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의 형(神獸之形) 5

Wagi200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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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유, 겨우 살았네."

 

유진은 책상에 엎드려 숨을 몰아쉬었다.
고등학교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유진은 책상에 얼굴을 붙이고 꿈꾸는 눈으로 옆자리의 기린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애다.
스스로도 좀 샘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거리를 걸으면 눈길을 끌 정도의 외모에

어릴 적부터 극성스런 엄마의 등쌀에 공부도 그럭저럭 해왔고

노는 데도 빠지지 않는다.

 

화제의 중심에는 늘 자신이 있어야 했고

어떤 모임이건 주도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었는데.

참 이상한 일이지.

기린이를 처음 보았을 때는 경쟁심보다 호감을 먼저 느꼈다.

다른 애들이 꺄꺄거리는 것과는 달랐다.

그냥 친근한 느낌이 솟아올랐다고나 할까.

 

"왜?"

 

기린이 눈을 맞추고 물었다.

 

"아냐, 그냥."

 

이런 점이 좋다.

기린은 늘 진지하게 사람을 대해준다.

별것 아닌 일에도 하던 일을 멈추고 집중해 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기쁘게 하는지 그런 대접을 받아보기 전에는 몰랐었다.

 

더 좋은 점은 아무에게나 그렇게 해 주지는 않는다는 거지만.

 

기린의 단짝으로서 약간의 우월의식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예의바르고 단정하지만 결코 옆을 허물지 않는 기린의 최근방에

자신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흐뭇하다.

 

사람을 따르지 않는 우아한 고양이를 품에 안고 걷는 기분이랄까.

 

"유진아."

"왜?"

"무슨 일 있었어?"

"일이라니?"

"어제 혹시 이상한 일 없었어?"

"이상한 일?"

 

유진은 곰곰 생각하다가 어제밤의 꿈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겨우 그런 개꿈을 갖고 호들갑떨 필요는 없어.

 

"없었는데?

맞다! 우리 언니가 세상에 내 옷장 뒤져서

새로 산 탑을 몰래 입고 가버린거 있지?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언니가 뭐 그러냐?"

 

유진은 새삼 언니의 만행에 치를 떨면서 기린에게 자세히 고해 바쳤다.

기린은 부모님이 안 계셨다.

형제도 하나 없고 할아버지와 같이 산다고 들었다.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기린 때문에

처음 만난 열두엇 무렵에는 집안 이야기를 하기가 껄끄러워 얼마나 조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닌 척 하지만 기린은 집안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아했고

부모님과의 사이, 형제간의 사이에 있었던 사건들을 이야기해주면 드물게 미소를 짓기도 했다.

기린의 미소는 별이다.

건빵 한봉지를 사면 아주 조금 들어있는 별사탕.

조그맣고 예쁘고 달콤해서 먹기가 아까운 깜짝선물.

 

오랜 시간을 붙어다니면서 그 별사탕을 갖는 법도, 간직하는 법도 알게 되었다.

그 별을 아낄 줄 알게 되면서 스스로 어른이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른스러운 기린과

귀엽고 아이같은 유진의 조합이었지만

유진에게는 기린이 조그마한 여동생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기린의 보이지 않는 사인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유진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기쁨을 알았다.

다른 사람을 감싸고 다독거리는 행복감을 깨달았다.

 

돌이켜 보면 자신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아이였는지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지금은 아무 이야기나 다 기린에게 할 수 있다.

일부러 조심하지 않아도 기린에게 상처가 될만한 말은 자동적으로 걸러지니까.

사랑을 간직한 마음으로 대하면 상대방을 상처주지 않는다.

진심을 전해주니까.

 

끝도 없는 유진의 수다를 들으면서 기린의 얼굴이 눈에 띄지 않게 풀렸다.

 

수업이 끝나고 기린이 교무실로 간 사이 유진은 화장실로 향했다.

여자애들은 화장실도 같이 다닌다지만 워낙 바쁜 기린이라

쉬는 시간 동안 온전히 차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유진 역시 조르르 몰려다니는 일에는 흥미가 없어

가끔 기린이 단짝친구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여자들 사이에서 붙어다니는 것을 거부하는 일은

곧 친교를 거부하는 것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중학교 때 기린과 지금처럼 친해지기 전에는

유진에게도 몰려다니는 무리가 있었다.

그때는 가고 싶지 않은 곳도 같이 가주어야 했고

사고 싶지 않은 것에도 흥미가 있는 척 했다.

 

새로 산 주름치마를 입고나온 애한테 촌스럽다고 한마디했다가

불편한 일주일을 보내기도 했다.

기린과 친해진 이후로는 그 애들에게서 배신자라는 소리도 들었다.

 

뭐 이젠 다 지난 일이지만.

지금은 가끔 연락하고 만나서 못된 짓을 배우는 사이가 되었으니 참 사람일이란 모르는 거다.

 

"유진아, 매점 안 갈래?"

"패스. 올때 마실 것 좀 사다주라."

"알았어. 딸기우유 두개?"

"응, 땡큐."

 

유진은 화장실을 지나 옥상으로 올라가는 뒷계단을 밟았다.

 

옥상문은 잠겨 있지만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뒷계단도 흡연장소로 적합했다.

계단의 맨 위는 건물에 가려 밖에서 보이지 않았고

만약의 경우 안쪽으로 시청각실 창문과 통해있어 도망치기에도 그만이었다.

남자애들은 갈 데가 없어

운동장 한 구석이나 예전 화장실 근처를 아지트로 삼는다지만 들키기 일쑤다.

 

이 학교 안에서 완벽하게 은밀한 곳을 꼽으라면 

여학생 건물의 뒷계단뿐이었다.

 

흡연하는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여학생들 사이에서만

비밀리에 전해지는 장소라 관리도 철저했다.

 

꽁초는 반드시 수거해가고 침을 뱉거나 재를 바닥에 비벼끄는 것도 금지.

공기에 배인 냄새말고는 어떤 증거도 남겨서는 안 된다.

유진은 계단 꼭대기의 그늘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중학교 졸업 후 호기심에 배운 담배는 좀처럼 끊을 수가 없었다.

빨리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손이 간다.

휴우.

길게 한숨을 쉬고 연기를 내뿜었다.

네 모금쯤 빨고 일본에서 사온 휴대용 재털이에 꽁초를 구겨넣었다.

기별도 안 갈 정도지만 학교에서 피우는 담배맛은 각별해서

엄청난 수고를 필요로 하는데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다.

 

한심해.

 

스스로에게 반쯤 어이없는 넋두리를 하지만

선배에게 들은 다음날 바로 와버린 주제에 무슨 말을 할까.

구강 스프레이를 뿌리고 머리와 옷에 꼼꼼하게 탈취제와 향수를 뿌렸다.

위가 트여 있어 연기와 냄새는 금방 빠진다.

 

이 학교의 좋은 점은 바람이 세다는 것.

담배 냄새따윈 30초면 날아가 버린다.

특히나 이렇게 쌀쌀한 날씨라면 더욱.

손바닥에 입김을 불어 냄새를 맡고 나서 유진은 한번 더 스프레이를 뿌렸다.

 

"그거 나도 좀 빌려주라."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옥상에서 남자애 하나가 기지개를 켜며 나왔다.

 

"누, 누구야? 여긴 여학생 교사야. 왜 여기 있는 거야?"

"저쪽 건물은 옥상문이 안 열리더라고."

"여기도 잠겨있었을텐데?"

"조금 손보니까 열리더라. 그거 빌려줄거야, 말거야?"

 

얼떨결에 스프레이를 건네주고 유진은 아차 싶어 얼른 팔짱을 꼈다.

 

"땡스~"

 

왠지 낯이 익어 어디서 봤던가 한참 고민했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유진은 포기하고 등을 돌렸다.

 

뭐, 저도 여기 있었는데 나한테 뭐라고 하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입을 막아두는게 나을까?

 

조금 머뭇거리는 유진을 향해 남자애가 말을 걸었다.

 

"너, 기린 친구지?"

 

앗! 맞다, 그 놈!

 

"너! 입학식에서!"

"잘 됐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너, 나랑 기린의 큐핏~역할 좀 해 주라."

 

뭐어? 큐우피잇?

재수없는 놈이 발음까지 꼬고 지랄이야!

하여간 미친 놈들이 곱게 미쳤으면 미쳤단 소리 안 듣지.

 

"난 화살이 없는데."

"화살이 필요해?"

 

팔짱을 끼고 매섭게 노려보던 유진은

얼뚱한 대답에 미끄러질 뻔 했다가 얼른 자세를 고쳤다.

 

어리둥절한 눈을 보면 진심인 것 같기도 한데….

차마 믿기지 않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물어봤다.

 

"큐핏이 뭐하는 건지는 알아?"

"사랑의 전령사. 편지 전해주는 애잖아."

 

거들먹거리며 자랑스레 떠벌리는 녀석을 말없이 지나치며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살다살다 이런 녀석은 처음이야.

 

"고맙다! 근데 너 몇반이야? 걔랑 같은 반이냐?

몇반인지 알려줘. 있다가 내가 점심시간에 갈께."

"미쳤냐? 너 기린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맛! 가만 안 둬!"

"오오, 기린이, 기린이… 그렇게 부르니까 그 이름도 꽤나 귀엽네."

"야! 말을 들어! 분명히 경고했다!

기린이 근처에 오기만 해봐."

"넌 이름이 뭐냐?

나와 기린일 이어줄 메신저니까 특별히 이름은 기억해 줄게."

"미친 놈! 누구 맘대로! 기린인 절대 안 돼!"

"그래, 미안미안. 내가 잘난 건 알지만 잊어줘. 난 기린이로 정했거든.

너도 꽤 귀엽긴 하다만 역시 기린이한테 쀨이 꽂혀버렸단 말이지."

 

손가락까지 까딱거리며 오우, 노우 따위를 지껄이는 저 녀석은 대체 뭐냐고.

 

정말 강적이다.

내 기린이랑 5년을 붙어다니면서 너같은 놈들 참 많이 처리했지만

넌 그 중에서도 초강력찐드기일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팍 스친다.

 

더구나 뭐? 큐핏이 편지 전해주는 애라고?

너처럼 멍청한 녀석도 처음이다.

처음이라는 말이 싫어져서 유진은 눈을 꼭 감았다.

 

처음에는 면역도 없단 말이다!

 

그래, 말이 안 통하는 놈들에겐 매가 약이라더라.

 

가장 간단하고 합리적인 해답을 내놓고 유진은 놈을 한번 노려봤다.

거기에 화답하는 것은 녀석의 느끼한 윙크.

 

그 자리에서 굳었다가 얼른 깨어난 유진은 이 자리를 피하기로 결심했다.

사이코랑 오래 있어서 좋을 일이 무어란 말인가.

유진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감싸고

이젠 오 솔레미오를 부르는 사이코를 피해 교실로 도망쳤다.

 

오 마이 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