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전기』9. 미완의 동양평화론 (1)

대모달2011.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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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애국지사들이 순국한 여순감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안중근(安重根)이 수감되었다가 6개월 뒤 처형되고, 뒷날 신채호(申采浩)와 이회영(李會榮)이 옥사한 여순감옥은 중국 요녕성 대련시 여순구구(旅順口區)에 소재한다. 여순감옥의 현재 정식명칭은 여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이다. 1902년 제정러시아가 최초로 건설했고, 1907년 일본의 점령군이 그것을 확장했다.



러시아는 19세기 중엽 연해주 지역을 점령하고 태평양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극동 영토는 인구가 적고 식량자급에 어려움이 있는 등 극동 유지와 방위가 다급해 가급적이면 이 지역에서 분쟁을 피한다는 것을 기본정책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국경을 길게 접하고 있는 청나라와 대립,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극동까지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영국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러시아는 1891년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시작했다.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고 극동 지역에서 세력을 강화하자 일본은 당혹스러웠다. 러시아의 세력이 뿌리내리기 전에 대륙, 특히 조선에 확고한 발판을 구축하려고 했던 까닭이다. 청일전쟁을 도발한 것도 조선에서 청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요동반도를 할양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만주 진출을 노리고 있었던 러시아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에 제정러시아는 3국간섭을 통해 일본이 요동 반도를 청국에 다시 반환하도록 하고, 1896년 치타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북만주를 횡단하는 동청철도 부설권을 얻었다. 1897년 11월 여순항에 러시아 해군 함정을 파견하고, 이듬해인 1898년 청나라 조정을 압박해 ‘여대조차조약’을 체결하고 여순·대련 지역을 강제로 조차했며, 하얼빈과 여순 간의 남부선 철도부설권도 획득했다.



1899년 러시아는 식민지 통치 지휘부로서 여순에 관동주(關東州) 총독부를 설치하고 총독 겸 태평양담당 해군장관 알렉세예프를 임명하였다. 관동주 총독 에프게니이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Evgenii Ivanovich Alekseevː1843~1918년)는 각지에 군대와 경찰, 비밀요원들을 풀어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1900년 의화단항쟁(義和團抗爭)이 발발하자 러시아군은 여순을 기지로 천진의 8개국 연합군에 참여해 의화단을 진압하는 한편, 수송로를 확보한다는 미명 아래 만주 동삼성을 점령했다. 이때 체포 구금한 많은 중국인들을 수용하기에는 기존의 감옥은 너무 협소했다. 관동총독부는 이에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건의하여 1902년 여순의 원보방(元宝房)에 감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903년 8월 바이칼 이동지역 문제에 전권을 갖는 극동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알렉세예프는 다시 극동총독에 임명되었는데, 대일강경파인 그의 부상은 일본을 자극했다.



일본은 러시아철도가 완성되기 전에 러시아와 일전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1904년 2월 8일 인천과 여순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공격해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여순감옥의 공사는 중단되었다. 그때까지 건설된 본관과 85간의 옥사는 전쟁 중 양측의 야전병원과 기마대 병영으로 사용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군은 다시 여순을 점령했다. 일본은 1907년 러시아가 건설하던 감옥을 확장해 2만 6천 평방미터 대지 위에 275개의 감방을 지었다. 약 2천명 이상을 수감할 수 있는 감옥 내에는 보통옥사 253칸, 지하감옥 4칸, 병사 18칸과 몸수색실, 최조 및 고문실, 교수형실과 15개의 작업장이 있었다. 감옥 바깥에는 수감자들이 강제노역을 하는 벽돌가마, 임목장(林木場), 과수원, 채소밭이 있었다. 감옥은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있어 많은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러시아인과 그리스인들이 수감되었으며 처형되기도 했다. 이렇게 확장한 여순감옥을 일본은 관동도독부감옥서(關東都督府監獄署)라고 했다가 1920년 관동청감옥(關東廳監獄), 1926년에는 관동청형무소(關東廳刑務所)로, 1934년에는 관동형무소, 1939년에는 여순형무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여순지역에 들어와 이 감옥을 폐쇄했으며, 1971년 7월 개수작업을 거쳐 전시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1988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은 여순감옥을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다. 1995년 구여순감옥(旅順日俄監獄) 전시관은 전국문물박물관 우수애국자의 교육기지로 선정되었다. 연간 50만 명이 이곳을 방문한다.



○ 여순감옥에서《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저술



안중근은 공판 개시 2개월 전인 1909년 12월 13일부터 옥중 자서전《안응칠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자신의 떳떳한 일생 행적을 밝히는 저술이었다. 자서전을 탈고한 것은 1910년 3월 15일이다. 3개월여 동안 혹심한 심문과 재판을 받은 틈틈이 쓴 것이다. 이 무렵의 여순은 영하 20도가 오르내리는 혹한의 날씨였다.



《안응칠역사》는 한문으로 쓰였다. 자서전은 “1879년 기묘년 7월 16일, 대한국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나서 성은 안(安)이요, 이름은 중근(重根, 성질이 가볍고 급한 편이기에 지은 이름), 자는 응칠(應七, 배와 가슴에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 지은 이름이라 했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안중근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출생과 성장 과정,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게 된 이유 등을 진솔하게 적었다. 그리고 자서전 말미에서는 빌렘 신부와 작별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도 밝혔다.



‘다음 날 오후 2시 쯤 홍 신부가 다시 나에게 와 말했다.


"나는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서 작별하러 왔다."


홍 신부와 나는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내 홍 신부는 헤어지기 위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인자하신 천주님께서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너를 거두어 주실 것이니 안심하여라."


그리고 손을 들어 나에게 강복을 해 주고 떠나니, 이 때가 1910년 경술년 2월 초하루 오후 4시 경이었다.


이상이 안중근의 32년간 역사의 줄거리다.’



완성된 원고는 안중근 순국 즉시 일본의 관리들에게 압수되어 유족에게조차 전달되지 않고 극비 속에 일제의 한국통치 자료로만 이용되었다. 여순감옥에서 이 원고를 본 일제 고위 관헌들은 그 내용에 크게 감동을 받고 서로 이것을 베껴 가졌다고 한다.



안중근의 순국 60년이 지난 1969년 최서면 한국학연구원장이 도쿄 고서점에서『안중근 자서전』일역본을 발견했다. 그 뒤 10년이 지난 1979년 재일교포 김정명 아오모리대학 명예교수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칠조청미(七條淸美 : 히치죠 기요미)」문서중《안중근 전기급 논설(安重根傳記及論說)》이란 표제를 붙인 책자에서《안응칠역사》의 등사본이 미완의《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등사본과 함께 합철 편책된 것을 발견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안응칠역사》와《동양평화론》원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일본의 기록보관소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겠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함구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 숭모회’는 1990년 3월 26일 안중근 순국 60주년에 맞춰《안응칠역사》국역본을 간행했다. 이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안중근 의사의 이토 총살 의거와 정치사상에 알게 되었다.《안응칠역사》는 “진실한 자기 심정을 표백해 놓은 글이라, 저절로 고상한 문학서가 되고 또 한말의 풍운속에서 활약한 자기 사실을 숨김없이 적어놓은 글이라 바로 그대로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안응칠역사》에는 안중근이 생존 동지들의 신변을 염려해 세심하게 배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함께 의병항쟁을 벌이고 이번 의거를 함게한 우덕순이나 단지동맹에 참여한 동지들에 대해 언급을 자제한 것도 ‘동지들의 신변보호’를 위해서였다. 이에 대해 윤병석 인하대학 명예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안중근 의사는《안응칠역사》서술에서 생존 동지들의 신변을 위하여 가능한 한 관련 인물들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거나 아예 생략한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하얼빈의거 동지인 우덕순에 대해서는 1981년 여름 국내 6진 지역 진공 의병항쟁 대목에서 언급을 피하였고, 1909년 2월 연추 카리에서 행한 단지동맹 부분에서는 그 때 동맹으로 성립한 동의단지회에 대하여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안중근은 옥중 자서전에서《동양평화론》을 쓰게 된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 후에 간수 쿠라하라씨의 특별 소개로 고등법원장 히라이시[平石]씨를 만나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사형 판결에 대해 불복하는 이유를 대강 설명한 다음에, 동양 대세의 흐름과 평화정책에 관한 의견을 말했다.


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그는 감격스러워 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대를 깊이 동정하지만 정부 기관이 하는 일을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대가 말한 의견을 정부에 상신해 보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고맙게 여겼다.


"그런 공정하고 바른 말이 내 귀에 우뢰처럼 들린다는 것은 일생에 두 번 있기도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당신 앞에서는 목석도 감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요청했다.


"허가할 수 있다면《동양평화론》이란 책을 한 권 저술하고 싶으니 사형 집행날짜를 한 달 정도만 연기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찌 한 달 뿐이겠습니까?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도록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돌아와 공소권을 포기했다. 다시 공소를 한다해도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일이었고, 또 고등법원장의 말이 진담이라면 굳이 더 생각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동양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 공소를 포기하고《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집필



안중근은 항소권을 포기하는 대신《동양평화론》을 쓰고자 했다. 변호사들이 의례적인 공소를 권유했다. 이에 안중근은 “내가 불공평한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도 공소권을 포기한 것은 복죄(服罪)했다고 생각지 마시고. 나는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싶지 않을 뿐이오. 상급법관 역시 일본인이니 그 결과가 뻔한 것 아니겠소?”라며 거절했다.

그 대신 자신이 오랫동안 구상해온《동양평화론》을 집필해 이토를 처단한 의거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또 동양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했다.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하면서 3월 25일로 예정된 사형집행일을 보름 정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하며 고등법원장의 약속까지 받았지만 일제는 이를 지키지 않았다. 그 대신 고등법원에 항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일이 3월 19일로 확정되었다.

안중근이 항소를 포기한 데는 어머니의 간절한 전언(傳言)도 크게 작용했다. 사형선고가 내린 날 안중근의 두 동생은 사후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어머니가 계신 진남포로 돌아왔다. 전후 사정을 보고드리자 어머니는 여순으로 가서 자신의 뜻을 전하라면서 다음과 같이 일렀다.



“중근은 큰 일을 했다. 만인을 죽인 원수를 갚고 정의를 세웠으니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큰 일을 하였으니 목숨을 아끼지 말라. 일본 사람이 너를 살려 줄 까닭이 없으니 비겁하게 항소 같은 것은 하지 말라. 깨끗이 죽음을 택한 것이 이 어미의 희망이다. 사형언도의 소식을 듣고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모여 너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네가 사랑하는 교우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살려달라고 구걸을 하면 양반집 체면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제는 평화스러운 천당에서 만나자.”



안중근의 옥중 저술활동은 전옥 구리하라[栗原貞古]가 3월 18일자로 통감부의 사카이 경시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안중근의《전기》는 이제 막 탈고하여 목하 청사 중인 바 완료 즉시 우송할 예정이지만 한편 《동양평화론》은 기고하여 현재 서론은 끝났으나 본론은 3, 4절로 나누어 쓰되, 각절은 생각날 때 집필하고 있다. 도저히 그 완성은 사기(死期)까지 어렵다고 생각될 뿐 아니라, 각절을 조리 정연한 논문이라고 하기보다 잡감(雜感)을 서술하려고 하기 때문에 수미 일관한 논문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본인은 철저히《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원하고 '사후에 빛을 볼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 전 논문의 서술을 이유로 사형의 집행을 15일 정도 연기될 수 있도록 탄원하였으나 허가되지 않을 것 같아 결국《동양평화론》의 완성은 바라기 어려울 것 같다.”



안중근은 법적으로 보장된 공소권까지 포기하면서《동양평화론》을 쓰고자 했다. 고등법원장도 이를 수용했다. 그렇지만 일제(日帝)는 이 약속마저 어겼다. 그가 남긴 글의 내용이 두려웠던 것이다. 안중근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니체는 “피로 쓴 글만이 읽을 가치가 있다”는 말을 남겼지만, 안중근은 피보다 더 중한 시간을 불사르면서 옥중에서《안응칠역사》에 이어《동양평화론》의 집필에 들어갔다.



3월 15일에《안응칠역사》를 탈고한 것으로 보아 그 이튿날부터 집필을 시작했거나《안응칠역사》를 쓰면서《동양평화론》을 함께 집필했던 것 같다. 그러나 3월 18일에 서문을 완성한 것으로 볼 때, 후자 쪽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때부터 휘호(揮毫)도 쓰기 시작했다. 안중근은 “그래서 (공소를 포기하는 대신 집필시간을 충분히 주겠다는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의 약속을 믿고)《동양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때 법원과 감옥소의 일반 관리들이 내 손으로 쓴 필적을 기념하고자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사 넣고 청구하므로 나는 부득이 자신의 필법이 능하지 못하고 또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도 생각지 못하고서 매일 몇 시간씩 글씨를 썼다”라고《안응칠역사》에서 기술했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