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金佐鎭)은 1901년에 당숙인 김창규(金昌圭)의 주선으로 오일영(吳鎰泳)의 딸인 오숙근(吳淑根)과 혼인하였다. 어려서부터 무관(武官)으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하겠다는 뜻을 가졌던 그는 1902년 5월에 서울로 올라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大韓帝國陸軍武官學校)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나라 사정은 김좌진에게 교육을 받는 일에만 전념할 수 없게 만들었다.
1903년 1월에 미국 해병대가 서울에 들어오고 5월에는 러시아의 해군이 압록강구 용암포(龍岩浦)를 점령한 뒤 목재회사를 설립해 평안도의 산림을 마음대로 훼손하는가 하면 일본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6월에 대한제국 정부를 강압하여 의주(義州)의 개항을 성사시켰다. 이듬해 1월이 되자 일본은 러시아와의 국교를 단절했으며 2월 초에 일본의 군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에 진주했다. 그리고 뤼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의 군함들이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음으로써 러일전쟁(露日戰爭)이 개전(開戰)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한국 주재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한국의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은 2월 23일에 일한의정서(日韓議政書)를 조인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치안·군사·외교 분야에서 일본과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독자적으로 정책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러시아 측과 체결했던 모든 조약이 무효처리되고 러시아 사람들에게 부여됐던 모든 이권이 폐기·취소되었다.
한반도를 향한 일본의 영향력이 증가하게 되자 김좌진이 재학중인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도 점차 일본인 교관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김좌진은 처음에는 일본인 교관 밑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것에 반감을 갖게 되었으나 장차 무력(武力)을 길러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일본식 군사운용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겨 민족주의적 감성으로 굴욕을 참으며 착실히 교육과정을 밟았다.
러일전쟁은 점점 일본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5월에는 일본군이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九連城)과 봉황성을 함락시키고 요양(遼陽)에서 러시아군과 대접전(大接戰)을 벌였다. 9월에는 러시아군이 봉천전투(奉天戰鬪)에서 10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며 참패했고 이듬해 1월에는 뤼순항이 점령되었다. 그리고 5월 27일에 일본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러시아 해군의 발틱함대를 궤멸시키고 로제스트벤스키[Z.P.Rozhestvensky] 제독을 포로로 삼는 대마도해전(對馬島海戰)의 승리를 이끌어 사실상 일본은 이 전쟁의 승전국(勝戰國)이 되었다.
한반도와 남만주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된 일본은 경성의 치안권을 박탈하고 친위대(親衛隊)를 폐지하여 한국 군대의 인원을 감축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7월에는 일본의 내각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테오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특사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장관이 비밀회담을 가져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용인하고 심지어 지원까지 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이어 일본은 8월에 영일동맹(英日同盟)을 맺고 9월에는 포츠머스조약(Treaty of Portsmouth)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보호와 지도를 승인받게 된다.
1905년 11월 일본 추밀원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의장이 서울을 방문하여 고종(高宗) 황제와 한국의 대신들을 협박하면서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권중현(權重顯) 등의 동의를 얻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에 성공하고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을 두어 한국을 일본의 반식민지(半植民地) 형태로 만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송병선(宋秉璿) 등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국권침탈에 대한 분노를 표시했으며,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사장인 장지연(張志淵)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써서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고조시켰다. 또 을사늑약 체결에 반발하여 유생과 민중이 궐기하는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태백산 일대에서는 신돌석(申乭石)의 의병부대가 활동하면서 일본 경찰대를 습격하고 일본 어민들을 살해하는 유격전(遊擊戰)을 벌였으며, 영남 지역에서는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가장 치열한 항일투쟁(抗日鬪爭)을 펼쳤다. 전남 태인에서는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최익현(崔益鉉)이 봉기하였으며, 경상도의 예안에서는 김도현(金道鉉)이 거의(擧義)를 선언하고 의병항쟁의 대열에 가세하였다.
나라의 존립이 위태롭게 되자 김좌진은 더 이상 육군무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는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무관학교의 생도가 된 지 2년만에 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일본의 야욕으로 이 나라의 운명이 아득히 어두운데 아직까지 고루한 신분차별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이제 오랫동안 내가 생각해온 것들을 실천에 옮겨야 할 때다.’
김좌진은 우선 종조부(從祖父)인 김병원(金炳嫄)의 집을 찾았다. 내당(內堂)으로 들어서니 기골이 장대하고 도포를 입은 노인 하나가 좌진을 반긴다.
“넌 형규의 아들 좌진이가 아니냐?”
김좌진이 넙죽 큰 절을 올리자 김병원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의 손목을 잡는다.
“이제 너도 제법 어른이 되었구나. 육군무관학교에 다닌다면서?”
“네, 그런데 무관학교에서 수업받으면서 나라 꼴이 하도 수치스럽게 돌아가고 있기에 그 모습을 보기가 싫어 공부를 다 마치지 않고 되돌아왔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수년 전부터 이 나라에 타국(他國)의 관리와 군인들이 들어와 서로 이권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상황에서 우리 나라의 조정은 아무 말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는 실정입니다. 요즘은 왜놈들이 득세하여 이 나라의 권력을 다 쥐고 제멋대로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군대는 왜놈들과 싸울 생각을 안 하고 도리어 왜놈들을 공격하려고 봉기한 의병들과 싸우고 있으니 만약 저도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된다면 왜놈들의 명령을 받고 의병과 싸우러 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싫어서 무관학교를 나왔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무관학교를 그만 둔 것은 너무 성급했다. 좌진이 네 말이 옳다만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궁성에 왜놈들이 침입하여 국모가 살해되는 판국이니 어찌 하겠느냐?”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를 보아도 군왕이 된 자는 무치(武治)라 하여 후궁이나 빈, 궁녀들을 마음대로 농락해도 그 아들들은 다 군(君)으로 봉하고 조금 낮은 사대부들도 첩들을 허용했음에도 첩에서 낳은 자식들은 서출이라 하여 과거도 못보게 했으니 양반이 저질러 놓고 양반이 그 대가를 받는 것이지요. 다 같은 사람인데 누구는 양반이라 하여 귀한 대접을 받고 누구는 상놈이라 하여 천한 신분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니 어떻게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겠습니까?”
김좌진의 입에서는 세도정치로 유명한 사대부 가문의 자제에게서 절대 나오기 힘든 파격적인 주장이 토해지고 있었다.
“너 그게 무슨 말이냐?”
김병원의 얼굴에는 경악의 빛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김좌진의 표정은 수심이 가득했다.
‘역시 종조부님도 세상이 변하고 나라가 어지럽다는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시는 분이로구나. 내가 하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겠어.’
그 길로 집으로 돌아오는 김좌진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말 한필에 의지하여 대문 앞에 이르니 아내 오숙근이 밖으로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나 김좌진은 생기를 잃은 표정으로 식사마저 거른 채 방 안에 들어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내와 어머니는 그런 김좌진의 모습을 지켜보며 영문을 모른 채 걱정했지만 하늘에서는 시간이 흐르자 어둠을 내리깔며 하루를 정리하고 다음날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1홍성의 꿈나무 ⑶
★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열강의 군사적 개입
김좌진(金佐鎭)은 1901년에 당숙인 김창규(金昌圭)의 주선으로 오일영(吳鎰泳)의 딸인 오숙근(吳淑根)과 혼인하였다. 어려서부터 무관(武官)으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하겠다는 뜻을 가졌던 그는 1902년 5월에 서울로 올라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大韓帝國陸軍武官學校)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나라 사정은 김좌진에게 교육을 받는 일에만 전념할 수 없게 만들었다.
1903년 1월에 미국 해병대가 서울에 들어오고 5월에는 러시아의 해군이 압록강구 용암포(龍岩浦)를 점령한 뒤 목재회사를 설립해 평안도의 산림을 마음대로 훼손하는가 하면 일본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6월에 대한제국 정부를 강압하여 의주(義州)의 개항을 성사시켰다. 이듬해 1월이 되자 일본은 러시아와의 국교를 단절했으며 2월 초에 일본의 군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에 진주했다. 그리고 뤼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의 군함들이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음으로써 러일전쟁(露日戰爭)이 개전(開戰)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한국 주재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한국의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은 2월 23일에 일한의정서(日韓議政書)를 조인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치안·군사·외교 분야에서 일본과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독자적으로 정책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러시아 측과 체결했던 모든 조약이 무효처리되고 러시아 사람들에게 부여됐던 모든 이권이 폐기·취소되었다.
한반도를 향한 일본의 영향력이 증가하게 되자 김좌진이 재학중인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도 점차 일본인 교관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김좌진은 처음에는 일본인 교관 밑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것에 반감을 갖게 되었으나 장차 무력(武力)을 길러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일본식 군사운용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겨 민족주의적 감성으로 굴욕을 참으며 착실히 교육과정을 밟았다.
러일전쟁은 점점 일본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5월에는 일본군이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九連城)과 봉황성을 함락시키고 요양(遼陽)에서 러시아군과 대접전(大接戰)을 벌였다. 9월에는 러시아군이 봉천전투(奉天戰鬪)에서 10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며 참패했고 이듬해 1월에는 뤼순항이 점령되었다. 그리고 5월 27일에 일본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러시아 해군의 발틱함대를 궤멸시키고 로제스트벤스키[Z.P.Rozhestvensky] 제독을 포로로 삼는 대마도해전(對馬島海戰)의 승리를 이끌어 사실상 일본은 이 전쟁의 승전국(勝戰國)이 되었다.
한반도와 남만주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된 일본은 경성의 치안권을 박탈하고 친위대(親衛隊)를 폐지하여 한국 군대의 인원을 감축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7월에는 일본의 내각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테오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특사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장관이 비밀회담을 가져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용인하고 심지어 지원까지 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이어 일본은 8월에 영일동맹(英日同盟)을 맺고 9월에는 포츠머스조약(Treaty of Portsmouth)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보호와 지도를 승인받게 된다.
1905년 11월 일본 추밀원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의장이 서울을 방문하여 고종(高宗) 황제와 한국의 대신들을 협박하면서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권중현(權重顯) 등의 동의를 얻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에 성공하고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을 두어 한국을 일본의 반식민지(半植民地) 형태로 만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송병선(宋秉璿) 등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국권침탈에 대한 분노를 표시했으며,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사장인 장지연(張志淵)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써서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고조시켰다. 또 을사늑약 체결에 반발하여 유생과 민중이 궐기하는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태백산 일대에서는 신돌석(申乭石)의 의병부대가 활동하면서 일본 경찰대를 습격하고 일본 어민들을 살해하는 유격전(遊擊戰)을 벌였으며, 영남 지역에서는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가장 치열한 항일투쟁(抗日鬪爭)을 펼쳤다. 전남 태인에서는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최익현(崔益鉉)이 봉기하였으며, 경상도의 예안에서는 김도현(金道鉉)이 거의(擧義)를 선언하고 의병항쟁의 대열에 가세하였다.
나라의 존립이 위태롭게 되자 김좌진은 더 이상 육군무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는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무관학교의 생도가 된 지 2년만에 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일본의 야욕으로 이 나라의 운명이 아득히 어두운데 아직까지 고루한 신분차별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이제 오랫동안 내가 생각해온 것들을 실천에 옮겨야 할 때다.’
김좌진은 우선 종조부(從祖父)인 김병원(金炳嫄)의 집을 찾았다. 내당(內堂)으로 들어서니 기골이 장대하고 도포를 입은 노인 하나가 좌진을 반긴다.
“넌 형규의 아들 좌진이가 아니냐?”
김좌진이 넙죽 큰 절을 올리자 김병원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의 손목을 잡는다.
“이제 너도 제법 어른이 되었구나. 육군무관학교에 다닌다면서?”
“네, 그런데 무관학교에서 수업받으면서 나라 꼴이 하도 수치스럽게 돌아가고 있기에 그 모습을 보기가 싫어 공부를 다 마치지 않고 되돌아왔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수년 전부터 이 나라에 타국(他國)의 관리와 군인들이 들어와 서로 이권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상황에서 우리 나라의 조정은 아무 말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는 실정입니다. 요즘은 왜놈들이 득세하여 이 나라의 권력을 다 쥐고 제멋대로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군대는 왜놈들과 싸울 생각을 안 하고 도리어 왜놈들을 공격하려고 봉기한 의병들과 싸우고 있으니 만약 저도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된다면 왜놈들의 명령을 받고 의병과 싸우러 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싫어서 무관학교를 나왔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무관학교를 그만 둔 것은 너무 성급했다. 좌진이 네 말이 옳다만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궁성에 왜놈들이 침입하여 국모가 살해되는 판국이니 어찌 하겠느냐?”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를 보아도 군왕이 된 자는 무치(武治)라 하여 후궁이나 빈, 궁녀들을 마음대로 농락해도 그 아들들은 다 군(君)으로 봉하고 조금 낮은 사대부들도 첩들을 허용했음에도 첩에서 낳은 자식들은 서출이라 하여 과거도 못보게 했으니 양반이 저질러 놓고 양반이 그 대가를 받는 것이지요. 다 같은 사람인데 누구는 양반이라 하여 귀한 대접을 받고 누구는 상놈이라 하여 천한 신분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니 어떻게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겠습니까?”
김좌진의 입에서는 세도정치로 유명한 사대부 가문의 자제에게서 절대 나오기 힘든 파격적인 주장이 토해지고 있었다.
“너 그게 무슨 말이냐?”
김병원의 얼굴에는 경악의 빛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김좌진의 표정은 수심이 가득했다.
‘역시 종조부님도 세상이 변하고 나라가 어지럽다는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시는 분이로구나. 내가 하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겠어.’
그 길로 집으로 돌아오는 김좌진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말 한필에 의지하여 대문 앞에 이르니 아내 오숙근이 밖으로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나 김좌진은 생기를 잃은 표정으로 식사마저 거른 채 방 안에 들어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내와 어머니는 그런 김좌진의 모습을 지켜보며 영문을 모른 채 걱정했지만 하늘에서는 시간이 흐르자 어둠을 내리깔며 하루를 정리하고 다음날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