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어 힘없이 걸어가는 수정은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에 흘러내리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비를 맞아 몸의 온도가 떨어진다. 28년 살아오면서 부모님 없이 혼자서 해쳐나가야 하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힘든 일도 많았었지만 이처럼 사랑의 아픔에 혼란스럽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이러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지금 현재가 너무 아프기만 하다. 한참을 길거리에서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온 수정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쓰러진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준하. 오늘 자신을 거부하던 수정의 얼굴이 떠올라 미칠 것만 같다. 그 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을 꺼냈는데.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는데. 그 남자만 아니었다면 수정이 자신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남자 때문에 자신을 거부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화가 치밀어 오른 준하는 식탁 위에 있던 모든 것을 손으로 쓸어버린다. 바닥으로 유리가 떨어지면서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월요일 아침 출근 준비를 하는 수정은 욕실에서 나와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린다. 간단한 기초화장만 하고 부엌으로 가서 가스 불을 키고 후라이를 한다. 토스트기에 식빵을 굽고 땡 하는 소리와 함께 토스트가 구워졌다는 신호가 들리자 꺼내어 접시에 담는다. 식탁에 앉아 입 속으로 토스트를 꾸역꾸역 넣기 시작한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을 입 안으로 넣고 속이 좋지 않지만 계속해서 입 안으로 넣는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차를 운전해 신문사에 도착한 수정은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동료들과 함께 구내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자리로 돌아와 일에만 열중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오후 5시가 다 되었을 때 즈음. 편집장이 호출을 받아 편집장실로 들어가는 수정.
“ 부르셨어요. 편집장님. ”
“ 요새는 외근을 잘 안하네? 매일 매일 경찰서로 출근하더니. ”
“ 요즘은 별로 기삿거리가 없더라구요. ”
“ 연락 왔는데 오늘 그 연예인 한명이 뺑소니치고 도망가서 고소당했대. 연예부 기자는 아니지만 황기자가 강남경찰서랑은 좀 친분이 있으니까 조기자 대신 좀 다녀와. ”
“ 강남 경찰서요? ”
“ 응.. 다른 기자들 더 많이 오기 전에 얼른 가서 알아봐. ”
“ 아...네..”
가고 싶지 않은 곳을 가야한다는 생각에 표정이 일그러진다. 불과 며칠 전만해도 경찰서로 출근하는 일은 즐거웠다. 아는 사람들도 많았고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다는 기대감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심술 난 표정을 하고는 차에 오른다. 시동을 걸어 보지만 쉽게 걸리지 않아 슬슬 짜증도 밀려온다.
“너도 그 곳에 가긴 싫은가보구나~ 휴.....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동이 걸렸고 경찰서로 출발한다. 일부러 최대한 느리게 밟으며 천천히 운전한다. 어쩌면 이 시간에 갔을 때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이다. 2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40분에 걸쳐 도착했고 차에서 내린 수정은 한숨을 한 번 쉬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뺑소니 사건으로 고소 받은 연예인이 출두 해 있었고 조사를 받고 있었다. 밖에서 사진을 찍고 취재를 간단하게 마친 후 짐을 챙겨 나가려고 하는데 문을 열고 주환이 들어온다.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고개만 숙이며 인사할 뿐 말은 건네지 않는다. 경찰서를 나와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차 문을 열었을 때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 황기자님..~!!!”
정수였다. 다급하게 뛰어와 수정을 불러 세운다.
“ 김형사님. 무슨 일이에요? ”
“ 제가 좋은 기삿거리 하나 드릴까요? ”
“ 어떤 건데요? ”
“ 오늘 의약품을 냉동 창고에 보관해서 불법 거래한다는 정보가 하나 들어왔어요. 저희도 조만간 그 놈 잡을 건데 그 전에 한번 알아 보시라구요. 우리가 그 동안의 정이 있어서 황기자님 한테만 알려드리는 거니까 제가 알려드린 건 비밀이에요. ”
“ 정말요? 하하.. 고마워요. 김형사님. 나중에 한 턱 낼게요. ”
멀리서 그 모습을 보는 주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정이 이 곳에 온 것만으로도 신경이 쓰인다. 그날 이후 수정은 경찰서를 찾는 횟수가 거의 줄었다. 자주 볼 수 없어 그리운 마음도 들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그날 수정에게 그렇게 매몰차게 행동한 것은 잘 한 일이다. 그래야 그 바보 같은 여자가 단념하고 자신을 잊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정수가 건물 안으로 들어오다 주환과 마주치고 화들짝 놀라자 수상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 아... 팀장님.. ”
“ 황기자랑 무슨 이야기 한 거지? ”
“ 네? 아..... 그게.. ”
“ 왜 머뭇거려? 뭐야? 무슨 이야긴데? ”
“ 아니.. 저번에 팀장님이 황기자 회의실에 내쫒은 이후로 경찰서 출입이 뜸한 거 같아서 .. 왠지 보기가 안 쓰럽더라구요. 오늘도 봐요. 원래 그런 사건 기사 안 쓰는데 연예인 뺑소니 그런 거 취재하러 오고..”
“ 그래서.. 그래서 무슨 이야기 했는데? ”
“ 독성 의약품 냉동 보관 한다는 거 알려 줬죠.. ”
“ 뭐어~~~!!!!!”
큰 소리에 놀란 정수가 주눅 들어 고개를 숙인다.
“ 그걸 그 여자한테 말하면 어떻해~!!! 그 여자 성격 몰라서 그래? 기사 쓰려고 위험한데 혼자 가려고 할 거라고!!”
“ 그럼 어쩝니까. 기자가 기사다운 기사도 못 쓰니까 얼굴이 반쪽이 됐던데.. ”
정수에게서 그 말을 전해들은 주환은 마음이 다급해진다. 그 여자라면 위험한 곳이라도 갈 것이다. 막아야한다. 혼자서 가면 어떤 상황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입술을 깨물며 차의 시동을 거는 주환.
“ 정수. 넌 나하고 8시간이 넘어도 연락이 계속 안 되면 냉동 창고 있는 곳으로 지원 요청 해! ”
“ 아...네... 팀장님. ”
주환이 운전하는 검은 색 차량이 경찰서 주차장을 빠져 나간다.
철산 동에 있는 공장 단지에 도착한 수정은 차 안에서 사진기 셔터를 누르며 그 주변 사진을 찍는다. 한 시간째 공장에서 나오는 사람. 들어가는 사람 위주로 사진을 찍으면서도 수정은 어떻게 하면 저 곳에 들어가 결정적인 증거물 사진을 확보 하는냐 하는 생각뿐이었다. 의약품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라 왠지 의사들처럼 하얀 가운을 입고 있을 것 같았지만 그 곳에 돌아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검은 양복 차림이다. 그냥 봐도 인상이 험악하게 생긴 사람들이 보인다. 지금까지 여기자로써 깡다구 있게 어디든 가서 취재하거나 사건 조사를 하며 기사를 썼지만 언제나 당당하던 수정도 음산한 기운이 돌고 무서운 얼굴에 남자들이 있는 곳이라 사실 무섭기도 하다. 그러다 문득 지금까지 강력계 사건들을 조사하면서 원하던 원하지 않던 항상 자신의 곁에 있었던 주환이 생각난다. 그리고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을 때 마다 그 사건 속에서 주환이 자신을 도와주곤 했었지만 이제는 그럴 사람은 옆에 없는 것이다. 이제는 혼자서 모든 것을 헤쳐 나가야 한다.
‘황수정! 쫄지 말자! 주환씨 몰랐을 때는 뭐.. 기사 못썼나.! 할 수 있어. ’
그렇게 자신에게 애써 주문을 외우고 있을 때 몇몇 사람들이 차를 타고 공장 밖으로 이동하는 게 보이고 한 두 명 정도가 남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포착한다. 이내 검은 양복의 남자 두 명이 담배를 피우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린다. 카메라를 옷 속에 숨기고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발을 벗고 이동한다. 잠시 자리를 비운터라 다행히 공장 입구 쪽 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그 틈으로 작은 몸의 수정이 들어간다. 들어가서 보니 무엇을 담은 것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자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고 오래 된 공장이라 쾌쾌한 냄새가 난다. 절로 기침이 나오지만 다른 사람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입장이기에 손으로 입을 막는다. 주변을 둘러 보다 공장 안 쪽에 큰 컨테이너 박스가 보이고 그 옆에 냉동 창고로 보이는 문이 보인다.
‘아.. 저거구나. 저 안에 있는 내용물만 확인하면 ...’
그 때 입구 쪽에서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리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하는 수정을 누군지 모를 손의 이끌려 동작을 멈춘다.
“ 우리가 아까 문 열어 놓고 갔었나? ”
“ 그랬나 보지... 어차피 오늘은 우리 둘 밖에 없으니 괜찮겠지 . 뭐,. ”
“ 아.. 이 짓은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냐.. ? 빨리 이거 팔아 버리고 잠 좀 제대로 된 곳에서 자고 싶다. ”
수정의 뒤에서 입을 막고 몸을 잡고 있는 사람.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잡아 데리고 나가 괴롭히지 않는 것을 보니 누굴 헤칠 사람 같진 않다. 그렇지만 누군지 모를 사람이 자신을 잡고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있었다. 자신을 힘으로 제압하고 덩치가 큰 것을 보면 남자는 분명한데 말이다. 누굴까. 한 동안 정적이 흐르고 양복 입은 남자들은 저녁식사를 하러 다시 공장 밖으로 나간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수정을 제압하고 있던 남자의 손의 힘이 풀리고 그 남자에게서 벗어나게 된 수정은 뒤를 돌아 봐야 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 위험하니 빨리 여길. 나가는 게 좋겠군요. ”
이 목소리는. 수정은 잘 안다. 분명 수정에게는 그 남자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그리고 또 위험한 순간에 그 남자가 자신을 보호했다는 안도감에 감사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몸을 돌려 주환을 바라본다.
“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하~ 사건 조사하시려고요? 그럼 하세요! 저도 볼 일이 있어서요. 그럼. ”
다시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하는 순간 수정의 팔을 잡는 주환.
“ 뭐죠? 할 말 있으세요? ”
“ 여길 혼자 오면 어떻합니까? 여긴 위험해요. 당신이 혼자 와서는 안 되는 곳이..”
“ 정 팀장님! 지금 제 걱정하시는 건가요? 설마.. 아니죠? 전 아까 그 남자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저도 제 일 하는 거니 정 팀장님이나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
주환의 손을 뿌리치고 냉동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한숨을 쉬며 주환도 따라 들어간다. 따라 들어가면서 문을 미처 잡지 않아 냉동 창고 문이 철컥 소리와 함께 닫힌다. 창고 안으로 들어간 수정은 사진기를 꺼내 열심히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박스 안에 있는 물건들을 하 나 하 나 꺼내 보며 약병에 써있는 글귀를 확인한다.
“ 그래! 이거야! 역시... ”
“ 황수정씨. ”
“ 어머! 여기까지 따라 오신 거에요? 이 약품들은 제가 어렵게 고생하며 구한 거니까 증거물 사진으로 제가 가져 갈 거에요. 안된다고 하지 마세요. ”
수정이 약통 2개를 들고 창고를 나가기 위해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뻑뻑하기만 하고 문을 열리지 않자 약병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문고를 잡는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는다. 뒤 따라온 주환이 힘으로 문을 열러 보려 하지만 역시나 움직이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당황한 얼굴로 서로 문을 열어 보려 해도 꼼작도 하지 않았다.
“ 이...이거.. 왜.. 이래요? 문이 안 열리잖아요? ”
“ 아...하... 냉동 창고는 안에서는 열 수 없게 설치 되어있을 겁니다. 아마...”
“ 뭐라고요 ? 말도 안돼... 그럼.. 우린 여기서 어떻게 나가죠? ”
“ 누군가가 열어주기 전엔 나갈 수 없습니다. ”
주환의 말을 들은 수정은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된다. 냉동 창고. 이 곳은 일반 창고와는 다르다. 어떤 식품, 약품들의 변질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그야말로 냉동 공간인 것이다. 이 곳에서 오래 방치되어 있게 되면 어떤 사람이든 살아 남지 못한다. 자신이 냉동 창고 안에 갇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오는 수정은 조금은 이성을 잃는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 여기요! 밖에 누구 없어요? 냉동 창고 안에 사람이 갇혔어요! 문 좀 열어 주세요. 여기요! 누구 없어요? ”
있는 힘을 다해 문을 쎄게 때려 보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없다. 한 이십 분정도 그런 패닉 상태에 빠진 수정을 보고 있는 주환 역시 지금 이 사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 중이다. 핸드폰을 꺼내 보지만 통화불가능지역이라고 뜨고
한숨을 내쉬는 주환. 밖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주저앉는 수정. 그런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린 주환이 다가온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신발까지 벗어던지고 양말만 신은채로 이 공장 안까지.. 그리고 이 냉동 창고 안까지 들어온 이 대책 없는 여자. 살고 싶은 마음에 문을 두드리느라 손바닥이 다 까지고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 수정의 어깨에 덮어준다. 가까이서 본 수정의 얼굴에는 겁에 질려 눈물범벅이 된 모습이다.
“ 내가 고집부리지만 않았으면...... 그러지만 않았다면... 주환씨...여기 갇힐 일도 없었을텐데... 미안해요..”
이 여자.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 무섭고 두려운 마음에 우는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자신에게 미안해서 운다는 것을 알고 주환의 마음이 아려온다. 이 여자의 마음이 주환의 마음을 흔든다. 애써 외면하려 했던.. 그 동안 꽁꽁 숨어버리기만 했던 마음이 말이다. 손을 뻗어 수정의 눈물을 닦아주는 주환. 자신의 품 안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이내 다시 이성을 찾고 시선을 회피한다. 아직은 자신이 없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런 감정. 아픔. 떨림.
냉동 창고 안에 갇힌 지 두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점점 두 사람의 체온이 떨어지고 있었고 평소 운동으로 다져진 성인 남자인 주환에게는 견딜 만 했지만 수정에게는 아니었다. 수정의 온 몸이 파르르 떨렸고 입술 색이 변하고 정신이 혼미해져가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안쓰러워 자신의 운동화를 벗어 양말만 신은 수정의 발에 신겨 주자 수정이 고개를 흔들며 거부한다.
“ 아...아니에요.. 괜찮아요... ”
“ 이제 고집 그만 부려요. ”
시간이 가면 갈수록 주환도 힘이 들었고 수정은 눈이 계속 감기려고 한다. 박스에 기대어 주환을 바라보는 수정은 눈을 깜박거리며 애써 웃어 보인다. 혹시라도 저 남자가 걱정할까봐. 그래서 무모한 짓을 할까봐서. 힘들지만 웃어 보인다.
“ 주....환씨... ”
“ 네..... ”
“ 우리가 여기서 만약에.. 나가지 못한다면... 우린 죽게 될까요? ”
수정에 말에 선뜻 대답을 잇지 못하는 주환.
“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절대로. ”
그 말을 하곤 서로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한다. 수정은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친다. 무섭다. 이렇게 죽게 될까봐. 아직 할 일도 많은데 이렇게 어의없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봐. 무섭고 속상하다. 그리고 자신의 고집 때문에 이런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될 저 남자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안하고 미칠 것 만 같다. 그리고 점 점 온 몸에 힘이 사라져간다. 추위 속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 보니 이제는 추운건지 안 추운건지도 모를 정도로 감각이 없어져 가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 놀라 수정에게로 다가온 주환은 수정을 흔들어 깨운다.
“ 이봐요. 황수정씨~! 정신 차려야 합니다. 정신 놓으면.. 안되요. 이봐요. ”
“ 주환씨.....”
“ 네.. 내 목소리 들립니까? ”
주환의 얼굴을 보고 작게나마 미소 짓는 수정.
“ 수정씨! 눈 감으면 안 됩니다. 힘들어도 눈을 떠요! 정신 잃으면 큰 일 나요. ”
“ 미안해요... 그리..고..... 나... 내가..생각 했던 거 보다.. 더 많이..당신... 사랑했나봐요.....”
힘겹게 말을 마친 수정은 온 몸이 축 늘어져 버린다. 놀란 주환은 자신의 손으로 수정의 몸을 비빈다. 열이 나도록 비벼 보지만 여전히 차갑고 아무런 기척이 없다. 손을 대 맥박을 잡아 보니 아직 살아 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 그 동안 자신의 마음을 숨겨오며 이 여자가 자신에게 받았을 상처가 미안해서라도. 아니. 이 여자가 죽으면 자신이 살 수 없을지도 모르기에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 한동안 몸을 비비다가 안 되겠는지 수정의 남방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한다.
“ 주환씨... 뭐.....하는..거에..요.. ”
“ 죽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요! ”
단추를 풀어 셔츠를 벗기고 자신도 윗옷을 벗는다. 상의를 벗은 주환이 수정을 자신의 품 안에 꽉 껴안고 체온을 전달하기 시작한다. 안고 있으면서도 수정의 팔과 다리 손을 비벼가며 열이 나도록 끊임없이 움직인다. 아무리 남자라고 해도 주환 역시 체온유지가 안되어 정신이 혼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자신의 안위보다 이 여자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 다시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먼저 보낼 자신 같은 건 없다. 3년 전에 미주가 자신이 눈앞에서 죽어갈 때도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구하러 갈 수도. 대신 죽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미주가 그렇게 떠난 후 주환의 삶은 산송장이나 다름없었고 자신 때문에. 죽음이라는 무서운 문턱에서 괴로워했을 미주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하루도 웃으며 살지 못했던 것이다. 웃을 자격도 없고 행복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정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처음에는 거부감이 있었고 서서히 자신이 이 여자에게 흔들리는 것을 발견하고 감정을 숨겨왔었다. 그래야만 모든 사람들이 편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여자가 죽을지도 모른다. 또 다시 눈앞에서 잃을지도 모른다.
“죽으면 안돼.. 그 동안 모른 척 해서 내가 잘못했어.... 이대로 가면 안돼... 제발.. ”
더 꼭 껴안고 체온유지를 위해 손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밖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렸다. 창고 안이라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지원군이 도착한 듯싶다. 이내 냉동 창고 문이 열리고 정수와 다른 팀원들이 들어와 갇혀 있던 주환과 수정을 데리고 나온다. 정수가 수정을 차에 태우자 뒷 자석에 주환이 문을 열고 탑승한다. 옆에 있던 담요로 수정의 몸을 감싸는 주환.
“ 히터 좀 틀자. ”
“ 네.. 팀장님.. 팀장님.. 제 옷 좀 걸치고 계십시오. 병원으로 바로 가겠습니다. ”
정수가 건넨 점퍼 또한 자신이 걸치지 않고 수정에게 덮는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백미러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정수. 미소를 짓는다.
◆연애소설- 세상에 외치다(9)
비에 젖어 힘없이 걸어가는 수정은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에 흘러내리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비를 맞아 몸의 온도가 떨어진다. 28년 살아오면서 부모님 없이 혼자서 해쳐나가야 하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힘든 일도 많았었지만 이처럼 사랑의 아픔에 혼란스럽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이러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지금 현재가 너무 아프기만 하다. 한참을 길거리에서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온 수정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쓰러진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준하. 오늘 자신을 거부하던 수정의 얼굴이 떠올라 미칠 것만 같다. 그 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을 꺼냈는데.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는데. 그 남자만 아니었다면 수정이 자신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남자 때문에 자신을 거부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화가 치밀어 오른 준하는 식탁 위에 있던 모든 것을 손으로 쓸어버린다. 바닥으로 유리가 떨어지면서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월요일 아침 출근 준비를 하는 수정은 욕실에서 나와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린다. 간단한 기초화장만 하고 부엌으로 가서 가스 불을 키고 후라이를 한다. 토스트기에 식빵을 굽고 땡 하는 소리와 함께 토스트가 구워졌다는 신호가 들리자 꺼내어 접시에 담는다. 식탁에 앉아 입 속으로 토스트를 꾸역꾸역 넣기 시작한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을 입 안으로 넣고 속이 좋지 않지만 계속해서 입 안으로 넣는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차를 운전해 신문사에 도착한 수정은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동료들과 함께 구내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자리로 돌아와 일에만 열중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오후 5시가 다 되었을 때 즈음. 편집장이 호출을 받아 편집장실로 들어가는 수정.
“ 부르셨어요. 편집장님. ”
“ 요새는 외근을 잘 안하네? 매일 매일 경찰서로 출근하더니. ”
“ 요즘은 별로 기삿거리가 없더라구요. ”
“ 연락 왔는데 오늘 그 연예인 한명이 뺑소니치고 도망가서 고소당했대. 연예부 기자는 아니지만 황기자가 강남경찰서랑은 좀 친분이 있으니까 조기자 대신 좀 다녀와. ”
“ 강남 경찰서요? ”
“ 응.. 다른 기자들 더 많이 오기 전에 얼른 가서 알아봐. ”
“ 아...네..”
가고 싶지 않은 곳을 가야한다는 생각에 표정이 일그러진다. 불과 며칠 전만해도 경찰서로 출근하는 일은 즐거웠다. 아는 사람들도 많았고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다는 기대감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심술 난 표정을 하고는 차에 오른다. 시동을 걸어 보지만 쉽게 걸리지 않아 슬슬 짜증도 밀려온다.
“너도 그 곳에 가긴 싫은가보구나~ 휴.....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동이 걸렸고 경찰서로 출발한다. 일부러 최대한 느리게 밟으며 천천히 운전한다. 어쩌면 이 시간에 갔을 때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이다. 2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40분에 걸쳐 도착했고 차에서 내린 수정은 한숨을 한 번 쉬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뺑소니 사건으로 고소 받은 연예인이 출두 해 있었고 조사를 받고 있었다. 밖에서 사진을 찍고 취재를 간단하게 마친 후 짐을 챙겨 나가려고 하는데 문을 열고 주환이 들어온다.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고개만 숙이며 인사할 뿐 말은 건네지 않는다. 경찰서를 나와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차 문을 열었을 때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 황기자님..~!!!”
정수였다. 다급하게 뛰어와 수정을 불러 세운다.
“ 김형사님. 무슨 일이에요? ”
“ 제가 좋은 기삿거리 하나 드릴까요? ”
“ 어떤 건데요? ”
“ 오늘 의약품을 냉동 창고에 보관해서 불법 거래한다는 정보가 하나 들어왔어요. 저희도 조만간 그 놈 잡을 건데 그 전에 한번 알아 보시라구요. 우리가 그 동안의 정이 있어서 황기자님 한테만 알려드리는 거니까 제가 알려드린 건 비밀이에요. ”
“ 정말요? 하하.. 고마워요. 김형사님. 나중에 한 턱 낼게요. ”
멀리서 그 모습을 보는 주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정이 이 곳에 온 것만으로도 신경이 쓰인다. 그날 이후 수정은 경찰서를 찾는 횟수가 거의 줄었다. 자주 볼 수 없어 그리운 마음도 들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그날 수정에게 그렇게 매몰차게 행동한 것은 잘 한 일이다. 그래야 그 바보 같은 여자가 단념하고 자신을 잊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정수가 건물 안으로 들어오다 주환과 마주치고 화들짝 놀라자 수상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 아... 팀장님.. ”
“ 황기자랑 무슨 이야기 한 거지? ”
“ 네? 아..... 그게.. ”
“ 왜 머뭇거려? 뭐야? 무슨 이야긴데? ”
“ 아니.. 저번에 팀장님이 황기자 회의실에 내쫒은 이후로 경찰서 출입이 뜸한 거 같아서 .. 왠지 보기가 안 쓰럽더라구요. 오늘도 봐요. 원래 그런 사건 기사 안 쓰는데 연예인 뺑소니 그런 거 취재하러 오고..”
“ 그래서.. 그래서 무슨 이야기 했는데? ”
“ 독성 의약품 냉동 보관 한다는 거 알려 줬죠.. ”
“ 뭐어~~~!!!!!”
큰 소리에 놀란 정수가 주눅 들어 고개를 숙인다.
“ 그걸 그 여자한테 말하면 어떻해~!!! 그 여자 성격 몰라서 그래? 기사 쓰려고 위험한데 혼자 가려고 할 거라고!!”
“ 그럼 어쩝니까. 기자가 기사다운 기사도 못 쓰니까 얼굴이 반쪽이 됐던데.. ”
정수에게서 그 말을 전해들은 주환은 마음이 다급해진다. 그 여자라면 위험한 곳이라도 갈 것이다. 막아야한다. 혼자서 가면 어떤 상황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입술을 깨물며 차의 시동을 거는 주환.
“ 정수. 넌 나하고 8시간이 넘어도 연락이 계속 안 되면 냉동 창고 있는 곳으로 지원 요청 해! ”
“ 아...네... 팀장님. ”
주환이 운전하는 검은 색 차량이 경찰서 주차장을 빠져 나간다.
철산 동에 있는 공장 단지에 도착한 수정은 차 안에서 사진기 셔터를 누르며 그 주변 사진을 찍는다. 한 시간째 공장에서 나오는 사람. 들어가는 사람 위주로 사진을 찍으면서도 수정은 어떻게 하면 저 곳에 들어가 결정적인 증거물 사진을 확보 하는냐 하는 생각뿐이었다. 의약품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라 왠지 의사들처럼 하얀 가운을 입고 있을 것 같았지만 그 곳에 돌아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검은 양복 차림이다. 그냥 봐도 인상이 험악하게 생긴 사람들이 보인다. 지금까지 여기자로써 깡다구 있게 어디든 가서 취재하거나 사건 조사를 하며 기사를 썼지만 언제나 당당하던 수정도 음산한 기운이 돌고 무서운 얼굴에 남자들이 있는 곳이라 사실 무섭기도 하다. 그러다 문득 지금까지 강력계 사건들을 조사하면서 원하던 원하지 않던 항상 자신의 곁에 있었던 주환이 생각난다. 그리고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을 때 마다 그 사건 속에서 주환이 자신을 도와주곤 했었지만 이제는 그럴 사람은 옆에 없는 것이다. 이제는 혼자서 모든 것을 헤쳐 나가야 한다.
‘황수정! 쫄지 말자! 주환씨 몰랐을 때는 뭐.. 기사 못썼나.! 할 수 있어. ’
그렇게 자신에게 애써 주문을 외우고 있을 때 몇몇 사람들이 차를 타고 공장 밖으로 이동하는 게 보이고 한 두 명 정도가 남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포착한다. 이내 검은 양복의 남자 두 명이 담배를 피우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린다. 카메라를 옷 속에 숨기고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발을 벗고 이동한다. 잠시 자리를 비운터라 다행히 공장 입구 쪽 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그 틈으로 작은 몸의 수정이 들어간다. 들어가서 보니 무엇을 담은 것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자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고 오래 된 공장이라 쾌쾌한 냄새가 난다. 절로 기침이 나오지만 다른 사람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입장이기에 손으로 입을 막는다. 주변을 둘러 보다 공장 안 쪽에 큰 컨테이너 박스가 보이고 그 옆에 냉동 창고로 보이는 문이 보인다.
‘아.. 저거구나. 저 안에 있는 내용물만 확인하면 ...’
그 때 입구 쪽에서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리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하는 수정을 누군지 모를 손의 이끌려 동작을 멈춘다.
“ 우리가 아까 문 열어 놓고 갔었나? ”
“ 그랬나 보지... 어차피 오늘은 우리 둘 밖에 없으니 괜찮겠지 . 뭐,. ”
“ 아.. 이 짓은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냐.. ? 빨리 이거 팔아 버리고 잠 좀 제대로 된 곳에서 자고 싶다. ”
수정의 뒤에서 입을 막고 몸을 잡고 있는 사람.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잡아 데리고 나가 괴롭히지 않는 것을 보니 누굴 헤칠 사람 같진 않다. 그렇지만 누군지 모를 사람이 자신을 잡고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있었다. 자신을 힘으로 제압하고 덩치가 큰 것을 보면 남자는 분명한데 말이다. 누굴까. 한 동안 정적이 흐르고 양복 입은 남자들은 저녁식사를 하러 다시 공장 밖으로 나간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수정을 제압하고 있던 남자의 손의 힘이 풀리고 그 남자에게서 벗어나게 된 수정은 뒤를 돌아 봐야 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 위험하니 빨리 여길. 나가는 게 좋겠군요. ”
이 목소리는. 수정은 잘 안다. 분명 수정에게는 그 남자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그리고 또 위험한 순간에 그 남자가 자신을 보호했다는 안도감에 감사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몸을 돌려 주환을 바라본다.
“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하~ 사건 조사하시려고요? 그럼 하세요! 저도 볼 일이 있어서요. 그럼. ”
다시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하는 순간 수정의 팔을 잡는 주환.
“ 뭐죠? 할 말 있으세요? ”
“ 여길 혼자 오면 어떻합니까? 여긴 위험해요. 당신이 혼자 와서는 안 되는 곳이..”
“ 정 팀장님! 지금 제 걱정하시는 건가요? 설마.. 아니죠? 전 아까 그 남자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저도 제 일 하는 거니 정 팀장님이나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
주환의 손을 뿌리치고 냉동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한숨을 쉬며 주환도 따라 들어간다. 따라 들어가면서 문을 미처 잡지 않아 냉동 창고 문이 철컥 소리와 함께 닫힌다. 창고 안으로 들어간 수정은 사진기를 꺼내 열심히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박스 안에 있는 물건들을 하 나 하 나 꺼내 보며 약병에 써있는 글귀를 확인한다.
“ 그래! 이거야! 역시... ”
“ 황수정씨. ”
“ 어머! 여기까지 따라 오신 거에요? 이 약품들은 제가 어렵게 고생하며 구한 거니까 증거물 사진으로 제가 가져 갈 거에요. 안된다고 하지 마세요. ”
수정이 약통 2개를 들고 창고를 나가기 위해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뻑뻑하기만 하고 문을 열리지 않자 약병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문고를 잡는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는다. 뒤 따라온 주환이 힘으로 문을 열러 보려 하지만 역시나 움직이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당황한 얼굴로 서로 문을 열어 보려 해도 꼼작도 하지 않았다.
“ 이...이거.. 왜.. 이래요? 문이 안 열리잖아요? ”
“ 아...하... 냉동 창고는 안에서는 열 수 없게 설치 되어있을 겁니다. 아마...”
“ 뭐라고요 ? 말도 안돼... 그럼.. 우린 여기서 어떻게 나가죠? ”
“ 누군가가 열어주기 전엔 나갈 수 없습니다. ”
주환의 말을 들은 수정은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된다. 냉동 창고. 이 곳은 일반 창고와는 다르다. 어떤 식품, 약품들의 변질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그야말로 냉동 공간인 것이다. 이 곳에서 오래 방치되어 있게 되면 어떤 사람이든 살아 남지 못한다. 자신이 냉동 창고 안에 갇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오는 수정은 조금은 이성을 잃는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 여기요! 밖에 누구 없어요? 냉동 창고 안에 사람이 갇혔어요! 문 좀 열어 주세요. 여기요! 누구 없어요? ”
있는 힘을 다해 문을 쎄게 때려 보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없다. 한 이십 분정도 그런 패닉 상태에 빠진 수정을 보고 있는 주환 역시 지금 이 사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 중이다. 핸드폰을 꺼내 보지만 통화불가능지역이라고 뜨고
한숨을 내쉬는 주환. 밖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주저앉는 수정. 그런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린 주환이 다가온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신발까지 벗어던지고 양말만 신은채로 이 공장 안까지.. 그리고 이 냉동 창고 안까지 들어온 이 대책 없는 여자. 살고 싶은 마음에 문을 두드리느라 손바닥이 다 까지고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 수정의 어깨에 덮어준다. 가까이서 본 수정의 얼굴에는 겁에 질려 눈물범벅이 된 모습이다.
“ 체온 유지를 해야 버틸 수 있어요. 옷을 너무 얇게 입어 걱정입니다. ”
“ 하.... 말도 안돼...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
“ 문 두드린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당신 손만 아프지. 체력 조절해야 하니 그만 울어요. ”
“ 미안해요..... 미안해요........나 때문에.... ”
나 때문에...?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주환은 깜짝 놀란다.
“ 내가 고집부리지만 않았으면...... 그러지만 않았다면... 주환씨...여기 갇힐 일도 없었을텐데... 미안해요..”
이 여자.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 무섭고 두려운 마음에 우는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자신에게 미안해서 운다는 것을 알고 주환의 마음이 아려온다. 이 여자의 마음이 주환의 마음을 흔든다. 애써 외면하려 했던.. 그 동안 꽁꽁 숨어버리기만 했던 마음이 말이다. 손을 뻗어 수정의 눈물을 닦아주는 주환. 자신의 품 안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이내 다시 이성을 찾고 시선을 회피한다. 아직은 자신이 없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런 감정. 아픔. 떨림.
냉동 창고 안에 갇힌 지 두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점점 두 사람의 체온이 떨어지고 있었고 평소 운동으로 다져진 성인 남자인 주환에게는 견딜 만 했지만 수정에게는 아니었다. 수정의 온 몸이 파르르 떨렸고 입술 색이 변하고 정신이 혼미해져가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안쓰러워 자신의 운동화를 벗어 양말만 신은 수정의 발에 신겨 주자 수정이 고개를 흔들며 거부한다.
“ 아...아니에요.. 괜찮아요... ”
“ 이제 고집 그만 부려요. ”
시간이 가면 갈수록 주환도 힘이 들었고 수정은 눈이 계속 감기려고 한다. 박스에 기대어 주환을 바라보는 수정은 눈을 깜박거리며 애써 웃어 보인다. 혹시라도 저 남자가 걱정할까봐. 그래서 무모한 짓을 할까봐서. 힘들지만 웃어 보인다.
“ 주....환씨... ”
“ 네..... ”
“ 우리가 여기서 만약에.. 나가지 못한다면... 우린 죽게 될까요? ”
수정에 말에 선뜻 대답을 잇지 못하는 주환.
“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절대로. ”
그 말을 하곤 서로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한다. 수정은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친다. 무섭다. 이렇게 죽게 될까봐. 아직 할 일도 많은데 이렇게 어의없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봐. 무섭고 속상하다. 그리고 자신의 고집 때문에 이런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될 저 남자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안하고 미칠 것 만 같다. 그리고 점 점 온 몸에 힘이 사라져간다. 추위 속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 보니 이제는 추운건지 안 추운건지도 모를 정도로 감각이 없어져 가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 놀라 수정에게로 다가온 주환은 수정을 흔들어 깨운다.
“ 이봐요. 황수정씨~! 정신 차려야 합니다. 정신 놓으면.. 안되요. 이봐요. ”
“ 주환씨.....”
“ 네.. 내 목소리 들립니까? ”
주환의 얼굴을 보고 작게나마 미소 짓는 수정.
“ 수정씨! 눈 감으면 안 됩니다. 힘들어도 눈을 떠요! 정신 잃으면 큰 일 나요. ”
“ 미안해요... 그리..고..... 나... 내가..생각 했던 거 보다.. 더 많이..당신... 사랑했나봐요.....”
힘겹게 말을 마친 수정은 온 몸이 축 늘어져 버린다. 놀란 주환은 자신의 손으로 수정의 몸을 비빈다. 열이 나도록 비벼 보지만 여전히 차갑고 아무런 기척이 없다. 손을 대 맥박을 잡아 보니 아직 살아 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 그 동안 자신의 마음을 숨겨오며 이 여자가 자신에게 받았을 상처가 미안해서라도. 아니. 이 여자가 죽으면 자신이 살 수 없을지도 모르기에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 한동안 몸을 비비다가 안 되겠는지 수정의 남방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한다.
“ 주환씨... 뭐.....하는..거에..요.. ”
“ 죽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요! ”
단추를 풀어 셔츠를 벗기고 자신도 윗옷을 벗는다. 상의를 벗은 주환이 수정을 자신의 품 안에 꽉 껴안고 체온을 전달하기 시작한다. 안고 있으면서도 수정의 팔과 다리 손을 비벼가며 열이 나도록 끊임없이 움직인다. 아무리 남자라고 해도 주환 역시 체온유지가 안되어 정신이 혼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자신의 안위보다 이 여자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 다시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먼저 보낼 자신 같은 건 없다. 3년 전에 미주가 자신이 눈앞에서 죽어갈 때도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구하러 갈 수도. 대신 죽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미주가 그렇게 떠난 후 주환의 삶은 산송장이나 다름없었고 자신 때문에. 죽음이라는 무서운 문턱에서 괴로워했을 미주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하루도 웃으며 살지 못했던 것이다. 웃을 자격도 없고 행복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정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처음에는 거부감이 있었고 서서히 자신이 이 여자에게 흔들리는 것을 발견하고 감정을 숨겨왔었다. 그래야만 모든 사람들이 편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여자가 죽을지도 모른다. 또 다시 눈앞에서 잃을지도 모른다.
“죽으면 안돼.. 그 동안 모른 척 해서 내가 잘못했어.... 이대로 가면 안돼... 제발.. ”
더 꼭 껴안고 체온유지를 위해 손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밖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렸다. 창고 안이라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지원군이 도착한 듯싶다. 이내 냉동 창고 문이 열리고 정수와 다른 팀원들이 들어와 갇혀 있던 주환과 수정을 데리고 나온다. 정수가 수정을 차에 태우자 뒷 자석에 주환이 문을 열고 탑승한다. 옆에 있던 담요로 수정의 몸을 감싸는 주환.
“ 히터 좀 틀자. ”
“ 네.. 팀장님.. 팀장님.. 제 옷 좀 걸치고 계십시오. 병원으로 바로 가겠습니다. ”
정수가 건넨 점퍼 또한 자신이 걸치지 않고 수정에게 덮는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백미러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정수. 미소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