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宋時烈) 거제 유배

김형석201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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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MARGIN-TOP: 2px; MARGIN-BOTTOM: 2px} 우암 송시열(宋時烈) 거제 유배 [연재] 거제도 고전 문학의 이해 우암 송시열(宋時烈) 거제 유배  2011년 05월 27일 (금) 16:20:29 뉴스앤거제 우암 송시열(宋時烈) 거제 유배

  우암 송시열(宋時烈) 거제 유배    ▲ 고영화
/ 고전문화연구가송시열(宋時烈)선생은 그의 나이 73세 때인 1679년 3월 25일에서 1680년 5월15일까지 거제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거제에서 선생은 성리학적 보편주의 예학의 정신에 입각하여 예(禮)를 다스려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했다. 선생의 높은 덕(德)에 거제사람들이 감화되고 교화를 받아, 이 후 거제반곡서원이 창건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거제는 유학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679년 거제도에서 그의 손자 송주석과 함께 ‘주자어류’를 집중적으로 교감하여, 그 가운데 주자 문인들의 뒤섞인 기록을 정돈하고 번거롭고 중복되는 내용을 산삭하며 류에 맞게 문목을 재분류하여 편집하였다.

회손(晦孫)에게 주어 작별하다.
기미년(1679, 숙종 5년, 선생 73세) 9월.

白日明孤島 밝은 햇볕 외로운 섬에 비치고
滄溟?一身 바닷물 한 몸을 둘렀구나.
臨風送爾去 바람결에 너를 떠나보내니
須愛卷中人 책 속의 옛사람 사랑하기 바라노라.

손자 주석(疇錫)과 순석(淳錫)은 물론 여러 사람들이 선생의 귀양지 덕원, 거제도, 제주도로 따라와 끝까지 봉양했다. 위 글은 거제로 따라왔던 회손(晦孫)이 서울로 돌아갈 때 학문에 힘쓰라 당부하는 글이다.

기성(岐城) 거제도 귀양살이에서

'山如?海' 모든 산 그림 같고 바다 아스라하니
姑射仙人若可招 고야선인도 불러올 것만 같아
却恐衣?塵土在 문득 옷자락 진토에 있음 두려워
汲泉淸濯此三朝 샘물에 사흘 동안 깨끗이 빨았네.

[주]고야선인 : 신선을 말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묘고야(?姑射)의 산에 신선이 있는데 살결이 옥설(玉雪) 같고 예쁘기가 처녀 같으며 곡식을 안 먹고 바람을 마신다.” 하였다.

거제도 풍경은 신선이 노닐 것 같이 아름다우나 선비의 정신(옷자락)이 진토에 더러워진 것 같아 깨끗한 샘물(죽천竹泉)에 씻으면 나아질까? 생각하며, 자신의 굳은 의지를 다짐하고 있는 한시(漢詩)이다. 

  우암 송시열(宋時烈) 거제 유배    ▲ 우암 송시열 초상화1680년 가을, 견내량을 건너 돌아가면서

성덕으로 해도의 신하 풀어 주시어, 큰 물결 다시 건너며 눈물 흘렸노라
옛 친구(李惟泰) 함께 이로움 요하니, 천 리 산천 모두 부끄러움 띠었네.

송시열(宋時烈, 1607년 ~ 1689년 7월 24일)은 조선의 문신으로 주자학의 대가이자 노론의 영수였다. 호는 우암(尤庵)이다.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聖人)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했고,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1675년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뒤 거제면 동상리 반곡 골짜기에서 약 1년 2개월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도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던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송시열은 성격이 과격하여 정치적인 적을 많았으나, 학식이 뛰어나 문하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귀양지에서도 끊임없이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들을 많이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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