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32세의 청년 야전군사령관인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은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이후 병사들에게 만록구(萬鹿溝) 산림 속에서 노영(露營)하도록 한 뒤 다음날인 10월 23일 아침 북로군정서의 병력을 2개 부대로 나누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황구령(黃口嶺) 방면을 향하여 행군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김좌진 장군이 직접 인솔하는 부대가 맹개골 산림 속을 통과할 무렵 일본군 기병 30명이 이 골짜기에 진입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김좌진은 휘하 병사들을 즉시 산림의 변두리에 매복시켰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장병들은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와 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에서 경험했듯이 일사분란한 긴급사태에 대비하여 결전의 시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이런 줄 모르는 일본군 기병들은 그 밀림 속을 헤치며 접근해 왔다.
이때 선두에서 병사들과 함께 매복하고 있던 김좌진 장군이 독일제 마우저식 M1910 권총(拳銃)을 조준하여 노련한 솜씨로 일본군의 선두에 있는 적병들을 향해 세 발의 탄환을 쏘았다. 앞장섰던 일본군 기병 두 명이 짧은 비명과 함께 마하(馬下)에 거꾸러지고 군마(軍馬)는 소리치며 달린다. 이것을 신호로 독립군 병사들이 일제사격을 가하니 일본군 병사 10여명이 사살되고 나머지는 쏜살같이 달아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총격전(銃擊戰)이 벌어졌다 끝났지만 김좌진 장군의 부대는 전리품으로 군마 5필과 군용지도(軍用地圖) 4장, 장총(長銃) 6정을 노획했다.
김좌진 장군과 그의 병사들은 계속된 전투와 일본군의 추격으로 휴식할 틈도 없었다. 독립군의 체력이 점점 고갈되는 것을 염려한 김좌진 장군은 병사들의 피로를 회복하기 위하여 맹개골로부터 약 20리 떨어진 만기구 뒷산 산림 속으로 이동시켰다.
독립군 병사들은 너무도 치열했던 전투 속에서 며칠간 어떻게 살았는지 실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총사령관의 휴식 명령이 떨어지자 잠이나 실컷 자보자며 서로 수풀 속 평평한 곳을 찾아 사지를 뻗고 잠들기 시작했으며, 이곳 저곳에서 코고는 소리가 밀림 속을 울려댔다. 이때 전방 약 1백미터 되는 지점에서 일본군인지 독립군인지 분별할 수 없는 약 50명의 보병이 밀집하여 서서히 행군하고 있는 것을 보초병들이 발견했다.
김좌진 장군은 북로군정서를 2개 소부대로 편성하여 밀림 속으로 진군하도록 했기 때문에 다른 아군이 뒤를 따라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독립군의 군복 색깔이 일본군의 군복과 비슷한 황갈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아래를 굽어보며 그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지금 오는 부대는 아군인가?”
김좌진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산림 속을 울리자 일본군은 즉시 긴장하여 임전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독립군 병사들은 일본군이 온 것을 알고 비상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일어나 총기(銃器)를 들고 엄폐물을 찾아 몸을 엎드렸다.
명중위본(命中爲本)의 전술 훈련으로 단련된 독립군 병사들은 백발백중(百發百中)의 정확한 사격을 전개하며 한 수 위의 전투력으로 일본군을 쓰러뜨렸다. 일본군 30여명이 순식간에 사살되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맹개골에서 다시 일본군을 무찌른 김좌진 장군의 부대는 병력을 재정비하여 다음날인 24일 아침 쉬구로 향했다. 이때 일본군 보병 100여명이 방심한 채 촌락의 전방을 통과하여 독립군 병사 50여명이 진군하고 있는 산림 쪽으로 서서히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여 피로가 풀린 독립군 병사들은 즉각 일본군을 기습공격하여 50여명의 적병을 사살했다. 그때 일본군 기병 1개 소대가 군마(軍馬)를 촌락에 매어 둔 채 흩어져 올라오기 시작했다. 독립군은 적군의 수효가 얼마 되지 않자 한편으로는 사격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백병전(白兵戰)을 벌일 요량으로 총검(銃劍)을 앞세우며 일본군 기병들을 압박하였다.
김좌진 장군이 각각 양손에 권총(拳銃)과 군도(軍刀)를 들고 앞장서서 돌격하여 적병 5~6명을 죽이니 독립군 병사들은 사기가 높이 올라 더욱 맹렬한 공세를 취했다. 일본군 기병 20여명이 독립군의 강공(强攻)에 의해 전사하고 나머지 7~8명은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이렇듯 독립군은 어랑촌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대적인 타격을 가한 뒤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추격을 여러 차례 물리치며 전과를 올렸다.
한편, 홍범도(洪範圖) 장군의 독립군 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은 이범석(李範奭)이 거느린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일부 병력과 더불어 10월 24일과 25일에 걸쳐 천보산(天寶山) 남쪽 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1개 중대 병력을 습격했다. 독립군은 비록 산악전(山岳戰)에 있어서 일본군보다 월등한 기량을 갖고 있었지만 병력과 화력 면에서 열세였고 특히 전투가 거듭될수록 병력과 군수물자의 손실도 많아졌다. 그리하여 군량 공급을 위해서도 적군을 습격하여 약탈하는 방법을 쓸 수 밖에 없었다.
먼저 이범석의 부대가 10월 24일 오전 8시와 9시 두 차례나 천보산 부근의 은(銀) 광산을 방비하고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이에 놀란 천보산의 일본군은 급히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대를 긴급히 파견하라는 지원 요청을 했으니 그 전과를 가히 짐작할만 하다. 또한 홍범도 장군의 부대도 10월 25일 새벽에 식량을 빼앗기 위해 천보산 부근에 갔다가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천보산의 패배 소식을 들은 아즈마[東正彦] 소장(小將)은 급히 천보산에 1개 대대 병력을 보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보아 천보산전투(天寶山戰鬪)에서의 일본군 피해 상황은 정확한 기록이 전해오지 않지만 상당한 사상자가 나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군은 이렇게 청산리 일대의 여러 전투에서 독립군의 두 영웅 홍범도·김좌진 장군의 지략과 전술에 말려들어 심각한 인명피해를 입었으나 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지 않으면 앞으로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가 어려워진다는 절박한 생각에서 추격전(追擊戰)을 멈추지 않았다.
메시노[飯野] 중좌(中佐)가 거느린 일본군 병사 150여명은 독립군을 찾아 밀림 속을 헤매다가 25일 밤 10시경에 홍범도 장군의 부대가 고동하곡(古洞河谷)에서 숙영중인 것을 발견하였다. 메시노 중좌는 원래 5백여명의 전투병력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고동하전투(古洞河戰鬪) 때에 그의 휘하 병사가 고작 150여명뿐인 것은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에서 400여명의 병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메시노 중좌는 현재 자신의 병력이 홍범도 장군의 부대보다 절대적으로 적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정각 12시에 야습전(夜襲戰)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처음에 과감한 돌격전(突擊戰)으로 독립군의 척후대를 패주시켰지만 홍범도 부대의 본영으로 진입하다가 뜻밖에도 하천과 절벽에 가로막혀 독립군의 매복작전(埋伏作戰)에 말려들고 말았다.
홍범도 장군은 직접 일본제 무라타[村田] 38식 기병장총(騎兵長銃)을 비껴들고 한 치의 오발(誤發)도 없는 정확한 사격술(射擊術)을 발휘하며 일본군 병사들을 쏘아 쓰러뜨렸다. 일본군은 사방에 흩어져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집중사격에 의해 2개 중대 병력이 궤멸되는 피해를 입었다. 홍범도 장군은 그 여세를 몰아 병사들을 거느리고 패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크게 당황한 아즈마 소장은 뒤에 있던 예비대 병력 50여명을 앞으로 이동시켜 홍범도 부대의 추격을 저지하도록 하고 부근의 743호 고지로 쫓겨 올라갔다. 아즈마 소장을 비롯한 일본군의 지휘관들은 독립군의 습격이 두려워 새벽 내내 전전긍긍(戰戰兢兢)하다가 날이 밝아오자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얼굴에 희색이 나타났다. 그 때문에 이들은 홍범도와 그의 참모들이 수백미터 앞에서 유유히 사라져 가는데도 추격은 물론이고 반격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홍범도 장군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 1백여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독립군도 10~20명 정도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고, 그 자신도 허벅지에 일본군의 총탄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리하여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10여회의 전투가 전개된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은 우리 민족에게 무력(武力)으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구축(驅逐)하고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 준 쾌거였으며, 식민지인 한반도를 발판으로 삼아 앞으로 만주를 정복하고 중국 대륙을 침략하려는 야욕에 부풀어있던 일제(日帝) 당국자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러나 독립군의 위대한 승리인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은 일본군의 불법적인 간도 침범과 독립군에 대한 대규모 토벌작전(討伐作戰)을 피하기 위해 근거지를 버리고 철수하다가 일본군의 추격에 응전(應戰)하여 크게 타격을 가한 전투에 불과했기 때문에 광복(光復)을 앞당기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중국의《요동일일신문(遼東日日新聞)》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에서 나온 일본군의 총(摠) 전사자 수효를 2천여명이라고 보도하였으며, 박은식(朴殷植)의「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도《요동일일신문》의 기사를 인용하여 독립군의 청산리대첩을 통해 일본군 2천여명이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일본군 제19사단의 작전 보고서에는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에서 병사 4명이 전사하고 하사 1명과 병사 2명이 부상당했다고 하고 있을 뿐이며,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에서조차도 보병 1명과 기병 2명이 전사하고 보병 4명과 기병 4명이 부상당했을 정도라고 하고 있을 뿐이다. 고동하전투(古洞河戰鬪)에서는 일본군의 피해가 없으며 독립군 30명을 사살했다고 하여 전투 상황을 철저하게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전황에 대한 이러한 왜곡에도 불구하고 오가[大賀龜吉] 간도 주재 일본총영사가 고무라[小村壽太郞] 외무대신에게 보낸 긴급전문에서 보면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 2개 연대의 병력으로서 2개월 동안이면 소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기대에 반해, 성적은 다소 실패로 끝났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고 보고함으로써 일본군이 패전(敗戰)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인하였다. 이 밖에 일본 영사관의 비밀보고서에는 일본군이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소대장 9명, 병사 8백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다고 기록되었다.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 장군의 탁월한 지도력과 치밀한 용병술로 이룩한 독립군의 청산리대첩은 우리 민족이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식민통치에 순응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주독립정신을 표방하여 치열한 항쟁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는 크고 깊다.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4청산리대첩 ⑸
★ 맹개골·쉬구·천보산·고동하곡 등지에서 일본군의 추격을 물리치다.
당시 32세의 청년 야전군사령관인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은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이후 병사들에게 만록구(萬鹿溝) 산림 속에서 노영(露營)하도록 한 뒤 다음날인 10월 23일 아침 북로군정서의 병력을 2개 부대로 나누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황구령(黃口嶺) 방면을 향하여 행군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김좌진 장군이 직접 인솔하는 부대가 맹개골 산림 속을 통과할 무렵 일본군 기병 30명이 이 골짜기에 진입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김좌진은 휘하 병사들을 즉시 산림의 변두리에 매복시켰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장병들은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와 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에서 경험했듯이 일사분란한 긴급사태에 대비하여 결전의 시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이런 줄 모르는 일본군 기병들은 그 밀림 속을 헤치며 접근해 왔다.
이때 선두에서 병사들과 함께 매복하고 있던 김좌진 장군이 독일제 마우저식 M1910 권총(拳銃)을 조준하여 노련한 솜씨로 일본군의 선두에 있는 적병들을 향해 세 발의 탄환을 쏘았다. 앞장섰던 일본군 기병 두 명이 짧은 비명과 함께 마하(馬下)에 거꾸러지고 군마(軍馬)는 소리치며 달린다. 이것을 신호로 독립군 병사들이 일제사격을 가하니 일본군 병사 10여명이 사살되고 나머지는 쏜살같이 달아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총격전(銃擊戰)이 벌어졌다 끝났지만 김좌진 장군의 부대는 전리품으로 군마 5필과 군용지도(軍用地圖) 4장, 장총(長銃) 6정을 노획했다.
김좌진 장군과 그의 병사들은 계속된 전투와 일본군의 추격으로 휴식할 틈도 없었다. 독립군의 체력이 점점 고갈되는 것을 염려한 김좌진 장군은 병사들의 피로를 회복하기 위하여 맹개골로부터 약 20리 떨어진 만기구 뒷산 산림 속으로 이동시켰다.
독립군 병사들은 너무도 치열했던 전투 속에서 며칠간 어떻게 살았는지 실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총사령관의 휴식 명령이 떨어지자 잠이나 실컷 자보자며 서로 수풀 속 평평한 곳을 찾아 사지를 뻗고 잠들기 시작했으며, 이곳 저곳에서 코고는 소리가 밀림 속을 울려댔다. 이때 전방 약 1백미터 되는 지점에서 일본군인지 독립군인지 분별할 수 없는 약 50명의 보병이 밀집하여 서서히 행군하고 있는 것을 보초병들이 발견했다.
김좌진 장군은 북로군정서를 2개 소부대로 편성하여 밀림 속으로 진군하도록 했기 때문에 다른 아군이 뒤를 따라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독립군의 군복 색깔이 일본군의 군복과 비슷한 황갈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아래를 굽어보며 그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지금 오는 부대는 아군인가?”
김좌진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산림 속을 울리자 일본군은 즉시 긴장하여 임전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독립군 병사들은 일본군이 온 것을 알고 비상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일어나 총기(銃器)를 들고 엄폐물을 찾아 몸을 엎드렸다.
명중위본(命中爲本)의 전술 훈련으로 단련된 독립군 병사들은 백발백중(百發百中)의 정확한 사격을 전개하며 한 수 위의 전투력으로 일본군을 쓰러뜨렸다. 일본군 30여명이 순식간에 사살되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맹개골에서 다시 일본군을 무찌른 김좌진 장군의 부대는 병력을 재정비하여 다음날인 24일 아침 쉬구로 향했다. 이때 일본군 보병 100여명이 방심한 채 촌락의 전방을 통과하여 독립군 병사 50여명이 진군하고 있는 산림 쪽으로 서서히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여 피로가 풀린 독립군 병사들은 즉각 일본군을 기습공격하여 50여명의 적병을 사살했다. 그때 일본군 기병 1개 소대가 군마(軍馬)를 촌락에 매어 둔 채 흩어져 올라오기 시작했다. 독립군은 적군의 수효가 얼마 되지 않자 한편으로는 사격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백병전(白兵戰)을 벌일 요량으로 총검(銃劍)을 앞세우며 일본군 기병들을 압박하였다.
김좌진 장군이 각각 양손에 권총(拳銃)과 군도(軍刀)를 들고 앞장서서 돌격하여 적병 5~6명을 죽이니 독립군 병사들은 사기가 높이 올라 더욱 맹렬한 공세를 취했다. 일본군 기병 20여명이 독립군의 강공(强攻)에 의해 전사하고 나머지 7~8명은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이렇듯 독립군은 어랑촌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대적인 타격을 가한 뒤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추격을 여러 차례 물리치며 전과를 올렸다.
한편, 홍범도(洪範圖) 장군의 독립군 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은 이범석(李範奭)이 거느린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일부 병력과 더불어 10월 24일과 25일에 걸쳐 천보산(天寶山) 남쪽 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1개 중대 병력을 습격했다. 독립군은 비록 산악전(山岳戰)에 있어서 일본군보다 월등한 기량을 갖고 있었지만 병력과 화력 면에서 열세였고 특히 전투가 거듭될수록 병력과 군수물자의 손실도 많아졌다. 그리하여 군량 공급을 위해서도 적군을 습격하여 약탈하는 방법을 쓸 수 밖에 없었다.
먼저 이범석의 부대가 10월 24일 오전 8시와 9시 두 차례나 천보산 부근의 은(銀) 광산을 방비하고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이에 놀란 천보산의 일본군은 급히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대를 긴급히 파견하라는 지원 요청을 했으니 그 전과를 가히 짐작할만 하다. 또한 홍범도 장군의 부대도 10월 25일 새벽에 식량을 빼앗기 위해 천보산 부근에 갔다가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천보산의 패배 소식을 들은 아즈마[東正彦] 소장(小將)은 급히 천보산에 1개 대대 병력을 보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보아 천보산전투(天寶山戰鬪)에서의 일본군 피해 상황은 정확한 기록이 전해오지 않지만 상당한 사상자가 나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군은 이렇게 청산리 일대의 여러 전투에서 독립군의 두 영웅 홍범도·김좌진 장군의 지략과 전술에 말려들어 심각한 인명피해를 입었으나 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지 않으면 앞으로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가 어려워진다는 절박한 생각에서 추격전(追擊戰)을 멈추지 않았다.
메시노[飯野] 중좌(中佐)가 거느린 일본군 병사 150여명은 독립군을 찾아 밀림 속을 헤매다가 25일 밤 10시경에 홍범도 장군의 부대가 고동하곡(古洞河谷)에서 숙영중인 것을 발견하였다. 메시노 중좌는 원래 5백여명의 전투병력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고동하전투(古洞河戰鬪) 때에 그의 휘하 병사가 고작 150여명뿐인 것은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에서 400여명의 병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메시노 중좌는 현재 자신의 병력이 홍범도 장군의 부대보다 절대적으로 적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정각 12시에 야습전(夜襲戰)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처음에 과감한 돌격전(突擊戰)으로 독립군의 척후대를 패주시켰지만 홍범도 부대의 본영으로 진입하다가 뜻밖에도 하천과 절벽에 가로막혀 독립군의 매복작전(埋伏作戰)에 말려들고 말았다.
홍범도 장군은 직접 일본제 무라타[村田] 38식 기병장총(騎兵長銃)을 비껴들고 한 치의 오발(誤發)도 없는 정확한 사격술(射擊術)을 발휘하며 일본군 병사들을 쏘아 쓰러뜨렸다. 일본군은 사방에 흩어져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집중사격에 의해 2개 중대 병력이 궤멸되는 피해를 입었다. 홍범도 장군은 그 여세를 몰아 병사들을 거느리고 패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크게 당황한 아즈마 소장은 뒤에 있던 예비대 병력 50여명을 앞으로 이동시켜 홍범도 부대의 추격을 저지하도록 하고 부근의 743호 고지로 쫓겨 올라갔다. 아즈마 소장을 비롯한 일본군의 지휘관들은 독립군의 습격이 두려워 새벽 내내 전전긍긍(戰戰兢兢)하다가 날이 밝아오자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얼굴에 희색이 나타났다. 그 때문에 이들은 홍범도와 그의 참모들이 수백미터 앞에서 유유히 사라져 가는데도 추격은 물론이고 반격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홍범도 장군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 1백여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독립군도 10~20명 정도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고, 그 자신도 허벅지에 일본군의 총탄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리하여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10여회의 전투가 전개된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은 우리 민족에게 무력(武力)으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구축(驅逐)하고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 준 쾌거였으며, 식민지인 한반도를 발판으로 삼아 앞으로 만주를 정복하고 중국 대륙을 침략하려는 야욕에 부풀어있던 일제(日帝) 당국자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러나 독립군의 위대한 승리인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은 일본군의 불법적인 간도 침범과 독립군에 대한 대규모 토벌작전(討伐作戰)을 피하기 위해 근거지를 버리고 철수하다가 일본군의 추격에 응전(應戰)하여 크게 타격을 가한 전투에 불과했기 때문에 광복(光復)을 앞당기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중국의《요동일일신문(遼東日日新聞)》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에서 나온 일본군의 총(摠) 전사자 수효를 2천여명이라고 보도하였으며, 박은식(朴殷植)의「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도《요동일일신문》의 기사를 인용하여 독립군의 청산리대첩을 통해 일본군 2천여명이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일본군 제19사단의 작전 보고서에는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에서 병사 4명이 전사하고 하사 1명과 병사 2명이 부상당했다고 하고 있을 뿐이며,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에서조차도 보병 1명과 기병 2명이 전사하고 보병 4명과 기병 4명이 부상당했을 정도라고 하고 있을 뿐이다. 고동하전투(古洞河戰鬪)에서는 일본군의 피해가 없으며 독립군 30명을 사살했다고 하여 전투 상황을 철저하게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전황에 대한 이러한 왜곡에도 불구하고 오가[大賀龜吉] 간도 주재 일본총영사가 고무라[小村壽太郞] 외무대신에게 보낸 긴급전문에서 보면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 2개 연대의 병력으로서 2개월 동안이면 소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기대에 반해, 성적은 다소 실패로 끝났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고 보고함으로써 일본군이 패전(敗戰)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인하였다. 이 밖에 일본 영사관의 비밀보고서에는 일본군이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소대장 9명, 병사 8백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다고 기록되었다.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 장군의 탁월한 지도력과 치밀한 용병술로 이룩한 독립군의 청산리대첩은 우리 민족이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식민통치에 순응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주독립정신을 표방하여 치열한 항쟁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는 크고 깊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