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日帝)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는 먼저 10월 2일 오후 2시에 국경에 배치돼 있던 경원수비대(慶源守備隊) 80명을 침입시켰고, 이어서 경원헌병대(慶源憲兵隊) 6명과 19사단 소속의 안부(安部) 소좌(少佐)가 이끄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 및 그 외에 국경 수비대 30명까지 합하여 3일 밤까지 훈춘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또한 일제는 대체로 동서남북 사방에서 일본 군대를 신속하게 간도로 침입시키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두만강을 넘어 남방에서는 조선주차군 제19사단과 제20사단의 78연대 3대대, 그리고 헌병대 및 경관대가 합세하여 간도로 들어왔다. 이 병력은 다시 3개 지대(支隊)와 사단직할부대 및 국경 수비대로 나뉘어 토벌구역을 분담하였다.
이들의 부대 구성과 작전지역을 살펴보면, 이소바야시[磯林直明] 지대는 경원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훈춘방면으로 진출하여 그 일대에 대한 토벌의 주력이 되며, 독립군을 나자구(羅在溝) 방면으로 추격하여 삼차구(三侘口) 방면에서 남하하는 포조군(浦潮軍)과 공동작전을 벌이도록 되어 있었다. 이소바야시 지대는 보병 제38여단 사령부에서 지휘하며 보병 제75연대의 기관총 소대 2개와 특종 포대, 보병 제78연대 제3대대 기관총소대 1개와 통신반, 기병 제27연대 3중대, 야포병(野砲兵) 제25연대 제2대대 야포중대 1개와 산포(山砲)소대 1개, 공병(工兵) 제19대대 제2중대, 약간의 헌병이 속해 있었다.
기무라[木村益三] 지대는 온성으로부터 월강하여 왕청현(汪淸縣) 방면으로 진출, 그 일원의 독립군에 대한 토벌을 담당하였다.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을 대상으로 토벌작전을 수행하되, 특히 서대파(西大坡)·대감자(大坎子)·백초구(百草溝)·합마당(蛤摩塘) 등지를 반복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기무라 지대는 보병 제76연대 산하 기관총 소대 1개와 특종포대 및 통신반, 산포병(山砲兵) 제1중대, 공병 제19대대 제1중대의 1개 소대, 약간의 헌병이 속해 있었다.
아즈마[東正彦] 지대는 회령 등지에서 월강, 용정 방면으로 진출하여 그 일원을 소탕하는 주력부대가 되었으며, 무산에서 북상하는 제20사단의 부대와 합동작전으로 독립군이 안도·돈화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초멸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아즈마 지대는 보병 제37여단 사령부의 지휘를 받아 보병 제73연대와 특종포대, 보병 제74연대 제2대대와 기관총 2소대 및 통신반, 기병 제27연대, 야포병 제25연대 제1대대와 야포병 1중대, 산포병 1중대와 공병 제19대대 제3중대, 약간의 헌병이 속해 있었다.
이 밖에 사단직할부대로는 제19사단장인 자작(子爵) 다카시마 도모다케[高島友武] 중장(中將)의 휘하에 보병 제74연대 제1대대 본부와 제3중대, 항공기반·무선통신반·비둘기통신반으로 구성되었으며, 국경수비대가 있었다.
또한 동쪽으로눈 중소(中蘇) 국경을 넘어 간도로 일본군이 들어왔는데, 이들은 일찍이 시베리아에 침범해 있던 포조(浦潮)파견군 제14사단·제11사단 토문자(土門子) 지대(支隊)·제13사단 우입(羽入) 지대였다. 이들은 훈춘(琿春)·초모정자(草帽頂子)·토문자·수분대전자(銖芬大甸子) 등에서 주력부대인 19사단과 연합하여 한국인들을 학살·탄압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북쪽에서는 북만주에 파견되어 있던 안서(安西) 지대(支隊)가 보병중대 3개와 기관총대 4개, 기병소대 1개로 편성되어 간도로 진격해 왔으며, 마지막 서쪽으로는 관동군(關東軍) 제19연대 1개 대대가 무순(撫順)·흥경(興京)·통화(通化)·관전(寬甸)·안동(安東) 등에, 그리고 기병 제20연대가 해룡(海龍)·유하(柳河)·통화·환인(桓仁)·관전·안동 등의 지방을 향해 침입해 왔다.
이렇게 간도를 침입한 일본군은 동서남북에서 포위작전을 통해 독립군을 압박하였으며, 이 때에 토벌작전에 동원된 일본의 전투병력은 총 2만 5천여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외에 일본군은 항공기까지 동원하여 한국인 집단거주지인 용정촌(龍井村)에 폭탄을 투하하는 등 한국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10월 12일과 13일 사이에 화룡현(和龍縣)의 이도구(二道溝)·삼도구(三道溝) 지역에서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최진동(崔振東)이 통솔하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허근(許根)과 방우룡(方雨龍)이 지휘하는 의군단(義軍團) 혼성부대, 김성(金星)이 인솔하는 신민단(新民團), 이명순(李明淳)이 이끄는 훈춘대한국민회(琿春大韓國民會) 등이 모여 독립군 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을 구성하였다. 16일에는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삼도구로 이동해 왔다. 이로써 독립군 측의 주요 부대가 대다수 모인 셈이었다.
독립군 지도자들은 묘령에서 연석하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가장 주도적으로 의견을 개진한 사람은 북로군정서의 부총재인 현천묵(玄天默)과 대한독립군의 사령관인 홍범도 장군이었다.
“우리 군사들이 뭉쳤다고 하나 막강한 일본 정규군 부대와 전면전(全面戰)을 벌이게 되면 설사 승리할지라도 아군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은 분명한 일이오. 게다가 이 지역은 중국의 영토이니 여기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중국 국민들의 독립군에 대한 감정도 나빠질 수도 있소.”
이러한 현천묵의 주장에 홍범도가 발끈하고 나섰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피해 다녀야 한단 말이오? 그렇잖아도 병사들이 주눅들어 있는 판입니다. 어차피 왜적(倭敵)들과 일대 격돌이 불가피한 형세이니 싸움을 미루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잖소?”
현천묵은 굽히지 않고 피전책(避戰策)을 더욱 강하게 내세웠다.
“난 그렇게 판단하지 않소. 저들의 화력이 우수한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니 일단 예봉은 피합시다. 일본군이 분산되면 그 때 국지전(局地戰)으로 파상 공세를 취하는 게 득이 될 거요.”
홍범도 장군은 답답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반박했다.
“거 참! 우리 독립군이 자주 연합부대를 편성하긴 했지만 언제 그 힘을 제대로 쏟아 부은 적이 있었던가요? 차일피일하다가 제각기 부대에 사정이 생겨 흩어지기 일쑤였어요. 그런 우(愚)를 범하지 않기 위해 아예 이 자리에서 총진군 작전 계획을 수립합시다.”
그러자 그때까지 이들의 의견을 듣고 있던 북로군정서의 사령관 김좌진이 홍범도를 만류했다.
“홍범도 사령관의 말도 일리가 있으나 조금만 뜸을 들이도록 합시다. 우리가 일단 접전을 피하는 모양새를 보이면 적군이 방심하게 될 것이오. 그럼 허점이 드러나게 되겠지요. 잠시 자중하도록 합시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최진동과 허근도 동의하는 듯해 홍범도는 한 발 뒤로 물러나 현천묵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고 더 이상의 교전 회피가 오히려 불리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고 판단되자 독립군 지도자들은 다시 긴급 회동을 갖고 피전책을 철회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로 결론을 내렸다. 홍범도 장군은 김좌진 장군에게 이렇게 제의했다.
“김 장군의 휘하 병력이 이번 전투에서 선봉에 서 주시오. 특히 이범석 연성대장이 인솔하는 여행단(旅行團)의 용사들은 훈련이 잘 된 만큼 그들로 하여금 적군을 공격하여 청산리 골짜기로 끌어들이면 승산이 있습니다. 그렇게 조처해 주시겠습니까?”
“저에게 막중한 임무를 주셔서 영광입니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 때부터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항일전(抗日戰)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둔 홍범도 장군의 명성을 듣고 늘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청산리 삼도구 골짜기로 이동했다. 1920년 10월 19일 저녁이 되자 곧 피비린내가 산하를 덮을 것을 미물도 알아차렸는지 까마귀들이 숱하게 몰려와 하늘을 가로질렀다.
“사령관님, 중대한 정보가 있습니다.”
척후병 하나가 허둥지둥 달려와 김좌진에게 적군의 동태를 보고했다.
“뭐야?”
“네, 시베리아에서 출동했던 일본군 1개 사단 병력이 현재 간도 주변에 이미 집결한 일본군과 합세하여 독립군을 수색·토벌하겠다고 이동중입니다. 이것은 중국군 측에서 입수한 정확한 정보입니다. 현재 일본군은 화룡현(和龍縣) 청산리(靑山里)를 향하여 서전(西進)하고 있어서 아군과 맞부딪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겠다.”
김좌진의 얼굴에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긴장감이 가득했다. 일본군은 전투병력만 총 2만 5천여명이고 중화기(重火器)로 무장한 강력한 화력을 지녔으나, 이에 비해 독립군은 김좌진이 총지휘하는 북로군정서 부대와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 연합여단을 전부 합쳐도 전투병력이 1천 4백여명 정도였고 무장력도 보잘것 없었다. 비록 아군의 사기는 높았고 전의가 불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전력이 열세이기 때문에 과연 전투 자체가 가능할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사령관인 자신이 흔들린다면 병사들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 들자 김좌진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휘하 장교들과 병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훈시(訓示)를 시작했다.
“왜놈들은 이번 기회에 독립군 전부를 소탕하겠다는 일념으로 예전에도 없었던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북로군정서 장병 8백여명은 적군에게 없는 한민족으로서의 기개와 정신이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일찍이 강대한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국난을 극복한 역사를 많이 만들어내셨다. 옛날 고구려의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은 단 3만여명의 수성군(守城軍)으로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휘하의 30만 대군을 물리쳤다. 또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은 13척의 군선과 1천 2백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장(倭將) 구귀(九鬼)·등당(藤堂)이 지휘하는 133척의 군선과 3만여명의 병졸로 이루어진 대함대를 격퇴하여 명량해전(鳴梁海戰)을 승리로 이끌었다. 지금의 우리도 이같은 위대한 승전(勝戰)을 이룩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왜놈들이 그동안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강토를 유린하며 재산을 빼앗은 만행을 생각한다면 어찌 이것을 복수하지 않고 세상에 숨을 쉬고 살 수 있겠는가! 제군의 죽음을 각오한 항전만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음을 명심하라.”
북로군정서의 장병들은 하늘을 울릴 듯한 함성을 지르며 결사항전을 외쳤다. 그리고 장병들의 입에서는 하나같이 군가(軍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전사가(祈戰死歌)였다.
‘하늘은 미워한다 배달족의 자유를 억탈(抑奪)하는 왜적(倭敵)들을 삼천리강산(三千里江山)에 열혈(熱血)이 끓어 분연히 일어나는 우리 독립군 백두(白頭)의 찬바람은 불어 거칠고 압록강 얼음 위엔 은월(銀月)이 밝아 고국에서 불어오는 피비린 바람 골수에 맺힌 한(恨)을 갚고야 말 것이다! 한울님, 저희들 이후에도 만천대 후손의 행복을 위하여 이 한 몸 깨끗이 바칠 것이니 빛나는 전사(戰死)를 하게 하소서’
이렇게 기전사가를 부르면서 강행군을 감행한 북로군정서는 마침내 울창한 산림에 둘러싸인 삼도구에 당도하였다. 일본군이 오기 전에 먼저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니 일단 첫번째 작전계획은 성공한 셈이었다. 김좌진(金佐鎭)은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명령하고 지형을 소상히 잘 아는 병사 두 명을 뽑아 이범석(李範奭)·이경민(李敬敏)·김규식(金奎植) 장교 세 명을 대동하여 청산리 일대의 고지에 올라가 지형을 세밀하게 정찰하였다.
진영으로 돌아온 김좌진은 곧 구수회의(鳩首會議)를 열어 부하들에게 작전 지시를 내렸다.
“연성대장인 이범석 장군은 청산리 계곡 입구에서 천보산(天寶山)으로 연한 측면의 고지에서 150명의 병력으로 장장 10리에 이르는 종렬(縱烈)로 포진하시오. 보병대대장인 김규식 장군은 역시 150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백두산 쪽으로 연결된 한쪽 측면에 종렬로 포진시키시오. 전면 계곡의 안쪽에는 내가 직접 100명 정도의 병력을 거느리고 매복하겠소. 공격 신호는 이범석 장군이 맡되, 작전의 열쇠는 그 시기가 매우 중요하니 이 점을 명심하기 바라오.”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러자 김규식이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적군이 언제 올 것인지로 모르거니와, 만에 하나 적군이 우리의 위치를 짐작하고 포위하고 있다면 어떡합니까?”
“적군은 반드시 이곳으로 오게 되어 있소. 만에 하나라도 적군이 이 지역을 포위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승운(勝運)이 없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오.”
김좌진은 사령관다운 여유와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를 보이면서 휘하 지휘관들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그리고 제2중대 제1소대장인 채춘(蔡春)을 불러 비밀 지령을 내린 뒤 그의 소대원들을 계곡 밖으로 출동시켰다.
이와 같은 조치가 끝난 뒤 바로 김좌진은 각 부대 지휘관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이번의 결전은 민족의 장래에 지대한 영향을 줄 것이오.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전투에 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동지들에게 당부하겠소.
첫째, 탄약을 아껴 써야 하겠습니다. 일발필살(一發必殺)의 정확성을 가지고 사격하도록 병사들에게 주의시키시오. 우리는 탄약이 충분하지 못합니다. 둘째, 작전이 개시되기 전까지 이제부터 인기척을 내서는 안됩니다. 특히 연기는 우리의 위치를 알려주는 결과가 되니 좀 날씨가 쌀쌀하더라도 불을 피워서는 안됩니다. 셋째 어떠한 경우라도 각자 행동을 삼가시오. 이제 원위치로 돌아가 맡은 바 군무에 충실히 임하시오.”
김좌진 장군의 지시를 듣고 있는 지휘관들의 굳게 다문 입술에는 필승의 결의가 묻어나고 있었다.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4청산리대첩 ⑵
★ 싸울 것이냐, 피할 것이냐?
일제(日帝)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는 먼저 10월 2일 오후 2시에 국경에 배치돼 있던 경원수비대(慶源守備隊) 80명을 침입시켰고, 이어서 경원헌병대(慶源憲兵隊) 6명과 19사단 소속의 안부(安部) 소좌(少佐)가 이끄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 및 그 외에 국경 수비대 30명까지 합하여 3일 밤까지 훈춘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또한 일제는 대체로 동서남북 사방에서 일본 군대를 신속하게 간도로 침입시키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두만강을 넘어 남방에서는 조선주차군 제19사단과 제20사단의 78연대 3대대, 그리고 헌병대 및 경관대가 합세하여 간도로 들어왔다. 이 병력은 다시 3개 지대(支隊)와 사단직할부대 및 국경 수비대로 나뉘어 토벌구역을 분담하였다.
이들의 부대 구성과 작전지역을 살펴보면, 이소바야시[磯林直明] 지대는 경원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훈춘방면으로 진출하여 그 일대에 대한 토벌의 주력이 되며, 독립군을 나자구(羅在溝) 방면으로 추격하여 삼차구(三侘口) 방면에서 남하하는 포조군(浦潮軍)과 공동작전을 벌이도록 되어 있었다. 이소바야시 지대는 보병 제38여단 사령부에서 지휘하며 보병 제75연대의 기관총 소대 2개와 특종 포대, 보병 제78연대 제3대대 기관총소대 1개와 통신반, 기병 제27연대 3중대, 야포병(野砲兵) 제25연대 제2대대 야포중대 1개와 산포(山砲)소대 1개, 공병(工兵) 제19대대 제2중대, 약간의 헌병이 속해 있었다.
기무라[木村益三] 지대는 온성으로부터 월강하여 왕청현(汪淸縣) 방면으로 진출, 그 일원의 독립군에 대한 토벌을 담당하였다.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을 대상으로 토벌작전을 수행하되, 특히 서대파(西大坡)·대감자(大坎子)·백초구(百草溝)·합마당(蛤摩塘) 등지를 반복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기무라 지대는 보병 제76연대 산하 기관총 소대 1개와 특종포대 및 통신반, 산포병(山砲兵) 제1중대, 공병 제19대대 제1중대의 1개 소대, 약간의 헌병이 속해 있었다.
아즈마[東正彦] 지대는 회령 등지에서 월강, 용정 방면으로 진출하여 그 일원을 소탕하는 주력부대가 되었으며, 무산에서 북상하는 제20사단의 부대와 합동작전으로 독립군이 안도·돈화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초멸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아즈마 지대는 보병 제37여단 사령부의 지휘를 받아 보병 제73연대와 특종포대, 보병 제74연대 제2대대와 기관총 2소대 및 통신반, 기병 제27연대, 야포병 제25연대 제1대대와 야포병 1중대, 산포병 1중대와 공병 제19대대 제3중대, 약간의 헌병이 속해 있었다.
이 밖에 사단직할부대로는 제19사단장인 자작(子爵) 다카시마 도모다케[高島友武] 중장(中將)의 휘하에 보병 제74연대 제1대대 본부와 제3중대, 항공기반·무선통신반·비둘기통신반으로 구성되었으며, 국경수비대가 있었다.
또한 동쪽으로눈 중소(中蘇) 국경을 넘어 간도로 일본군이 들어왔는데, 이들은 일찍이 시베리아에 침범해 있던 포조(浦潮)파견군 제14사단·제11사단 토문자(土門子) 지대(支隊)·제13사단 우입(羽入) 지대였다. 이들은 훈춘(琿春)·초모정자(草帽頂子)·토문자·수분대전자(銖芬大甸子) 등에서 주력부대인 19사단과 연합하여 한국인들을 학살·탄압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북쪽에서는 북만주에 파견되어 있던 안서(安西) 지대(支隊)가 보병중대 3개와 기관총대 4개, 기병소대 1개로 편성되어 간도로 진격해 왔으며, 마지막 서쪽으로는 관동군(關東軍) 제19연대 1개 대대가 무순(撫順)·흥경(興京)·통화(通化)·관전(寬甸)·안동(安東) 등에, 그리고 기병 제20연대가 해룡(海龍)·유하(柳河)·통화·환인(桓仁)·관전·안동 등의 지방을 향해 침입해 왔다.
이렇게 간도를 침입한 일본군은 동서남북에서 포위작전을 통해 독립군을 압박하였으며, 이 때에 토벌작전에 동원된 일본의 전투병력은 총 2만 5천여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외에 일본군은 항공기까지 동원하여 한국인 집단거주지인 용정촌(龍井村)에 폭탄을 투하하는 등 한국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10월 12일과 13일 사이에 화룡현(和龍縣)의 이도구(二道溝)·삼도구(三道溝) 지역에서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최진동(崔振東)이 통솔하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허근(許根)과 방우룡(方雨龍)이 지휘하는 의군단(義軍團) 혼성부대, 김성(金星)이 인솔하는 신민단(新民團), 이명순(李明淳)이 이끄는 훈춘대한국민회(琿春大韓國民會) 등이 모여 독립군 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을 구성하였다. 16일에는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삼도구로 이동해 왔다. 이로써 독립군 측의 주요 부대가 대다수 모인 셈이었다.
독립군 지도자들은 묘령에서 연석하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가장 주도적으로 의견을 개진한 사람은 북로군정서의 부총재인 현천묵(玄天默)과 대한독립군의 사령관인 홍범도 장군이었다.
“우리 군사들이 뭉쳤다고 하나 막강한 일본 정규군 부대와 전면전(全面戰)을 벌이게 되면 설사 승리할지라도 아군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은 분명한 일이오. 게다가 이 지역은 중국의 영토이니 여기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중국 국민들의 독립군에 대한 감정도 나빠질 수도 있소.”
이러한 현천묵의 주장에 홍범도가 발끈하고 나섰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피해 다녀야 한단 말이오? 그렇잖아도 병사들이 주눅들어 있는 판입니다. 어차피 왜적(倭敵)들과 일대 격돌이 불가피한 형세이니 싸움을 미루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잖소?”
현천묵은 굽히지 않고 피전책(避戰策)을 더욱 강하게 내세웠다.
“난 그렇게 판단하지 않소. 저들의 화력이 우수한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니 일단 예봉은 피합시다. 일본군이 분산되면 그 때 국지전(局地戰)으로 파상 공세를 취하는 게 득이 될 거요.”
홍범도 장군은 답답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반박했다.
“거 참! 우리 독립군이 자주 연합부대를 편성하긴 했지만 언제 그 힘을 제대로 쏟아 부은 적이 있었던가요? 차일피일하다가 제각기 부대에 사정이 생겨 흩어지기 일쑤였어요. 그런 우(愚)를 범하지 않기 위해 아예 이 자리에서 총진군 작전 계획을 수립합시다.”
그러자 그때까지 이들의 의견을 듣고 있던 북로군정서의 사령관 김좌진이 홍범도를 만류했다.
“홍범도 사령관의 말도 일리가 있으나 조금만 뜸을 들이도록 합시다. 우리가 일단 접전을 피하는 모양새를 보이면 적군이 방심하게 될 것이오. 그럼 허점이 드러나게 되겠지요. 잠시 자중하도록 합시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최진동과 허근도 동의하는 듯해 홍범도는 한 발 뒤로 물러나 현천묵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고 더 이상의 교전 회피가 오히려 불리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고 판단되자 독립군 지도자들은 다시 긴급 회동을 갖고 피전책을 철회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로 결론을 내렸다. 홍범도 장군은 김좌진 장군에게 이렇게 제의했다.
“김 장군의 휘하 병력이 이번 전투에서 선봉에 서 주시오. 특히 이범석 연성대장이 인솔하는 여행단(旅行團)의 용사들은 훈련이 잘 된 만큼 그들로 하여금 적군을 공격하여 청산리 골짜기로 끌어들이면 승산이 있습니다. 그렇게 조처해 주시겠습니까?”
“저에게 막중한 임무를 주셔서 영광입니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 때부터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항일전(抗日戰)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둔 홍범도 장군의 명성을 듣고 늘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청산리 삼도구 골짜기로 이동했다. 1920년 10월 19일 저녁이 되자 곧 피비린내가 산하를 덮을 것을 미물도 알아차렸는지 까마귀들이 숱하게 몰려와 하늘을 가로질렀다.
“사령관님, 중대한 정보가 있습니다.”
척후병 하나가 허둥지둥 달려와 김좌진에게 적군의 동태를 보고했다.
“뭐야?”
“네, 시베리아에서 출동했던 일본군 1개 사단 병력이 현재 간도 주변에 이미 집결한 일본군과 합세하여 독립군을 수색·토벌하겠다고 이동중입니다. 이것은 중국군 측에서 입수한 정확한 정보입니다. 현재 일본군은 화룡현(和龍縣) 청산리(靑山里)를 향하여 서전(西進)하고 있어서 아군과 맞부딪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겠다.”
김좌진의 얼굴에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긴장감이 가득했다. 일본군은 전투병력만 총 2만 5천여명이고 중화기(重火器)로 무장한 강력한 화력을 지녔으나, 이에 비해 독립군은 김좌진이 총지휘하는 북로군정서 부대와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 연합여단을 전부 합쳐도 전투병력이 1천 4백여명 정도였고 무장력도 보잘것 없었다. 비록 아군의 사기는 높았고 전의가 불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전력이 열세이기 때문에 과연 전투 자체가 가능할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사령관인 자신이 흔들린다면 병사들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 들자 김좌진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휘하 장교들과 병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훈시(訓示)를 시작했다.
“왜놈들은 이번 기회에 독립군 전부를 소탕하겠다는 일념으로 예전에도 없었던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북로군정서 장병 8백여명은 적군에게 없는 한민족으로서의 기개와 정신이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일찍이 강대한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국난을 극복한 역사를 많이 만들어내셨다. 옛날 고구려의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은 단 3만여명의 수성군(守城軍)으로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휘하의 30만 대군을 물리쳤다. 또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은 13척의 군선과 1천 2백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장(倭將) 구귀(九鬼)·등당(藤堂)이 지휘하는 133척의 군선과 3만여명의 병졸로 이루어진 대함대를 격퇴하여 명량해전(鳴梁海戰)을 승리로 이끌었다. 지금의 우리도 이같은 위대한 승전(勝戰)을 이룩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왜놈들이 그동안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강토를 유린하며 재산을 빼앗은 만행을 생각한다면 어찌 이것을 복수하지 않고 세상에 숨을 쉬고 살 수 있겠는가! 제군의 죽음을 각오한 항전만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음을 명심하라.”
북로군정서의 장병들은 하늘을 울릴 듯한 함성을 지르며 결사항전을 외쳤다. 그리고 장병들의 입에서는 하나같이 군가(軍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전사가(祈戰死歌)였다.
‘하늘은 미워한다 배달족의 자유를 억탈(抑奪)하는 왜적(倭敵)들을 삼천리강산(三千里江山)에 열혈(熱血)이 끓어 분연히 일어나는 우리 독립군 백두(白頭)의 찬바람은 불어 거칠고 압록강 얼음 위엔 은월(銀月)이 밝아 고국에서 불어오는 피비린 바람 골수에 맺힌 한(恨)을 갚고야 말 것이다! 한울님, 저희들 이후에도 만천대 후손의 행복을 위하여 이 한 몸 깨끗이 바칠 것이니 빛나는 전사(戰死)를 하게 하소서’
이렇게 기전사가를 부르면서 강행군을 감행한 북로군정서는 마침내 울창한 산림에 둘러싸인 삼도구에 당도하였다. 일본군이 오기 전에 먼저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니 일단 첫번째 작전계획은 성공한 셈이었다. 김좌진(金佐鎭)은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명령하고 지형을 소상히 잘 아는 병사 두 명을 뽑아 이범석(李範奭)·이경민(李敬敏)·김규식(金奎植) 장교 세 명을 대동하여 청산리 일대의 고지에 올라가 지형을 세밀하게 정찰하였다.
진영으로 돌아온 김좌진은 곧 구수회의(鳩首會議)를 열어 부하들에게 작전 지시를 내렸다.
“연성대장인 이범석 장군은 청산리 계곡 입구에서 천보산(天寶山)으로 연한 측면의 고지에서 150명의 병력으로 장장 10리에 이르는 종렬(縱烈)로 포진하시오. 보병대대장인 김규식 장군은 역시 150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백두산 쪽으로 연결된 한쪽 측면에 종렬로 포진시키시오. 전면 계곡의 안쪽에는 내가 직접 100명 정도의 병력을 거느리고 매복하겠소. 공격 신호는 이범석 장군이 맡되, 작전의 열쇠는 그 시기가 매우 중요하니 이 점을 명심하기 바라오.”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러자 김규식이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적군이 언제 올 것인지로 모르거니와, 만에 하나 적군이 우리의 위치를 짐작하고 포위하고 있다면 어떡합니까?”
“적군은 반드시 이곳으로 오게 되어 있소. 만에 하나라도 적군이 이 지역을 포위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승운(勝運)이 없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오.”
김좌진은 사령관다운 여유와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를 보이면서 휘하 지휘관들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그리고 제2중대 제1소대장인 채춘(蔡春)을 불러 비밀 지령을 내린 뒤 그의 소대원들을 계곡 밖으로 출동시켰다.
이와 같은 조치가 끝난 뒤 바로 김좌진은 각 부대 지휘관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이번의 결전은 민족의 장래에 지대한 영향을 줄 것이오.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전투에 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동지들에게 당부하겠소.
첫째, 탄약을 아껴 써야 하겠습니다. 일발필살(一發必殺)의 정확성을 가지고 사격하도록 병사들에게 주의시키시오. 우리는 탄약이 충분하지 못합니다. 둘째, 작전이 개시되기 전까지 이제부터 인기척을 내서는 안됩니다. 특히 연기는 우리의 위치를 알려주는 결과가 되니 좀 날씨가 쌀쌀하더라도 불을 피워서는 안됩니다. 셋째 어떠한 경우라도 각자 행동을 삼가시오. 이제 원위치로 돌아가 맡은 바 군무에 충실히 임하시오.”
김좌진 장군의 지시를 듣고 있는 지휘관들의 굳게 다문 입술에는 필승의 결의가 묻어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