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을 추종하는 하나회는 12.12 군사반란으로 상관을 몰아내고 실질적인 최고 실력자가 됩니다. 전두환등 5인이 인사위원회를 구성해서 인사권을 행사해서 수십명이 대거 승진했죠. 이 때 특히 주목해야 할 인물이 특전사령관이 된 정호용, 수경사령관이 된 노태우죠. 심지어 전두환의 상관인 계엄사령관 이희성 조차 전두환이 임명할 정도로 전두환은 위세를 떨쳤습니다.
12.12 군사반란은 역사의 물꼬를 돌려놓은 중대한 사건입니다. 12.12 군사반란으로 등장한 신군부는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민주정부가 설립된다면 신군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전두환이 단번에 정권을 장악할 수는 없었습니다. 미국이 버티고 있으니까요. 미국이 인권이나 민주보다, 독재를 택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대놓고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하는 꼴을 지켜보지는 않았거든요. 실제로 미국도 상당히 전두환을 견제를 많이 했습니다.
전두환은 천천히 하나하나씩 실권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합니다. 1980년 2월 초 보안사에 정보처를 부활시킵니다. 정보처는 박정희 정권 시절 폐지된 부서인데, 국내 정치에 관여할 수가 있었죠. 이어서 보안사는 K-공작계획을 실행합니다. 언론에 현 상황을 혼란 상황으로 보이도록 만든 다음 전두환을 최고의 인물로 부각하도록 만들자는 것이었죠. 또 언론사 중진을 포섭해서 언론을 군부의 편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4월 14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합니다.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취임은 미국과 한국의 정치권에 충격을 줬습니다. 전두환은 취임사에서 시국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자에게는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미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에는 창조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새로운 군사정부의 등장을 암시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는 도중 5월 초부터 서울대 학생회가 군부 퇴진을 위해서 전면적인 시위에 나서자고 결의를 합니다. 학생들은 대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벌였죠. 학생 시위에 자극 받은 정치권도 지지부진하던 민주화 일정을 앞당긴다고 발표했습니다. 오랬동안 국회가 열리지 안 않는데 5월 20일 여야가 국회를 소집하고 계엄령 해제안을 접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신현확 총리도 5월 15일 담화를 통해 다음해 총선과 대선을 치뤄 정권 이양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국회와 정부가 약속한 민주화 일정은 5월 17일 부로 지켜지지 않게 됩니다. 전두환 사령관이 판을 뒤집어 엎었기 때문이죠. 전두환은 학생 시위에 대해서는 북한의 배후 조종을 받은 것이라고, 정치인에 대해서는 시국에 대한 혼란을 일으킨 주범이라고, 대한민국에 북한이 남침할 것이라고 군인들이 나서서 정치를 주도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죠. 정보기관과 언론을 장악한 전두환으로서는 충분히 실행 가능한 일이었습니다.(오해의 소지가 있어 덧붙이자면, 당시의 북한남침설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평가됐으며,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정확히 꿰뚫어 봤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2&aid=0002064886)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보안사령부는 '비상계엄 확대','국회 해산','비상기구 설치'를 통해 정국을 주도해 나가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전군은 이 계획을 지지하는 메세지를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냈습니다. 중동 방문을 마치고 5월 16일 밤 돌아온 최규하 대통령은 다음날 영문도 모르고 신군부의 계획에 싸인을 하게 되죠.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신군부는 계엄포고령 제10호를 통해 정치활동금지, 시위금지, 언론검열강화, 휴교령 등의 조치를 내립니다. 확대된 계엄령과 함께 군병력이 국회,정부기관,대학가를 폐쇄하게 되었습니다. 광주, 청주, 대전, 전주, 서울 등 전국 주요 도시에는 공수부대가 내려가 시위진압 준비를 했죠.
다음날 전남대 학생들이 대학에 출입하는 과정에서 공수부대와 시비가 붙었고, 학생들이 신군부 규탄 데모를 시내에서 열면서 5.18 민주화운동이 발발하게 됩니다. 신군부는 공수부대에게 전날 내린 포고령을 어기고 시위를 한 사람 전원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공수부대원들은 신군부의 지시에 따라 시위대를 닥치는 대로 체포하기 위해 시위대원의 머리를 때리고 대검으로 찌르는 강경진압을 전개합니다. 그 다음부터 광주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아실거라 믿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왜 일어났는가?
전두환을 추종하는 하나회는 12.12 군사반란으로 상관을 몰아내고 실질적인 최고 실력자가 됩니다. 전두환등 5인이 인사위원회를 구성해서 인사권을 행사해서 수십명이 대거 승진했죠. 이 때 특히 주목해야 할 인물이 특전사령관이 된 정호용, 수경사령관이 된 노태우죠. 심지어 전두환의 상관인 계엄사령관 이희성 조차 전두환이 임명할 정도로 전두환은 위세를 떨쳤습니다.
12.12 군사반란은 역사의 물꼬를 돌려놓은 중대한 사건입니다. 12.12 군사반란으로 등장한 신군부는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민주정부가 설립된다면 신군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전두환이 단번에 정권을 장악할 수는 없었습니다. 미국이 버티고 있으니까요. 미국이 인권이나 민주보다, 독재를 택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대놓고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하는 꼴을 지켜보지는 않았거든요. 실제로 미국도 상당히 전두환을 견제를 많이 했습니다.
전두환은 천천히 하나하나씩 실권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합니다. 1980년 2월 초 보안사에 정보처를 부활시킵니다. 정보처는 박정희 정권 시절 폐지된 부서인데, 국내 정치에 관여할 수가 있었죠. 이어서 보안사는 K-공작계획을 실행합니다. 언론에 현 상황을 혼란 상황으로 보이도록 만든 다음 전두환을 최고의 인물로 부각하도록 만들자는 것이었죠. 또 언론사 중진을 포섭해서 언론을 군부의 편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4월 14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합니다.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취임은 미국과 한국의 정치권에 충격을 줬습니다. 전두환은 취임사에서 시국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자에게는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미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에는 창조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새로운 군사정부의 등장을 암시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는 도중 5월 초부터 서울대 학생회가 군부 퇴진을 위해서 전면적인 시위에 나서자고 결의를 합니다. 학생들은 대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벌였죠. 학생 시위에 자극 받은 정치권도 지지부진하던 민주화 일정을 앞당긴다고 발표했습니다. 오랬동안 국회가 열리지 안 않는데 5월 20일 여야가 국회를 소집하고 계엄령 해제안을 접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신현확 총리도 5월 15일 담화를 통해 다음해 총선과 대선을 치뤄 정권 이양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국회와 정부가 약속한 민주화 일정은 5월 17일 부로 지켜지지 않게 됩니다. 전두환 사령관이 판을 뒤집어 엎었기 때문이죠. 전두환은 학생 시위에 대해서는 북한의 배후 조종을 받은 것이라고, 정치인에 대해서는 시국에 대한 혼란을 일으킨 주범이라고, 대한민국에 북한이 남침할 것이라고 군인들이 나서서 정치를 주도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죠. 정보기관과 언론을 장악한 전두환으로서는 충분히 실행 가능한 일이었습니다.(오해의 소지가 있어 덧붙이자면, 당시의 북한남침설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평가됐으며,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정확히 꿰뚫어 봤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2&aid=0002064886)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보안사령부는 '비상계엄 확대','국회 해산','비상기구 설치'를 통해 정국을 주도해 나가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전군은 이 계획을 지지하는 메세지를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냈습니다. 중동 방문을 마치고 5월 16일 밤 돌아온 최규하 대통령은 다음날 영문도 모르고 신군부의 계획에 싸인을 하게 되죠.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신군부는 계엄포고령 제10호를 통해 정치활동금지, 시위금지, 언론검열강화, 휴교령 등의 조치를 내립니다. 확대된 계엄령과 함께 군병력이 국회,정부기관,대학가를 폐쇄하게 되었습니다. 광주, 청주, 대전, 전주, 서울 등 전국 주요 도시에는 공수부대가 내려가 시위진압 준비를 했죠.
다음날 전남대 학생들이 대학에 출입하는 과정에서 공수부대와 시비가 붙었고, 학생들이 신군부 규탄 데모를 시내에서 열면서 5.18 민주화운동이 발발하게 됩니다. 신군부는 공수부대에게 전날 내린 포고령을 어기고 시위를 한 사람 전원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공수부대원들은 신군부의 지시에 따라 시위대를 닥치는 대로 체포하기 위해 시위대원의 머리를 때리고 대검으로 찌르는 강경진압을 전개합니다. 그 다음부터 광주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아실거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