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혈혁명으로 고구려 최고의 권력자가 된 연개소문(淵蓋蘇文)이 혼란스러운 나라 안 분위기를 수습하고 당의 침략에 대비하는 동안 당황(唐皇)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연 2백만의 인력을 동원해 자신의 별궁인 양성궁(襄城宮)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혹독한 부역(賦役)에 시달리게 된 백성들은 태종의 사치에 원성을 높였다. 그러나 태종은 자신이 중국의 어느 역대 황제보다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어진 군주라고 착각했다. 태종은 자신이 진정한 천하의 제왕이 되기 위해서는 고구려를 반드시 정복해야 한다고 여겼다.
수나라가 문제(文帝)·양제(煬帝) 2대에 걸쳐 네 차례나 침략했으나 실패한 고구려, 그래서 결국 수나라를 망하게 만든 고구려를 태종은 자신이 중원의 통치자로 군림하는 동안 반드시 정벌하여 속국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결심했다.
‘하늘에 해가 하나밖에 없듯이 지상에도 황제는 한 명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건방지게도 동북 변방의 오랑캐 주제에 고구려의 임금이 신라·백제·말갈(靺鞨)·거란(契丹) 등 주변국 사이에서는 천자(天子) 노릇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거야말로 유일한 황제의 나라 중국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도전이요 그지없는 불경이 아니고 무엇인가!’
태종은 고구려에 정권이 바뀐 틈을 타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치고 싶었으나 아직은 당나라의 국력이 부족한 탓에 우선 정보수집을 위해서 영류태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문사(弔問使)를 보내는 것으로 그쳐야 했다.
643년 9월에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그 당시 신라는 계속되는 고구려와 백제의 위협으로 인해 전년도에 빼앗겼던 서부 40여성과 대야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와의 협상에서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덕여왕(善德女王)은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왜국에 상대등(上大等) 을제(乙祭)를 사신으로 급파하였다. 마침 왜국에서는 황극왕(皇極王)이 새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축하사절을 보낼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왜국에는 벌써 고구려와 백제의 사신이 와서 왜국 조정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간 뒤였다. 신라의 사신은 풍랑으로 인해 즉위 축하행사가 이미 끝난 후에 도착하고 말았다. 왜국에서는 신라 사신에 대해 단 한차례 잔치도 열어주지 않았다. 왜국과도 실패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당나라로 보낸 신라의 사신인 이찬(伊飡) 수품(水品)이었다. 그는 김춘추의 외교 실패를 잘 알고 오직 당과의 협조만이 신라가 사는 길이란 생각에만 가득 차, 협상의 원칙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태종을 만난 자리에서 조급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찬 수품은 장안에 도착해서 당나라의 궁궐이 화려하고 장엄한 것에 놀라 기가 죽어서 쩔쩔 맸다. 태종은 신라의 사신이 매우 한심해 보였다.
“신라 사신은 국서(國書)부터 올려라!”
국서의 내용을 보니 고구려와 백제가 담합하여 계속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므로 나라의 존망을 점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당나라의 강력한 힘으로 신라를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태종이 수품에게 물어보았다.
“그대 나라인 신라에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에 대해 뾰족한 대책이 있느냐?”
신라의 사신 수품이 대답했다.
“계책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천자(天子)께서는 우리 신라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태종은 수품이 너무도 못나고 대화 상대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매우 답답했다.
“짐에게 세 가지 계책이 있으니 너는 잘 들어보아라! 첫째는 짐이 변방의 군사를 조금 보내 거란·말갈의 군사와 더불어 요동을 친다면, 한 일년 동안은 포위가 풀여 너희 신라가 편할 것이다. 하지만 짐이 계속 군사를 보내지 않으면 고구려와 백제가 다시 기승을 부려 너희가 더욱 괴롭게 되겠지. 둘째는 짐이 너희에게 우리 군사가 사용하는 붉은 군복과 군기 수천벌을 보내 너희가 이를 사용하면 저들이 보고 천병(天兵)이 온 줄 알고 반드시 놀라 달아날 것이다. 셋째는 너희가 여자를 임금으로 삼았으므로 고구려와 백제가 깔보고 자주 침범하는 것이다. 하여 짐이 친척 한명을 보내서 너희 신라의 국왕으로 옹립하는 것이다. 그 후 나라가 안정되면 신라가 자력으로도 안보를 굳건히 할 수 있게 된다. 너는 이 세가지 계책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하겠느냐?”
수품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예, 예…” 하면서 어물거렸다. 그런 모습을 본 태종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만 물러가라고 손을 휘저었다.
태종은 이듬해 정월에 사농승상(司農丞相) 이현장(里玄奬)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런데 당나라에서 사신이 오고 있다는 것을 미리 보고받은 연개소문은 병마원수 고량·대모달 두방루 등과 더불어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쪽 국경으로 나아가 신라의 변경을 쳐서 성을 2개나 함락시켰다. 당나라가 무슨 요구를 하든 무시하겠다는 의도였다.
당나라의 사신이 평양에 도착하자 보장태왕은 연개소문에게 사람을 보내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연개소문은 태종이 종6품 사농승상 정도의 하급관리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낸 것에 분개하고 있었다.
당사(唐使) 이현장은 연개소문이 평양으로 돌아올 때까지 객관에서 며칠간 기다려야 했다. 연개소문이 도성에 개선하자 이현장은 궁궐 안 조그만 방에 안내되어 연개소문과 마주앉았다.
연개소문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그래, 그대가 당사인가? 고구려의 도성에는 무슨 용건으로 먼 길을 왔는가?”
드디어 이현장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저희 폐하의 조서를 갖고 왔는데 내용은 이미 우리 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는 신라를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고구려가 신라를 자꾸 침범한다면 대당제국의 군사들이 이를 응징하려고 출전하게 될 것입니다.”
“신라는 우리 고구려의 천하 속에 있는 나라다. 당(唐)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옛날 우리가 수(隨)의 침략을 받았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 우리 땅 오백리를 빼앗았다. 지금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전쟁을 중지할 수 없다. 게다가 작년에 김춘추란 자가 와서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는 감감 무소식이니 내가 어찌 이들을 가만히 두겠는가?”
“이제 와서 지난 일을 따지면 무엇하겠습니까? 사실 요동의 여러 성들도 본래는 우리 중국의 군현(郡縣)이었지만 우리는 돌려달라고 하지 않는데, 어찌 고구려만 옛 땅을 돌려달라는 겁니까?”
이현장의 어불성설(語不成說)에 연개소문이 고리눈을 부릅뜨고 냅다 호통을 친다.
“이런 형편없는 서토의 똥되놈을 봤나! 요동은 본래 우리 선조의 나라인 조선과 부여의 영토였으며, 우리 민족의 시조이신 왕검(王儉) 단군(檀君)께서 새 나라를 창업하신 땅이니라! 그것을 너희 조상인 유철(劉徹)이 강탈하여 제멋대로 사군(四郡)을 설치했던 것이다. 너는 돌아가서 너희 왕에게 나 연개소문의 말을 똑바로 전하거라! 당이 요동을 넘본다면 우리는 중원본토로 쳐들어가 장안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다.”
유철이란 한(漢) 세종(世宗)의 휘(諱)였다.
이현장은 연개소문의 분노를 지켜보면서 대체 어디에서 저런 자신감과 자만심이 나오는지 궁금하고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이현장은 연개소문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말을 듣지 않으시면 또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고정하시고 참으십시오.”
“허어, 이놈아! 전쟁으로 이 연개소문과 우리 고구려를 협박하려 들 셈이냐? 가서 당주(唐主) 이세민(李世民)에게 전해라. 올 테면 와 봐라! 대신 이세민이 직접 오라고 전해라. 내가 이세민을 사로잡아서 패수(浿水)의 물을 먹여주겠다!”
이현장은 두려움에 떨었다. 보장태왕도 알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이현장이 장안으로 돌아와서 평양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아뢰자 태종은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격노했다. 그래도 태종은 대국의 천자라는 체면에 한번만 더 참기로 했다. 고구려를 정벌할 명분도 더 쌓는 셈치고 이번에는 장엄(藏儼)이라는 자를 고구려에 칙사로 보냈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장엄을 만나주지도 않고 토굴 속에 가두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보고를 받은 태종은 이를 부득부득 갈고 천장이 낮다고 펄쩍펄쩍 뛰면서 분노했다.
“아니, 이런 천하에 무지무식한 놈을 봤나! 감히 천자가 보낸 사신을 잡아 가두다니, 짐을 능멸해도 분수가 있지! 이 괘씸한 개소문, 내가 평양을 함락하고 그 놈의 목을 베어 소금에 절이고 말리라!”
그 해 644년 7월에 태종은 고구려 원정 결심을 완전히 굳히고 준비에 착수했다. 먼저 홍주·영주·강주 3개 주에 명해 전함 4백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도독 장검(張儉)에게 명해 영주·유주의 군사로써 요서에 거주하는 거란·말갈·해족을 단속하는 한편 요동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대비태세를 시험토록 했다. 또 대리경 위정(韋挺)을 군수물자 육로 수송 책임자로, 태복소경 소예(蕭銳)를 해로 수송 책임자로 임명했다.
11월이 되자 마침내 전쟁 준비가 완전히 끝났다고 나름대로 판단한 태종은 낙양궁(洛陽宮)에서 고구려 정벌을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고구려의 역적 연개소문이 제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기 나라의 임금을 시해하고 대신들을 학살했다. 이로 인해 고구려의 민심이 크게 이완되었다. 요동은 본시 우리 중국의 영토인데 수씨(隨氏)가 네 번이나 군사를 출동시켰지만 이것을 찾지 못했다. 짐이 지금 동이(東夷)를 정벌하려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는 전사자 자제들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며, 고구려에 대해서는 죽임을 당한 전왕(前王)을 위해 설치(雪恥)하려는 것뿐이다. 또 지금 사방이 대체로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평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짐이 더 늙기 전에 백관(百官)의 힘을 모아 이 땅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다.”
태종 이세민이 말한 요지는 영류태왕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을 처벌하고 아직도 신복(臣僕)하지 않는 고구려를 정벌하여 당나라의 속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당나라 중심의 세계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고구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언어도단(言語道斷)에 불과한 명분으로 당나라가 오늘날 미국처럼 무슨 국제경찰의 역할을 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지난 626년 7월 2일에 장안성 현무문(玄武門)에서 유혈 정변을 일으켜 친형인 태자 이건성과 아우 이원길을 살해하고 아버지 이연을 협박하여 황제 자리를 찬탈한 천하의 패륜아가 바로 이세민이었다. 이야말로 제가 하면 순정이고 연개소문이 하면 불륜이란 식의 뻔뻔하고 낯 두꺼운 헛소리였다.
태종은 이듬해 3월에 정주에 이르러서 고구려 정벌에 참전하는 장수들에게 작전 임무를 맡겼다. 개국공신이며 역전의 노장인 병부상서 겸 태자첨사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임명해 보병과 기병 6만명과 난주·하주의 항복한 돌궐족 등 이민족 군사를 거느리고 유주로 집결토록 했고,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임명해 강주·회주·영주·협주 등지의 군사 4만명과 장안·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명과 전함 5백척을 거느리고 산동성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진격토록 했다. 또한 행군총감 강행본(江行本)과 소감 구행엄(丘行淹)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공성기구를 만들게 했다.
이렇게 하여 668년에 고구려가 패망할 때까지 장장 24년에 걸친 여당전쟁(麗唐戰爭)의 역사적인 막이 올랐다.
「 ‘바다의 여왕’ 연수영 」(평해거사 황원갑 원작·정천 김재암 편작)3제1차 여당전쟁의 개전 ⑴
● 용호상박(龍虎相搏)
유혈혁명으로 고구려 최고의 권력자가 된 연개소문(淵蓋蘇文)이 혼란스러운 나라 안 분위기를 수습하고 당의 침략에 대비하는 동안 당황(唐皇)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연 2백만의 인력을 동원해 자신의 별궁인 양성궁(襄城宮)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혹독한 부역(賦役)에 시달리게 된 백성들은 태종의 사치에 원성을 높였다. 그러나 태종은 자신이 중국의 어느 역대 황제보다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어진 군주라고 착각했다. 태종은 자신이 진정한 천하의 제왕이 되기 위해서는 고구려를 반드시 정복해야 한다고 여겼다.
수나라가 문제(文帝)·양제(煬帝) 2대에 걸쳐 네 차례나 침략했으나 실패한 고구려, 그래서 결국 수나라를 망하게 만든 고구려를 태종은 자신이 중원의 통치자로 군림하는 동안 반드시 정벌하여 속국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결심했다.
‘하늘에 해가 하나밖에 없듯이 지상에도 황제는 한 명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건방지게도 동북 변방의 오랑캐 주제에 고구려의 임금이 신라·백제·말갈(靺鞨)·거란(契丹) 등 주변국 사이에서는 천자(天子) 노릇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거야말로 유일한 황제의 나라 중국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도전이요 그지없는 불경이 아니고 무엇인가!’
태종은 고구려에 정권이 바뀐 틈을 타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치고 싶었으나 아직은 당나라의 국력이 부족한 탓에 우선 정보수집을 위해서 영류태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문사(弔問使)를 보내는 것으로 그쳐야 했다.
643년 9월에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그 당시 신라는 계속되는 고구려와 백제의 위협으로 인해 전년도에 빼앗겼던 서부 40여성과 대야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와의 협상에서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덕여왕(善德女王)은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왜국에 상대등(上大等) 을제(乙祭)를 사신으로 급파하였다. 마침 왜국에서는 황극왕(皇極王)이 새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축하사절을 보낼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왜국에는 벌써 고구려와 백제의 사신이 와서 왜국 조정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간 뒤였다. 신라의 사신은 풍랑으로 인해 즉위 축하행사가 이미 끝난 후에 도착하고 말았다. 왜국에서는 신라 사신에 대해 단 한차례 잔치도 열어주지 않았다. 왜국과도 실패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당나라로 보낸 신라의 사신인 이찬(伊飡) 수품(水品)이었다. 그는 김춘추의 외교 실패를 잘 알고 오직 당과의 협조만이 신라가 사는 길이란 생각에만 가득 차, 협상의 원칙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태종을 만난 자리에서 조급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찬 수품은 장안에 도착해서 당나라의 궁궐이 화려하고 장엄한 것에 놀라 기가 죽어서 쩔쩔 맸다. 태종은 신라의 사신이 매우 한심해 보였다.
“신라 사신은 국서(國書)부터 올려라!”
국서의 내용을 보니 고구려와 백제가 담합하여 계속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므로 나라의 존망을 점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당나라의 강력한 힘으로 신라를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태종이 수품에게 물어보았다.
“그대 나라인 신라에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에 대해 뾰족한 대책이 있느냐?”
신라의 사신 수품이 대답했다.
“계책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천자(天子)께서는 우리 신라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태종은 수품이 너무도 못나고 대화 상대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매우 답답했다.
“짐에게 세 가지 계책이 있으니 너는 잘 들어보아라! 첫째는 짐이 변방의 군사를 조금 보내 거란·말갈의 군사와 더불어 요동을 친다면, 한 일년 동안은 포위가 풀여 너희 신라가 편할 것이다. 하지만 짐이 계속 군사를 보내지 않으면 고구려와 백제가 다시 기승을 부려 너희가 더욱 괴롭게 되겠지. 둘째는 짐이 너희에게 우리 군사가 사용하는 붉은 군복과 군기 수천벌을 보내 너희가 이를 사용하면 저들이 보고 천병(天兵)이 온 줄 알고 반드시 놀라 달아날 것이다. 셋째는 너희가 여자를 임금으로 삼았으므로 고구려와 백제가 깔보고 자주 침범하는 것이다. 하여 짐이 친척 한명을 보내서 너희 신라의 국왕으로 옹립하는 것이다. 그 후 나라가 안정되면 신라가 자력으로도 안보를 굳건히 할 수 있게 된다. 너는 이 세가지 계책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하겠느냐?”
수품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예, 예…” 하면서 어물거렸다. 그런 모습을 본 태종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만 물러가라고 손을 휘저었다.
태종은 이듬해 정월에 사농승상(司農丞相) 이현장(里玄奬)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런데 당나라에서 사신이 오고 있다는 것을 미리 보고받은 연개소문은 병마원수 고량·대모달 두방루 등과 더불어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쪽 국경으로 나아가 신라의 변경을 쳐서 성을 2개나 함락시켰다. 당나라가 무슨 요구를 하든 무시하겠다는 의도였다.
당나라의 사신이 평양에 도착하자 보장태왕은 연개소문에게 사람을 보내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연개소문은 태종이 종6품 사농승상 정도의 하급관리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낸 것에 분개하고 있었다.
당사(唐使) 이현장은 연개소문이 평양으로 돌아올 때까지 객관에서 며칠간 기다려야 했다. 연개소문이 도성에 개선하자 이현장은 궁궐 안 조그만 방에 안내되어 연개소문과 마주앉았다.
연개소문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그래, 그대가 당사인가? 고구려의 도성에는 무슨 용건으로 먼 길을 왔는가?”
드디어 이현장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저희 폐하의 조서를 갖고 왔는데 내용은 이미 우리 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는 신라를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고구려가 신라를 자꾸 침범한다면 대당제국의 군사들이 이를 응징하려고 출전하게 될 것입니다.”
“신라는 우리 고구려의 천하 속에 있는 나라다. 당(唐)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옛날 우리가 수(隨)의 침략을 받았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 우리 땅 오백리를 빼앗았다. 지금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전쟁을 중지할 수 없다. 게다가 작년에 김춘추란 자가 와서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는 감감 무소식이니 내가 어찌 이들을 가만히 두겠는가?”
“이제 와서 지난 일을 따지면 무엇하겠습니까? 사실 요동의 여러 성들도 본래는 우리 중국의 군현(郡縣)이었지만 우리는 돌려달라고 하지 않는데, 어찌 고구려만 옛 땅을 돌려달라는 겁니까?”
이현장의 어불성설(語不成說)에 연개소문이 고리눈을 부릅뜨고 냅다 호통을 친다.
“이런 형편없는 서토의 똥되놈을 봤나! 요동은 본래 우리 선조의 나라인 조선과 부여의 영토였으며, 우리 민족의 시조이신 왕검(王儉) 단군(檀君)께서 새 나라를 창업하신 땅이니라! 그것을 너희 조상인 유철(劉徹)이 강탈하여 제멋대로 사군(四郡)을 설치했던 것이다. 너는 돌아가서 너희 왕에게 나 연개소문의 말을 똑바로 전하거라! 당이 요동을 넘본다면 우리는 중원본토로 쳐들어가 장안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다.”
유철이란 한(漢) 세종(世宗)의 휘(諱)였다.
이현장은 연개소문의 분노를 지켜보면서 대체 어디에서 저런 자신감과 자만심이 나오는지 궁금하고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이현장은 연개소문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말을 듣지 않으시면 또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고정하시고 참으십시오.”
“허어, 이놈아! 전쟁으로 이 연개소문과 우리 고구려를 협박하려 들 셈이냐? 가서 당주(唐主) 이세민(李世民)에게 전해라. 올 테면 와 봐라! 대신 이세민이 직접 오라고 전해라. 내가 이세민을 사로잡아서 패수(浿水)의 물을 먹여주겠다!”
이현장은 두려움에 떨었다. 보장태왕도 알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이현장이 장안으로 돌아와서 평양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아뢰자 태종은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격노했다. 그래도 태종은 대국의 천자라는 체면에 한번만 더 참기로 했다. 고구려를 정벌할 명분도 더 쌓는 셈치고 이번에는 장엄(藏儼)이라는 자를 고구려에 칙사로 보냈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장엄을 만나주지도 않고 토굴 속에 가두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보고를 받은 태종은 이를 부득부득 갈고 천장이 낮다고 펄쩍펄쩍 뛰면서 분노했다.
“아니, 이런 천하에 무지무식한 놈을 봤나! 감히 천자가 보낸 사신을 잡아 가두다니, 짐을 능멸해도 분수가 있지! 이 괘씸한 개소문, 내가 평양을 함락하고 그 놈의 목을 베어 소금에 절이고 말리라!”
그 해 644년 7월에 태종은 고구려 원정 결심을 완전히 굳히고 준비에 착수했다. 먼저 홍주·영주·강주 3개 주에 명해 전함 4백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도독 장검(張儉)에게 명해 영주·유주의 군사로써 요서에 거주하는 거란·말갈·해족을 단속하는 한편 요동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대비태세를 시험토록 했다. 또 대리경 위정(韋挺)을 군수물자 육로 수송 책임자로, 태복소경 소예(蕭銳)를 해로 수송 책임자로 임명했다.
11월이 되자 마침내 전쟁 준비가 완전히 끝났다고 나름대로 판단한 태종은 낙양궁(洛陽宮)에서 고구려 정벌을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고구려의 역적 연개소문이 제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기 나라의 임금을 시해하고 대신들을 학살했다. 이로 인해 고구려의 민심이 크게 이완되었다. 요동은 본시 우리 중국의 영토인데 수씨(隨氏)가 네 번이나 군사를 출동시켰지만 이것을 찾지 못했다. 짐이 지금 동이(東夷)를 정벌하려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는 전사자 자제들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며, 고구려에 대해서는 죽임을 당한 전왕(前王)을 위해 설치(雪恥)하려는 것뿐이다. 또 지금 사방이 대체로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평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짐이 더 늙기 전에 백관(百官)의 힘을 모아 이 땅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다.”
태종 이세민이 말한 요지는 영류태왕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을 처벌하고 아직도 신복(臣僕)하지 않는 고구려를 정벌하여 당나라의 속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당나라 중심의 세계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고구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언어도단(言語道斷)에 불과한 명분으로 당나라가 오늘날 미국처럼 무슨 국제경찰의 역할을 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지난 626년 7월 2일에 장안성 현무문(玄武門)에서 유혈 정변을 일으켜 친형인 태자 이건성과 아우 이원길을 살해하고 아버지 이연을 협박하여 황제 자리를 찬탈한 천하의 패륜아가 바로 이세민이었다. 이야말로 제가 하면 순정이고 연개소문이 하면 불륜이란 식의 뻔뻔하고 낯 두꺼운 헛소리였다.
태종은 이듬해 3월에 정주에 이르러서 고구려 정벌에 참전하는 장수들에게 작전 임무를 맡겼다. 개국공신이며 역전의 노장인 병부상서 겸 태자첨사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임명해 보병과 기병 6만명과 난주·하주의 항복한 돌궐족 등 이민족 군사를 거느리고 유주로 집결토록 했고,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임명해 강주·회주·영주·협주 등지의 군사 4만명과 장안·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명과 전함 5백척을 거느리고 산동성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진격토록 했다. 또한 행군총감 강행본(江行本)과 소감 구행엄(丘行淹)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공성기구를 만들게 했다.
이렇게 하여 668년에 고구려가 패망할 때까지 장장 24년에 걸친 여당전쟁(麗唐戰爭)의 역사적인 막이 올랐다.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