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1909년과 순국한 1910년은 한국의 명운과 관련되는 사건이 잇따랐다. 1909년 1월 15일 홍암(弘巖) 나철(羅喆)이 조국의 비참한 운명을 내다보고 새로운 출발을 예견이나 하는 듯이 단군(檀君)을 신앙하는 대종교(大倧敎)를 창시했다. 홍암은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발표되자 을사오적(乙巳五賊) 처단에 나선 인물이다. 그는 나라가 더욱 어려워지자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민족정신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종교가 필요하다고 믿고, 서일(徐一)·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대종교를 창시했다. 대종교는 독립운동 단체가 되었다.
2월 23일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는 이른바 출판법을 공포하여 출판물의 사전검열과 배일(排日) 출판물을 압수하고, 7월 6일에는 일본 각의에서 ‘조선병합 실행에 관한 건’을 의결해 본격적인 병탄(倂呑)에 나섰다. 일본인들은 물론 한국의 일부 학자 중에도 안중근이 이토를 총살했기 때문에 일제(日帝)의 한국병탄이 이루어지게 되는 빌미를 주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일제는 이미 비밀 각의에서 7월 6일 한국병탄을 결정한 상태였다. 7월 12일 한국통감부는 기유각서(己酉覺書)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과 감옥 사무를 장악했다. 그리고 9월초부터 10월까지 두 달 동안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이란 이름의 의병학살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의병과 일반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같은 해인 9월 4일에는 청국과 안봉선(安奉線) 철도 부설권 교환을 조건으로 하는 간도협약(間島協約)을 체결해 한국 고대국가의 발상지이자 전통적으로 한국 민족의 영토인 간도 지역을 청국에 불법적으로 넘겨주었다. 이런 시점에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를 성공시켜 동양 천지에 큰 파장을 몰고 온 것이다. 일제는 같은 해 11월 1일에 창경궁(昌慶宮)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만들고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바꿨다. 남의 나라의 황궁을 동물원이나 식물원으로 만든 일은 일찍이 유례가 없는 만행이었다. 한국인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적인 행위였다.
11월 26일에는 한성부민회(漢城府民會)에서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가 성대하게 열렸고, 12월 4일에는 일진회 무리들이 일본의 한국병합 요구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매국노의 망동이 서울 장안을 누비고 다녔다. 12월 22일 이재명(李在明)이 서울 종현천주교회당(鐘峴天主敎會堂)에서 이완용(李完用) 암살을 시도했으나 부상만 입히고 죽이지는 못한 채 일본 경찰관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듬해인 1910년 1월 29일에는 평안도 순천에서 한국 농민 3천여명이 경찰서와 군청, 일본인 점포를 습격하는 대대적인 항쟁이 일어났다.
1910년에 2천만 조선인과 삼천리강토와 4천년의 역사는 일제의 폭압에 점점 무너져가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怨讐) 이토를 처단했으나 무너져가는 나라를 구하지는 못했다. 그동안 조선이란 나라는 너무 낡고 나약해져 있었다.
일본 정부의 지침에 따라 마나베 재판장은 “피고가 이토 공을 살해한 행위는 그 결의가 개인적인 원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치밀한 계획 끝에 감행한 것이므로 살인죄에 대한 극형을 과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믿고, 피고 안중근을 사형에 처한다”라고 선고했다. 그리고 안중근이 항소를 포기하자 사형집행일이 3월 26일로 결정되었다.
안중근은 25일에 형을 집행해줄 것을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측에 요청했다. 천주교 신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일에 형을 받고 주님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것마저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정해진 날이 3월 26일이었다. 26일은 달[月]은 달라도 이토가 죽은 날이었다. 일제가 이 날을 택한 것은 이토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 심리에서였을지도 모른다.
안중근은 집행 전야인 3월 25일에 그동안 미루어졌던 두 동생을 만났다. 입회한 미조부치가 “오늘은 최후가 될 터이니 서로 손을 잡아도 좋다”며 생색을 냈다. 삼형제는 그동안 철창 너머로 얼굴만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마주 잡고자 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침착하고 경건한 자세로 먼저 무릎을 꿇었다. “천주여, 들어주시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몸을 돕는 분이신 주여, 이 우리의 슬픈 울음을 춤으로 바꾸소서. 내 천주여, 영원히 당신을 찬미하오리다. 아멘.”
기도를 마친 안중근은 두 동생과 손을 마주잡았다. 혈육의 뜨거운 정이 전류처럼 삼형제에게 동시에 흘렀다. 안중근은 전날부터 쓴 여섯통의 편지를 동생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아내 김아려가 긴 밤들을 지새우며 지은 조선의 한복 바지와 저고리를 전달받았다. 안중근의 이 수의는 어머니가 지었다는 설도 있다. 누가 지었으면 어떠랴?
이날 안중근이 동생들을 통해 전달한 편지는 어머니에게 쓴 ‘모주전상서(母主前上書)’, 두 동생에게 주는 ‘정근·공근에 여하는 서 형서(定根·恭根에 與하는 書 兄書)’, 사촌동생 명근에게 주는 ‘명근 형제에게 기하는 서(明根 賢弟에게 奇 하는 書)’, 뭬텔 주교에게 주는 ‘민 주교 전상서 죄인 안다묵 배(閔主敎前 上書 罪人 安多黙 拜)’, 빌렘 신부께 주는 ‘홍 신부 전상서 죄인 안다묵’, 숙부에게 주는 ‘첨위 숙부전에 답하는 서질 다묵 배(僉位 叔父前 書侄 多黙 拜)’ 등 유서나 다름없는 편지를 보내 이승과 하직하고, 자신의 뜻을 남긴 것이다(표기의 일자는 음력이다).
‘유서’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또 전날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 남긴「동포에게 고함」도 함께 싣는다.
〈정근·공근에게 보내는 글〉
‘형이 씀 동봉하는 편지 여섯 통은 각기 보낼 곳에 전하여라. 훗날 영원한 복지에서 다시 기쁘게 만나기를 기대하며 이제 마지막 말을 남길 뿐이다.’
〈어머님 전상서〉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 저녁 문안 인사 못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 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 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 니 마음을 평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기를 희망하오며, 후 일에도 잊지 마옵시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 주십시오. 이상이 대요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 주 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분도 어머니에게 부치는 글〉
‘장부 안도마 드림 예수를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멀지 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 에서 영원에 모이려 하오. 반드시 감정에 괴로워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 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어머님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의 즐거움을 바랄 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 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반드시 잊지 말고 특히 천주 께 바치어 후세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많고 많은 말은 후일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 보고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1910년 경술 2월 14일’
〈홍 신부 전상서〉
‘죄인 안도마 올림 예수를 찬미하옵니다. 자애로우신 신부님이시여. 저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주시고 또 최후의 그러한 장소에 수많은 노고를 불구하 고 특히 와 주시어 친히 모든 성사를 베풀어 주신 그 은혜야말로 어찌 다 사례를 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다시 바라옵건대 죄인을 잊지 마시고 주님 앞에 기도를 바쳐 주시옵고, 또 죄인이 욕되게 하는 여러 신 부님과 여러 교우들에게 문안드려 주시어 모쪼록 우리 가 속히 천당 영복의 땅에서 흔연히 만날 기회를 기다 린다는 뜻을 전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교께도 상서하였사오니 그리 아시기를 바랍 니다. 끝으로 자애로우신 신부님이 저를 잊지 마시기를 바 라오며, 저 또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1910년 경술 2월 15일’
〈명근 아우에게 보내는 글〉
‘도마 보냄 예수를 찬미한다.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떠나니 꿈속의 꿈이라 할까. 다시 깊은 꿈속의 날을 끝내고 영원히 복된 땅에서 기쁘게 만나고, 더불어 영원히 태평한 안락을 받을 것 을 바랄 뿐이다.’
〈민 주교 전상서〉
‘죄인 안도마 올림 예수를 찬미합니다. 인자하신 주교께옵서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죄인의 일에 관해서는 주교께 허다한 배려를 번거롭게 하여 황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를 입고 고백, 영성체의 비적 등 모든 성사를 받은 결과 심신이 모두 평안함을 얻었습니다. 성모의 홍은, 주교의 은혜는 감사할 말씀이 없아오며, 감히 다시 바라옵건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어 주님 앞 에 기도를 바쳐 속히 승천의 은혜를 얻게 하시옵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동시에 주교님과 여러 신부님께옵서는 다같이 일체가 되어 천주교를 위해 진력하시어 그 덕화가 날로 융성하 여 머지 않아 우리 한국의 허다한 외국인과 기독교인들 이 일제히 천주교로 귀의하여 우리 주 예수의 자애로우 신 아들이 되게 할 것을 믿고 또 축원할 따름입니다. 1910년 경술 2월 15일’
〈작은 아버님 전에 답하는 글〉
‘조카 도마 올림 아멘! 보내주신 글을 받아보고 기쁘기 끝이 없었습니다. 불 초 조카의 신상에 대해서는 너무 상심하지 마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세상에서 화와 복을 불문하고 무슨 일이나 모두 주님의 뜻이오라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바이므로 다만 성모의 바다와 같은 은혜만 을 믿고 또 축원하면서 기도할 뿐입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이번 은혜로 모든 성사를 받을 수 있었음은 구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께서 저를 버리지 않 으시고 그 분의 품 속으로 구해 올려주셨음이라고 믿으 며 자연 심신의 평안을 느꼈습니다. 숙부님을 비롯하여 일가 친척께서는 어느 분이시고 마음 쓰지 마시고 성모의 은혜에 대해 저를 대신하여 사례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동시에, 바라옵건대 가내가 서로 일생을 화목하게 평안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니다. 큰아버지께옵서는 아직 입교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듣 고 참으로 유감된 마음을 견디기 어려운 바, 그러한 마 음씨로는 성모의 가르침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신 것일 까요. 마음과 몸을 다하여 속히 귀화하시기를 권유하여 마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 세상을 떠남에 있어 일 생의 권고임을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 교우에게는 일일이 서신을 내지 못하오니 그 분 들에게 다음의 취지로 문안을 전해 주시기 바라는 바, 반드시 여러 교우가 다 신앙하고 열심히 전에 종사하 시어 우리나라를 천주교의 나라가 되도록 권면 진력하 시기를 기도하는 동시에, 머지 않아 우리들의 고향인 영복의 천당, 우리 주 예수의 앞에서 기쁘게 만날 것을 바라오니 여러 교우께서도 저를 대신하여 주께 감사 기 도하시기를 천만번 엎드려 바라마지 않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이만 마치옵니다. 1910년 경술 2월 15일 오후 4시 30분’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 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우리들 2천만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 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 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자로서 유한이 없을 것이다. (이 글은 면회 온 안병찬 변호사를 통하여 동포에세 전한 것이다.)’
○ 순국의 날 온종일 비 내리고
1910년 경술년 3월 26일 새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날 여순지방에는 새벽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유교철학에는 하늘과 사람은 합일체라는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이 전한다. 또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도 있다. 하늘과 사람, 사람과 하늘이 합일이고 서로 감응한다는 학설이다. 최제우(崔濟愚)는 여기서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도출했다. 한나라의 학자 동중서(董仲舒)는 “하늘은 인간과 같은 희로애락이 있다”고 주장했다.
6년 전 전봉준(全琫準)이 처형되던 날에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조선의 마지막 두 영웅을 보내는 날 하늘도 두 장부의 뜻에 감응하여 비를 내렸을까? 이날 안중근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평상심으로 새벽을 맞았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싸늘한 감방에서 속절없이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며 아내가 섬섬옥수로 지어 보낸 한복으로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 마지막으로 시(詩) 한 수를 짓고 싶어 붓을 들었다.
조선 중기에 빼어난 문장가로 반골형 선비인 임제(林悌)가 있었다. 선조(宣祖) 때에 동서인이 갈려 싸우는 꼴을 보고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다 비분강개 속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임제의《백호집(白湖集)》에는 이런 시가 실려 있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雨裝) 없이 길을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잘까 하노라.’
비 내리는 여순의 하늘을 무념히 바라보며 시 한 수를 짓고 나니 간수 지바가 나타났고, 그에게 휘호 한 폭을 써주고 일어섰다.
○ 북한 극작가의 ‘최후의 날’ 스케치
안중근이 순극한 3월 26일 아침의 상황을 북한의 극작가 임종상은《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작품을 통해 팩트와 픽션을 잘 버무려 한 편의 서사로 만들었다.
‘서른 두 살. 안중근의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맞는 이른 새벽이다. 그는 안해 아려가 보낸 흰옷을 무릎 앞에 당겨 놓았다. 수륙수백 리를 거쳐 와 닿았을 옷이였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입은 옷도 어머님이 지어 준 흰 애기 옷이었다.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입고 떠날 옷도 안해가 지어 보낸 이 흰옷이다. 어머님은 제 손으로 애기 옷을 행복에 겨워 입혔으련만 안해는 그런 '권리'마저 빼앗겼다. 하아 어이하랴…….
이제 이 옷을 입고 형장으로 나가면 생은 끝나는 것이다. 그는 투박한 손으로 흰옷을 어루만져 보았다. 안해의 정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시 한수를 읊었다. 옥에서 지어 본 시였다.
님 생각 천리 길에 바라보는 눈이 뚫어질 듯 하오이다 행여 이 정을 저버리지 마소서.
한 뜸 두 뜸 눈물을 머금고 시침을 마쳤을 바늘자리마다에 안해의 수심 어린 둥근 얼굴이 우렷이 떠오른다. 눈물과 한숨보다도 피맺힌 원한이 슴배여 있을 흰옷이 그의 마음을 한없이 괴롭혔다. 애오라지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쏘아 죽이면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원할 수 있고 모진 생활의 풍파를 묵묵히 헤쳐 온 마음씨 고운 안해와 엄한 가풍 속에서도 가끔 옷자락에 매여 달려 떨어지기 아쉬워하던 어린 자식들을 한 품에 안아 즐겁게 살 수 있으리라던 한 가닥 기대가 이다지도 허무하게 사그러지다니!
그는 안해가 흰옷 갈피 속에 넣어 보낸 가족사진을 젖어 오는 눈길로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사진 속에서 안아 본 적 없는 애기가 빤히 쳐다본다. 집 떠난 다음에 낳았다는 준생이다.
"아, 혈육의 정 가슴을 어여 내건만 내 그네들에게 무엇을 안겨 주고 이 차디찬 옥에서 마지막 새벽을 맞고 보내야 하느뇨!"
그는 쓰린 가슴을 부여안고 비록 짧은 한생이었으나 뜻을 알아주고 리해해주고 뒷받침해 준 그런 안해를 되새겨 보고 있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또다시 흰옷을 엇쓸었다. 말은 없었으나 늘 자기의 속마음을 리해해 주던 안해가 아니였던가! 내 그런 안해. 눈만 감으면 삼삼히 떠오르는 그런 안해 앞에 가져다준 것이 무엇이냐?’
○ 유동선의 ‘최후의 날’ 증언
안중근의 사형집행 날에 대한 다른 기록도 있다. 하얼빈의거 때 함께 구속되었던 유동하의 여동생 유동선의 구술이다.
“3월 26일 사형 날짜가 닥쳐왔다. 아침 8, 9시경, 사형장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밖의 동포와 중국 사람들은 비분의 눈물을 머금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슴을 들먹이고 있었다.
교수대의 밧줄이 바람결에 흐느적이고 있었다. 검찰관 미조부치가 사형 정각 3분을 앞두고 안중근 곁으로 다가오며 공포어린 낯빛으로 말을 더듬거렸다.
"마지막 할 말은 없는가?"
안중근은 숭엄하게 머리를 쳐들고 광장의 사람들을 휘둘러보며 …… (공란-필자)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당신들이 동의한다면 나와함께 이 자리에서 동양평화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오."
그 말에 미조부치와 사형 집행수들은 흠칫 놀라며 "그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소" 하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럼 다른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류동하 만은 아무런 죄가 없으니 곧 석방해 줄 것을 요구하오."
이 때 집행석에서 손종을 절렁대며 …… (공란-저자) 종소리가 들리자 안중근은 격정된 목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데 미조부치가 사형집행을 명령하자 사형리들이 올가미를 안중근의 목에 걸고 당겨 올렸다.
안중근의 목이 허공에 말려 올라가 몇 분간의 시간이 지나 질식 상태에서 혼미가 되었을 때 사형리들은 밧줄을 늦추어 안중근을 서서히 땅에 내려놓아 숨이 돌아서게 했다. 악독한 사형리들은 이것을 반복하더니 세 번째 만에 밧줄을 당겨 안중근 의사를 교살했다.”
○ 한국인 연구자의 ‘최후의 날’ 기록
또 다른 기록이 있다. 평생을 안중근 의사 연구에 바친 최서면 국제한국학연구원장이 저술한《새로 쓴 안중근 의사 전기》의 글이다.
‘26일이 되는 날 아침이었다. 형무소장이 직접 안중근의사를 데리러 왔다, 감방을 나와 사형장으로 갔다. "금년 2월 14일 언도한 판결에 항소가 없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니 명령에 의해 사형을 집행한다" 하는 선고가 있었다. 그러고는 "남기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말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아무 것도 남길 말이 없다. 다만 내가 한 일은 동양평화를 위해서 했다. 한일양국이 협력하여 평화를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을 위해 기도를 올리고 싶다"고 하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속에서 기도를 올렸다.
안중근 의사는 다 같이 "동양평화만세"를 부르고 싶었지만 죄수와 간수가 함께 부를 수 없기 때문에 그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간수가 두 장의 종이로 안중근 의사의 눈을 가린 뒤 흰 보를 씌워 앞을 못 보게 했다. 이윽고 7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간 뒤 교수대에서 숨을 거두었다.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형무소장 구라하라는 안중근 의사에게 최고의 예우를 했다. 안중근 의사를 모실 관은 일부러 밖에서 구해 와서 한국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뒤 시신을 교회당에 모시고 우덕순, 채동선, 유동하에게 한국식으로 절을 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신부는 없지만 스님을 불러 정성껏 염불을 올리고 형무소 공동묘지에 정중히 묻었다. 그러고는 집에 가서 중얼거렸다.
"아까운 사람을 죽였어."’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하고 형 집행 날로 3월 25일을 원했다. 이 날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감부는 당일이 바로 순종(純宗)의 생신인 건원절(乾元節)이었으므로 다음날인 26일에 형을 집행하기를 요청해 받아들여졌다. 비록 아무 실권이 없는 망국전야의 군주였지만 대한제국 황제의 생일에 안중근을 처형하기에는 민심이 두려웠던 것이다.
『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전기』11. 순국 (1)
○ 순국 전야, 여섯 통의 유서 동생들에게 전달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1909년과 순국한 1910년은 한국의 명운과 관련되는 사건이 잇따랐다. 1909년 1월 15일 홍암(弘巖) 나철(羅喆)이 조국의 비참한 운명을 내다보고 새로운 출발을 예견이나 하는 듯이 단군(檀君)을 신앙하는 대종교(大倧敎)를 창시했다. 홍암은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발표되자 을사오적(乙巳五賊) 처단에 나선 인물이다. 그는 나라가 더욱 어려워지자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민족정신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종교가 필요하다고 믿고, 서일(徐一)·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대종교를 창시했다. 대종교는 독립운동 단체가 되었다.
2월 23일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는 이른바 출판법을 공포하여 출판물의 사전검열과 배일(排日) 출판물을 압수하고, 7월 6일에는 일본 각의에서 ‘조선병합 실행에 관한 건’을 의결해 본격적인 병탄(倂呑)에 나섰다. 일본인들은 물론 한국의 일부 학자 중에도 안중근이 이토를 총살했기 때문에 일제(日帝)의 한국병탄이 이루어지게 되는 빌미를 주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일제는 이미 비밀 각의에서 7월 6일 한국병탄을 결정한 상태였다. 7월 12일 한국통감부는 기유각서(己酉覺書)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과 감옥 사무를 장악했다. 그리고 9월초부터 10월까지 두 달 동안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이란 이름의 의병학살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의병과 일반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같은 해인 9월 4일에는 청국과 안봉선(安奉線) 철도 부설권 교환을 조건으로 하는 간도협약(間島協約)을 체결해 한국 고대국가의 발상지이자 전통적으로 한국 민족의 영토인 간도 지역을 청국에 불법적으로 넘겨주었다. 이런 시점에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를 성공시켜 동양 천지에 큰 파장을 몰고 온 것이다. 일제는 같은 해 11월 1일에 창경궁(昌慶宮)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만들고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바꿨다. 남의 나라의 황궁을 동물원이나 식물원으로 만든 일은 일찍이 유례가 없는 만행이었다. 한국인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적인 행위였다.
11월 26일에는 한성부민회(漢城府民會)에서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가 성대하게 열렸고, 12월 4일에는 일진회 무리들이 일본의 한국병합 요구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매국노의 망동이 서울 장안을 누비고 다녔다. 12월 22일 이재명(李在明)이 서울 종현천주교회당(鐘峴天主敎會堂)에서 이완용(李完用) 암살을 시도했으나 부상만 입히고 죽이지는 못한 채 일본 경찰관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듬해인 1910년 1월 29일에는 평안도 순천에서 한국 농민 3천여명이 경찰서와 군청, 일본인 점포를 습격하는 대대적인 항쟁이 일어났다.
1910년에 2천만 조선인과 삼천리강토와 4천년의 역사는 일제의 폭압에 점점 무너져가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怨讐) 이토를 처단했으나 무너져가는 나라를 구하지는 못했다. 그동안 조선이란 나라는 너무 낡고 나약해져 있었다.
일본 정부의 지침에 따라 마나베 재판장은 “피고가 이토 공을 살해한 행위는 그 결의가 개인적인 원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치밀한 계획 끝에 감행한 것이므로 살인죄에 대한 극형을 과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믿고, 피고 안중근을 사형에 처한다”라고 선고했다. 그리고 안중근이 항소를 포기하자 사형집행일이 3월 26일로 결정되었다.
안중근은 25일에 형을 집행해줄 것을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측에 요청했다. 천주교 신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일에 형을 받고 주님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것마저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정해진 날이 3월 26일이었다. 26일은 달[月]은 달라도 이토가 죽은 날이었다. 일제가 이 날을 택한 것은 이토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 심리에서였을지도 모른다.
안중근은 집행 전야인 3월 25일에 그동안 미루어졌던 두 동생을 만났다. 입회한 미조부치가 “오늘은 최후가 될 터이니 서로 손을 잡아도 좋다”며 생색을 냈다. 삼형제는 그동안 철창 너머로 얼굴만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마주 잡고자 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침착하고 경건한 자세로 먼저 무릎을 꿇었다. “천주여, 들어주시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몸을 돕는 분이신 주여, 이 우리의 슬픈 울음을 춤으로 바꾸소서. 내 천주여, 영원히 당신을 찬미하오리다. 아멘.”
기도를 마친 안중근은 두 동생과 손을 마주잡았다. 혈육의 뜨거운 정이 전류처럼 삼형제에게 동시에 흘렀다. 안중근은 전날부터 쓴 여섯통의 편지를 동생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아내 김아려가 긴 밤들을 지새우며 지은 조선의 한복 바지와 저고리를 전달받았다. 안중근의 이 수의는 어머니가 지었다는 설도 있다. 누가 지었으면 어떠랴?
이날 안중근이 동생들을 통해 전달한 편지는 어머니에게 쓴 ‘모주전상서(母主前上書)’, 두 동생에게 주는 ‘정근·공근에 여하는 서 형서(定根·恭根에 與하는 書 兄書)’, 사촌동생 명근에게 주는 ‘명근 형제에게 기하는 서(明根 賢弟에게 奇 하는 書)’, 뭬텔 주교에게 주는 ‘민 주교 전상서 죄인 안다묵 배(閔主敎前 上書 罪人 安多黙 拜)’, 빌렘 신부께 주는 ‘홍 신부 전상서 죄인 안다묵’, 숙부에게 주는 ‘첨위 숙부전에 답하는 서질 다묵 배(僉位 叔父前 書侄 多黙 拜)’ 등 유서나 다름없는 편지를 보내 이승과 하직하고, 자신의 뜻을 남긴 것이다(표기의 일자는 음력이다).
‘유서’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또 전날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 남긴「동포에게 고함」도 함께 싣는다.
〈정근·공근에게 보내는 글〉
‘형이 씀
동봉하는 편지 여섯 통은 각기 보낼 곳에 전하여라.
훗날 영원한 복지에서 다시 기쁘게 만나기를 기대하며
이제 마지막 말을 남길 뿐이다.’
〈어머님 전상서〉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
저녁 문안 인사 못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
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 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
니 마음을 평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기를 희망하오며, 후
일에도 잊지 마옵시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 주십시오.
이상이 대요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 주
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분도 어머니에게 부치는 글〉
‘장부 안도마 드림
예수를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멀지 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
에서 영원에 모이려 하오.
반드시 감정에 괴로워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
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어머님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의 즐거움을 바랄 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
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반드시 잊지 말고 특히 천주
께 바치어 후세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많고 많은 말은 후일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
보고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1910년 경술 2월 14일’
〈홍 신부 전상서〉
‘죄인 안도마 올림
예수를 찬미하옵니다.
자애로우신 신부님이시여. 저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주시고 또 최후의 그러한 장소에 수많은 노고를 불구하
고 특히 와 주시어 친히 모든 성사를 베풀어 주신 그
은혜야말로 어찌 다 사례를 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다시 바라옵건대 죄인을 잊지 마시고 주님 앞에
기도를 바쳐 주시옵고, 또 죄인이 욕되게 하는 여러 신
부님과 여러 교우들에게 문안드려 주시어 모쪼록 우리
가 속히 천당 영복의 땅에서 흔연히 만날 기회를 기다
린다는 뜻을 전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교께도 상서하였사오니 그리 아시기를 바랍
니다.
끝으로 자애로우신 신부님이 저를 잊지 마시기를 바
라오며, 저 또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1910년 경술 2월 15일’
〈명근 아우에게 보내는 글〉
‘도마 보냄
예수를 찬미한다.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떠나니 꿈속의 꿈이라 할까.
다시 깊은 꿈속의 날을 끝내고 영원히 복된 땅에서
기쁘게 만나고, 더불어 영원히 태평한 안락을 받을 것
을 바랄 뿐이다.’
〈민 주교 전상서〉
‘죄인 안도마 올림
예수를 찬미합니다.
인자하신 주교께옵서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죄인의 일에 관해서는
주교께 허다한 배려를 번거롭게 하여 황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를 입고 고백, 영성체의 비적 등
모든 성사를 받은 결과 심신이 모두 평안함을 얻었습니다.
성모의 홍은, 주교의 은혜는 감사할 말씀이 없아오며,
감히 다시 바라옵건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어 주님 앞
에 기도를 바쳐 속히 승천의 은혜를 얻게 하시옵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동시에 주교님과 여러 신부님께옵서는 다같이 일체가
되어 천주교를 위해 진력하시어 그 덕화가 날로 융성하
여 머지 않아 우리 한국의 허다한 외국인과 기독교인들
이 일제히 천주교로 귀의하여 우리 주 예수의 자애로우
신 아들이 되게 할 것을 믿고 또 축원할 따름입니다.
1910년 경술 2월 15일’
〈작은 아버님 전에 답하는 글〉
‘조카 도마 올림
아멘!
보내주신 글을 받아보고 기쁘기 끝이 없었습니다. 불
초 조카의 신상에 대해서는 너무 상심하지 마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세상에서 화와 복을 불문하고 무슨
일이나 모두 주님의 뜻이오라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바이므로 다만 성모의 바다와 같은 은혜만
을 믿고 또 축원하면서 기도할 뿐입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이번 은혜로 모든 성사를 받을 수
있었음은 구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께서 저를 버리지 않
으시고 그 분의 품 속으로 구해 올려주셨음이라고 믿으
며 자연 심신의 평안을 느꼈습니다.
숙부님을 비롯하여 일가 친척께서는 어느 분이시고
마음 쓰지 마시고 성모의 은혜에 대해 저를 대신하여
사례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동시에, 바라옵건대 가내가
서로 일생을 화목하게 평안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니다.
큰아버지께옵서는 아직 입교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듣
고 참으로 유감된 마음을 견디기 어려운 바, 그러한 마
음씨로는 성모의 가르침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신 것일
까요. 마음과 몸을 다하여 속히 귀화하시기를 권유하여
마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 세상을 떠남에 있어 일
생의 권고임을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 교우에게는 일일이 서신을 내지 못하오니 그 분
들에게 다음의 취지로 문안을 전해 주시기 바라는 바,
반드시 여러 교우가 다 신앙하고 열심히 전에 종사하
시어 우리나라를 천주교의 나라가 되도록 권면 진력하
시기를 기도하는 동시에, 머지 않아 우리들의 고향인
영복의 천당, 우리 주 예수의 앞에서 기쁘게 만날 것을
바라오니 여러 교우께서도 저를 대신하여 주께 감사 기
도하시기를 천만번 엎드려 바라마지 않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이만 마치옵니다.
1910년 경술 2월 15일 오후 4시 30분’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
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우리들 2천만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
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
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자로서 유한이 없을 것이다.
(이 글은 면회 온 안병찬 변호사를 통하여 동포에세 전한 것이다.)’
○ 순국의 날 온종일 비 내리고
1910년 경술년 3월 26일 새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날 여순지방에는 새벽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유교철학에는 하늘과 사람은 합일체라는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이 전한다. 또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도 있다. 하늘과 사람, 사람과 하늘이 합일이고 서로 감응한다는 학설이다. 최제우(崔濟愚)는 여기서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도출했다. 한나라의 학자 동중서(董仲舒)는 “하늘은 인간과 같은 희로애락이 있다”고 주장했다.
6년 전 전봉준(全琫準)이 처형되던 날에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조선의 마지막 두 영웅을 보내는 날 하늘도 두 장부의 뜻에 감응하여 비를 내렸을까? 이날 안중근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평상심으로 새벽을 맞았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싸늘한 감방에서 속절없이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며 아내가 섬섬옥수로 지어 보낸 한복으로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 마지막으로 시(詩) 한 수를 짓고 싶어 붓을 들었다.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고[丈夫雖死心如鐵]
의사는 위태로움에 처할지라도 기운이 구름과 같다[義士臨危氣似雲]’
조선 중기에 빼어난 문장가로 반골형 선비인 임제(林悌)가 있었다. 선조(宣祖) 때에 동서인이 갈려 싸우는 꼴을 보고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다 비분강개 속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임제의《백호집(白湖集)》에는 이런 시가 실려 있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雨裝) 없이 길을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잘까 하노라.’
비 내리는 여순의 하늘을 무념히 바라보며 시 한 수를 짓고 나니 간수 지바가 나타났고, 그에게 휘호 한 폭을 써주고 일어섰다.
○ 북한 극작가의 ‘최후의 날’ 스케치
안중근이 순극한 3월 26일 아침의 상황을 북한의 극작가 임종상은《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작품을 통해 팩트와 픽션을 잘 버무려 한 편의 서사로 만들었다.
‘서른 두 살. 안중근의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맞는 이른 새벽이다. 그는 안해 아려가 보낸 흰옷을 무릎 앞에 당겨 놓았다. 수륙수백 리를 거쳐 와 닿았을 옷이였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입은 옷도 어머님이 지어 준 흰 애기 옷이었다.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입고 떠날 옷도 안해가 지어 보낸 이 흰옷이다. 어머님은 제 손으로 애기 옷을 행복에 겨워 입혔으련만 안해는 그런 '권리'마저 빼앗겼다. 하아 어이하랴…….
이제 이 옷을 입고 형장으로 나가면 생은 끝나는 것이다. 그는 투박한 손으로 흰옷을 어루만져 보았다. 안해의 정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시 한수를 읊었다. 옥에서 지어 본 시였다.
님 생각 천리 길에
바라보는 눈이 뚫어질 듯 하오이다
행여 이 정을
저버리지 마소서.
한 뜸 두 뜸 눈물을 머금고 시침을 마쳤을 바늘자리마다에 안해의 수심 어린 둥근 얼굴이 우렷이 떠오른다. 눈물과 한숨보다도 피맺힌 원한이 슴배여 있을 흰옷이 그의 마음을 한없이 괴롭혔다. 애오라지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쏘아 죽이면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원할 수 있고 모진 생활의 풍파를 묵묵히 헤쳐 온 마음씨 고운 안해와 엄한 가풍 속에서도 가끔 옷자락에 매여 달려 떨어지기 아쉬워하던 어린 자식들을 한 품에 안아 즐겁게 살 수 있으리라던 한 가닥 기대가 이다지도 허무하게 사그러지다니!
그는 안해가 흰옷 갈피 속에 넣어 보낸 가족사진을 젖어 오는 눈길로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사진 속에서 안아 본 적 없는 애기가 빤히 쳐다본다. 집 떠난 다음에 낳았다는 준생이다.
"아, 혈육의 정 가슴을 어여 내건만 내 그네들에게 무엇을 안겨 주고 이 차디찬 옥에서 마지막 새벽을 맞고 보내야 하느뇨!"
그는 쓰린 가슴을 부여안고 비록 짧은 한생이었으나 뜻을 알아주고 리해해주고 뒷받침해 준 그런 안해를 되새겨 보고 있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또다시 흰옷을 엇쓸었다. 말은 없었으나 늘 자기의 속마음을 리해해 주던 안해가 아니였던가! 내 그런 안해. 눈만 감으면 삼삼히 떠오르는 그런 안해 앞에 가져다준 것이 무엇이냐?’
○ 유동선의 ‘최후의 날’ 증언
안중근의 사형집행 날에 대한 다른 기록도 있다. 하얼빈의거 때 함께 구속되었던 유동하의 여동생 유동선의 구술이다.
“3월 26일 사형 날짜가 닥쳐왔다. 아침 8, 9시경, 사형장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밖의 동포와 중국 사람들은 비분의 눈물을 머금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슴을 들먹이고 있었다.
교수대의 밧줄이 바람결에 흐느적이고 있었다. 검찰관 미조부치가 사형 정각 3분을 앞두고 안중근 곁으로 다가오며 공포어린 낯빛으로 말을 더듬거렸다.
"마지막 할 말은 없는가?"
안중근은 숭엄하게 머리를 쳐들고 광장의 사람들을 휘둘러보며 …… (공란-필자)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당신들이 동의한다면 나와함께 이 자리에서 동양평화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오."
그 말에 미조부치와 사형 집행수들은 흠칫 놀라며 "그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소" 하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럼 다른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류동하 만은 아무런 죄가 없으니 곧 석방해 줄 것을 요구하오."
이 때 집행석에서 손종을 절렁대며 …… (공란-저자) 종소리가 들리자 안중근은 격정된 목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데 미조부치가 사형집행을 명령하자 사형리들이 올가미를 안중근의 목에 걸고 당겨 올렸다.
안중근의 목이 허공에 말려 올라가 몇 분간의 시간이 지나 질식 상태에서 혼미가 되었을 때 사형리들은 밧줄을 늦추어 안중근을 서서히 땅에 내려놓아 숨이 돌아서게 했다. 악독한 사형리들은 이것을 반복하더니 세 번째 만에 밧줄을 당겨 안중근 의사를 교살했다.”
○ 한국인 연구자의 ‘최후의 날’ 기록
또 다른 기록이 있다. 평생을 안중근 의사 연구에 바친 최서면 국제한국학연구원장이 저술한《새로 쓴 안중근 의사 전기》의 글이다.
‘26일이 되는 날 아침이었다. 형무소장이 직접 안중근의사를 데리러 왔다, 감방을 나와 사형장으로 갔다. "금년 2월 14일 언도한 판결에 항소가 없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니 명령에 의해 사형을 집행한다" 하는 선고가 있었다. 그러고는 "남기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말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아무 것도 남길 말이 없다. 다만 내가 한 일은 동양평화를 위해서 했다. 한일양국이 협력하여 평화를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을 위해 기도를 올리고 싶다"고 하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속에서 기도를 올렸다.
안중근 의사는 다 같이 "동양평화만세"를 부르고 싶었지만 죄수와 간수가 함께 부를 수 없기 때문에 그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간수가 두 장의 종이로 안중근 의사의 눈을 가린 뒤 흰 보를 씌워 앞을 못 보게 했다. 이윽고 7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간 뒤 교수대에서 숨을 거두었다.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형무소장 구라하라는 안중근 의사에게 최고의 예우를 했다. 안중근 의사를 모실 관은 일부러 밖에서 구해 와서 한국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뒤 시신을 교회당에 모시고 우덕순, 채동선, 유동하에게 한국식으로 절을 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신부는 없지만 스님을 불러 정성껏 염불을 올리고 형무소 공동묘지에 정중히 묻었다. 그러고는 집에 가서 중얼거렸다.
"아까운 사람을 죽였어."’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하고 형 집행 날로 3월 25일을 원했다. 이 날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감부는 당일이 바로 순종(純宗)의 생신인 건원절(乾元節)이었으므로 다음날인 26일에 형을 집행하기를 요청해 받아들여졌다. 비록 아무 실권이 없는 망국전야의 군주였지만 대한제국 황제의 생일에 안중근을 처형하기에는 민심이 두려웠던 것이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