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인 게이시.. 1942년에 태어난 게이시는 알콜중독자 아버지에게서 비웃음과 언어폭력을 당하며 성장 하였다. 그는 땅딸하고 뚱뚱한 소심한 남자로 성장했으며 동성애자인 자신의 성향을 비관하며 극심한 자기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정상인처럼 평범하게 살기위해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아아ㅣ오와 주에 정착 했으며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체인점을 운영 하였다. 그는 체인점 운영으로 남부럽지 않은 정도의 생활을 영위했지만 뒷구석 으로는 미성년 소년들을 유혹하고 능욕하는 짓을 끊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1968년 소년을 강간한 혐의로 10년형을 선고 받았으며 선고 당일날 큰 충격을 받은 아내는 이혼 소송을 냈다. 감옥에서의 케이시는 매우 모범적인 생활을 했고 수감이된지 2년이 지나지 않아 가석방 되었다. 그는 다시 시카고에서 자리를 잡고 결혼까지 했다. 그는 하청업체를 운영했는데 이는 자신의 더러운 욕망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다. 그와 아는 남성들이나 부하직원, 거리의소년, 소매치기들을 닥치는대로 납비가호 성폭행 했으며 자신의 하청업체에 아르바이트나 구직을 위해 찾아오는 소년들을 윤간했다. 그리고 동성애자 클럽을 드나들며 먹잇감을 목색하기도 했고 납치된 소녀들에게는 수갑을 채우고 고문과 성폭행을 가한후 끈과 막대기로 목을 졸라 죽였다. 이 후 존 웨인 게이시는 소년의 사체를 벽장 지하실 밑에 버렸으며 더 이상 시체를 버릴 공간이 없자 지하실 바닥에 파뭍기도 하고 강에 버리기도 했다. 이런 그의 악마적 심성과 다르게 그는 지역사회에서 명망있는 인사였다. 그는 헌신적인 사업가로 성공했고(남들이 보기에) 자선사업에 깊숙히 관여했다. 또 그는 어릿광대 분장을 하고 지역병원의 소아 환자들을 위한 자선 공연도 여러번 베풀었다. 게다가 정치에도 관여하여 청년 회의소 위원직을 맡았으며 심지어 그의 사무실에는 시카고 시장부인이며 차 후 영부인이 되는 로살린 카터와의 사진까지 붙어있을 정도였다. 19789년 세이시의 너무나 더러운 악행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한밤중에 비명소리에 잠을깬 주민이 경찰에 신고하였고 경찰은 신고 받은 대로 시카고 근처의 게이시의 농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명망있는 인물인 게이시가 나와서 점잖게 둘러대자 경찰들은 곧 떠나고 만다. 미 무렵 15살 소년 로버트 피어스트가 실종되었다. 쾌활하고 착한 소년이었던 피어스트는 방학이 되자 아르바이트 거리를 얻기위해 부모에게 허락을 얻고 게이시를 찾아가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피어스트의 부모는 당장 경찰에 신고했고 드디어 경찰은 게이시의 뒷조사를 하기 시작했고 그가 10여년전 교도소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경찰은 즉시 영장을 밤부했으며 게이시의 집을 샅샅히 수색하기 시작된다. 그러자 수상한 물건들이 점점 나오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아주 극단적 내용의 포르노 잡지, 배설물이 묻어있는 지저분한 전동딜도, 소년들의 장신구나, 옷가지, 신발, 지갑 등이었다. 한편 다른팀이 조사하던 거실 벽장쪽에서는 놀랄만한 장소가 발견되었다. 후레시를 킨 수사관들은 엄청난 악취와 함게 썩어가는 시체가 가득한 지옥도를 발견하였다. 돼지 비계처럼 변한 썩은 살점들과, 바싹 마른 살이 붙어있는 뼈들을 발견하였으며 결과적으로 29구의 젊은 남자들과 소년들의 시체를 발굴 하게 되었다. 증거물이 낯낯히 발견되자 게이시는 즉각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는 6년이 넘는 기간동안 수많은 소년들을 윤간한 죄와 33명의 소년, 청년들을 살해한 죄로 기오되었다. 법원에서 게이시는 자신의 이중인격으로 고통받는다고 형을 경감시키기 위해 정신병으로 위장하였으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은채 1980년 3월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형이 집행되기까지 14년 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는 그동안 그림을 그리거나 나름대로의 사회활동을 하면서 감옥 생활을 하였다 자신을 주제로 된 서적 40여권 영화각본 2편 영화1편 노래 5곡 신문기사 5천건이 나왔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하던 미치광이 광대는 1994년 5월 10일 자정 치사주사를 맞고 처형되었다 그가 마지막 남긴말은 "Kiss My Ass" (내 똥꼬에 뽀뽀? 해줘) 였다고 한다 184
어릿 광대 연쇄 살인마 존 웨인 게이시
존 웨인 게이시..
1942년에 태어난 게이시는 알콜중독자 아버지에게서 비웃음과 언어폭력을 당하며 성장 하였다.
그는 땅딸하고 뚱뚱한 소심한 남자로 성장했으며 동성애자인 자신의 성향을 비관하며
극심한 자기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정상인처럼 평범하게 살기위해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아아ㅣ오와 주에 정착 했으며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체인점을 운영 하였다.
그는 체인점 운영으로 남부럽지 않은 정도의 생활을 영위했지만 뒷구석 으로는
미성년 소년들을 유혹하고 능욕하는 짓을 끊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1968년 소년을 강간한 혐의로 10년형을 선고 받았으며 선고 당일날 큰 충격을 받은
아내는 이혼 소송을 냈다.
감옥에서의 케이시는 매우 모범적인 생활을 했고 수감이된지 2년이 지나지 않아 가석방 되었다.
그는 다시 시카고에서 자리를 잡고 결혼까지 했다.
그는 하청업체를 운영했는데 이는 자신의 더러운 욕망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다.
그와 아는 남성들이나 부하직원, 거리의소년, 소매치기들을 닥치는대로 납비가호 성폭행 했으며
자신의 하청업체에 아르바이트나 구직을 위해 찾아오는 소년들을 윤간했다.
그리고 동성애자 클럽을 드나들며 먹잇감을 목색하기도 했고 납치된 소녀들에게는
수갑을 채우고 고문과 성폭행을 가한후 끈과 막대기로 목을 졸라 죽였다.
이 후 존 웨인 게이시는 소년의 사체를 벽장 지하실 밑에 버렸으며
더 이상 시체를 버릴 공간이 없자
지하실 바닥에 파뭍기도 하고 강에 버리기도 했다.
이런 그의 악마적 심성과 다르게 그는 지역사회에서 명망있는 인사였다.
그는 헌신적인 사업가로 성공했고(남들이 보기에) 자선사업에 깊숙히 관여했다.
또 그는 어릿광대 분장을 하고 지역병원의 소아 환자들을 위한
자선 공연도 여러번 베풀었다.
게다가 정치에도 관여하여 청년 회의소 위원직을 맡았으며
심지어 그의 사무실에는 시카고 시장부인이며 차 후 영부인이 되는
로살린 카터와의 사진까지 붙어있을 정도였다.
19789년 세이시의 너무나 더러운 악행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한밤중에 비명소리에 잠을깬 주민이 경찰에 신고하였고
경찰은 신고 받은 대로 시카고 근처의 게이시의 농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명망있는 인물인 게이시가 나와서 점잖게 둘러대자
경찰들은 곧 떠나고 만다.
미 무렵 15살 소년 로버트 피어스트가 실종되었다.
쾌활하고 착한 소년이었던 피어스트는 방학이 되자
아르바이트 거리를 얻기위해 부모에게 허락을 얻고
게이시를 찾아가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피어스트의 부모는 당장 경찰에 신고했고
드디어 경찰은 게이시의 뒷조사를 하기 시작했고
그가 10여년전 교도소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경찰은 즉시 영장을 밤부했으며 게이시의 집을 샅샅히 수색하기 시작된다.
그러자 수상한 물건들이 점점 나오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아주 극단적 내용의 포르노 잡지, 배설물이
묻어있는 지저분한 전동딜도, 소년들의 장신구나, 옷가지, 신발, 지갑 등이었다.
한편 다른팀이 조사하던 거실 벽장쪽에서는 놀랄만한 장소가 발견되었다.
후레시를 킨 수사관들은 엄청난 악취와 함게 썩어가는 시체가 가득한 지옥도를 발견하였다.
돼지 비계처럼 변한 썩은 살점들과, 바싹 마른 살이 붙어있는 뼈들을 발견하였으며
결과적으로 29구의 젊은 남자들과 소년들의 시체를 발굴 하게 되었다.
증거물이 낯낯히 발견되자 게이시는 즉각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는 6년이 넘는 기간동안 수많은 소년들을 윤간한 죄와 33명의 소년, 청년들을 살해한 죄로 기오되었다.
법원에서 게이시는 자신의 이중인격으로 고통받는다고
형을 경감시키기 위해 정신병으로 위장하였으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은채 1980년 3월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형이 집행되기까지 14년 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는 그동안 그림을 그리거나 나름대로의 사회활동을 하면서 감옥 생활을 하였다
자신을 주제로 된 서적 40여권 영화각본 2편 영화1편 노래 5곡 신문기사 5천건이 나왔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하던 미치광이 광대는 1994년 5월 10일 자정 치사주사를 맞고 처형되었다
그가 마지막 남긴말은 "Kiss My Ass" (내 똥꼬에 뽀뽀? 해줘) 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