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 강연 - "현대사회에서의 정의"

박민재2011.05.23
조회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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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건데 지금 올리네요 ㅋㅋ

 

저 게시판 다 막혀서 여기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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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 - 내 후대에서의 경제적 가능성 (Economic Possiblities for our grandchildren) (1930)

 

이 책은 대공황 (1929) 다음년에 쓰여진 책이다.

 

케인즈는 이 책에서 경제 대공황은 쉽게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런 얘기는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얘기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주목해야하는 점은

 "100년뒤에 우리는 지금보다 4~8배 더 잘 살게 된다. 그런 이것이 과연 축복인가?"

라는 물음이다.

 

부의 성장이 행복이 되는가?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가치관을 바꿔야한다고 케인즈는 말을 했다.

 

고대,중세 시대에는 인간들의 소유물을 늘리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환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행복을 위해 가난함과 궁핍함을 참고 욕망절제를 행복 그 자체로 여겨왔다.

 

그러나 1700년대 사회가 급변하면서 소유물을 그들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늘릴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욕망절제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욕망절제가 없어진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것보다 그들의 욕망이 훨씬 더 빠르게 성장했고, 그러므로 행복할 수 없어졌다.

 

1700년대에는 사유재산을 통한 내부혁신. 이어지는 생산성증가.

 

또 2010년에는 1700년대보다 140배를 더 잘살게 되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항상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지금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연 1700년대의 부족함과 지금 현대의 부족함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전자는 절대부족이고 후자는 상대부족인 것이다.

 

여기서 잠깐 미국과 유럽의 경제체제의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인간은 욕망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고 그 점을 극대화 활용하여 급성장을 이룬 반면, 복지를 중시여기는 유럽의 경우에는 인간의 욕망을 이용한다기보다는 분배에 더 초점을 뒀기때문에 이렇다할 경제적 급성장은 없더라도 복지국가의 컨셉을 잘 따르고 있다.

 

욕망을 인정한 미국의 급성장은 그들의 경제체제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의 극대화로 이어졌다. 유럽과 오리엔탈리즘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열등함을 말하며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신자유주의를 내세웠다.

그는 역사는 끝났다 라는 말을 하며 역사의 종언(1992)을 말했다. 그것은 그들의 극대화된 자부심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이다.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그 이론에 변변찮은 반론을 내세울때 당당하게 그 이론에 그럴듯한 반기를 낸 사람이 송두율 교수이다.

송두율 교수는 '역사는 끝났는가?'(1995) 책을 냈다. 그 책에서는 미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욕망에 대해 논한 부분이 있는데 송교수는 욕망에는 절대적 욕망과 상대적 욕망이 있다고 했다.

 

절대적 욕망은 3살짜리 아이가 흔히 하는 행동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그런 욕망을 뜻하고

상대적 욕망은 사회에 의해 학습된 욕망을 뜻하는 것이다.

송교수는 인간은 절대적 욕망의 동물이긴 하지만 상대적 욕망의 동물은 절대 아니라고 역설하면서 인간의 욕망을 순순히 인정하고 또 그것을 이용하여 이룩된 경제발전은 옳지않다고 했다.

 

상대적 욕망 즉 학습된 욕망의 습득과정은 맥락화 라고 볼 수 있는데 주로 너무도 당연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결국 상반되는 두 이론이야 어찌됬건 미국의 급성장된 경제체제는 실패했다. 그것이 바로 서브프라임모기지 붕괴 사건이다. 미국경제체제가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The fall of America.

 

우리나라의 상황을 살펴보자면 625 한국전쟁이후 외국 자유주의 세력에서 공산화를 막기 위해 우리나라에 여러원조를 했다.

그 원조를 토대로 발전한 기업들이 지금의 대기업인데 그 당시 그 기업들은 농경사회를 산업사회로 탈바꿈 시켰다.

 

우리나라의 경우 1950년대 전까지 거의 상당수의 사람들이 절대적 욕망을 느끼고 살아왔다. 그들은 농경사회속에서 그들의 소유물을 증가시키기 힘든 환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전쟁이후 산업사회가 되면서 1950년대에 전후의 상황도 있겠으나 절대적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열렬한 소비를 한다. 이것은 농경 자본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에는 절대적 욕망, 갈망등이 거의 해소되었으며 절대적 결핍도 끝이 났다.

 

사람들의 절대적인 궁핍이 끝났으니 아무 상품이나 막 사지 않을것임을 기업은 잘 알고 있는터, 그들의 생존을 위해 새로운 활로를 찾기 시작한다.

 

1990년대 이후 기업들은 사람들에게 절대적 욕망이 아닌 상대적 욕망을 느끼게 해야 살 수 있는것이 되었다. 그 활로는 대게 기술발전/ 디자인/ 브랜드화 등이있다.

 

예를들어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와서 하는말이

"아빠 나 내일부터 학교 안간다."

"왜 안가냐"

"친구네 집에 갔더니 테레비가 평평하고 얇던데 우리집은 뚱뚱하고 볼록해서 창피해서 못가겠다."

 

좀 사는 집이라면 아빠는 아들이 한 말이나 또 자존심을 위해서 TV를 바꾸게 된다. 또 몇달뒤에 아들이 친구네 집은 벽에 걸어서 보드라 그러면 또 그 TV로 바꾸게 된다. 다소 억지감이 없지않은 예이지만 우리는 지금 멀쩡히 사용하고 있는 제품들을 망가지지도 않았는데 새로운 모델로 바꾸곤한다. 핸드폰을 더 좋은것으로 바꾸기 위해 막다룬다는등이 좋은예이다.

 

기업들은 끊임없이 욕망을 자극하고 우리가 상품을 버리고 새로운 모델로 사게 만드는 자극을 계속한다.

 

그런데 반면 소득이 낮고 못사는 집같은 경우 위 예처럼 상품을 계속 바꿀수 있는가?

이 점에서 우리 사회는 경제적 양극화로 치닫게 되고, 사회적 불균형이 이루어지게 된다.

 

또 하나의 문제는 화폐가 가진 추상성의 함정이다.

이건희 회장이나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백화점에가서 옷 한벌 사입는다고 하자. 그게 60이던 600이던 그들에게 별 체감은 없다.

화폐와 노동가치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커피 한잔을 먹기위해 오천원을 낸다고 하자. 그러나 이것은 화폐일뿐이다. 우리가 커피를 먹기위해 커피숍에 갔는데 점원이

"여기 기구와 재료가 다 셋팅되어 있으니까 알아서 만들어 드세요."

라고 하면 굉장히 황당할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 먹는지 모르고 간다면 말이다. 황당할뿐아니라 힘들기도 할것이고 커피가 제대로된 커피가 될 지도 의문이다. 이 모든 불확실한 상황을 모두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오천원을 내고 만족스러운 커피를 먹게 되는것이다.

결국 노동가치와 화폐를 비교해보면 백원 이백원도 우리의 노동으로 따지면 결코 적지않은 돈인데 화폐라는 기호화된 물건은 우리에게 체감이 되지 않기때문에 여기서도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는것이다.

 

우리가 초과생산,과잉생산을 하지않았다면 지금 현재의 환경문제와 인간이 만든 문제가 없었을것이다. 기업은 끊임없는 상대적 욕망을 자극하고 자본은 체감을 느끼기 힘드므로 그 욕망을 더욱 부채질한다.

이러한 사회는 결코 오래가지않는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온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시대. 공생. 상생.

 

언제 어디서나 슬로건으로 외쳐지는것은 항상 그것이 결핍되어 있기때문이다. 지금의 슬로건은 상생과 복지다.

 

종대가 아닌 횡대로 가는것이 중요하다.

 

현재 우리의 대기업을 보면 70~80년대 과도하게 무리하면서까지 경제 성장을 하였다. 앞에 누가 서있으면 밀치고 누가 넘어져있으면 밟고.... 그렇게 외국 소위 글로벌 기업을 따라잡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그 기업들을 지금 이 시점에서 거의 다 따라잡았다. 문제는 앞에 서 보니까 뭘 해야할지 모른다는게 문제인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현재 기성세대의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다. 빨리 가야하니까 모든게 불법일 수 밖에 없었고 각종 청문회만 열렸다 하면 털리는게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없이 많이 흩어져있는 밀가루. 우리는 물이 되어야한다.

앞서갔으니 뒤를 봐야하는것이다. 내가 급해서 뛰어가느라 제대로 못챙겨줬구나. 그때 그렇게 밀고 밟아서 미안했다. 이런식의 사고가 필요한것이다. 복지냐 성장이냐. 이런물음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람을 중심으로 본다면, 이념의 논리, 잣대로 판단하는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사람을 중심으로 놓고 생각하고 행동하는것이 이 시대의 진정한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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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로 유명하고 경제학과 주식에 깊은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계신 박경철 연사님의 강연이다. 작지않은 세미나 실에서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더 큰 세미나 실로 옮겼는데 그래도 객석은 물론이고 계단과 객석옆에서 서서 들은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나 고등학교 다닐때 아침먹을때 아빠가 항상 이 분의 방송을 틀어놓으셔서 친숙한 분이다.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과 이상적인 부분이 없지않으나 분명히 연사로서의 몫은 충분히 발휘하신 강연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들었을때 나와 분명 결론부분 생각이 비슷했는데 단순히 내 이상이 아니라 이것이 꼭 필요한 거구나. 사회에서 꼭 필요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 혼자 세상을 살아가는게 아니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힘이 되는 강연이었다.

 

이 강연을 들으면서 생각나는 책이 3개가 있었는데

1. 이기적 유전자. 2.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3. 엔트로피

 

참고가 될 것같다.

 

3가지 질문이 있었는데 영양가 있는 질문은 하나뿐이었다.

 

Q : 강연 잘 들었는데요 저도 선생님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요 이런얘기를 주위사람들에게 하면 "너는 이상주의자다. 세상을 아직 덜 살아서 잘 모른다." 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듣게 되는데, 이런말에 어떻게 대처해야하고 또 어떤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지 듣고싶습니다.

 

A : 내 판단이 틀리더라도, 내가 후에 낙오자가 되더라도 기꺼이 감수해야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또 이런 생각은 모두가 가져야하는 생각이겠지요. 자신의 한계는 결국 자기가 정하는거잖아요. 결국 꺾고 뛰어넘는것도 자기자신밖에 없습니다. 나를 뛰어넘고 또 사회를 뛰어넘어서 나에게, 사회에게 그런 변화를 이루는게 혁명성입니다. 결국 모든 선택과 생각은 당신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