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기꾼이 되기로 작정했다.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연말연시에 적당히 놀면서 쓸 200만원 정도만 있으면 충분했다. 물론 다다익선, 그 이상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괜히 섣부르게 큰 탕 한번 치고 잡혀가느니 작은 껀수에서 부터 노하우를 쌓아가는 편이 안전하다. 위대한 소도둑이 되려면 바늘부터 훔치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음? 젊은 놈이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왜 하필 사기냐고? 그것은 세상의 돈은 돌고 돌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손해를 보고 산다. 나만 해도 그렇다. 온라인 중고물품거래에서 입금을 하고 물품을 못 받은 경우가 몇 번이나 있었다. 경찰에 신고를 해봐도 소용없었다. 시큰둥 몇 마디 물어보고는 담당형사는 몇 달째 연락이 없기 일쑤였고 한번도 내 돈을 돌려받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사기를 치면 안된다’는 쓸모없는 교훈을 준 것이 아니라 ‘사기를 쳐도 안 잡히는구나’하는 실용적인 교훈을 주었다.
그동안 모두가 나를 속였지만 나는 누구도 속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의 손해는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가? 돌고 도는게 돈이라는데 왜 나는 빠져나가는 돈만 있고 들어오는 돈은 없는가. 여기 저기서 사기치고 등쳐먹는데 왜 나 혼자만 등신같이 당하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여기서 나는 갈등했고 오랜 고민 끝에 깨달았다. 내가 당한 만큼 누군가가 또 당해야 나의 손해분량이 보충된다는 사실을. 나를 속인 녀석들도 어디선가 속았던 녀석들이겠거니 생가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 역시도 누군가를 속여도 된다는 면죄부가 되니까. 적어도 나는 사기꾼일망정 타인에게나 나에게나 공평한 사람인 것이다. 요컨대 세상이 육식인간과 초식인간으로 나뉜다면 나는 기꺼이 악랄한 육식인간이 되기로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사기꾼이 되기로 작정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대포폰과 대포통장을 만드는 일이었다. 대포폰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전에 운 좋게 지하철 안에서 주운 핸드폰을 들고 용산전자상가에 가보니 대포폰 만들어주는 곳은 수도 없이 널려 있었다. 그곳 기술자들은 내 핸드폰의 esn(고유번호)를 주은 핸도폰의 esn으로 등록시켜주었고 개통비 1만원에 선불3만원을 더 내니 선불폰으로 개통까지 시켜주었다. 신분증을 안 보여드려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네는 오직 믿음으로 장사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필요 없다고 했다. 무슨 사업을 하시려는지 모르지만 이정도만 하시면 경찰에서도 절대 추적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 않았다.
대포통장은 발품을 팔 필요도 없었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대포통장’ 네 글자만 치면 관련카페목록이 주루룩 떴다. 나는 그중에서 인터넷에서만 4년 넘게 장사를 했다는 믿음과 신뢰의 ‘OO상사’에 20만원을 주고 대포통장을 주문했다. 과연 한번 온 고객은 다시 찾는다는 OO상사답게 K은행의 감쪽같은 대포통장은 노숙자일 것으로 짐작되는 누군가의 주민등록증사본과 함께 다음날 제꺼덕 배달이 되었다. 자기들이 4년동안 수도 없이 많은 대포통장을 팔아봤지만 지금껏 한번도 경찰의 추적은 받은 적이 없다는 자부심 어린 쪽지도 첨부되어 있었다.
자 모든 준비는 갖추어졌다. 나는 노트북 중고거래로 유명한 N사이트에 요즘 가장 있기 있는 SONY사의 최신형 노트북을 매물로 올렸다. 그런 고가의 노트북이 나에게 있을 리가 없기에 사진은 SONY사의 홈페이지에 있는 것을 도용했다. 물론 회원가입은 대포통장의 신분으로 했고 ip추적을 피하기 위해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PC방을 이용했다.
-급매입니다. 카드값 때문에 시세보다 30만원정도 낮은 파격적인 가격으로 드립니다. 010-9920-771*으로 연락주세요
매물을 올리고 집으로 오는 중에 문의전화와 문자가 15통이 넘게 왔다. 그 중에는 지금 당장 돈 부쳐 줄테니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아달라는 어리숙한 녀석도 있었다. 이 녀석들은 도대체 뇌가 있는 것일까? 떡밥을 뿌리자마자 월척들이 서로 먼저 물겠다고 몰려드는 꼴을 보니 한심하기도 하고 왠지 뿌듯하기도 했다. 나는 가장 어리숙해 보이는 녀석을 골라잡아서 사는 지역을 물어보았다.
“저어..4호선 길음역족에 사는데여..직접 찾아 뵙고 2만원만 네고해 주시면 안될까요?”
“죄송한데예..지가 경상도거던예..마 믿고 장사하는 긴데 먼저 입금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꺼? 지도 몇 번 당한 적이 있어서 사기치는 새끼들이 젤루 싫습니더”
나는 미리 연습해둔 사투리로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경상도 사투린지 전라도 사투린지 지가 알게 뭔가.
“저..죄송한데요 그럼 일단 반액만 보내드리고 물건 받고 나머지 드리면 안될까요?”
“마 사람을 그리 못믿습니꺼? 싫음 마이소. 지금 5명이 넘게 차례 기다리고 있습니더”
“저..그래도..”
“마 좋십니더. 까짓 2만원 네고해 드리고 택배비도 제가 내겠심더. 됐지예?”
정확히 5분후 내 대포통장 계좌에 230만원이 입금되었다. 나는 CCTV를 의식하여 머플러와 모자, 선글라스로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집에서 지하철로 5정거 떨어진 K은행지점으로 가서 금액을 모조리 인출했다. 물품을 부치고 송장번호를 알려달라는 문자가 온다. 당연히 송장번호는 알려주어야지. 재화란 돌고 도는 것. 받는게 있으면 주는게 있어야 한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꽤나 공평하고 양심적인 사람인 것이다.
나는 집에 오자마자 베란다에 굴러다니는 짱돌을 아무거나 하나 집어서 박스에 넣고 택배로 부쳤다. 모양도 넙죽하고 무게도 적당한게 노트북 대용품으론 딱이었다. 택배비 5천원이 추가로 깨지긴 했지만 230만원이나 주셨는데 그깟 5천원이 아까우랴. 최소한 박스를 받아서 테이프를 찢고 제품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가슴 떨리는 희망과 용기를 줘야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나는 그 작은 기쁨마저 빼앗을 정도로 악랄한 사기꾼은 못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세상엔 우리가 모르는 신비가 많다. 연말연시라 배송이 오래걸리다보니 노트북이 오는 도중 화석으로 변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나는 고객에게 친절하게 송장번호까지 문자로 보내주고 나서 곧바로 대포폰을 해지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다음 껀수에 가입비가 좀 더 들더라도 이 방법이 안전했다. 히트 앤드 런!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아라!
오랜만에 주머니가 두둑해진 나는 그동안 얻어 먹고 다녔던 친구들을 모아 오랜만에 단란에서 거하게 한방 쏘았다. 원양어선 타고 돌아온 뱃놈이라도 되는 양 전대를 풀어놓고 돈을 써대는 나를 보고 친구 놈들은 돈벼락이라도 맞았느냐고 놀라워했다. 이제야 비로소 돈이 순리대로 도는 것을 실감하며 나는 여자파트너의 젖통을 신나게 빨았다.
주점에서 밤을 꼴딱 세우고 다음날 아침 집에 돌아갔을 때, 집에는 낯선 남자가 수첩을 꺼내들고 서성이고 있었다. 거칠어 보이는 인상의 턱수염이 텁수룩한 남자는 나에게 자신을 ‘강형사’라고 소개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디에서 꼬리가 잡힌걸까. 어제 하루동안 내가 저지렀을지도 모를 실수를 곰곰이 되집어 보였다. 없다. 아무데서도 꼬투리를 잡힐 건덕지가 없다. 더구나 아직까지 물품을 배송중일 터였다. 나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 강형사가 대답했다.
“어저께에 댁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댁에 아버님께서 애지중지 하시던 2천만원짜리 수석을 집어갔더군요. 허 참, 안 그래도 도둑이 집어 갈까봐 베란다에 평범한 돌덩이처럼 위장해 놓으셨다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쏙 집어갔는지...혹시 짐작가시는 분 없으십니까? 자주 드나들던 이웃집사람 이라든지..”
[스압주의] 추천 공포소설 몇가지
안녕하세요.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재밌게 본 글들 모아봤어요.
대부분 웃대에서 퍼온 글이 많네요. ㅎㅎ
그냥 혼자 보기 아까워서 올립니다. 재밌게 보세요~~
스압좀 있습니다.
p.s 중복글 있더라도 양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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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이야기 - 불청객
(작가: 웃대 도모토리)
“댕, 댕, 댕, 댕, ….”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자정을 알리고 있었다. 어둠이 잔뜩 실려 있는
공허한 거실 내부엔 간헐적으로 울려퍼지는 시계 종소리만이 유일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덕구는 듣기 싫은 소음을 피해 이불을 뒤집어썼다.
종소리는 느린 속도로 정확히 열두 번 그의 귀를 갈갈이 찢어
놓더니 이윽고 요란한 소리를 멈추었다.
열두번의 소리가 모두 울리자 그는 이불 속에서 빠끔히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비비며 방문을 열었다.
황량한 느낌마저 감도는 거실 모퉁이엔 그의 아내가 들여 놓은
커다란 괘종시계가 요지부동의 자세로 우두커니 모습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잠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버릇처럼
베란다로 향하였다.
베란다엔 화단에 심어 놓은 작은 아카시아 나무의 수수한 향이
물씬 베어있었다. 감미로운 향을 음미하며 덕구는 베란다 너머
로 휘황찬란하게 쏟아지는 달빛을 유유히 바라보며 잠시 사색
에 잠겼다.
“딩동!”
베란다에서 나온 그가 주방으로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별
안간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그는 흠칫 놀라며 현관을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누구지?’
인터폰 속에는 밝은 베이지색 야구 모자를 푹 눌러 쓴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누구시죠?”
“소포 왔습니다.”
‘소포?’ 덕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소포라니요?”
“추석 연휴로 인하여 배달이 많이 지연될 수 있기 때문에, 일찍 주문
하신 물품은 일정보다 미리 배송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내는 주구장창 중얼거렸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배달량이 많아서요. 그러다 보니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배송이 지체되었습니다. 밤늦은 시간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잠을 설치던 차였는데.”
덕구는 그렇게 말하고 얼른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 재꼈다. 사내는
무거워 보이는 박스를 어깨에 이고 있었다.
“여기, 주문하신 물품입니다.”
그가 힘겹게 마룻바닥에 박스를 내려놓으며 말하였다. 덕구는 의아
한 얼굴로 박스를 들여다보았다. 분명 요 근래에는 물품을 주문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또 쓸 데 없는 화장품
이나 옷가지들을 주문한 것이라 생각했다.
“춥죠?”
덕구는 보은 통에 담긴 따듯한 커피 한잔을 사내에게 건내며 물
었다.
“일이 일인 만큼 정말 추위를 타는군요. 이제 겨울은 다 지났는데
도 추위는 가실 줄 모르니….”
그는 따듯한 커피 잔에 손을 녹이며 말하였다.
“밤늦게까지 고생하시네요. 저희 집이 마지막 배송인가요?”
“그렇습니다.”
사내가 커피로 몸을 녹이며 대답했다. 순간 문득 덕구의 머릿속에 무
언가가 번뜩이며 떠올랐다. 그것은 영국으로 어학연수 갔을 때 구입한
고급 양주였다. 평소 그가 워낙 닳도록 애지중지 하던 것이라 그 자신
도 몇 모금 맛을 보지 못한 술이었지만, 유독 찬장에 키핑해놓은 그
애물단지가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밤도 깊었는데, 돌아가는 길이 성치 않겠습니다. 들어와 조금 쉬었다 가시죠.”
덕구는 조심히 입실을 권하였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술 좋아하십니까?”
“좋아하다마다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잠도 안 오던 차에 이야기 친구라도 필요했는
데 잘 됐습니다. 같이 술이나 마십시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고개를 꺾고 정중히 인사하며 사내가
집 안에 발을 들여 놓았다. 덕구는 의자를 밟고 올라가 찬장 깊숙이
들여놓았던 양주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근데 저 택배 박스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덕구는 식탁 위에 양주잔을 세팅하며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가 황
당하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걸 저한테 물으시다니요. 주문하신 선생이 더 잘 알 터인데.”
사내의 말에 덕구가 가볍게 코웃음쳤다.
“아뇨. 저는 물품을 주문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아니라면 제 아
내가 주문했겠죠. 또 쓸 데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군요.”
사내는 박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덕구는 말없이 사내의 잔 한가득 양주
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공손히 술을 받는 사
내를 보고 덕구는 부드럽게 말하였다.
“너무 어려워하지 마시고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계세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덕구가 건 낸 술을 기울였다.
“근데 사모님은…?”
사내는 원샷한 양주가 독한 지 미간을 찌푸리며 덕구에게 물었다.
“아, 오늘 동창회가 있다고 늦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아, 예”
“근데 그건 왜 물으시는지?”
“아니, 선생께서는 아까 사모님이 저 박스를 주문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이곳에 있는게 사모님께 커다란 민폐가 되는게
아닌가 해서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이렇게 밤늦은 시간
에 저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불청객이잖습니까?”
“그런 걱정이라면 안 해도 됩니다. 아내는 내일 오후에나 들어
올 것이니.”
덕구는 가볍게 웃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박스를 바라보던 사내는
한시름 걱정을 놓으며 덕구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군요. 헌데 선생께서는 어떠한 직종에 몸을 담고 계십니까?”
그렇게 묻고 그는 말없이 덕구의 빈 술잔을 채웠다. “하하!” 사내
의 물음에 너털 웃음을 지으며 덕구는 쑥쓰러운 듯 먼 산을 바라보았다.
“제 작년까지는 프리랜서 작가로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출판사와의 계약이 해지되면서 손을 놓고 말았죠. 그 이후로는
이렇게 만년 백수처럼 놀고 먹고 있습니다. 하하하!”
그리고는 큰 소리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무표정한 사내의 얼굴
이 그를 더욱 머쓱하게 만들었다. 한참을 혼자 웃던 덕구는 무안한
지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주가 떨어졌네요. 땅콩 좋아하십니까?”
그는 주전부리를 찾기 위해 주방으로 향하였다.
“아, 전 괜찮습니다.”
손사래를 치며 덕구의 사려를 극구 거부하던 사내는 “집을 좀 둘러봐도
괜찮겠습니까?” 라는 말을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조근
조근 발걸음을 옮기며 어딘가로 향하였다. 다름 아닌 어둠이 자욱이 깔린
거실이었다. 덕구는 불쾌한 심정을 애써 감추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 저곳을 누비던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커다란 괘종시계 앞이었다.
그가 시계를 어루만지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대 주택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괘종시계네요.”
주방에서 안주거리를 찾던 덕구는 사내의 말에 짐짓 밝게 웃으며 대
꾸하였다.
“아내가 구입한 건데 아주 애물단지랍니다. 저것 때문에 요새 잠을
제대로 못들죠. 아주 미치겠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사내는 시계를 어루만지면서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안경을 고쳐쓰기 시작했다.
“괜찮으시다면, 선생이 쓰셨던 소설이 어떤 부류인지 말씀해주시
겠습니까?”
덕구는 한 줌 가득히 들고 있던 땅콩을 그릇에 담으며 무성의하게
되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요?”
“그냥 궁금해서요.”
“궁금하십니까? 그걸 들으신다면 저를 싸이코라 생각할 게 분명
한데두요.”
“천만에요. 말씀해보세요.”
“정 원하신다면….” 몇 번의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는 입을 열었다.
“저는 공포소설을 즐겨 씁니다만은, 혼령이나 귀신 혹은 사후세계
같은 미지의 세계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게 소설이
라는 것에는 부정할 수 없지만요. 저는 언제까지나 비현실적인 요소를
최소한으로 배제하고 최대한 사실에 입각하여 글을 씁니다. 그런 유령
이나 귀신 목격담등 다소 비현실적이고 식상할 수 있는 부분들은 현대
공포와는 거리가 멀죠.”
“그렇다면 선생께서 다루는 분야는 어떤 것들입니까?”
“음, 그렇다고 과학적으로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나 특정
대상에 대해서 쓴다고 하면 그건 설명문이나 논설문에 그치겠죠. 소설이
이 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란 바로 허구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하하! 죄송합니다. 말이 너무 어려웠나요?”
덕구는 신이 난 듯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소설의 기초 요소인 허구라는 개념을 배제하지 않은 채
최대한 사실에 입각하여 쓰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인 공포에 대해서 쓰곤 했습니다.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는 공포라던지, 두려움, 잔인성과 같은 것들요.”
“그렇다면 그런 글들의 소재는 어디서 찾는지요?”
“소재요?”
“그렇습니다.”
“음, 아무래도 소설의 컨셉이 일상적인 공포이니 만큼 일상생활
에서 소재를 찾겠죠?”
“예를 들면요?”
“흐음, 글쎄요. 저는 대게 생각을 많이 이용하는데 이런저런 생
각을 하다보면 가끔씩 떠오르는 것이 있어요. 지금 생각하고 있는
주제도 인간의 잔인성에 대한 플롯입니다.”
사내는 눈에 힘을 주고 덕구의 말을 사뭇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는 답답해 보이는 모자를 벗어 재꼈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돌
아와 식탁에 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
“네?”
“그럼 지금 상황을 놓고 당장 그 소재를 찾으라면 찾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요?”
“네.”
“글쎄요. 그게 그렇게 쉽게 찾고, 쉽게 글을 쓴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사내는 모자에 눌린 머리를 위로 쓸어 넘기며 말하였다.
“저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들었던 그대로입니다. 저는 지금 이 상황에서 공포 소설에
필요한 소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하!”
덕구가 박장대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우며 덧붙였다.
“그럼 저랑 내기 하나 하시겠습니까?”
“무슨 내기 말입니까?”
“한 사람씩 차례대로 지금 이 상황에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하여 소재를 만드는 것입니다. 주제는 ‘공포’입니다.
소재가 먼저 떨어지는 사람이 지는 룰로 말입니다. 만약 제가
진다면 선생이 원하는 것을 드리지요.”
“원하는 것?”
덕구가 의아한 얼굴로 들었던 술잔을 놓았다.
“재밌군요.”
그러고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남아 있는 술을 목으로 털어넣었다.
“좋아요. 헌데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내가 진다면?”
“만약 선생이 진다면 저는 선생에게서 소중한 것 하나를 앗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선생은 절대적으로 저에게 그것
을 주셔야 합니다.”
“뭐요? 그럼 내가 주기를 거부한다면요?”
“선생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마 내기가 끝나는 순간 저
는 자연스럽게 선생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고 난 뒤일테니
까요.”
사내가 씨익 웃어보였다.
“왜, 글이라는 것은 생전 써 본적도 없는 저에게 지기라도 할 것
같습니까?”
“하하!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입니까? 좋습니다. 하지만 나중
에 다른 말 하기 없기입니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겠죠. 그럼 순서를 정하도록 하죠.”
“먼저하시죠.”
“후훗”
사내의 얼굴에서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잘 들으십쇼”
“말해보세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
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 얘기가 저 혼자만의 줏대라고 믿든
그렇지 않다고 믿든 어느 것이든 당신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당
신은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해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규칙입니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죠?”
“저기를 보십시오. 저 괘종시계 보이십니까?”
사내는 거실 한 가운데 놓인 괘종시계를 가리키며 낮은 톤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아까 집안을 둘러보다 저 괘종시계 안에서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아주 작고 나즈막한 소리. 저는 분명히 두 귀로 들었습니다.”
사내는 잠시 말을 멈추고 탁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키며 마른 성대
를 축였다. 덕구는 남자의 이어지는 말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저는 확신 하였습니다.”
“………?”
“저 안에 사람이 들어 있다고.”
“지금 농담하십니까?”
그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글쎄요. 제가 하는 얘기는 작은 농담이 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끔찍한 사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선생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입니다.”
사내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덕구는 괘종시계에
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무슨 근거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럼 아무런 근거 없이 제가 지어낸 말이라고 믿으십시요.
그것은 당신의 자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아마도…”
사내가 망설이듯 입을열었다.
“종소리는 시계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머리와 종이 서로 부딪
히며 나는 소리일 것입니다.”
덕구는 떫은 감이라도 베어 문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지금 확인해 보도록 하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덕구가 소리쳤다. 그러자 사내가
두손으로 그를 제지했다.
“그건 안 됩니다.”
“왜요?”
“규칙을 잊으셨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선생은 내기에서
패한 것입니다.”
사내가 내세운 규칙이 그의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선생은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해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규칙입니다.’
사내의 불쾌한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규칙을 어기고 내기에서 패하신다면 약속대로 선생은 저에게
‘소중한 것’을 주셔야 됩니다.”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덕구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이제 선생이 얘기 할 차례입니다.”
이제 바톤은 덕구에게로 넘어갔다.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듣고 나서야, 그는 조용히 콧잔등을 어루만졌다.
맞은 편에는 사내가 팔짱을 낀 채 득의연한 얼굴로 덕구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팔목에 걸친 손목시계를 예의
가리키며 시간을 재촉하고 있었다. 덕구는 다급해졌다.
“좋습니다.”
잠자코 머리를 굴려보던 덕구는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럴려고 노력중입니다.”
“실은 말입니다.”
그는 마치 사내가 모르고 있던 치명적인 비밀 하나라도 고백
하려는 듯 망설이며 말을 꺼내었다. 그리고는 “제법 눈치가
빠르신 분인 줄 알았는데 유감이군요.” 라고 연이어 전하며
안타까운 속내를 드러내었다.
사내는 그가 무슨 얘기를 하려하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가 없었다.
“실은 당신이 마신 술잔에 독이 묻어 있었습니다.”
“많이 취하셨군요.”
“제가 농담하는 것 같습니까?”
“재미있네요.”
“지금 저는 당신의 술잔에 독을 묻힘으로써 살인을 저지른 것
입니다. 살인도 엄연히 공포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시나 보군요.”
덕구는 거드름을 피우며 계속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수상한 자에게 함부로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보십쇼.” 덕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재밌는 소재였습니다. 이제 다시 제 차례군요.”
다시 사내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까닭모를 불안감이 다시금
덕구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제 경험담입니다.”
그렇게 운을 뗀 사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역시 믿던 안 믿던 선생의 자유이고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한참을 뜸 들이던 사내가 드디어
어눌한 어조로 말을 늘어 놓기 시작하였다.
“아까 자정을 넘길 무렵이었습니다. 바야흐로 저는 마지막
남은 택배의 수취인이 선생의 집 주소로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되었죠.
그 때까지 제 머릿속에는 오직 단 한가지 생각뿐이 없었습니다.
빨리 이 귀찮은 물품박스를 집주인에게 전해주고, 집으로 돌아
가서 휴식을 취해야 겠다고. 그리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곳
선생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시간은 12시 정각을 가리
키고 있었죠.”
사내는 목이 타는 지 다시금 술을 들이켰다.
“그래서요?” 덕구가 어린아이 보채 듯 그렇게 물었다.
“차 시동을 끄고 선생의 집 주소로 되어 있는 택배 상자를
꺼내기 위해 트렁크를 여는 순간이었습니다.”
사내의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마치 자신이 하고 있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덕구는 그런 그의 이야기가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저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한 참을 주저하다가 그가 꺼낸 말은 무언가를 목격했다는 것
이었다. 덕구는 점점 조바심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을 봤기에 그러십니까?”
“그 전에 약속 하나 합시다.”
“약속이라니요?”
“제 이야기를 듣고 흥분하지 않기로요.”
“하하. 점점 궁금하게 만드는군요. 알겠습니다.”
덕구는 사내의 다음 얘기가 빨리 듣고 싶어 대충 지껄였다.
“제가 본 건 분명 살인이었습니다.”
“살인이요?”
고양이 눈을 치켜 뜬 채, 놀라 되묻는 덕구에게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한 괴한이 중년쯤 되 보이는 여성을 날카로운 흉기로 무자비
하게 찌르고 있었습니다.”
“그게 정말 사실입니까?”
덕구는 심각한 얼굴로 사내의 말에 반응하였다.
“아직 놀라시긴 이릅니다. 그는 그녀를 잔인하게 토막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토막낸 사체를 어디론가 가져
가기 시작하더라는 겁니다.”
“그걸 보고만 있었단 말입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뇨?”
“너무 무서웠습니다.”
사내의 말에 덕구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어느덧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
었다. 그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식탁 밑으로 손을 내렸다.
“선생의 집 앞에서 살인을 목격한 뒤, 저는 여인을 무참하게 살해
하고 토막내서 어디론가 급하게 가져가는 괴한의 마지막 뒷 모습을
본 후에야 차 안에서 나올 수 있었죠. 그리고 선생의 집 초인종을
눌렀던 것입니다.”
사내의 말은 주구장창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은 말 안해도 선생께서 잘 아실겁니다. 선생이
베푸는 뜻밖의 호의에 저는 선생의 집 안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그리고 선생과 술을 마시며 지금까지 얘기를 나눴던 것입니다.”
“그게 다입니까?”
“아뇨. 설마 이게 다라면 애초부터 이 얘길 선생에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얘기는 선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나와 관련이 있다구요?”
그는 차가운 눈으로 덕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덕구는
사내가 무슨 얘길 하려하는지 도저히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사내는 무언가를 손짓으로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곳은 바로 TV가 위치한 테이블이었다.
“선생, 혹시 기억하십니까? 아까 제가 집안을 둘러보았을 때
말입니다. 그 때 저 사진을 보았습니다.”
사내는 TV가 위치한 테이블 언저리에 놓인 가족사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것은 가족사진이었습니다. 선생과 사모님이 함께 찍은 가족
사진 말입니다.”
“서, 설마. 당신 지금 무슨 소릴!!”
“제 얘기 안 끝났습니다. 설마 저와 한 약속을 벌써 잊으신겁니까?”
불안감이 덕구의 머릿속에서 점차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 괴한에게 살해되던 중년의 여인은 바로 저 사진
속 사모님이셨습니다. 저도 집안을 둘러보다 저 사진을 보고 알았
습니다. 가족사진의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부인의 얼굴은 괴한에
의해 살해될 때 그 고통스러워하는 얼굴과 사뭇 달랐습니다.”
사내의 말에 덕구는 들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렸다. 두려움으로
떨리는 손이 식탁보 밑에서 요동 치고 있었다. 빠르게 회전하는
두뇌가 계속해서 아드레날린을 분비하여 동공이 작아지고 있었다.
사내의 말은 설마 하던 그의 예상에 정확하게 적중하고 있었다.
그는 흥분을 감추려 하였지만 그러기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뛰고 있는 심장이 말을 듣지 않았다.
“지,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덕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고함쳤다.
“아무리 부인해 보아도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선생의
아내는 죽었습니다.”
“……”
“여기까지 제 얘기입니다. 역시 사실로 믿든, 믿지 않든
선생의 자유입니다.”
덕구는 사내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믿지 않는
것은 선생의 자유입니다.’라는 그의 얘기에 꼬리처럼
따라 붙는 말은 수수께끼같은 사내의 말에 보다 큰 의문
을 남길 뿐이었으니.
“선생이 얘기 할 차례입니다.”
귓전에 울려퍼지는 사내의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연신
그의 머릿속을 헤짚고 다녔다. 덕구는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냈다.
“…… 담배 한대만 피고 하죠”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려는지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차피 사내가 하는 말 따위야 그냥
잊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의 말처럼 그것은 사실이 아
니니까. 재미삼아 시작한 내기가 아닌가? 녀석의 말에 동
요될 필요가 전혀 없다.
하지만, 빠르게 타들어가는 담배 한 개비에 점차 조바심이
들었다. 다시 바톤은 덕구에게 돌아왔다. 은근한 눈짓을
보내던 사내가 남아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듯
연거푸 손가락으로 식탁 유리를 두드렸다. 조급한 마음에
덕구는 빠르게 눈을 굴렸다.
“후……”
“왜, 벌써 소잿거리가 바닥나신 겁니까?”
“그게 아니고……”
“……?”
들고 있던 담배를 재털이에 비벼 끄며 덕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지……?”
덕구는 침이 마르는지 마지막 남아 있는 한방울의 술까지
목으로 훌쩍 털어넘겼다.
“…… 한번 생각해 보시죠.”
“뭘 말입니까?”
“당신의 말대로라면, 당신은 살인을 목격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 집 초인종을 눌렀어요. 보통의 사람이라면 인근의
경찰서나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큰 길가로 나가서 이
사실을 빠르게 알렸을 것이 분명한데 말이죠.”
“그렇지 않아도, 저 성가신 택배물만 선생에게 전해주고 이곳
에서 나가면 즉시 경찰서로 향할 계획이었습니다.”
“아니, 단언컨데 당신은 그 사실을 경찰에 알리지 못했을
거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건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필연적으로 이곳에 들어와야 했겠죠”
“결론부터 얘기해 주시죠.”
“좋아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내겐 당신의 죽음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덕구의 말에 사내가 피식 웃어보였다.
“선생, 소재거리가 벌써 바닥나신 겁니까?”
‘큭큭!’ 연신 실소를 터트리던 사내가 간신히 웃음을
참고 얘기했다.
“아니면 선생은 예지력이라도 기르고 있다는 것입니까?”
“예지력이라면 나보다 당신이 더 뛰어난 것 같습니다만?”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어떻게 괘종시계안에 사람이 들어있을거란 생각을 했지?”
사내가 탁 앞에 술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모르죠.”
덕구는 눈살을 찌푸렸다. 연이어 사내의 기분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쯤 되면 그것은 보통 (재미 삼아 시작한) 내기가 아니었다.
“이제 다시 제 차례군요.” 라는 말과 함께 사내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저도 담배 한대 핍시다.”
사내가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그가 담배에 불을 지피자 덕구는
언짢은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내뱉는 담배 연기가 바로 눈앞
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혹시 뭐 잊은 것 없습니까?”
“……?”
“저는 선생에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하하, 알고 있어요. 당신이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이었죠.”
“그것 말고, 저 박스 말입니다.”
사내는 박스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진정 저 박스가 단순히 택배 상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무슨 소릴?”
“그전에 잊지 말아야 할 규칙 하나를 상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규칙이요?”
“그렇습니다. 제가 어떠한 이야기를 하던 선생은 그것의
진위여부를 확인해 볼 수 없습니다. 꼭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아요. 말해보시죠.”
그 순간 1시를 알리는 괘종시계가 음울하게 울려 퍼졌다.
사내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정말 저 박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짐작이 안가십니까?”
사내의 말소리가 무겁게 들려왔다.
“저 박스 말입니다……”
까닭모를 낯선 곳에서부터 전해져오는 불안감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덕구는 궁금증만큼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어쩌면 사내가 꺼낸 말의 이면에 머릿속을 간질이는
호기심과 그로 인한 알 수 없는 공포가 함께 도사리고 있는 것
인지도 몰랐다.
“역시 사실로 믿든 믿지 않든 선생의 자유의지이고, 거듭 말씀
드리지만 굳이 제 얘기를 믿으라고 강요는 안 하겠습니다.”
“어서 얘기해보시죠.”
“이 쯤 되면 눈치 빠른 이라면 대강 눈치 챘을 터인데……
그러고 보면 선생은 어딘가 둔한 구석이 있군요.”
한동안 사내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능청스럽게 먼 산만 바라보
았다. 가만히 앉아 이죽거리는 그의 방관에 덕구는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재끼며 비장하
게 입을 열기까지는 10초도 채 안됬지만 덕구에겐 이 모든
순간들이 10년처럼 느껴졌다.
“선생과 얘기를 나누던 도중에도 연신 저의 머릿속을 헤짚고
다니던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뭐 말입니까?”
“그건 바로‘과연 저 비좁은 공간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까
에 대한 고찰이었습니다.”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아까 말씀드렸었죠.”
“………?”
“사모님을 살해 한 그 괴한 이야기 말입니다. 괴한은 사모님
의 시신을 잘게 토막 냈습니다. 그리고 저 박스 안에 차곡차곡
담아냈습니다.”
“무…… 무슨!?”
“자, 이제 짐작 되십니까?”
“………”
“유감스럽지만 사모님의 사체는 저 박스안에 들어있습니다.”
“………개수작 하지마!”
“여기 까지입니다. 이제 선생이 얘기할 차례입니다.”
“당신!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인 줄 알아!?”
“선생의 차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내 얘기 시작하지! 너는 그딴 재수 없는 이야기를
내게 한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사내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저도 하나 말씀드리죠. 선생은 저를 집 안에 들인 것을 후회
하게 될 것입니다.”
주구장창 입을 놀리던 사내의 턱에 묵직한 무언가가 강타했다.
별안간‘퍼억!’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가 의자밑으로
넘어졌다. 덕구의 주먹이 사내의 턱을 강타하면서 살얼음판
같던 정적을 깼다. 사내가 의자 밑에서 다시 지껄였다.
“이게 무슨 짓이죠?”
“이 새끼가……!”
덕구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대고 있었다. 바닥에 널 부
러진 사내는 삐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며 실성한 듯 히죽거렸다.
“큭큭!”
“웃음이 나오지? 이 강아지야!”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불길한 생각이 수면 위로 피어올랐다.
덕구는 부리나케 거실로 향했다. 단순한 미치광이가 나불대는
말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그래도‘혹
시나’라는 생각이 그를 붙들고 있었다. 그는 허겁지겁 괘종시계
문을 열어 재꼈다. ‘혹시라도…… 만약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신발, 조카 안 열리네!”
쉽게 열리지 않는 시계 문을 억지로 잡아당기며 투덜댔다. 여전히
불길한 생각은 그의 머릿속을 떠날 줄 모르고 있었다.
‘퍽! 챙그랑!’ 그가 있는 힘껏 주먹으로 그것을 내려치자, 괘종
을 덮고 있는 유리가 파편을 튀기며 이리 저리 불규칙적인 모습으
로 깨지기 시작했다. 덕구는 황급히 시계 문을 뜯어보았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뭐야! 이 강아지가 나를 가지고 놀아? 이 싸이코 새끼!”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계 안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
내는 실성한 듯이 연거푸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하…… 선생?”
사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덧붙였다.
“애시당초 장난삼아 시작한 내기 아니었습니까? 왜 그리 심각
하십니까? 크흣…… 제 말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해놓고서는
지금 선생의 꼴을 보니 우습군요.”
“개소리 집어치워!”
“선생은 규칙을 어겼습니다. 이로써 선생은 저와의 내기에서
패하신 겁니다.”
“이런 개……!”
덕구는 과자 부스러기처럼 널 부러진 깨진 유리 조각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부드득 이를 갈며 그것을 사내에게 집어던지며 외
쳤다. “강아지가!” 소매를 걷어부치고 사내에게 다가갔다. 아
무래도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패 줘야 직성이 풀릴 듯한 눈이었다.
바로 그 때, 불현듯 박스가 놓인 현관에서 왠지 모를 비릿한 냄
새가 풍겨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어렴풋이 보이는 박스 틈새로 누군가의 ‘얼굴’이 들어왔다.
가만히 서서 실눈으로 박스를 유심히 들쳐보던 덕구가 그 상황을
이해하는데까진 꽤 오랜시간이 흘렀다. 얼굴은 박스 안에서 지그
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비명이 나오려 했지만 쉽사리 입이 떨
어지지 않았다. 가슴 속에 파묻힌 공포가 비명마저 삼켜버린 것
이다.
덕구는 박스안에 담겨있는 그 얼굴과 눈을 마주한 채, 멀뚱히 서
있기를 일관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언가에 놀랐는지 공포에 질린
눈동자였다.
“이럴수가……”
떨리는 손으로 박스를 뜯어 내용물을 살펴 본 그의 시야에 들어
온 건 아니나 다를까 아내의 머리였다. 목 부위에 날카롭고 뾰족
한 도구로 사정없이 뜯겨져 나간 흔적이 선명했다. 덕구는 기겁
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허어억! 우웨에에엑!”
‘마…… 말도 안돼!’바닥에 토악질을 하며 사내를 흘겨보려던
찰라 그제 서야 덕구는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사내가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렇다할 틈도 없이 묵직한 물건
이 정수리에 강하게 닿는 기분이 들었다.‘퍼억!’ 둔탁한 마찰
음과 함께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건 사내의 불쾌한 웃음소리였다.
“약속대로 소중한 것을 가져가겠습니다.”
‘젠장,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뜨듯한 액체가 머리
위에서 흘러내린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 * * * *
“정신 차리시지요?”
능글맞은 목소리에 덕구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흐릿해져오는
시야 너머로 사내의 얼굴이 들어온다.
“무…… 무슨 짓이지?”
“상황 파악이 그렇게 안 되십니까?”
“이…… 정신 나간 새끼!”
“제가 말씀 드렸죠. 이 내기에선 제가 이길 것이고, 내기에서
승리하는 순간 저는 선생에게서 이미 소중한 것을 빼앗고 난 뒤
일 거라구요. 어때요? 제가 틀렸습니까?”
“헛소리 집어치워!”
“어떻습니까? 선생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던 선생의 아내를 ‘담보’
로 한 내기가…… 즐거우셨습니까?”
“강아지”
온 몸이 결박되어 꼼짝할 수 없었다. 아마 로프에 의해 단단히
묶인 모양이다. 사내가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
이터에 불을 붙이며 뒷 주머니에서 꺼낸 건 피가 흥건히 묻은
흉기였다. 덕구는 있는 힘껏 몸을 비틀었다. 어떻게든 저항하려
고 몸서리쳤지만 그럴 여력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몸은 점점 힘없이 나른해지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공포소재가 아닌가. 공포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일이 그에게 벌어지고 있었다. 꿈만 같은 상황이다.
어쩌면 전세는 애시당초 역전되어 있었고, 애초부터 주객은
전도되어 있었다. 사내가 처음 이 집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사내의 말이 맞았다. 자신을 집 안에 들인 것을 분명히 후회할 것이라고……
그래. 처음부터 손해보는 내기를 시작한 것이다. 만약 내기
에서 이겼다고 해도 사내가 말한‘원하는 것’은 분명 아내의
머리였을 것이 분명하다. 부질 없다. 다 틀렸어. 이젠 끝이다.
사내가 덕구의 얼굴로 흉기를 가져다대며 속삭였다.
“꽤 아플 거야.”
“끄아악!!”
덕구의 비명이 속사포처럼 전해진다.
* * * * *
얼마나 지났을까. 망가진 괘종시계가 새벽 1시 반에 정지해
있었다.
거실 바닥엔 누군가가 힘없이 쓰러져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
가 주방에서 홀연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드리워진 어둠 새로
어렴풋이 드러난 얼굴은 다름아닌 ‘덕구’ 의 것이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톱날이 들려 있었다. 조금 전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 크게 당할 수도 있는 상황
이었다. 사내가 그의 얼굴로 흉기를 가져다대는 순간‘약효’가
나타난 것이다.
덕구는 바닥에 쓰러진 사내를 가엾게 바라보았다.
“하마터면 당할 뻔 했지 뭐야.”
시퍼렇게 날이 선 톱 날을 어루만지며 그는 잠시 사색에 잠
겼다. 그러고는 쓰러진 사내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놀라운 사실 하나 알려줄까?”
‘놀라운 사실……?’ 분명 사내의 숨이 조금이라도 붙어있
다면 그는 어안이 벙벙해져 그렇게 되물었을 것이다. 덕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네 녀석을 집으로 들였을까? 누군지도 모르는 네
녀석을, 그것도 이 야심한 밤에 말이야.”
덕구는 쓰러진 사내의 귓가에 계속해서 속삭였다.
“내가 말했지. 난 수상한 자에게 함부로 자비를 베풀지 않는
다고. 네 녀석이 처음 초인종을 누를 때 말이지. 나는 그 때 주
방으로 향했지. 그리고 네 녀석과 함께 마실 술과 네 녀석의
술잔을 준비했어. 내가 왜 그랬을까?”
덕구는 식탁 위에 놓인 사내의 술잔을 들며 연신 말을 이었다.
“아까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가 네 녀석 잔에 독을 묻혔다
고 한 적이 있었을거야. 네 녀석은 독이 묻어 있는 이 잔으로
신나게 술을 퍼 마셨고, 그러니까 네 녀석이 머리가 나쁜거야……”
‘슥삭. 슥삭.’ 덕구는 톱을 좌우로 흔들며 사내의 목을
톱질하기 시작하였다. 연약한 피부는 단단하고 날카로운 톱
날에 의해 순식간에 초토화되기 시작하였다. 부드러운 고기
처럼 싹둑 싹둑 잘리는 살점들 사이로 봇물처럼 터지는 붉은
선혈이 덕구의 얼굴에 빨갛게 물을 들였다.
“물론 하마터면 내가 당할 뻔 했었지. 흉기를 든 네 녀석
에게 이기기 위해선 독의‘약효’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만 했지. 뜻 밖에도 네 녀석이 수상한 내기를 제의하
더군. 나야 고마웠지.”
덕구는 사내의 머리를 완전히 잘라내었다. 잘려나간 사내의
눈동자가 뭔가를 말하려는 듯 보였다. 덕구는 두꺼운 노끈을
사내의 머리에 연결했다. 그리고선 괘종시계의 문을 열었다.
“괘종시계 안에 사람이 들어 있을 거라고? 미래를 보는 예지력
하나 만큼은 탁월하군 그래.”
‘딩, 철퍽!, 딩, 철퍽, 철퍽……!’
잠시 후 괘종시계의 종이 대롱대롱 매달린 사내의 머리와
부딪히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에필로그.
‘댕, 댕, 댕, 댕…’
젠장, 저 소리 때문에 집중이 안 되는 군.’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깬 덕구는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요지부동의 자세로 요란하게 자정을 알리는 괘종시계가
어둠이 자욱이 깔린 거실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냉장
고에는 동창회가 있을 것이라며 기다리지 말고 자라는
아내의 쪽지가 붙어있었다. 그는 주머니속에서 담배를 꺼
낸 뒤 버릇처럼 베란다로 향하였다.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사색에 잠겨있던 그의 눈에
불현듯 무언가가 스치듯 들어왔다. ‘또각 또각’ 구둣소리를
내며 요염하게 걷고 있는 여인이었다. 조그마한 핸드백에
도트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인은 다름아닌 그의 아내였다.
그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아내를 부르려던 찰라였다.
그 순간 그녀의 뒤를 곤색 점퍼에 밝은 베이지색 야구모자를
걸쳐 쓴 한 사내가 바짝 따라붙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의 오른 손에는 커다란 ‘박스’가 들려 있었다. 덕구는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는 처음으로 ‘살인’이라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눈 앞에
서 아내가 살해 되는 광경을 우두커니 지켜보며 그는 꼼짝달
싹도 하지 못했다. 몸이 얼어붙는다는 느낌을 처음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여인을 무참하게 살해한 사내는 들고 있던
박스에 여인을 담기 시작했다. 팔…… 다리…… 몸통……
차곡차곡. 그리고 마지막 케이크의 꽃 장식을 올리듯 여인의
머리를 그 위로 담아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딩동…… 딩동! 소포 왔습니다.’
덕구는 부리나케 주방으로 향하였다
두번째 이야기 - 불면증
(작가: 웃대 라빈♡)
"수면제..구할수 있을까?"
내 오랜 벗인 정훈이는 그말을 듣고는 눈을 크게 뜨고 안경을 고쳐썼다.
"왜..?"
나는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두손을 가볍게 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불면증이야.."
정훈이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더니 결국 처방전을 꺼내 무엇
인가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아냐,아냐..처방전 없이..그냥 줄순 없을까?"
처방전이 남게 되면 일이 곤란해 진다.
의심스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정훈이를 나도 똑바로 쳐다보며 싱긋
이 웃어주었다.
"아..환자 취급 받긴 싫거든.. 그렇지 않아도 내 마누라가 날 환자 취급
하고 있는데.. 자네에게 처방을 받은걸 알면 아마 날 병원에 입원시키
려 들걸."
그때 마침 정훈이를 부르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작은 스피커를 통해 들려
왔고 다음환자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정훈이는 별다른
말없이 나에게 수면제 한봉지를 내밀었다. 하루에 두알만 먹어야 한다
는 주의와 함꼐.
오늘은 비가 오는 밤이다. 아마 아내는 오늘도 밤외출을 할것이다.
사실 내가 불면증에 걸린 이유는 바로 그런 아내때문이다.
아내는 부슬부슬 비가오는 밤마다..검은 비닐점퍼를 꺼내 입고 살금살금
현관문 밖으로 나가곤 했다.
아내를 미행해 보려 한적도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그녀는 마치 날렵한 검은 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나를 따돌리고 어디론
가 사라지곤 했다.
참다못해 그녀에게 왜 몰래 집을 빠져나가냐며 화를 내며 따져보기는 했
지만..그녀는 고개를 뻣뻣이 치켜든채 한마디로 잘라 결론을 낼 뿐이었
다.
"그건 다 당신이 만들어낸 환상이예요! 오, 여보, 차라리 병원에 한번
가보세요.
요즘에 당신이 불면증에 너무 시달리다 보니 그런 환상을 본걸거에요."
억울했다. 나는 환자가 아니다.
그러나 아내이외의 다른 사람들 모두도 나를 '불면증'이라고 평하는 것
을 보면 그거 하나만은 확실한 것 같다. 사실 그것은 내 아내 탓이지만.
머리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고 이마를 지긋이 눌렀다.
사실 잠을 제대로 잘수 없는 것은 오히려 나에게 도움이 될 뿐이었지
만, 이 참기 힘든 두통은 그다지 반갑지가 않다.
현관문을 키로 돌려 열고 곧장 부엌으로 걸어갔다.
커피메이커가 진한 헤즐넛향을 풍기며 검은 액체를 한두방울씩 뽑아내
고 있었다.
아내는 불면증을 더욱 심하게 만들 뿐이라며 내가 커피 마시는 것을 질
색 했지만 나는 내 혀와 코를 동시에 즐겁게 해주는 커피를 포기할수가
없다.
아내와 세트로 쓰고 있는 부부 커피잔을 꺼내 커피를 따라낸 다음 안방
으로 들고 갔다.
아내는 침대에 멍하니 앉아 손톱을 물어 뜯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싫어 나는 불쑥 티브이를 켰다.
"은호는?"
올해 고3인 아들 은호 얼굴을 제대로 본지도 며칠 된것 같다. 사실 나
는 가끔 신경질을 억누르지 못하고 집안 물건을 때려 부수곤 했다. 아내
는 마치 어린양을 백정손에서 빼돌리는 듯한 눈길로 나에게 은호를 독서
실에 다니게 하자고 했었다.
고3은 신경이 날카롭다나..
"오늘은.. 독서실에서 잘거예요."
"나.. 노력하고 있으니까.. 앞으론...잘할꼐.."
아내는 놀란 눈길로 힘없이 중얼거리는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더니 엷은 주홍빛 립스틱이 칠해진 입술로 나에게 미소를 지어주었
다.
"여보..고마워요.. 사실 나 좀 힘들었었어요.."
나는 괜히 멋적은 심정이 들어 티브이의 볼륨을 올리며 아내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아나운서가 무표정한 얼굴로 사건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또 한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7일전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김
모 양의 시신이 오늘 김양의 집근처 하수도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시
신의 일부가 없어진 것으로 보아
경찰은 정신병자의 소행으로 보고..."
사실 나는 정신병자라는 단어가 매우 싫다. 불면증이 계속 되면 안된다
고 치료를 받아보라 했던 아내의 말에 그토록 분개한것도 그 단어..'정
신병자' 때문이다.
어두운 방에 갇혀 울부짖는 일밖에 할수 없었던 우리 아버지를 보고도
다들 그렇게 불렀었다.
치료..정신병...
정신병도 유전된다고 말하던 정훈이 녀석이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니었
다면 턱을 한대 올려친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주먹을 쥐어보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나는 결코 정신병이 아니며, 비정상적인 행동을 안하는 '정상인'으로 살
것이라고.
아내는 내 손에서 하얀바탕에 장미무늬가 그려진 커피잔을 받아들고 웃
음을 지었다.
안방은 금세 향긋한 헤즐넛 향기로 꽉 차있었다.
"여보..그리고 뜨거운 물로 샤워하면 잠이 더 잘온대요."
아내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며 새로 사왔다는 허브향 입욕제를 건네 주었
다.
그러나 나의 불면증은 확실히 중증인가 보다. 아내가 모처럼 사온 입욕
제까지 썼는데도 불구하고...옆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내의 숨소
리를 뚜렷하게 들으며 천장만 멀뚱히 바라볼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그럴수 밖에 없겠지만.
낮에 정훈이에게 받은 수면제 30알을 정성껏 가루로 만들어 아내의 커피
에 타놓았으니..
아마 그녀는 일어날수 없을 것이다.
밖에선 여전히 빗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오늘밤은 아내도 밖으로 나갈수가 없다.
아니, 밖으로는 나갈수 있지.. 다만 그게 자신의 의사가 아닐테지만.
나는 아내의 겨드랑이에 두손을 집어넣고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나 제법 키가 큰 아내의 두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린다.
아내를 거실의 바닥에 내려놓고 나는 베란다 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내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정신병자!!-
아까부터 머리속에서 뱅뱅 돌고 있는 말 한마디가 끈질기게 나를 괴롭힌
다.
그러나 난 정신병자가 아니다! 내 아버지는 그랬지만.
바람난 아내를 응징하는것이야말로 내가 '정상인'이라는 걸 증명해주는
사실아닌가?
게다가 나는 아내를 죽임으로 해서 불면증에서 벗어날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아내를 베란다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퍽-!-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실 우리집은 1층이다. 그러나 우리집이 있는 이 101동은 절벽처럼 깎
아지른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고, 101동의 모든집은 다 그쪽을 향해
나있는 베란다를 갖고 있었다.
아마 아내의 시체는 내일 아침에나 발견되겠지.
저 아래로 지나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아내는 정말 모르는 일이었겠지만.. 나는 오늘 일을 아내의 자살로 꾸미
기 위해 사전부터 치밀한 준비를 해왔다.
자주가는 슈퍼, 정육점, 심지어 아내의 회사에 들릴때마다도..항상 슬픈
표정으로 그런 이야기를 해왔던 것이다.
-제 아내는..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어요.. 요즘엔 몽유병 증세가 좀
있어서..혹시라도 이상한 행동을 보이게 되면 놀라지 마시고 이해해 주
세요..-
내말을 듣고 아내에게 직접 '당신이 불면증에 몽유병이냐'라고 물을 사
람이 있었을까?
아마 내 말을 전해들은 그들은 뒤로 돌아 혀를 차면서 그렇게 말했을 뿐
일거다.
-쯧쯧..가엾게도.. -
그리고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를 좀더 친절히 대해주며 간혹 이상한
눈길을 보냈겠지.
빗줄기가 상쾌하게 느껴진다.
내일은 경찰앞에서 아내를 갑작스레 잃은 남편의 슬픔을 연기해야 할것
이다.
-아..아내가 불면증에 몽유병 증세가 있는건 알았지만.. 수면제를 먹고
베란다에서 떨어질줄이야..-
처음엔 의심받을 줄은 몰라도.. 아마 경찰 스스로가 증거 불충분으로
날 풀어주게될것이다.
내가 수면제를 구한 경로도 추적해 내지 못할테지만.
나는 천천히 안방으로 도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아내의 검은 비닐 점퍼가 마치 깊게 베인 상처처럼 옷장 한가운데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자 난 속이 뒤집어져서 그 검은 점퍼를 꺼
내 땅에 내동댕이 쳤다.
-땡그랑..-
아내의 점퍼 주머니에서 뭔가가 떨어지더니 내 발등을 내리찍고 저쪽으
로 굴러갔다.
저.. 반짝이는 저것은..
열쇠였다. 나는 그게 과연 어디의 열쇠일지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남자와 밀회를 하기위해 집을 얻어 놓은 것일까?
그러나 저 열쇠의 형태는..
철물점에서 흔하게 파는 대형 자물쇠의 열쇠같이 생겼다.
아내는 저 열쇠를 이용해 뭔가를 숨기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열쇠를 집어들고 집안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내가 바람 피운 증거를 찾아낼수 있다면... 경찰에 좀더 유리한 입장
이 될것이다.
그러나 자물쇠 같은것은 아무곳에도 없었다.
내가 샅샅이 살피지 않은 단 한군데, 다용도실에도 자물쇠가 없다면
이 집안에 자물쇠를 채울만한 곳은 없다.
다용도실은 웬일인지 굳게 잠겨 있었다.
그동안 특별히 내가 다용도실을 들여다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 방문이 잠겨 있다는 것조차 몰랐었는데.
나는 세차게 어깨를 부딪혀 문을 쉽사리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엔 자물쇠가 있을까..?
그러나 나를 궁금하게 하던 그 자물쇠는 너무나 눈에 띄기 쉬운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장이 나서 버리기로 되어 있었던 세탁기가 웬일인지 그대로 있다.
세탁기는 은색체인으로 한바퀴 돌려져 있었고 그 끝에는 차가운
금속성으로 빛나는 거대한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왜 이런 행동을..?
아마 그에 대한 해답은 이 자물쇠를 풀어보면 나올것이다.
약간 긴장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자물쇠를 풀고 체인을 풀어헤쳤다.
-덜컹-
그러나 세탁기 안에 들어있는 것은 나를 더 의아하게 했다.
하얀색 아이스 박스가 세탁기 안에 처박혀 있었다.
왜? 왜 이런것을 여기에 넣어놓은 것일까.
아이스 박스 안에는 무엇인가 잔뜩 들어있었는지 무게가 상당했다.
나는 세탁기의 귀퉁이에 찢겨나간 손톱을 빨며 꺼내놓은 아이스
박스의 뚜껑을 열어제쳤다.
"우..우웨에에엑~~!!"
눈물이 찔끔 흘러나올정도로 토악질을 해댔지만 아직 개운하지가 않았
다.
아이스 박스 속에는.. 하얀 드라이 아이스 여러개와 함께..
잘려나간 귀, 뭔가 날카로운 것으로 도려낸듯한 여자의 유방이 들어있었
다.
나는 바닥에 주저 앉은 채로 뒤로 기어갔다.
아까 티브이에서 들었던 뉴스..
시체의 일부를 가져간다는 그 연쇄살인범..
그게.. 내 아내 였던가? 아내가 비오는 날 밤마다 밖으로 나간것은 그것
때문이었나?
살인을 하러?
비닐 점퍼를 입었던것도.. 피가 튀는걸 막기 위해..
나는 예상외의 사태에 망연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나는 욕실로 뛰어 들어가 차가운 물로 머리를 적시며 서있었다.
정신병자..아내는 정상인처럼 행동했지만 정신병자였다..!!
-딩동!-
갑자기 정적을 깨는 벨소리가 들려 나는 화들짝 놀라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만약 저 다용도실의 시체조각을 누가 지금 목격이라도 한다면..
그리고 아내가 집에 없는것을 알아챈다면..
둘다 내가 뒤집어 쓸 가능성이 많다.
"누..누구..?"
나는 조심스레 물고기 렌즈를 통해 밖을 쳐다보았다.
은호의 얼굴이 렌즈안에 비치고 있었다.
이젠 정말 큰일이다. 은호는 분명히 오늘 독서실에서 잔다고 했었는데.
"아버지! 저예요."
잠시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던 은호는 문 손잡이를 비틀며 내가 문을
열어주길 재촉했다.
나는 입술만 깨물며 초조히 서있다가 결국 문을 열어주었다.
은호는 내 아들이다. 내가 왜 아내를 죽였는지 듣고 나면 이해 할것이
다.
살인자 엄마를 두었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리고 싶진 않을테니까.
은호는 머리에서 물방울을 털어내며 가방을 현관에 내려놓았다.
나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가를 생각하며 당황스런 표정을 감추기 위해
냉장고로 걸어가 쥬스를 꺼냈다.
"비..비가 많이 오지..? 너..오늘 독서실에서 잔다길래.."
은호는 내가 내미는 쥬스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엄마는요?"
젠장..올게 왔다..하지만 결국 말해야 되는 거니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여 물며 말했다.
"어..엄마..네 엄마는..."
은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젠장..아무래도 똑바로 바라보고 말하기는 힘이 든다.
"잠시만요, 아버지."
은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갑작스레 몸을 일으켜 다용도실로
걸어갔다.
"자..잠깐..!"
팔을 움켜잡는 나를 약간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은호를 움켜잡고
속사포처럼 진실을 쏟아냈다.
은호는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슬금슬금 현관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네..네엄마를 죽인건 내가 맞지만 ..저 시체는..!! 정말 난 아니야!!"
그러나 내 처절한 부르짖음에도 은호는 쭈뼛거리며 달아날 태세를 취할
뿐이었다.
아들..내 아들이 나를 못믿어..?
나는 꽉 다문 잇새로 한음절씩 끊어 내뱉으며 은호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난.. 아니라고 했잖니..? 날 못믿어?"
은호는 다가가는 내 걸음에 맞추어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아..아니에요..믿어요..아버지..왜..?"
내손에는 어느새 번쩍이는 식칼이 들려있었다.
은호..내 아들녀석마져 나를 못믿고..
"난.. 불면증일 뿐이야.. 정신병자가 아니라구!!"
나는 나도 모르게 어느새 고함을 버럭버럭 지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도 울부짖었다... 어두운 방안에 갇혀. 정신병자란 칭호와
함께..
"악!!아버지!!"
순간 얼굴을 가리는 은호의 팔에 식칼이 내리 꽂혔다.
"흐흐..흐흐흐..."
나는 천장을 쳐다보며 광소를 터뜨렸다.
난!! 안미쳤어!
그때였다. 내 배를 타고 뜨듯한 액체가 흘러내리기 시작한것은..
놀라 쳐다보는 내 눈에 싱그레 웃고있는 은호의 얼굴이 들어왔다.
내 배에는 잘 갈려진 사시미칼이 꽂혀 있었다.
은호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내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더니 칼을 쓰윽
빼냈다.
아..아프다..
"어쩐지.. 오늘은 엄마가 안나오시던데. 제가 사람을 죽일때마다 엄마
가 뒤처리를 해줬는데 오늘은 저혼자 힘들었어요. 비오는 날에는 항상
날 찾아다니느라 고생하셨었는데.. 그래도 엄마는 절 이해하던데요?
고3이라.. 스트레스때문에 그럴거라고.
아! 그리고.. 이말도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네가 이러는것은 네 아버지 때문일거야'라고. 정신병은 유전된다면서
요?"
아내가 나갔던 것은... 그것 때문이었나..?
아들의 살인을 감춰주기 위해.. 비오는 날마다 미쳐 날뛰는 아들을..
대대로 유전되어 오는 정신병을 가진 아들을 감싸주려고..
흐릿해져 오는 눈을 억지로 떠보려다가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 갔다.
아..달콤한 잠이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세번째 이야기 - 집착
(작가: 웃대 도모토리)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 베로나(Verona)라
는 곳에 줄리엣이라 불리는 한 소녀가 살았어요. 바야흐로 그녀의
나이가 이제 막 열 여섯을 넘기고 있었지만 그녀는 마을 내외에서 자
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고의 미녀였어요. 출중한 외모에 나이에 안 맞
게 성숙하고 굴곡진 몸매, 게다가 빼어난 지식까지 함께 겸비한 그녀
를 사람들은 지덕체를 모두 갖춘 마을 최고의 현모양처로 손꼽았죠.
그래서인지 그녀를 며느리감으로 점찍어 둔 사람들이 득실거렸어요.
사내들은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적극적인 구애를 펼쳤고 남자라면
질색이던 줄리엣은 그들의 그런 마음을 모두 거부했어요.
" 줄리엣이잖아... "
" 어쩜 저렇게 곱니? "
" 재수 없어. "
줄리엣은 마을 여자들이 자신을 향해 수근대는 소리를 듣고 있었어
요. 여자들은 그녀를 시기했으나 줄리엣은 별로 개의치 않았어요.
" 근데 저렇게 곱게 차려입고 어디가는 거래? "
" 낸들아니? "
" 파티라도 가는 건가? "
" 파티? "
" 그래. 왕궁에 얼마 전 새로 부임한 장군이 있는데 입단 축하 파티
라나, 뭐라나... "
그래요. 줄리엣은 파티장에 가는 길이었어요. 그녀의 친구 마론과
캐서린이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으니까요.
절대 줄리엣 본인이 춤과 남자를 좋아해서 그러는게 아니었어요.
" 줄리엣, 왜 이렇게 늦었거야? 기다렸잖아. "
파티장에 도착하자 그녀의 친구 마론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
어요. 캐서린은 벌써부터 남자들과 눈이 맞아 춤을 추고 있었고요.
" 미안. 마차가 좀 막혀서 "
" 일로와서 한 잔 받아 "
마론이 줄리엣에게 와인을 따라주면서 말했어요.
" 잘 들어 "
" 응? "
" 여기서 남자 하나만 잘 물어가면 고생 길 피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
" 하지만... 난... "
" 왜그래, 줄리엣? 아마추어 같이? 너 정도면 새로 부임한 '로미오'
장군을 노려볼만도 해 "
" 뭐? "
" 저기! 그가 나온다 "
마론이 손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어요. 2층계단에서 누군가가 걸어
내려오고 있었죠.
어머나! 줄리엣은 그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았어요. 짧은 순
간이었지만 줄리엣은 여태까지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감정
을 느끼게 되었어요.
" 저 자가 바로 로미오야 "
로미오. 어깨너머까지 내려오는 금발머리에 비단결같은 머릿카락 한
올 한올 사이로 비춰지는 그의 실루엣은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 영웅
들의 깎아 놓은 조각상을 보는 듯 했어요. 떡 벌어지지도 그렇다고 너
무 외소하지도 않은 적당한 체격에 금빛 찬란한 바로크 문양을 멋지게
수놓은 은회색 턱시도를 입고 그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어요.
" 로미오다! "
" 어머! 나의 왕자님! "
" 어쩜, 저렇게 멋있지? "
" 자, 잘생겼다 "
" 우와! 저 백옥같이 고운 피부좀 봐. 빠져들 것만 같아! "
그의 등장에 파티장 안은 술렁거렸어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여
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로미오를 향했죠. 줄리엣 역시 마찬가지였어
요. 남자라면 질색이던 줄리엣이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
게 된 거예요.
" 신사 숙녀 여러분, 이렇게 조촐할 데 그지 없는 파티에 응해 주신
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술과 음식은 얼마든지 있으니 최대한 마
음껏 즐기다 가시길 바랍니다. "
로미오는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어요. 잘생긴 그가 매너까
지 좋아보이자 여자들의 속삭임이 더 커졌죠.
넋빠진 얼굴로 그를 지켜보던 줄리엣에게 마론이 말했어요.
" 계집애... 남자한테는 관심 없다더니... "
마론이 말하자 줄리엣이 화들짝 놀라 대꾸했어요.
" 저, 정말 관심없어! "
" 그게 관심 없는 얼굴이냐? "
" ... "
" 너희들 여기서 뭐하니? "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녀들에게 누군가가
다가와서 말했어요. 캐서린이었어요.
" 어머, 캐서린! "
줄리엣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어요.
" 줄리엣! 언제 온 거야? "
" 얼마 안 됐어 "
" 근데 너희 둘다 여기서 뭐해. 나가서 춤이라도 추자! 멋진 남자들
이 많단 말야. "
" 난 춤을 못추는데...? "
줄리엣이 말했어요. 그러자 마론이 끼어들었어요.
" 처음부터 잘 추는 사람들이 어디있니? 일단 나가자! "
이튿날 줄리엣은 오후 늦게 잠에서 깼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
신의 방이었어요.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어떻게 되긴요. 어젯 밤
그녀는 술에 떡이 된 채로 누군가의 등에 업혀 집에 들어온 게 생각
났어요.
그리고 바로 파티장에서 피웠던 난동들과 술주정이 생각 났어요.
" 아 X발. X 됐다. "
줄리엣은 그 동안 사람들에게 쌓아 온 자신의 지고지순한 이미지가 한
순간에 깨졌다고 생각했어요. 여태까지 사람들에게 내숭을 떨었던 게
너무 아까워서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부분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어요. 분명 또다른 무슨 '실수'를 저질렀
던 것만 같은데 기억이 않나는 거예요.
" 마론, 어제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
줄리엣은 걱정이 되서 마론을 만나 물었어요.
" 야이 미친년아! 어제 너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 "
" 왜 그래, 마론? "
" 말도 마라. 술에 떡이 되서는 로미오한테 가겠다고 울고 불고 난리 부
르스도 아니었다. "
" ...로미오에게? "
" 그래, 이년아! "
" 이런... "
" 그래도 너 영광인 줄 알아. 로미오가 너를 업고 집까지 데려다 주
었어. "
" 뭐라고? "
" 네가 술에 취해서 그만, 로미오가 술을 마시고 있는 테이블까지 걸
어가 그 사람한테 토를 해 버린거야. "
" 그럴리가... "
" 아무튼 너 이제 작작 마셔. 알았지? "
마론과 헤어지고나서 줄리엣은 곰곰히 생각해보았어요.
' 그럼 어제 나를 등에업고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 준 사람이 바로
로미오...? '
줄리엣은 너무 고마운 나머지 그에게 어떻게라도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왕궁 소속의 그를 만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었
어요.
그녀는 로미오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답
니다. 그 둘은 신분이 달랐기 때문이예요.
몇날 며칠이 지났지만 줄리엣은 파티장에서의 그를 잊을 수가 없었
답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그에 대한 그리움은 나날이
커져갔죠.
그리고 어느 날 마론이 그녀의 집에 찾아갔을 때 그녀는 심각한 상
사병을 앓고 있었어요. 줄리엣은 그를 보고싶어 했지만 그러지 못했
고 결국 그녀는 알아눕게 되버린 것입니다.
" 마론. 그가 보고싶어 "
마론이 말했어요.
" 적당히 좀 해. 그가 너같은 애를 거들떠나 볼 것 같아? "
" 그 때 파티장에서 나한테 그랬잖아. 너 정도면 로미오를 노려볼만
도 하다고. 그 얘긴 뭐야 그럼? "
" 농담과 진담도 구분 못해? 그만큼 파티장에 꼬셔볼만한 남자들이
많다는 것을 예를들어 말한거잖아. 오르지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말
랬다고 그는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
"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했어. "
" 아니, 근데 이년이...! "
" ..... "
마론이 돌아가고 줄리엣의 병세는 점점 악화 되었어요. 로미오에
대한 지나친 사랑과 애정이 결핍으로 이어진거죠. 결국 로미오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집착'에 가까워졌답니다.
그녀는 하루에도 수십통씩 그에게 편지를 보냈고, 가끔식 그가
마을로 내려올때면 그를 만나기 위해 마을로 나섰죠. 혹시 모를
우연을 기대하면서요.
그러던 어느날 줄리엣은 정말로 마을을 돌던 로미오와 우연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답니다.
" 어라? 당신은...? "
로미오가 먼저 반갑게 말했어요.
" 파티장! 맞죠? "
" 로, 로미오? "
" 내 이름을 알아요? "
" 그럼요! 마을에서 당신의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거든요. "
" 하하, 그래요? "
" 그 때는 정말 신세 많았어요. 이렇게 고맙다는 얘기도 못드리
고... 아, 그리고 정말 죄송했습니다. 세탁비는 따로 드릴게요. "
" 아뇨. 괜찮아요.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
" 언제 식사라도 한끼 대접하고 싶은데... "
" 네? "
" 오늘 저녁 어떠세요? "
" 죄송하네요.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
" 그럼... 토요일 저녁은 어때요? "
로미오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대답했어요.
" 음... 좋아요. 그 때 뵙죠 "
로미오는 그렇게 말하고 어딘가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그와의 저녁 약속을 잡은 줄리엣도 신이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뭔가 낌
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던 걸까요?
그래서 그녀는 로미오를 몰래 미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미오
는 광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어요.
" 로미오! 왜 이렇게 늦은거야? 기다렸잖아! "
" 미안, 많이 기다렸어? "
로미오가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가 상당히 짜증섞인 얼굴로
그를 맞이했습니다. 멀리서 몰래 그 장면을 지켜보던 줄리엣은
놀란 얼굴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엔 바로 그녀의 절친한 친
구 마론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 날 이후 줄리엣은 엄청난 괴로움에 시달렸습니다. 사랑하는 남
자와 오래된 친구를 동시에 잃게 된 셈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마론
에게서 느끼는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컸어요.
하지만 그런 배신감보다 그녀를 더욱 괴롭혔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로미오를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녀는 생각했어요. 그 누구에게도 로미오를 뺏길 수 없다고...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었죠.
그래서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 갑자기 무슨 일이야? "
토요일 아침 일찍 줄리엣은 마론의 집을 찾아갔어요. 그런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조금 놀랐는지 마론의 얼굴은 그렇게 달가워
보이지 않았어요.
" 할 말이 있어 "
줄리엣은 얼른 집으로 돌아가 로미오와의 저녁식사를 준비해야만
했기에 서둘러 일을 처리해야만 했어요.
" 들어와 "
마론이 말했어요.
" 그런데 갑자기 할말이라니... 또 그 로미오라는 작자에 관한 얘
기야? 아서라, 아서. 그랑 너는 어울리지 않아. "
" 어울리지 않는다고? "
" 내가 다른 남자 소개시켜줄게. 세상에 로미오보다 멋지고 잘난
남자는 얼마든지 있어 "
"그래서 너는 로미오와 그렇게 잘 어울려서 친구가 좋아하는 남
자를 뺏어갔냐? 가증스러운 년! "
" 뭐라고? 대체... 뭐라고 지껄이는거야? "
" 시끄러! 너같은건 없어져야 돼!! "
줄리엣은 코트 주머니 속에 넣어둔 권총을 꺼냈어요. 마론이 당
황해서 물었어요.
" 주, 줄리엣! 잠깐만 진정하고 내 얘기 들어 봐! "
" 탕! 탕! "
줄리엣은 마론의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어요. 정
확히 두 발의 총알이 그녀의 정수리를 뚫고 지나갔죠.
마론은 그대로 풀썩 쓰러졌어요.
그리고 쓰러진 마론을 향해 줄리엣은 나직이 속삭였답니다.
" 누구에게도 로미오를 빼앗 길 수 없어... "
로미오와의 저녁약속을 기대하며 줄리엣은 흥겹게 저녁식사를 준
비하고 있었답니다. 그동안의 노력에 결실을 맺게 되는 순간이었죠.
그 둘의 사랑을 방해하던 마론도 없어졌겠다. 이젠 정말 로미오와
평화롭게 사랑하는 일만 남았죠. 줄리엣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녁 여덟시를 막 넘길 무렵 약속대로 그가 찾아왔습니다.
" 맛있는 냄세가 나네요 "
줄리엣은 그 어느때보다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답니다. 로미오는 줄
리엣이 만든 해물 스파게티 한 입을 입 안으로 밀어넣더니 맛있다
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줄리엣은 기분이 좋았답니다.
" 와인 한잔 할까요? "
즐거운 저녁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줄리엣이 말했어요.
" 좋죠. "
로미오가 대답했어요.
줄리엣이 포도주를 찾기 위해 창고로 들어갔고 로미오는 소변을
보기위해 화장실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창고에서 돌아온 줄리엣
은 그가 화장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죠. 조금 후에 있을 그와
단둘의 오붓한 시간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간 그가 10분, 20분, 30분, 1시간 째 기다려
도 나오지 않는 거예요.
줄리엣은 점점 걱정이 됐어요.
" 이 봐요. 로미오! 안에 있어요? "
화장실 문 안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줄리
엣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급하게 문을 두드렸죠.
" 로미오! 대답해봐요! 로미오! 제 말 듣고 있나요? "
급한 나머지 줄리엣은 문을 잡아당겼어요. 예상밖에도 문은 열려
있었죠. 하지만 문이 열리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정말이지
참혹했어요.
" 세, 세상에나! "
세상에! 로미오가 죽어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토막난 채로 말이죠. 그의 시체는 욕실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
고 있었어요.
" 대.. 대체... 이게... 어떻게... "
줄리엣은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어요.
" 오... 나의 왕자님... 어쩌다... "
줄리엣은 슬퍼했어요.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죠. 왜일까요?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는데. 절친한 친구까지 죽여가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런 슬픔보다 그녀의 두뇌속을 빠르게 지나간건 어떻
게든 그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일념이었어요. 그리고 그녀
는 시체를 은폐하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분명 그녀의 말을 믿어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영
문을 모르겠지만 그가 갑자기 토막난 채 죽어있었다. 라고 하면
어느 누가 쉽게 믿겠어요? 게다가 왕궁 소속의 그를 살해했다
고하면 최소 사형에 처해지게 될 것을 줄리엣은 너무나도 잘 알
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줄리엣은 커다란 봉지에 로미오의 잘려나간 시체를 하나씩 하나
씩 담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혹시 마론의
유령이 저지른 복수극일까요?
스물 세개로 조각난 로미오를 봉투에 모두 담아낸 뒤 욕실을
청소하기 시작했어요. 엄청난 악취가 집안 전체에 비릿하게 풍
기고 있었기 때문에 구토가 나올 것만 같았지만 그녀는 힘들게
참아냈죠. 줄리엣은 로미오의 시체가 들린 봉투를 테이프로 감
아서 꽁꽁 밀착 시킨다음 그것을 다시 박스에 집어넣었어요.
이제 로미오를 버리는 일만 남았네요.
" 줄리엣! 안에 있니? 나야, 캐서린! "
바로 그 때였어요.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어요.
바로 캐서린이었어요.
" 캐, 캐서린...? "
" 줄리엣! 이 문좀 열어 봐! 너에게 급하게 전할 말이 있어.
마론이... 마론이 죽었어... "
" 자, 잠깐만! "
" 줄리엣! 듣고 있니? 일단 이 문부터 열어 봐! "
줄리엣은 당황했어요. 어쩌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몸이 '붕-'하고
뜨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어요. 아니 실제로 몸이 뜨고 있었어
요!
" 캐서린! 내가, 내가 날고 있어! "
" 뭐? 뭐라고? 뜬금없이 그게 무슨소리야? 일단 이 문부터 열어
보라니까! "
" 기찬아! 밥 먹어야지 "
엄마의 말에 기찬은 들고 있던 줄리엣을 내려놓았다. 줄리엣은 기
찬이 제일 아끼는 바비인형이었다. 기찬의 다른 손엔 커터칼에 의
해 산산히 조각난 로미오의 몸체가 들려있었다. 로미오는 기찬의
아버지가 어제 사온 새인형의 이름이었다.
어렸을적부터 기찬과 함께 해온 줄리엣은 늘 기찬의 단짝 친구가
되어주었다. 기찬은 그녀를 사랑했고 그렇게 줄리엣에 대한 기찬
의 사랑은 조금씩 '집착'에 가까워졌다.
" 누구에게도 줄리엣을 뺏길 수 없다... 어느 누구 에게도..."
기찬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 기찬아! 인형 놀이 그만하고 밥 먹으라니깐? "
" 네, 엄마 "
네번째 이야기 - 실수
(작가 : 웃대 hirurika)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처음에는 기절이라도 했나보다라고 생각했지만 녀석은 그 날 이후
이틀간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
숨도 쉬지 않고, 심장도 뛰지 않는다.
의학적 지식이 전혀없는 내가 보기에도 녀석의 사망은 분명해 보였다.
난 그저 살짝 밀었을 뿐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리다니.
덕분에 이제 난 살인자가 되었다.
이건 누가봐도 명백한 실수이기 때문에 사형은 면하겠지만
아마 잡히는 날엔 적어도 10년, 어쩌면 20년 동안을 감옥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20대와 30대를 감옥에서 보낼 판이었다.
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제 아무리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도 증거가 없다면 어쩔것인가?
처벌을 할래야 할 수 없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이 더럽고 냄새나는 시체를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나는 방안에 비닐을 깔고 그 위에서 녀석의 몸을 토막내기 시작했다.
장장 3시간에 걸쳐서 나는 녀석을 완전히 조각조각 자를 수 있었다.
나는 고깃덩어리가 된 녀석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할로윈(내가 기르는 개)에게 사료와 함께 섞어서 먹이로 주었다.
시베리안 허스키인 녀석의 먹성은 생각보다 좋아서 적어도 한달은
먹을거라던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일주일만에 끝내버렸다.
그 안에 몇번이나 경찰들이 날 찾아왔지만 별다른 특이점은
발견하지 못하고 몇가지 간단한 질문만 하고는 돌아갔다.
낌새로 보아 경찰은 아직 그를 단순 실종사건으로만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녀석이 만약 개밥이 되어 벌써 똥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알면
경찰들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생각하니 웃음이 터져나와 난 견딜수가 없었다.
뼛조각은 이미 잘 빻아서 하수구에 흘려보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완전범죄가 아닌가?
며칠, 몇달이 지났지만 모든것이 잠잠했다.
경찰은 고등학교 때에도 몇번 가출한 경험이 있는 녀석을 아예
단순가출로 처리해 버렸다.
사람을 죽인 내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게된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쉬운 것이었던가?
마당에서 할로윈이 숨을 헐떡거리며 날 향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나는 이번 일의 숨은 공로자인 할로윈을 격려하기 위해서 마당으로 나갔다.
녀석은 신이나서 더욱 세차게 꼬리를 흔들어 댔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몇번 쓰다듬어 주었다.
할로윈은 내 얼굴을 혓바닥으로 마구 핥아댔다.
평소의 나였다면 호통을 쳤겠지만 이번만큼은 봐주기로 했다.
내 얼굴을 핥아대던 할로윈이 갑자기 내 목을 덥썩 물어뜯었다.
어찌나 무는 힘이 강한지 성대가 그대로 뜯겨져 나가버렸다.
덕분에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자리에서 고꾸라지고 말았다.
입가에 뭍은 피를 핥아대며 할로윈이 날 뜯어먹기 시작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난 사람을 죽였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나는 한가지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것은 사람고기의 맛을 알게된 개 새끼를...
쩝쩝쩝... 와득와득...
다섯번째 이야기 - 돌고 돌아 도는 돈
(작가 : 붉은벽돌무당집 안영준)
나는 사기꾼이 되기로 작정했다.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연말연시에 적당히 놀면서 쓸 200만원 정도만 있으면 충분했다. 물론 다다익선, 그 이상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괜히 섣부르게 큰 탕 한번 치고 잡혀가느니 작은 껀수에서 부터 노하우를 쌓아가는 편이 안전하다. 위대한 소도둑이 되려면 바늘부터 훔치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음? 젊은 놈이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왜 하필 사기냐고? 그것은 세상의 돈은 돌고 돌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손해를 보고 산다. 나만 해도 그렇다. 온라인 중고물품거래에서 입금을 하고 물품을 못 받은 경우가 몇 번이나 있었다. 경찰에 신고를 해봐도 소용없었다. 시큰둥 몇 마디 물어보고는 담당형사는 몇 달째 연락이 없기 일쑤였고 한번도 내 돈을 돌려받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사기를 치면 안된다’는 쓸모없는 교훈을 준 것이 아니라 ‘사기를 쳐도 안 잡히는구나’하는 실용적인 교훈을 주었다.
그동안 모두가 나를 속였지만 나는 누구도 속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의 손해는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가? 돌고 도는게 돈이라는데 왜 나는 빠져나가는 돈만 있고 들어오는 돈은 없는가. 여기 저기서 사기치고 등쳐먹는데 왜 나 혼자만 등신같이 당하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여기서 나는 갈등했고 오랜 고민 끝에 깨달았다. 내가 당한 만큼 누군가가 또 당해야 나의 손해분량이 보충된다는 사실을. 나를 속인 녀석들도 어디선가 속았던 녀석들이겠거니 생가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 역시도 누군가를 속여도 된다는 면죄부가 되니까. 적어도 나는 사기꾼일망정 타인에게나 나에게나 공평한 사람인 것이다. 요컨대 세상이 육식인간과 초식인간으로 나뉜다면 나는 기꺼이 악랄한 육식인간이 되기로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사기꾼이 되기로 작정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대포폰과 대포통장을 만드는 일이었다. 대포폰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전에 운 좋게 지하철 안에서 주운 핸드폰을 들고 용산전자상가에 가보니 대포폰 만들어주는 곳은 수도 없이 널려 있었다. 그곳 기술자들은 내 핸드폰의 esn(고유번호)를 주은 핸도폰의 esn으로 등록시켜주었고 개통비 1만원에 선불3만원을 더 내니 선불폰으로 개통까지 시켜주었다. 신분증을 안 보여드려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네는 오직 믿음으로 장사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필요 없다고 했다. 무슨 사업을 하시려는지 모르지만 이정도만 하시면 경찰에서도 절대 추적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 않았다.
대포통장은 발품을 팔 필요도 없었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대포통장’ 네 글자만 치면 관련카페목록이 주루룩 떴다. 나는 그중에서 인터넷에서만 4년 넘게 장사를 했다는 믿음과 신뢰의 ‘OO상사’에 20만원을 주고 대포통장을 주문했다. 과연 한번 온 고객은 다시 찾는다는 OO상사답게 K은행의 감쪽같은 대포통장은 노숙자일 것으로 짐작되는 누군가의 주민등록증사본과 함께 다음날 제꺼덕 배달이 되었다. 자기들이 4년동안 수도 없이 많은 대포통장을 팔아봤지만 지금껏 한번도 경찰의 추적은 받은 적이 없다는 자부심 어린 쪽지도 첨부되어 있었다.
자 모든 준비는 갖추어졌다. 나는 노트북 중고거래로 유명한 N사이트에 요즘 가장 있기 있는 SONY사의 최신형 노트북을 매물로 올렸다. 그런 고가의 노트북이 나에게 있을 리가 없기에 사진은 SONY사의 홈페이지에 있는 것을 도용했다. 물론 회원가입은 대포통장의 신분으로 했고 ip추적을 피하기 위해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PC방을 이용했다.
-급매입니다. 카드값 때문에 시세보다 30만원정도 낮은 파격적인 가격으로 드립니다. 010-9920-771*으로 연락주세요
매물을 올리고 집으로 오는 중에 문의전화와 문자가 15통이 넘게 왔다. 그 중에는 지금 당장 돈 부쳐 줄테니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아달라는 어리숙한 녀석도 있었다. 이 녀석들은 도대체 뇌가 있는 것일까? 떡밥을 뿌리자마자 월척들이 서로 먼저 물겠다고 몰려드는 꼴을 보니 한심하기도 하고 왠지 뿌듯하기도 했다. 나는 가장 어리숙해 보이는 녀석을 골라잡아서 사는 지역을 물어보았다.
“저어..4호선 길음역족에 사는데여..직접 찾아 뵙고 2만원만 네고해 주시면 안될까요?”
“죄송한데예..지가 경상도거던예..마 믿고 장사하는 긴데 먼저 입금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꺼? 지도 몇 번 당한 적이 있어서 사기치는 새끼들이 젤루 싫습니더”
나는 미리 연습해둔 사투리로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경상도 사투린지 전라도 사투린지 지가 알게 뭔가.
“저..죄송한데요 그럼 일단 반액만 보내드리고 물건 받고 나머지 드리면 안될까요?”
“마 사람을 그리 못믿습니꺼? 싫음 마이소. 지금 5명이 넘게 차례 기다리고 있습니더”
“저..그래도..”
“마 좋십니더. 까짓 2만원 네고해 드리고 택배비도 제가 내겠심더. 됐지예?”
정확히 5분후 내 대포통장 계좌에 230만원이 입금되었다. 나는 CCTV를 의식하여 머플러와 모자, 선글라스로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집에서 지하철로 5정거 떨어진 K은행지점으로 가서 금액을 모조리 인출했다. 물품을 부치고 송장번호를 알려달라는 문자가 온다. 당연히 송장번호는 알려주어야지. 재화란 돌고 도는 것. 받는게 있으면 주는게 있어야 한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꽤나 공평하고 양심적인 사람인 것이다.
나는 집에 오자마자 베란다에 굴러다니는 짱돌을 아무거나 하나 집어서 박스에 넣고 택배로 부쳤다. 모양도 넙죽하고 무게도 적당한게 노트북 대용품으론 딱이었다. 택배비 5천원이 추가로 깨지긴 했지만 230만원이나 주셨는데 그깟 5천원이 아까우랴. 최소한 박스를 받아서 테이프를 찢고 제품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가슴 떨리는 희망과 용기를 줘야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나는 그 작은 기쁨마저 빼앗을 정도로 악랄한 사기꾼은 못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세상엔 우리가 모르는 신비가 많다. 연말연시라 배송이 오래걸리다보니 노트북이 오는 도중 화석으로 변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나는 고객에게 친절하게 송장번호까지 문자로 보내주고 나서 곧바로 대포폰을 해지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다음 껀수에 가입비가 좀 더 들더라도 이 방법이 안전했다. 히트 앤드 런!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아라!
오랜만에 주머니가 두둑해진 나는 그동안 얻어 먹고 다녔던 친구들을 모아 오랜만에 단란에서 거하게 한방 쏘았다. 원양어선 타고 돌아온 뱃놈이라도 되는 양 전대를 풀어놓고 돈을 써대는 나를 보고 친구 놈들은 돈벼락이라도 맞았느냐고 놀라워했다. 이제야 비로소 돈이 순리대로 도는 것을 실감하며 나는 여자파트너의 젖통을 신나게 빨았다.
주점에서 밤을 꼴딱 세우고 다음날 아침 집에 돌아갔을 때, 집에는 낯선 남자가 수첩을 꺼내들고 서성이고 있었다. 거칠어 보이는 인상의 턱수염이 텁수룩한 남자는 나에게 자신을 ‘강형사’라고 소개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디에서 꼬리가 잡힌걸까. 어제 하루동안 내가 저지렀을지도 모를 실수를 곰곰이 되집어 보였다. 없다. 아무데서도 꼬투리를 잡힐 건덕지가 없다. 더구나 아직까지 물품을 배송중일 터였다. 나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 강형사가 대답했다.
“어저께에 댁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댁에 아버님께서 애지중지 하시던 2천만원짜리 수석을 집어갔더군요. 허 참, 안 그래도 도둑이 집어 갈까봐 베란다에 평범한 돌덩이처럼 위장해 놓으셨다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쏙 집어갔는지...혹시 짐작가시는 분 없으십니까? 자주 드나들던 이웃집사람 이라든지..”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세상의 돈은 돌고 도는 것이다.
여섯번째 이야기 - CCTV
(작가 : 웃대 hirurika)
어렸을 때 우리반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 놈과 맞장을 뜬적이 있다. 또래에 비해서
키도 작고 마른 체격의 내가 적어도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녀석과 싸움을 하려니
애초에 게임이 되질 않았다. 죽도록 두드려 맞은 난 불쌍할 정도로 부어오른 얼굴로
뻗어버렸고 녀석은 '성기도 안되는게 개기기는'라고 하면서 의자에 삐딱하게 걸터앉았다
. 하지만 녀석은 쓰러져 있던 내가 설마 그런짓을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듯 무
방비 상태로 카터칼에 얼굴을 찔리고 말았다. 녀석의 볼살을 뚫고 들어간 칼날 사이로
붉은 피가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난 그 때 내가 뭣 때문에 녀석과 그렇게 싸웠는지는
정확히 기억을 할 수가 없다. 꽤 사소한 일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도 안나는 걸 보면
정말 별것도 아닌일이었던 것 같다.
"또..."
오늘도 어김없이 내 자취방에 누군가 침입했다. 거울엔 붉은색 립스틱으로 욕설이
가득 써있고, 방안은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 처럼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나에게 앙심을 품은건진 몰라도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한다. 경찰에 신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 내손으로 범인을 잡고 싶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건지
그 이유도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난 돈이 좀 들긴 했지만 방안 은밀한 곳에 감시 카메
라를 설치해 놓고 여느때와 다름없이 수업을 듣기위해 학교로 출발했다.
"오늘도 오셨었군."
아니나 다를까 강의가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난 분명 나올 때 문을 잠궜음에도
불구하고 섹시한 여자의 입술처럼 살짝 열려있는 문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덕분에 이제 몰래 설치해 둔 CCTV로 범인이 누군지 확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난 긴
장된 마음으로 방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산산히 조각나서 방바닥을 뒹굴고 있는 카메라
를 볼 수 있었다. 은밀한 곳에 설치한다고 했지만 녀석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나 보다.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한편으로는 어디에 설치되어 있을지 모를 CCTV
의 위험성을 녀석이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이런일이 발생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한건 아쉽지만 어쩌면 이러는게 더 속편한 일일지도 모르
겠다.
"빌어먹을 개자식. 두고보자."
다음날 외출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런 내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어김없이 난장
판이 되어있는 집안 풍경을 보고 복수를 결심했다. 이젠 누구라도 잡히기만 하면 가만
두지 않을 생각이다. 그동안 조용히 살아왔건만 이렇게 신경을 건드리다니. 반쯤 죽여
놔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난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아둔 돈을 모두 털어 집안 곳곳에
CCTV를 설치했다. 녀석이 아무리 눈썰미가 좋고 대담하다고 해도 12개의 카메라를 모
두 찾아내진 못할 것이다. 걸리기만 해라. 걸리기만.
"이럴수가."
다시 외출에서 돌아온 난 12개의 카메라가 보란듯이 모두 망가져 방바닥을 뒹굴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고 말았다. 장소를 미리 알고있지 않은 이상 도저히 찾아낼 수 없
다고 생각했던 곳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이런일이 가능한거지? 마치 내 행동을 낱낱
히 파악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내 일거수 일투족을 다 꿰고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망가진 카메라를 지긋이 보던 난 어쩌면 그것이 아주 불가능한 것만
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녀석이 내 행동을 미리 관찰하고 있다면 그
렇게 어려운 일만도 아닌 것이다.
"이 집 어딘가에 몰래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아요. 찾아주세요."
결국 전문가까지 부르고 말았다. 한시간 가량 비좁은 자취방을 샅샅히 탐색한 그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도청기나 몰래카메라 같은건 없다고 했다. 이쯤되면 녀석은
몰래카메라에 관해선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아마
지금도 전문가조차 찾아내지 못할 기상천외한 곳에서 녀석의 몰래카메라가 날 관찰하
고 있을 것이다. 난 틈만나면 녀석의 몰래카메라를 찾기위해 방을 뒤지곤 했지만 소득
은 없었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몰래 집 근처에 잠복한지도 어느덧 4일째다. 녀석은 마치 내가 이곳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았다. 일주일째가 되던 날 결국
난 더이상 학업까지 포기해가면서 범인색출에 매달릴 수만은 없었기에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집을 나와버렸다. 친구집에서 한동안 지내면서 녀석이 나에 대한 원한이나
증오의 감정을 수그러뜨리기를 바랬다. 영화 '올드보이'에서처럼 내가 모르는(혹은 내
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안하다. 유석아. 신세 좀 질게."
"친구끼리 미안한게 어딨냐? 그나저나 그 스토커도 참 지독하다."
그 날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늦게까지 술을 마신 난 12시가 조금 넘어서야 귀가를
했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난 친구의 집도 안전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
달을 수 있었다. 난장판이 된 그의 집은 둘째치고 유석이의 얼굴은 눈뜨고는 못봐 줄
만큼 지독하게 부어있었다. 아주 심하게 구타를 당한 것 같았다.
"유석아. 이게 어떻게 된거야?"
"히이익, 잘못했어. 미안해. 살려줘..."
유석이는 완전히 패닉상태에 빠져있었다. 도대체 무슨짓을 당했길래 내 얼굴도 못알
아보는 거지? 난 유석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지만 그럴수록 유석이의 안
색은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119라도 부르려는 찰나 밖에서 경
찰차의 싸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신고했는지는 몰라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경찰들이 들어오자 언제 그렇게 굳어있었냐는 듯 유석이는 미친듯
이 경찰뒤로 숨으며 악을 썼다.
"저 새끼에요. 저 새끼를 잡아요. 저 미친새끼..."
난데없는 유석이의 말에 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너무 심한 짓을 당한 나
머지 날 그 스토커로 착각하고 있는 듯 싶었다. 경찰들은 유석이의 말만 믿고 내 손에
수갑을 채웠다.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오해를 풀어야 했기에 난 그들에게 순순히 협조
를 해주었다. 유석이가 좀 진정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정현식씨 정말 끝까지 이럴겁니까? 피해자가 있는데도..."
"유석이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형사님도 보셨잖아요. 걔가 지금 정상으로 보이세요?"
경찰서에 도착한 난 조서를 꾸미면서 앞에 앉은 형사와 계속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그도 그럴것이 유석이의 말만 듣고 날 가해자로 생각하는 형사에게 진실을 설명해줘야
했으니 말이다. 난 정말로 유석이를 폭행한 일이 없으며 유석이가 말한 시간엔 고등학
교 동창생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정도 알리바이면 당연히 오해가 풀려야 정상 아니
냐는 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형사는 날 추궁하고 있는 것이다.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겠다 이거죠? 금방 끝날일을 왜 어렵게 돌아가는지 모르겠군요.
이게 뭔 줄 알아요?"
"뭔데요?"
"김유석씨 집에 설치되 있던 감시 카메랍니다. 김유석씨 본인이 설치한 거죠. 여기에
당신이 한 짓이 모두 들어있다고. 알아들어요?"
"난 유석이를 폭행한 적 없습니다."
끝까지 완강한 내 태도에 결국 형사는 내 앞에서 비디오를 틀었다. 그리고 곧 난 믿
기지 않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유석이는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거칠게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방안으로 들어왔는데 자세히 보니 나였다. 난 자고있는
유석이의 얼굴을 주먹으로 미친듯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습격에 처절한 비명
을 지르며 깨어난 유석이는 제대로 된 방어도 하지 못한 채 내가 날리는 주먹을 고스
란이 얻어맞았다. 폭행은 무려 30분이나 계속되었다. 급기야는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유석이는 내게 무릅꿇고 살려달라고 빌기 시작했다. 난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
은 후 들어올 때처럼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집
으로 들어온 내가 유석이에게 '유석아. 이게 어떻게 된거야?'라고 말하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실로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이래도 잡아 땔겁니까?"
"그럴리 없어..."
모든게 내 자작극이었단 말인가? 그럴리 없다. 이럴수가. 귀에서 윙윙 거리는 소리
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내 앞에서 지껄여대는 형사의 목소리가 그 윙윙 거리는 소
리에 뭍혀 잘 들리지 않았다. 난 고개를 돌려 책상위에 놓인 거울을 보았다. 내 얼굴
에 낮선 흉터가 보인다. 마치 카터칼에라도 찔린 듯한 흉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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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네요.. 좀 길죠?
스크롤압박이 있네요. 짧은글들을 모아놔서 그렇지 글 하나하나는 그렇게 길지 않아요
그럼 재밌게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