 싫었다. 독서가 버거울 때가 있다.  

내 마음이 버석거릴 때에 독서는 특히나.  

삶에 대한 통렬함, 전경린 소설 속 여자들의 사랑은 대체로 허공에 부유한다. 

그래서 전경린의 소설은 여타의 가볍게 씹어 삼킬 수 있는 책들과는 다르게

가벼운 마음에 준비를 하고 읽는 편이다. 뭔가 거창하지만 나는 그렇다. 

그만큼 전경린의 소설은 위험한 요소가 있다.

우리나라 여성 작가가 한국의 현실 속 여자들의 사랑, 욕망, 한계에 대해

날카롭게 이야기하니 그만큼 날카롭게 박힐 수 밖에 없는건지 아니면

그 유난스런 표현력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읽다보면 한 문장, 한 페이지를 넘기지 못할 때가 많다.

 

 

 

 

 

 

 

 

# 바다엔 젖은 가방들이 떠다닌다

 

 

 

p20 ㅣ 나는 이제 한결같고 따스하고 잔잔한 풍경화 같은 결혼을 꿈꾼다.

세월만 흘러갈 뿐 더이상 변화하지는 않을 그런 생.

모험도 없고 혼란도 없고 격정도 없고

실패도 없고 갈등도 없고 이별도 없는.

나머지 인생은 정말 그러기를 바란다. 

 

한 여자가 오직 나만을 알고

나도 오직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진짜 결혼.

 

···

 

늘 그렇듯이 한 남자의 세상엔

꼭 두 가지 타입의 여자만이 존재한다.

공항 여자들이나 화련들.

내 욕망은 결혼에 대한 설계를 대폭 수정하며,

어차피 한 여자하고만 살아야 한다면 좀 위험하더라도

화련 쪽을 선택하고 싶어한다. 화련이라면 꽉 끌어안고

아주 깊은 물 속이라도 숨도 쉬지 않고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

 

줄을 이어 선 화원 거리에서 갑자기 차를 갓길로 빼내고 멈추었다.

그리고 한 화원으로 불쑥 들어가 마르코폴로가 있는지 물었다.

...나는 커다란 넝쿨잎들이 새파랗게 자라나는 퀴퀴하고 축축한 습기 속에서 깨달았다.

아, 내가 사랑에 빠졌구나.

 

 

 

p39 ㅣ 어차피 인생에 더 나은 것 따위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단지 더 모르는 것에 끌릴 뿐이다.

그리고 모르는 것이 없어질수록 삶의 열정도 사라져간다.

 

 

 

*한 남자가 오직 나만을 알고 나도 오직 한 남자만을 사랑하는 진짜 결혼.

사람은 언제나 위험한 것에 알면서도 제 발을 담구는 것 같다.

 

 

 

 

 

 

 

 

# 다섯번째 질서와 여섯번째 질서 사이에

세워진 목조마네킹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p47 ㅣ "울면서 살 지경이면 콱 죽어버려. 옛날엔 여자의 눈물이 무기였던 때도 있었지.

여자가 울면 남자가 안절부절 못하던 시절도 있었다고. 요즘은 눈물이 똥보다 못해.

조롱거리라고. 아무도 우는 여자를 바로 안본다니까. 배를 갈라 창자를 내놓았으면

내놓았지 눈물은 흘릴게 못 돼. 독한 세상이라고. 아무도 울면서 안 살아···"

 

 

p63 ㅣ “우리의 감정엔 그런 권위가 없어. 그냥 예외적인 감정이지…… 우린 사실 뭘 하고 있는지 잘 몰라.

사랑하는지, 미안해하는지, 열등감에 빠져 있는지, 그리워하는지…… 난 사실 잘 몰라. 미안해. 난 네게……”

 

 

사랑하는지 미안해 하는지 열등감에 빠져 있는지 그리워하는지 모른다는 남자들의 잠.

 

 

 

*동성애를 다루고 있는 단편. 나이가 서른이 넘은, 세상 속의 동성간의 사랑은 정말 사랑하는지 미안해하는지

열등감에 빠져있는지 그리워하는지, 사랑이라 부를 권위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한의 말처럼.

 

 

 

 

 

 

 

#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

 

 

 

p73 ㅣ 생의 어느 시기에 블랙홀로 빠져들어 중력을 상실해버린 여자.

사람의 몸무게는 바로 지구가 끌어당기는 중력의 무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연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쯤일까요?

연인 간에 당기는 무게는, 엄마와 아이들 간의 무게는 부부간의 무게는 자매간의 무게는……

공중에 뜨는 여자에게는 그런 관계의 무게조차도 없어지는 것일까요……

 

공중에 뜨는 사람은 사람의 길을 알 수가 없어요. 걸음걸이도 서툽니다.

그는 허공에 유폐된 자아를 지닌 자이며 세상으로부터 중절된 자인 것입니다.

 

 

 

p84 ㅣ "……두 아이를 낳았고 정확히 십년 뒤에 집을 떠났어요. 무슨 이유 같은 건 없었어요.

……먼 곳에 오면 산다는 것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죠.

때론 삶의 굴욕과 침묵과 시간이 비스킷처럼 부서지던 그 사소함이 그리워질 때가 있어요."

 

 

"접시를 돌릴 때면 꿈틀대는 짐승의 등 위에서 한 장의 접시도 떨어뜨리지 않고

끝까지 돌리며 가야 하는, 그 잔혹한 것이 생 같아. 접시돌리기를 멈추면 짐승은 나를 내동댕이치고

달려가버리고 접시들은 어김없이 바닥에 떨어져 깨어지고 생의 빛도 암흑 속으로 사라져버리지.

접시돌리기의 망상, 그것이 생이에요. 누구나 꿈틀대는 짐승의 등 위에서 돌려야 하는 접시가 있지. "

 

 

 

 

 

 

 

#첫사랑

 

 

 

p97 ㅣ ㅡ사람들은 첫사랑을 떠올릴 때 화들짝 놀라고 이어 얼굴을 약간 붉힌 뒤, 막막하고 허술한 표정이 된다.

그리고 흔히 이런 관용구로 첫사랑에 관한 말을 시작한다. '글쎄 그걸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첫사랑이란 실은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어떤 억눌린 감정에 관한 추억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간혹은 있다. 첫사랑이 생애에 유일한 사랑인 사람들.

그런 확신이 단 한 번으로 영원히 자신을 사로잡을 때,

명료하지도 않고 약속도 없는 하나의 이미지가 존재의 결계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p112 ㅣ "…… 그 남자는 나에게 말도 붙이고 혼자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무어라고 묻는 말에 내가 대답하면

하하 웃기도 했어. 그날 난, 병신인 내게 친절한 젊은 일꾼에게 그만 반해버렸단다. 남자가 좋아진 건 생전 처음이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말하자면 난, 무서움을 이기고 누군가를 그만 사랑하게 된거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무서운 일이

생기고 말 거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 말이야…… '

 

……이건 어른들한테는 비밀인데, 난 결혼한 뒤에 그가 도망갈 줄 알고 있었단다. 하지만 말이야 난 다른 것도 알고 있었어.

그가 아무리 멀리 가도, 이 생의 끝까지 달아나도 그에게는 내가 유일한 아내라는 사실…… 그에겐 잔인하고 나에겐 슬프지.

하지만 우린 불행으로라도 삶을 채워야 하는 거야. 아니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겠니."

 

 

 

 

 

 

#달의 신부

 

 

 

p151 ㅣ "사랑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오. 사랑이란 한 번도 같고 두 번도 같고 세 번도 같은 것이오.

한 번으로도 충분한 것을 어찌 억지로 붙잡아두려고만 하오?"

 

"나한테 가르치려 마시오. 이 세상에 또 무슨 여자가 있다는 말이오.

나에겐 세상 천지에 오직 그 여자 하나뿐이오."

 

 

p155 ㅣ 정은 보름밤에 더이상 아내를 가두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지게를 지고 어두운 숲 속 묘지와

계곡과 폭포들 사이를 헤매는 아내 뒤를 묵묵히 따르다가 마침내 동이 트고 아내가 실신해 쓰러지면,

아내의 몸을 지고 가파르고 미끄러운 산길을 디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만 점점 더 가벼워지는 아내의 무게 때문에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꼼짝하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정은 자신의 몸 어딘가가 터져 마른 흙 위에 피가 뚝뚝 흐르는 듯 했습니다.

 

 

 

 

 

 

# 二月 荒凉的 脚步(이월 황량적 각보)

 

 

 

p193 ㅣ 아내가 떠난 뒤로 얼마나 많은 날이 지나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날도, 그 전날도 나는 단지 아내를 안고 싶었다.

내가 아내에게 했던 모든 거짓말을 잊고 싶었다. 집 같은 것, 증권 같은 것, 빚 같은 것, 가게 같은 것, 아이들,

몇 년 동안 나를 덮친 불운과 거짓말에 거짓말로 연장해온 나의 사랑도……

 

오늘밤은 무사하니까, 아직은 따뜻하게 안고 자자고 말하고 싶었다.

삶이 나의 갈비뼈를 차례차례 부수고 들어와도, 내가 만신창이가 되어 내장이 밖으로 쏟아져 나와도 끝까지 버티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대신 나는 식탁 의자를 들어올렸다. 아내가 더이상 아내가 아니고, 내가 더이상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낙원빌라

 

 

p214 ㅣ "두려움과 혼란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져요. 낯선 일들이 지나가면,

누구와 엮어도 다를 바 없는 메마른 관계의 해골만 남게 되죠……

 

사랑한다는 일이, 사실 가능한지나 모르겠어요.

사나운 맹수 앞에서 태연한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태연하지 못하면,

그만 물려죽고 마니까요. 그러니, 사랑이 과연 가능할까요?"

 

 
p220 ㅣ사는 일이란 양잿물 같은 그 많은 감정을 가슴에 차곡차곡 재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이란 감정이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하면서
그 손끝에서 쌓아가는 경험의 축적이라는 것도...

 

 

*강간 당한 아내를 외면하는 남편과 세상을 떠나 스스로 생을 유폐시키려는 여자 이야기.

 

 

  

 

#물의 정거장

 

 

 

p223 ㅣ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온 줄 몰랐어요. 당신 손을 잡고 당신 눈길을 따라가느라,
 이렇게 높은 곳에 올려진 줄도 몰랐어요. 날개라도 달린 듯......

그런데, 당신은 없고 이렇게 높고 외딴 곳에 나만 남겨졌어요.
 세상은 나를 향해 일제히 불을 꺼버렸는데, 나 혼자 어떻게 내려가나요?
 이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는데. 내가 한 발도 못 움직일 거라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p235 ㅣ ㅡ이 나이에 굳이 사랑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열정이 없을수록 삶은 더 선량해지는데......
사랑 없이 못 사는 사람과 사랑 없이 사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나쁜 사람일까......

 

 

p249 ㅣ "에스키모에게는 희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열일곱 개나 있대."
"그게 왜?"
"난 나머지 생을 그와 함께하려는 생각뿐이야.
 사계절이 온통 얼음과 눈으로 덮인 세계에선 흰색이 지배적이겠지."
 삶의 장애이고 삶의 허용이고 삶의 구조이며 배경이고 질료이며
 온도이고 질감이고 삶이 그곳에서 나와 그곳으로 돌아가겠지......
 그와 나 사이에도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가 앞으로 열일곱 개쯤 더 생기길 바래."

 

p255 ㅣ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고 오늘내일 끝날 문제도 아닐 때는
 그냥 눈 딱 감고 아무 일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원래 그게 내 인생인 것처럼 사는 거지."

 

 

 

 

 

 

#부인내실의 철학

 

 

p280 ㅣ "...가장 자연스러운 인생에서조차 끊임없이 뭔가를 잃어가지만 우린 뒤돌아보며
 되찾으려 해서는 안 돼요. 그대로, 잃은 채로 앞을 향해 살아가야 하는 거예요......"


"잃어버린 것은 완전해 보이지. 하지만 막상 그때로 돌아가면 결코 완전한 건 없어.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상처 때문에 유토피아적 환상이 생기는 거야.
 유토피아란, 그래서 미래의 이상이라기보다는

 상처로 인해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집착이기도 하지."

 

 

*남편으로부터 폭행당하는 유령같은 여자의 목요일.

 

 

 

 

 

#장미십자가

 

 

p303 ㅣ나는 자라 잡는 사람들과 작은 갑각속에 자신을 밀어넣고
죽은 체하는 것이 전부인 자라를 증오했다. 동시에 나 역시 악어의 입 속에 들어갈 때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천천히 알아챘다. 이미 죽은 체하며 아득히 고통을 속이는 것.
자라에겐 언제부턴가 강물 전체가 악어의 입 속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고통이 오래 지속되고 그 고통을 오래 속이다보면

어느 날 등이 휘어지며 갑각의 지붕이 되기도 하는지.
그래서 삶과 죽음을 함께 업고 다니기도 하는지.

 

 

 

 

젠장..

이래서 전경린 소설 읽고 리뷰쓸라면 맘먹고 해야 한다니까....

결혼과 가정 속 여자들이라는 하나의 테마 아래 엮인 단편집.

 

 

10.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