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전기』9. 미완의 동양평화론 (2)

대모달2011.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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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맺지 못한 논설《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



안중근은《동양평화론》의 체제를 서문, 전감(前鑑), 현상, 복선(伏線), 문답 등 5단계로 잡았다. 이중 서문과 전감만 완성되고 뒷부분은 형이 집행됨으로써 완성되지 못하고 말았다. 인류문화사에는 수많은 명저가 유배지나 옥중에서 집필되었다. 그렇지만 사형집행을 며칠 앞두고 쓴 글이나 책은 많지 않다. 안중근은 보통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극한 상황, 즉 형 집행일이 정해지고 영하 20도가 오르내리는 혹한의 감방에서《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끝을 맺지 못한 채 생을 접어야 했다. 문화사에 남을 ‘옥중명저’가 완성되지 못한 것이다.



‘대저 합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분명히 정해지고 있는 이치이다’라고 시작되는《동양평화론》과 고등법원장과의 면담록에 나타난 동양평화사상의 골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은 여순(旅順)을 중국에 돌려주고 중립화하여 그곳에 한·중·일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을 만들고 삼국이 그곳에 대표를 파견하여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도록 한다. 재정확보를 위해 회비를 모금하면 수억명의 인민이 가입할 것이다. 각국 각 지역에 동양평화회의의 지부를 두도록 한다.



둘째, 원만한 금융을 위하여 공동의 은행을 설립하고 각국이 함께 쓰는 공용화폐를 발행하도록 한다. 각 지역에 은행의 지부를 설치한다.



셋째, 삼국의 청년들로 공동의 군단을 만들고 그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어학을 배우게 하여 우방 또는 형제의 관념을 높인다.



넷째, 한·중 두 나라는 일본의 지도 아래 상공업의 발전을 도모한다.



다섯째, 한·중·일 세 나라의 황제가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여 협력을 맹세하고 왕관을 받는다. 세계 민중의 신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는《동양평화론》을 현재와 미래의 ‘동양평화론’으로 대입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여순의 중립화론 : 한반도의 중립적 조정국가론

삼국 평화 회의론 : 동북아 평화회의 6자회담의 확대론

3국 공동군단 창설론 : 동북아 집단안보체제론·동북아공동군축·비핵지대화론

개발은행 설립 : 동북아 개발은행 설립

공동화폐론 : 아시아관 유로머니·ACU(아시아통화단위)의 창설론·동아시아 채권시장 창설론

공동 경제개발론 : 동북아 시장통합론·동북아 개발은행 설립론·동북아 테크노마트 설립론·동북아 공동 기술개발 훈련센터 설립론

로마 교황청 인증론 : UN의 틀 안에서 상호존중과 상호신뢰론’



안중근은 또 만국공법(萬國公法)을 신뢰하면서도 일제(日帝)의 행위 즉 을사늑약(乙巳勒約)과 정미7늑약(丁未七勒約)을 경험하면서부터 만국공법과 엄정중립을 제국주의의 침략논리로 인식했다. 자신은 의병항쟁 과정에서 일본군 포로들을 만국공법 정신에서 풀어주었는데, 일제는 대한의용군 참모중장(大韓義勇軍參謀中將) 신분으로 적장(伊藤博文)을 사살한 자신을 ‘암살자’ 정도로만 처우하는 부당성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자 했다. 이어서 만국공법과 중립주의가 침략논리로 둔갑하는 그 허구성을 논박하려 했다.



안중근의 이 논문이 완성되었다면 일제의 한국 침략과 아시아 정복 계획의 실상을 일목요연하게 밝혔을 것이고, 이토 히로부미의 15개조 죄상을 조목조목 논거해 그 처단의 정당성을 입증했을 것이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를 파괴한 이토를 살해하는 것은 동양평화를 진작하는 길이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형장에서도 “동양평화를 삼창하고 죽음을 맞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안중근은《동양평화론》에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속성에 대해 매우 날카로운 ‘예언자적’ 진단까지 했다.



‘종래 외국에서 써오던 수법을 흉내 내고 있는 것으로 약한 나라를 병탄하는 수법이다. 이런 생각으로는 패권을 잡지 못한다. 아직 다른 강한 나라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일본은 일등국으로서 세계열강과 나란히 하고 있지만 일본의 성질이 급해서 빨리 망하는 결함이 있다. 일본을 위해서는 애석한 일이다.’



안중근의《동양평화론》은 아무런 자료와 준비 기간도 없이, 더구나 사형집행을 앞둔 매우 절박한 상황에서 쓰였다. 다만 일본 황실을 신뢰하고 있었고, 동양평화를 이끌 주체를 일본 제국으로 설정하는 등 일정한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따른다.



안중근의 일제(日帝)에 대한 인식에 한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오영섭 연세대학 NK연구교수는 이에 대해 “안중근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을 비판하는 초점을 이토 히로부미 개인에게 맞추고 정작 침략정책의 최고 책임자인 오무로 무츠히토[大室睦仁] 일본 황제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일본 황제를 옹호하고 이토만을 비난하는 논리는 안중근의 자서전과 공술에서 누차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상논리는 단순히 공판투쟁 과정에서 자신의 일신을 구하기 위한 임시방편적 대응책이 아니라 안중근이 평소 지니고 있던 지론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안중근의 독립사상에 나타난 한계점이라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의《동양평화론》은 동아시아 현제와 미래의 ‘평화구도’와 공동체의 모델로 인식되는 대단히 선구적인 제안으로 평가받는다. 김영호 교수는 “그는 열강이 중국을 침략하는 것을 보고 서양 제국주의에 대한 한·중·일 삼국연대를 주장했으나 아시아주의가 일본의 침략논리에 이용당하자 일본의 침략논리를 억제하는 틀로 아시아주의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전후 유럽에서 밖으로는 옛 소련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면서 안으로는 독립의 팽창을 억제하려고 서유럽연합을 추진했던 것과 비교된다. 안중근은 당시 국제적 분쟁지 여순을 중립화해 한·중·일 공동참여에 의한 동양평화회의 본부를 그곳에 둘 것을 제의했다. 분쟁의 축을 협력의 축으로 바꾸는 역전의 모델로 현대 동아시아 각종 분쟁지의 해결방향을 제시해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동양평화론》의 서문과 전감(前鑑)을 한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동양평화론》서문



‘대저 합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분명히 정해져 있는 이치이다. 지금 세계는 동서로 나뉘어져 있고 인종도 각각 달라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의 이기(利器) 연구 같은 것을 보더라도 농업이나 상업보다 대단하며 새 발명인 전기포(電氣砲), 비행선, 침수정(浸水艇)은 모두 사람을 상하게 하고 물(物)을 해치는 기계이다.

청년들을 훈련하여 전쟁터로 몰아넣어 수많은 귀중한 생명들을 희생(犧牲)처럼 버리고 피가 냇물을 이루고 고기가 질펀히 널려짐이 날마다 그치질 않는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상정이거늘 밝은 세계에 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면 뼈가 시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 근본을 따져보면 예로부터 동양민족은 다만 문학에만 힘쓰고 제 나라만 조심해 지켰을 뿐이지 도무지 구주의 한치 땅이라도 침입해 뺐지 않았다. 이는 5대주 위의 사람이나 짐승 초목까지 다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구주의 여러 나라들은 가까이 수백 년 이래로 도덕을 까맣게 잊고 날로 무력을 일삼으며 경쟁하는 마음을 양성해서 조금도 기탄하는 바가 없다.

그중 러시아가 더욱 심하다. 그 폭행과 잔해함이 서구나 동아에 어느 곳이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악이 차고 죄가 넘쳐 신과 사람이 다같이 성낸 까닭에 하늘이 한 매듭을 내려 동해 가운데 조그만 섬나라인 일본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강대국인 러시아를 만주대륙에서 한 주먹으로 때려눕히게 되었다. 누가 능히 이런 일을 헤아렸겠는가. 이것은 하늘에 순하고 땅의 배려를 얻은 것이며 사람의 정에 응하는 이치다.

당시 만일 한.청 양국 인민이 상하가 일치해서 전날의 원수를 갚고자 해서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를 도왔다면 큰 승리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어늘 어찌 예상을 했겠는가. 그러나 한.청 양국 인민은 이와 같은 행동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일본군대를 환영하고 운수, 치도(治道), 정탐 등 일에 수고로움을 잊고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두 가지 큰 사유가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할 때, 일본천황의 선전포고하는 글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공고히 한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대의가 청천백일의 빛 보다 더 밝았기 때문에 한.청 인사는 지혜로운 이나 어리석은 이를 막론하고 일치동심 해서 복종했음이 그 하나이고, 일본과 러시아의 다툼이 황백인종의 경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지난날의 원수진 심정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고 도리어 하나의 큰 인종 사랑하는 무리(一大愛種黨)를 이루었으니 이도 또한 인정의 순서라 가히 합리적인 이유의 다른 하나이다.

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 년래 행악하던 백인종의 선봉을 한 북소리로 크게 부수었다. 가히 천고의 희한한 일이며 만방이 기념할 자취이다. 당시 한.청 양국의 뜻 있는 이들이 기약치 않고 함께 기뻐해 마지않은 것은 일본의 정략이나 일해쳐 나감이 동서양 천지가 개벽한 뒤로 가장 괴걸한 대사업이며 시원스런 일로 스스로 헤아렸기 때문이었다.

슬프다. 천천만만 의외로 승리하고 개선한 후로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하며 어질고 약한 같은 인종인 한국을 억압하여 조약을 맺고, 만주 장춘 이남을 조차를 빙자하여 점거하였다. 세계 일반인의 머릿속에 의심이 홀연히 일어나서 일본의 위대한 성명과 정대한 공훈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만행을 일삼는 러시아 보다 더 심하게 보게 되었다.

슬프다. 용호(龍虎)의 위세로서 어찌 뱀이나 고양이 같은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와 같이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다시 찾은들 어떻게 얻을 것인가. 아깝고 통탄할 일이로다. 동양평화 한국독립의 단어에 이르러서는 이미 천하만국의 사람들 이목에 드러나 금석처럼 믿게 되었고 한.청 양국사람들의 간뇌(肝腦)에 도장 찍혀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자 사상은 비록 천신의 능력으로서도 마침내 소멸시키기 어려울 것이거늘 하물며 한두 사람의 지모로 어찌 능히 말살할 수 있겠는가.

지금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 화난을 동양인종이 일치단결해서 극력 방어해야 함이 제일의 상책임은 비록 어린아이일지라도 익히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일본은 이러한 순연한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인 이웃나라를 깎고 우의를 끊어 스스로 방휼(蚌鷸)의 형세를 만들어 어부(漁夫)를 기다리는 듯 하는가. 한.청 양국인의 소망이 크게 절단되어 버렸다.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진다면 부득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 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의론이 한.청 양국인의 폐부에서 용솟음쳐서 상하 일체가 되어 스스로 백인의 앞잡이가 될 것이 명약관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 동양의 몇 억 황인종 중의 허다한 유지와 강개 남아가 어찌 수수방관 하고 앉아서 동양전체의 까맣게 타죽는 참상을 기다릴 것이며 또한 그것이 옳겠는가. 그래서 동양평화를 위한 의전을 하얼빈에서 개전하고 담판하는 자리를 여순구(旅順口)에 정했으며 이어 동양평화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바이다.


제공은 눈으로 깊이 살필지어다. 1910년 경술 2월 대한제국인 안중근 여순옥중에서 쓰다.’



《동양평화론》전감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동서남북의 어느 주(州)를 막론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대세의 번복이고 알 수 없는 것은 인심의 변천이다. 지난날(甲午年ㆍ1894년) 일.청 전역을 보더라도 그 때 조선국의 서절배(鼠竊輩) 동학당의 소요로 인연해서 청·일 양국이 동병해서 건너왔고 무단히 개전해서 서로 충돌하였다. 청국이 패해 일본이 이기고 승승장구, 요동의 반을 점령하였다.


요험인 여순을 함락시키고 황해함대를 격파한 후 마관(馬關)에서 담판을 열어 조약을 체결하여 대만을 활양받고 2억 원을 배상금으로 받기로 하였다. 이는 일본의 유신후 하나의 커다란 기념사이다.

청국은 물자가 풍부하고 땅이 넓어 일본에 비하면 수십 배는 족히 되는데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이 패했는가. 예로부터 청국인은 스스로를 중화대국이라 일컫고 다른 나라를 오랑캐라 일러 교만이 극심하였으며 더구나 권신척족이 국권을 천농(擅弄)하고 신민과 원수를 삼고 상하가 불화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욕을 당한 것이다.


일본은 유신 이래로 민족이 화목하지 못하고 다툼이 끊임이 없었으나 그 외교적 정쟁이 생겨난 후로는 집안싸움이 하루아침에 화해가 되어 연합을 혼성하고 한 덩어리 애국당을 이루었으므로 이와 같이 개가를 올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친절한 외인이 다투는 형제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때의 러시아의 행동을 기억할지어다. 당일에 동양함대가 조직되고 프랑스 독일 양국이 연합하여 요코하마 해상에서 크게 항의를 제출하니 요동반도가 청국에 환부되고 배상금이 감액되었다. 그 외면적인 행동을 보면 가히 천하의 공법이고 정의리라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호랑(虎狼)의 심술보다 더 사납다.


불과 수년 동안에 민첩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여순구를 조차 한 후에 군항을 확장하고 철도를 부설하였다. 이런 일의 근본을 생각해 보면 러시아 사람이 수십 년 이래로 봉천이남 대련, 여순, 우장(牛莊) 등지에 부동항 한 곳을 억지로라도 가지고 싶은 욕심이 불같고 밀물 같았다.

그러나 감히 하수를 못한 것은 청국이 한번 영.불 양국의 천진 침략을 받은 이후로 관동의 각진(各鎭)에 신식 병마를 많이 설비했기 때문에 감히 생심을 못하고 단지 끊임없이 침만 흘리면서 오랫동안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셈이 들어맞은 것이다.

이 때를 당해서 일본인 중에도 식견이 있고 뜻이 있는 자는 누구라도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이유를 따져보면 이 모두가 일본의 과실이다. 이것이 이른바 구멍이 있으면 바람이 생기는 법이요, 자기가 치니까 남도 친다는 격이다. 만일 일본이 먼저 청국을 침범하지 않았다면 러시아가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행동했겠는가. 가위 제 도끼에 제 발 찍힌 격이다.

이로부터 중국 전체의 모든 사회 언론이 들끓었으므로 무술개변(戊戌改變)이 자연히 양성(釀成)되고 의화단(義和團)이 들고 일어났으며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는 화난이 크게 치열해졌다. 그래서 8개국 연합군이 발해 해상에 운집하여 천진이 함락되고 북경이 침입을 받았다. 청국 황제가 서안부(西安府)로 파천하는가 하면 군민 할 것 없이 상해를 입은 자가 수백만 명에 이르고 금은재화의 손해는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참화는 세계 역사상 드문 일이고 동양의 일대 수치일 뿐만 아니라 장래 황인종과 백인종 사이의 분열경쟁이 그치지 않을 징조를 나타낸 것이다. 어찌 경계하고 탄식하지 않을 것인가.

이 때 러시아 군대 11만이 철도 보호를 청탁하고 만주 경계상에 주둔해 있으면서 종내 철수하지 않으므로 러시아 주재 일본공사 율야(栗野)씨가 혀를 닳고 입술이 부르트도록 폐단을 주장하였지만 러시아 정부는 들은 체도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군사를 동원하였다. 슬프다. 일.러 양국 간의 대참화를 종내 모면하지 못하였도다. 그 근본을 논하면 필경 어디로 몰아갈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동양의 일대전철(一大前轍)이다.

당시 일·러 양국이 각각 만주에 출병할 때 러시아는 단지 시베리아 철도로 80만 군비를 실어내었으나 일본은 바다를 건너고 남의 나라를 지나 4, 5 군단과 치중(輜重) 군량을 수륙병진으로 요하 일대에 수송했으니 비록 정산(定算)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어찌 위험하지 않았겠는가. 결코 만전지책이 아니요 참으로 낭전(浪戰)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 육군이 잡은 길을 보면 한국의 각 해구(海口)와 성경(盛京) 금주만(金州灣) 등지로서 하륙할 때는 4, 5천리를 지나온 터이니 수륙의 괴로움을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가 있다.

이 때 일본군이 다행히 연전연승은 했지만 함경도를 아직 벗어나지 못했고 여순구를 격파하지 못했으며 봉천에서 채 이기지 못했을 즈음이다. 만약 한국의 관민이 일치 동성으로 을미년(1895년)에 일본인이 한국의 명성황후 민씨를 무고히 시해한 원수를 이 때 갚아야 한다고 사방에 격문을 띄우고 일어나고 함경, 평안 양도 사이에 있는 러시아 군대가 생각지 못한 곳을 찌르고 나와 전후좌우로 충돌하며, 청국도 또한 상하가 협동해서 지난날 의화단 때처럼 들고일어나 갑오년(日淸戰役)의 묵은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서 북청 일대의 인민이 폭동을 일으키고 허실을 살펴 방비 없는 곳을 공격하며 개평(盖平) 요양 방면으로 유격기습을 벌여 나아가 싸우고 물러가 지킨다면 일본군은 남북이 분열되고 복배에 적을 맞아 사면으로 포위 당한 비감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일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면 여순 봉천 등지의 러시아 장졸들이 예기가 등등하고 기세가 배가해서 앞뒤로 가로막고 좌충우돌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군의 세력이 머리와 꼬리가 맞아 떨어지지 못하고 치중과 군량미를 이어댈 방도가 아득해졌을 것이다. 그러하면 산현유붕(山縣有朋) 내목희전(乃木希典)씨의 경략이 필히 무산되었을 것이며 또한 마땅히 이 때 청국정부와 주권자의 야심이 폭발해서 묵은 원한을 갚게 되었을 것이고 때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른바 만국공법이라느니 엄정중립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근래 외교가의 교활한 무술(誣術)이니 족히 말할 바가 못된다. 병불염사(兵不厭詐) 출기불의(出其不意) 병가묘산(兵家妙算) 운운하면서 관민이 일체가 되어 명분없는 군사를 출동시키고 일본을 배척하는 상대가 극렬 참독해 졌다면 동양 전체가 휩쓸 백년풍운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이와 같은 지경이 되었다면 구주 열강이 다행히 좋은 기회를 얻었다 해서 각기 앞을 다투어 군사를 출동시켰을 것이다.

그 때 영국은 인도 홍콩 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수륙군대를 병진시켜 위해위 방면에 집결시켜 놓고는 필시 강경수단으로 청국정부와 교섭하고 캐어물을 것이다. 또 프랑스는 사이공 가달마도(加達馬島)에 있는 육군과 군함을 일시에 지휘해서 아모이 등지로 모여들게 했을 것이고, 미국, 독일, 벨기에,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희랍 등의 동양 순양함대는 발해 해상에서 연합하여 합동조약을 예비하고 이익을 균점할 것을 희망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부득불 밤새워 전국의 군사비와 국가 재정을 통틀어 짠 뒤에 만주 한국 등지로 곧바로 수송했을 것이고 청국은 격문을 사방으로 띄우고 만주 산동 하남(河南) 형량(荊襄) 등지의 군대와 의용병을 급급 소집해서 용전호투(龍戰虎鬪)하는 형세로 일대 풍운을 자아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형세가 벌어졌다면 동양의 참상은 말하지 않아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때 한.청 양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약장을 준수하고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아 일본으로 하여금 위대한 공훈을 만주땅 위에서 세우게 했다. 이로 보면 한.청 양국 인사의 개명 정도와 동양평화를 희망하는 정신을 족히 알수가 있다. 그러하니 동양의 일반 유지들의 일대 사량(思量)은 가히 뒷날의 경계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때 일로전역이 끝날 무렵 강화조약 성립을 전후해서 한.청 양국 유지 인사의 허다한 소망이 다 절단되어 버렸다.

당시 일·러 양국의 전세를 논한다면 한번 개전한 이후로 크고 작은 교전이 수백 차였으나 러시아 군대는 연전연패해서 상심낙담이 되어 멀리서 모습만 바라보고서 달아났다. 일본군대는 백전백승하고 승승장구하여 동으로는 블라디보스톡 가까이까지 이르고 북으로는 하얼빈에 육박하였다. 사세가 여기까지 이른 바에야 기회를 놓쳐서는 안될 일이었다. 이왕 벌인 춤이니 비록 전 국력을 기울여서라도 한두 달 동안 사력을 다해 진취하면 동으로 블라디보스톡을 뽑고 북으로 하얼빈을 격파할 수 있었음은 명약관화한 형세였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러이사의 백년대계는 하루아침에 필시 토붕와해(土崩瓦解)의 형세가 되었을 것이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 하지를 않고 도리어 은밀히 구구하게 먼저 강화를 청해(화를) 뿌리 채 뽑아버리는 방도를 달성하지 않았는지 가위 애석한 일이다.


황차 일.러 담판을 보더라도 이왕이면 강화 담판할 곳을 의정(議定)하면서 천하에 어떻게 워싱턴이 옳단 말인가. 당일 형세로 말한다면 미국이 비록 중립으로 편벽된 마음이 없다고는 하지만 짐승들이 다투어도 오히려 주객의 형세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인종의 다툼에 있어서랴.

일본은 전승국이고 러시아는 패전국인데 일본이 어찌 제 본뜻대로 정하지 못했는가. 동양에는 족히 합당할만한 곳이 없어서 그랬단 말인가.


소촌(小村) 외상이 구차스레 수만리 밖 워싱턴까지 가서 강화조약을 체결할 때에 화태도 반부를 벌칙조항에 넣은 일은 혹 그럴 수도 있어 이상하지 않지만 한국을 그 가운데 첨가해 넣어 우월권을 갖겠다고 이름한 것은 근거도 없는 일이고 합당함을 잃은 처사이다. 지난날 마관조약 때는 본시 한국은 청국의 속방이므로 그 조약 중에 간섭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지만 한.러 양국간에는 처음부터 관계가 없는 터인데 무슨 이유로 그 조약 가운데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일본이 한국에 대해서 이미 큰 욕심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 자기 수단으로 자유로이 행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구라파 백인종과의 조약 중에 첨입(添入)해서 영세(永世)의 문제로 만들었단 말인가. 도시 방책이 없는 처사이다. 또한 미국대통령이 이왕 중재하는 주인으로 되었는지라 곧 한국이 구미 사이에 끼어있는 것처럼 되었으니 중재주(仲裁主)가 필시 크게 놀라서 조금은 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같은 인종을 사랑하는 의리로서는 만에 하나라도 승복할 수 없는 이치이다.

또한 (미국 대통령이) 노련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소촌 외상 농락하여 약간의 해도 조각 땅과 파선 철도 등 잔물을 배상으로 나열하고서 거액의 벌금은 전폐시켜 버렸었다. 만일 이때 일본이 패하고 러시아가 승리해서 담판하는 자리를 워싱턴에서 개최했다면 일본에 대한 배상요구가 어찌 이처럼 약소했겠는가. 그러하니 세상일의 공평되지 않음을 이를 미루어 가히 알 수 있을 뿐이고 다른 이유는 없다.

지난날 러시아가 동으로 침략하고 서쪽으로 정벌을 감행해 행위가 심히 가중하므로 구미열강이 각자 엄정중립을 지켜 서로 구조하지 않았지만 이미 이처럼 황인종에게 패전을 당한 뒤이고 사태가 결판이 난 마당에서야 어찌 같은 인종으로서 우의가 없었겠는가. 이것은 인정세태의 자연스런 형세이다.


슬프다. 그러므로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 이웃나라를 헤치는 자는 마침내 독부(獨夫)의 판단을 기필코 면하지 못할 것이다.’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의 구체적 실천방안 제시



안중근은 히라이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과 나눈 대화에서《동양평화론》의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했다.



“새로운 정책은 여순을 개방하여 일본, 청국 그리고 한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의 대표를 파견하여 평화회의를 조직한 뒤 이를 공표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야심이 없다는 것을 보이는 일이다. 여순은 일단 청국에 돌려주고 그것을 평화의 근거지로 삼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재정확보에 대해 말하면 여순에 동양평화 회의를 조직하여 회원을 모집하고 회원 1명당 회비로 1원을 모금하는 것이다. 일본, 청국 그리고 인민 수억이 이에 가입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은행을 설립하고 각국이 통용하는 화폐를 발행하면 신용이 생기므로 금융은 자연히 원만해질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곳에 평화회의 지부를 두고 은행의 지점도 병설하면 일본의 금융은 원만해지고 재정은 완전해질 것이다. 여순의 유지를 위해서 일본은 군함 5~6척만 계류해두면 된다. 이로써 여순을 돌려주기는 했지만 일본을 지키는데는 걱정이 없다는 것을 다른 나라에 보여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상의 방법으로 동양의 평화는 지켜지나 일본을 노리는 열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청국 그리고 한국의 3국에서 각각 대표를 파견하여 다루게 한다. 세 나라의 청년들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는 2개국 이상의 어학을 배우게 하여 우방 또는 형제의 관념이 높아지도록 지도한다….

금일의 세계 열강이 아무리 힘을 써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있다. 서구에서는 나폴레옹 시대까지 로마교황으로부터 관을 받아씀으로써 왕위에 올랐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이 제도를 거부한 뒤로는 이 같은 의식을 치르지 않게 되었다. 일본이 앞서 말한 것은 패권을 얻은 뒤 일, 청, 한 세 나라의 황제가 로마교황을 만나 서로 맹세하고 관을 쓴다면 세계는 이 소식에 놀랄 것이다. 오늘날 존재하는 종교 가운데 3분의 2는 천주교이다. 로마 교황을 통하여 세계 3분의 2의 민중으로부터 신용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대단한 힘이 된다. 만일 이에 반대하면 여하히 일본이 강한 나라라고 해도 어쩔 수가 없게 된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국, 일본, 청국 3국연합 평화회의를 개설하고 은행을 설립해 3국 공동화폐를 발행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오늘날 EU와 같은 지역경제 공동체를 제안한 것이다. 놀랄 만한 제안이고 선각적인 혜안이다.



안중근의 사상형성이나《동양평화론》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대한매일신보》등 신문에 실린 논설이나 기사에서 영향을 받았고, 한역《태서신사》와《만국사》·《만국공법》등의 저술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천주교 사제들을 비롯해, 노령으로 떠나기 전에 여러 차례 배일연설을 함께하는 등 교류가 있었던 안창호, 안중근이 ‘대표적인 동양평화주의자’로 지목한 이상설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의《동양평화론》은 어디까지나 안중근의 독창적인 사상의 신물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설립했던 최석우 신부는 안중근의 동양평화사상이 형성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동양평화론》을 구상한 안중근은 기본적으로 당시 발행되던 신문이나 서책을 통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울러 그와 접촉이 많았던 인물들, 예컨대 천주교 사제들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안창호나 이상설 같은 우국지사들도 안중근의 국권회복사상과 동양평화론에 기여하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안창호는 안중근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이등박문의 포살과 동양평화론의 형성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이 안중근의《동양평화론》의 위치나 의의, 독창성을 감소시키는 것은 물론 아니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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