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김좌진(金佐鎭) 장군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이후 끝까지 자신을 따르며 호위하고 있는 1백명 남짓한 독립군 병사들을 모아 행상대(行商隊)를 조직하고 농작물 판매와 만주 지역의 각종 정보 수집에 주력하였다. 만주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색출하여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켰던 일본군은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이후 중국 정부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조선 북쪽 국경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많은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었고, 독립군에 대한 식량지원도 불가능했으니 김좌진 장군의 마음은 더욱 답답했다.
병사들은 흩어져서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고 사냥과 고기잡이로 얻은 생선과 야생동물로 끼니를 떼우기도 하고 때로는 중국인 토호들을 협박하여 식량을 탈취하기도 했다. 그와 같은 상황에도 계절은 변함없이 흘렀다. 어느새 나뭇잎이 지고 추수한 볏짚단 위에는 서리가 내리면서 겨울이 성큼 대문 앞에 들어섰다. 그리고 쌀쌀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김좌진의 집에도 때아닌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돼지를 잡고 떡을 찧는 소리가 요란했다. 인절미에 콩가루를 묻히고 시루떡도 만들고 여기저기에서 술병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김좌진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아무리 물어보아도 마을 잔치라고만 하고 상세한 말은 전해주지 않았다. 동리 교포들은 싱글벙글 웃기만 할 뿐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행상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달구지 한 대가 김좌진의 집 앞에 도착했다. 교포들이 모여들었다. 김좌진은 무슨 영문인지 알 수도 없고 사람들에게 물어 볼 생각도 없어서 뒷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달구지에서 행상대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내린 사람들은 김좌진의 어머니 이소사(李召史)와 아내 오숙근(吳淑根), 딸인 김옥남(金玉男) 등이었다.
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뜻하지 않은 감격적인 가족상봉이었다. 김좌진이 만주로 망명하자 고향을 지키며 일본 관헌의 탄압 속에서 고통을 치르며 지내던 가족들은 김좌진이 모르게 행상대원 유창덕(兪昌德)·이중삼(李重三) 등이 홍성으로 잠입하여 소식을 전해주자 그들을 따라 어렵게 압록강을 건너 김좌진을 찾아오게 된 것이다. 5년만에 어머니와 아내를 보게 된 김좌진으로서는 너무나도 의외의 일이었고 돌연한 가족상봉이었기에 당황했다.
교포들과 대원들이 한동안 소란 끝에 축복의 인사를 남기고 모두 흩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가니 주위는 조용해졌다. 김좌진은 문득 오숙근의 손을 잡고 있는 여자 아이에게 시선을 모았다. 김좌진이 만주로 망명할 때 고작 젖먹이에 불과했던 아기가 어느새 12세의 소녀로 자랐으니 김좌진은 딸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 이씨가 손녀에게 말했다.
“너의 아버지가 저 분이시다. 어서 애비한테 가봐라.”
그러나 옥남은 무엇인지 어색하여 선뜻 김좌진의 품에 안기지 않았다.
그날 밤 만주의 차가운 바람을 맞받는 초가집에서는 먼 길을 온 가족의 피로를 풀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면서 그는 지난 날들을 곰곰이 회고해 보았다. 노모의 주름살진 얼굴과 아내의 억샌 손에서 호주(戶主)가 없는 가정생활의 고생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이야기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젖먹이 때에 본 이후로 처음 보는 자신의 혈육 옥남이 피곤히 잠든 모습을 보고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을 느끼며 눈시울을 붉힌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왜놈들과 싸우겠다고 홀연히 집을 떠난 아들, 남편,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 했겠는가? 못난 나를 찾으려고 만주까지 어려운 길을 걸어왔던 나의 가족들…’
그러나 김좌진은 그리운 가족을 불러올 수가 없었다. 가족에게 얽매여 장부의 뜻을 굽히게 될 것이 두려웠다. 나라를 되찾고 민족의 생존권을 지키는 투쟁을 위해서는 사사로운 감정은 과감하게 버려야 했다. 오로지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武力)으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우리 땅에서 몰아내는 것만이 그의 인생에 있어 유일한 목적이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살아왔는데 뜻밖에도 대원들이 자기도 모르게 어머니와 아내를 데려온 것이다.
“장군님, 가족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그의 심정을 잘 알고 있는 대원들은 번갈아 가며 김좌진의 불편한 마음을 달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입장일 뿐이었다. 물론 김좌진도 가족을 돌려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최악의 경우 또 다시 가족의 곁을 떠나 항일투쟁에 진력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독립운동가의 가족이 겪는 공통된 운명의 한 예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의 활동이 가족으로 인하여 장애가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김좌진이 만주에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한지 석달이 지나자 그의 딸인 옥남에게서 이상한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아내인 오숙근이었다.
“여보, 옥남이가 요새 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허리가 아프다고 늘 짜증만 내고 있어요. 음식도 제대로 먹지 않고...”
“별일 있을라구. 좀 그러다가 괜찮아지겠지. 너무 걱정말고 음식이나 잘 먹이도록 해요.”
감기 한번 앓아 본 적이 없는 김좌진은 딸의 증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도 그렇지만 김좌진은 가족들에게 자상한 신경을 쓸 새도 없었다. 그는 때로는 멀리 떨어진 지방에 가서 민족운동 지도자들을 만아 협의하고 설득하여 의견을 조율하면서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시도하는 작업에만 열중하고 있었기에 다른 문제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 뒤 오숙근은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지도자인 구춘선(具春先)을 만나 회담하고 돌아오는 김좌진에게 다시 걱정스럽게 말했다.
“애가 이상해요. 열이 불덩어리 같고 숫제 누워서 일어날 줄 몰라요.”
김좌진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건강한 애가 몸은 왜 그리 약할까?”
그는 옥남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이마에 손바닥을 대 보았다. 김좌진은 그제서야 옥남이 심한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팔은 야위어 뼈가 앙상하고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도 파란 정맥이 드러나 보였다.
“아니 애기 이렇게 되도록 뭘 하고 있었단 말이오?”
김좌진은 자신이 딸에게 제대로 신경을 못 쓴 부분을 생각하지 않고 아내를 질타하였다. 오숙근은 안절부절하며 울상이 되었다. 근처에 병원도 없고 중국인이 운영하는 한약방을 찾아 탕약을 지어다 달여 먹였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이거 심상치 않은걸. 내가 의사를 불러올테니 잘 돌보고 있어요.”
김좌진이 밤중에 문을 열고 나서자 오숙근이 만류한다.
“이 밤중에 어디를 가세요? 날이 밝거든 나가시지요.”
김좌진은 붙잡는 아내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급히 나갔다. 그러나 김좌진 장군을 만나자는 연락은 여기저기에서 오고 있었지만 3일째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 이씨와 아내 오숙근은 우선 앓아 누운 옥남보다도 김좌진이 더 걱정스러웠다. 김좌진은 중국 관헌에게도 경계대상 인물로 손꼽히고 있거니와 며칠을 소식이 없으니 신변에 무슨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닌지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와 아내는 안절부절하며 견딜 수 없도록 근심에 빠졌다. 행상대원들 역시 불안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김좌진 장군의 집 마당에서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아 가족들과 함께 밤을 새우며 김좌진이 오기를 기다렸다.
꼬박 3일을 행상대원과 함께 밤을 새운 가족들 앞에 먼지를 흠뻑 뒤집어 쓴 초라한 모습으로 김좌진이 한 손에 가방을 들고 불쑥 나타났다. 그 뒤에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 한사람도 따라 들어왔다.
김좌진은 병원이나 부근의 의사를 찾으며 헤매다가 밤새 기차를 타고 심양까지 가서 일본인 의사를 데리고 길을 재촉하여 지금 도착한 것이다.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 지도자가 일본인 의사에게 딸의 검진을 의뢰하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만주 지역에서는 신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된 중국인도 없었고 한국인 의사 역시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김좌진은 일본에서 만주로 이민 온 사람들을 따라 심양(瀋陽)에서 병원을 개업한 일본인 미즈노[水野永隆] 외과의사에게 간청하여 영고탑(寧古塔) 구석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
의사 미즈노는 김좌진이 일본군과 싸운 독립군 사령관이란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만주에 거주하는 한국인 소작농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김좌진과 그의 어머니 이씨, 그리고 아내 오숙근과 행상대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젊은 일본인 의사 미즈노는 김좌진의 딸 옥남을 진찰하기 시작했다. 옥남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들릴듯 말듯 신음 소리만 내고 있었다.
“저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다니…”
김좌진은 자신의 과오를 자책하며 일본인 의사 미즈노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한참만에 김좌진의 가족들에게 고개를 돌린 의사 미즈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설래설래 흔들었다.
옆에 있던 가족과 행상대원들은 그 일본인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읽을 수 있었다. 김좌진도 그러한 상황일 것이라고 추측은 했지만 답답한 심경에서 의사 미즈노에게 다그쳐 물었다.
“도대체 내 딸이 무슨 병에 걸린 것이오?”
“가망이 없습니다. 때가 늦었습니다.”
의사 미즈노는 유창한 중국어로 나지막하게 말하고 진료기구를 주섬주섬 가방에 주워 넣었다. 아내 오숙근은 그의 행동에서 옥남의 병세가 절망적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어머니 이씨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 도대체 무슨 병이기에 못 고친다는 겁니까?”
의사 미즈노는 김좌진의 어머니와 아내를 밖으로 나가 있게 하고 김좌진을 마주보며 말했다.
“미안합니다만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다. 따님은 등뼈가 점점 곪아 전신이 마비되는 ‘베르테라 카리에스’라는 희귀병에 걸렸습니다. 병세는 한 2년 정도 진전된 듯합니다. 이 증상은 세계 인류 가운데 십만명당 한명꼴로 걸리는 흔치 않은 병환으로 하필 따님께서 이런 희한한 병에 걸렸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원래 이 병은 아주 초기에 발견한다 하더라도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고 안정해야 하는데 따님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오? 저 아이를 죽을 때까지 그냥 두고 보고만 있으라는 것이오? 그럴려면 내가 당신을 왜 여기까지 데리고 왔겠소? 내 비록 가난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치료비를 부담할테니 제발 내 딸 좀 살려주시오. 제발 부탁이니 저 아이를 버리지 마시오.”
총탄이 빗발치고 시체가 나뒹구는 살벌한 전장(戰場)에서도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았던 김좌진 장군의 얼굴에는 평생 보지 못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린 딸에게 아버지의 구실을 못한 죄책감과 아버지의 얼굴을 처음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과의 이별을 해야 하는 딸의 운명을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으로 김좌진 장군은 비틀거리고 있었다.
“저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제가 왜 의사로서 환자를 저버리겠습니까? 저도 역시 저 환자를 살려낼 수만 있다면 의사로서 다시 없는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늦었어요. 늦어도 너무 늦었어요. 저도 답답하지만 이제는 도저히 손을 써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저 환자는 지금 마비상태입니다. 애석하지만 앞으로 약 한달 이상 생명을 부지할 힘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손을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귀여운 따님이지만 체념하셔야 되겠습니다. 앞으로 명복을 빌어줄 생각이나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말 저로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의사 미즈노가 다시 절망적인 진료 결과를 말하자 김좌진은 울화가 치밀어 언성을 높였다.
“당신은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멸시해서 그러는 것이지? 당신과 같은 일본 사람이라면 이렇게 냉정하게 대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일본인 의사는 젊은이답지 않게 침착하게 대꾸한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정치인도 군인도 아닙니다. 저는 의료업을 천직으로 삼고 있는 한낱 의사일 뿐입니다. 저에게는 한가지, 환자를 돌보는 의무 밖에는 없어요. 간혹 일본인 의사 가운데는 순수하지 못한 자가 있기는 하지만 저는 그런 자들과는 다릅니다. 저는 어떠한 경우라도 환자의 국적을 따져서 차별하며 치료하지 않습니다.”
의사 미즈노는 한숨을 지으며 김좌진의 거처를 떠났다.
김좌진 장군의 집에는 저녁내내 등잔불이 꺼지지 않고 일본인 의사가 떠나고 나니 쓸쓸하기만 했다. 김좌진은 노모와 아내 앞에서 눈물을 뿌리며 “그동안 내가 독립운동에 매진하느라 혈육인 옥남이에게 너무 무심했습니다. 세상에 저 같은 무능하고 매정한 아버지는 없을 겁니다”하고 사죄했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김좌진은 어쩌면 일찍이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는 항일투사에게는 가족이 같이 있으면 안된다는 판단을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휘어잡을 수 없는 역경이 다시 김좌진의 가정에 비췄으니 이것을 국운의 탓으로 돌려야 할 지, 아니면 김좌진 개인의 비운이라고 말해야 할 지 모를 일이었다. 누구 탓인지도 말하기 어렵다. 국운이 쇠퇴할 때 아버지의 귀여움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태어난 옥남은 할머니 그늘에서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자라다가 천신만고 끝에 아버지를 만났으나 척추의 골수가 썩어가는 희귀병으로 생애 12년만에 다시 피어보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이역만리의 만주 땅에서 아버지를 보자마자 감겨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고 말았다.
김좌진과 어머니 이씨의 슬픔도 컸지만 누구보다 억장이 무너지는 사람은 김좌진의 아내 오숙근이었다. 남편이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가정을 떠나 만주로 망명한 이후 혼자서 집안 살림을 도맡으며 어려운 역경을 이겨낸 데에는 딸인 옥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옥남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숙근은 결국 만주를 벗어나 홍성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5.일본군의 패전보복 ⑷
★ 딸 옥남의 사망
그 무렵 김좌진(金佐鎭) 장군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이후 끝까지 자신을 따르며 호위하고 있는 1백명 남짓한 독립군 병사들을 모아 행상대(行商隊)를 조직하고 농작물 판매와 만주 지역의 각종 정보 수집에 주력하였다. 만주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색출하여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켰던 일본군은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이후 중국 정부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조선 북쪽 국경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많은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었고, 독립군에 대한 식량지원도 불가능했으니 김좌진 장군의 마음은 더욱 답답했다.
병사들은 흩어져서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고 사냥과 고기잡이로 얻은 생선과 야생동물로 끼니를 떼우기도 하고 때로는 중국인 토호들을 협박하여 식량을 탈취하기도 했다. 그와 같은 상황에도 계절은 변함없이 흘렀다. 어느새 나뭇잎이 지고 추수한 볏짚단 위에는 서리가 내리면서 겨울이 성큼 대문 앞에 들어섰다. 그리고 쌀쌀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김좌진의 집에도 때아닌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돼지를 잡고 떡을 찧는 소리가 요란했다. 인절미에 콩가루를 묻히고 시루떡도 만들고 여기저기에서 술병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김좌진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아무리 물어보아도 마을 잔치라고만 하고 상세한 말은 전해주지 않았다. 동리 교포들은 싱글벙글 웃기만 할 뿐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행상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달구지 한 대가 김좌진의 집 앞에 도착했다. 교포들이 모여들었다. 김좌진은 무슨 영문인지 알 수도 없고 사람들에게 물어 볼 생각도 없어서 뒷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달구지에서 행상대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내린 사람들은 김좌진의 어머니 이소사(李召史)와 아내 오숙근(吳淑根), 딸인 김옥남(金玉男) 등이었다.
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뜻하지 않은 감격적인 가족상봉이었다. 김좌진이 만주로 망명하자 고향을 지키며 일본 관헌의 탄압 속에서 고통을 치르며 지내던 가족들은 김좌진이 모르게 행상대원 유창덕(兪昌德)·이중삼(李重三) 등이 홍성으로 잠입하여 소식을 전해주자 그들을 따라 어렵게 압록강을 건너 김좌진을 찾아오게 된 것이다. 5년만에 어머니와 아내를 보게 된 김좌진으로서는 너무나도 의외의 일이었고 돌연한 가족상봉이었기에 당황했다.
교포들과 대원들이 한동안 소란 끝에 축복의 인사를 남기고 모두 흩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가니 주위는 조용해졌다. 김좌진은 문득 오숙근의 손을 잡고 있는 여자 아이에게 시선을 모았다. 김좌진이 만주로 망명할 때 고작 젖먹이에 불과했던 아기가 어느새 12세의 소녀로 자랐으니 김좌진은 딸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 이씨가 손녀에게 말했다.
“너의 아버지가 저 분이시다. 어서 애비한테 가봐라.”
그러나 옥남은 무엇인지 어색하여 선뜻 김좌진의 품에 안기지 않았다.
그날 밤 만주의 차가운 바람을 맞받는 초가집에서는 먼 길을 온 가족의 피로를 풀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면서 그는 지난 날들을 곰곰이 회고해 보았다. 노모의 주름살진 얼굴과 아내의 억샌 손에서 호주(戶主)가 없는 가정생활의 고생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이야기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젖먹이 때에 본 이후로 처음 보는 자신의 혈육 옥남이 피곤히 잠든 모습을 보고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을 느끼며 눈시울을 붉힌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왜놈들과 싸우겠다고 홀연히 집을 떠난 아들, 남편,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 했겠는가? 못난 나를 찾으려고 만주까지 어려운 길을 걸어왔던 나의 가족들…’
그러나 김좌진은 그리운 가족을 불러올 수가 없었다. 가족에게 얽매여 장부의 뜻을 굽히게 될 것이 두려웠다. 나라를 되찾고 민족의 생존권을 지키는 투쟁을 위해서는 사사로운 감정은 과감하게 버려야 했다. 오로지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武力)으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우리 땅에서 몰아내는 것만이 그의 인생에 있어 유일한 목적이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살아왔는데 뜻밖에도 대원들이 자기도 모르게 어머니와 아내를 데려온 것이다.
“장군님, 가족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그의 심정을 잘 알고 있는 대원들은 번갈아 가며 김좌진의 불편한 마음을 달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입장일 뿐이었다. 물론 김좌진도 가족을 돌려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최악의 경우 또 다시 가족의 곁을 떠나 항일투쟁에 진력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독립운동가의 가족이 겪는 공통된 운명의 한 예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의 활동이 가족으로 인하여 장애가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김좌진이 만주에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한지 석달이 지나자 그의 딸인 옥남에게서 이상한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아내인 오숙근이었다.
“여보, 옥남이가 요새 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허리가 아프다고 늘 짜증만 내고 있어요. 음식도 제대로 먹지 않고...”
“별일 있을라구. 좀 그러다가 괜찮아지겠지. 너무 걱정말고 음식이나 잘 먹이도록 해요.”
감기 한번 앓아 본 적이 없는 김좌진은 딸의 증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도 그렇지만 김좌진은 가족들에게 자상한 신경을 쓸 새도 없었다. 그는 때로는 멀리 떨어진 지방에 가서 민족운동 지도자들을 만아 협의하고 설득하여 의견을 조율하면서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시도하는 작업에만 열중하고 있었기에 다른 문제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 뒤 오숙근은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지도자인 구춘선(具春先)을 만나 회담하고 돌아오는 김좌진에게 다시 걱정스럽게 말했다.
“애가 이상해요. 열이 불덩어리 같고 숫제 누워서 일어날 줄 몰라요.”
김좌진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건강한 애가 몸은 왜 그리 약할까?”
그는 옥남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이마에 손바닥을 대 보았다. 김좌진은 그제서야 옥남이 심한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팔은 야위어 뼈가 앙상하고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도 파란 정맥이 드러나 보였다.
“아니 애기 이렇게 되도록 뭘 하고 있었단 말이오?”
김좌진은 자신이 딸에게 제대로 신경을 못 쓴 부분을 생각하지 않고 아내를 질타하였다. 오숙근은 안절부절하며 울상이 되었다. 근처에 병원도 없고 중국인이 운영하는 한약방을 찾아 탕약을 지어다 달여 먹였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이거 심상치 않은걸. 내가 의사를 불러올테니 잘 돌보고 있어요.”
김좌진이 밤중에 문을 열고 나서자 오숙근이 만류한다.
“이 밤중에 어디를 가세요? 날이 밝거든 나가시지요.”
김좌진은 붙잡는 아내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급히 나갔다. 그러나 김좌진 장군을 만나자는 연락은 여기저기에서 오고 있었지만 3일째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 이씨와 아내 오숙근은 우선 앓아 누운 옥남보다도 김좌진이 더 걱정스러웠다. 김좌진은 중국 관헌에게도 경계대상 인물로 손꼽히고 있거니와 며칠을 소식이 없으니 신변에 무슨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닌지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와 아내는 안절부절하며 견딜 수 없도록 근심에 빠졌다. 행상대원들 역시 불안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김좌진 장군의 집 마당에서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아 가족들과 함께 밤을 새우며 김좌진이 오기를 기다렸다.
꼬박 3일을 행상대원과 함께 밤을 새운 가족들 앞에 먼지를 흠뻑 뒤집어 쓴 초라한 모습으로 김좌진이 한 손에 가방을 들고 불쑥 나타났다. 그 뒤에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 한사람도 따라 들어왔다.
김좌진은 병원이나 부근의 의사를 찾으며 헤매다가 밤새 기차를 타고 심양까지 가서 일본인 의사를 데리고 길을 재촉하여 지금 도착한 것이다.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 지도자가 일본인 의사에게 딸의 검진을 의뢰하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만주 지역에서는 신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된 중국인도 없었고 한국인 의사 역시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김좌진은 일본에서 만주로 이민 온 사람들을 따라 심양(瀋陽)에서 병원을 개업한 일본인 미즈노[水野永隆] 외과의사에게 간청하여 영고탑(寧古塔) 구석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
의사 미즈노는 김좌진이 일본군과 싸운 독립군 사령관이란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만주에 거주하는 한국인 소작농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김좌진과 그의 어머니 이씨, 그리고 아내 오숙근과 행상대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젊은 일본인 의사 미즈노는 김좌진의 딸 옥남을 진찰하기 시작했다. 옥남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들릴듯 말듯 신음 소리만 내고 있었다.
“저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다니…”
김좌진은 자신의 과오를 자책하며 일본인 의사 미즈노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한참만에 김좌진의 가족들에게 고개를 돌린 의사 미즈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설래설래 흔들었다.
옆에 있던 가족과 행상대원들은 그 일본인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읽을 수 있었다. 김좌진도 그러한 상황일 것이라고 추측은 했지만 답답한 심경에서 의사 미즈노에게 다그쳐 물었다.
“도대체 내 딸이 무슨 병에 걸린 것이오?”
“가망이 없습니다. 때가 늦었습니다.”
의사 미즈노는 유창한 중국어로 나지막하게 말하고 진료기구를 주섬주섬 가방에 주워 넣었다. 아내 오숙근은 그의 행동에서 옥남의 병세가 절망적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어머니 이씨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 도대체 무슨 병이기에 못 고친다는 겁니까?”
의사 미즈노는 김좌진의 어머니와 아내를 밖으로 나가 있게 하고 김좌진을 마주보며 말했다.
“미안합니다만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다. 따님은 등뼈가 점점 곪아 전신이 마비되는 ‘베르테라 카리에스’라는 희귀병에 걸렸습니다. 병세는 한 2년 정도 진전된 듯합니다. 이 증상은 세계 인류 가운데 십만명당 한명꼴로 걸리는 흔치 않은 병환으로 하필 따님께서 이런 희한한 병에 걸렸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원래 이 병은 아주 초기에 발견한다 하더라도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고 안정해야 하는데 따님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오? 저 아이를 죽을 때까지 그냥 두고 보고만 있으라는 것이오? 그럴려면 내가 당신을 왜 여기까지 데리고 왔겠소? 내 비록 가난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치료비를 부담할테니 제발 내 딸 좀 살려주시오. 제발 부탁이니 저 아이를 버리지 마시오.”
총탄이 빗발치고 시체가 나뒹구는 살벌한 전장(戰場)에서도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았던 김좌진 장군의 얼굴에는 평생 보지 못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린 딸에게 아버지의 구실을 못한 죄책감과 아버지의 얼굴을 처음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과의 이별을 해야 하는 딸의 운명을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으로 김좌진 장군은 비틀거리고 있었다.
“저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제가 왜 의사로서 환자를 저버리겠습니까? 저도 역시 저 환자를 살려낼 수만 있다면 의사로서 다시 없는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늦었어요. 늦어도 너무 늦었어요. 저도 답답하지만 이제는 도저히 손을 써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저 환자는 지금 마비상태입니다. 애석하지만 앞으로 약 한달 이상 생명을 부지할 힘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손을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귀여운 따님이지만 체념하셔야 되겠습니다. 앞으로 명복을 빌어줄 생각이나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말 저로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의사 미즈노가 다시 절망적인 진료 결과를 말하자 김좌진은 울화가 치밀어 언성을 높였다.
“당신은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멸시해서 그러는 것이지? 당신과 같은 일본 사람이라면 이렇게 냉정하게 대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일본인 의사는 젊은이답지 않게 침착하게 대꾸한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정치인도 군인도 아닙니다. 저는 의료업을 천직으로 삼고 있는 한낱 의사일 뿐입니다. 저에게는 한가지, 환자를 돌보는 의무 밖에는 없어요. 간혹 일본인 의사 가운데는 순수하지 못한 자가 있기는 하지만 저는 그런 자들과는 다릅니다. 저는 어떠한 경우라도 환자의 국적을 따져서 차별하며 치료하지 않습니다.”
의사 미즈노는 한숨을 지으며 김좌진의 거처를 떠났다.
김좌진 장군의 집에는 저녁내내 등잔불이 꺼지지 않고 일본인 의사가 떠나고 나니 쓸쓸하기만 했다. 김좌진은 노모와 아내 앞에서 눈물을 뿌리며 “그동안 내가 독립운동에 매진하느라 혈육인 옥남이에게 너무 무심했습니다. 세상에 저 같은 무능하고 매정한 아버지는 없을 겁니다”하고 사죄했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김좌진은 어쩌면 일찍이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는 항일투사에게는 가족이 같이 있으면 안된다는 판단을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휘어잡을 수 없는 역경이 다시 김좌진의 가정에 비췄으니 이것을 국운의 탓으로 돌려야 할 지, 아니면 김좌진 개인의 비운이라고 말해야 할 지 모를 일이었다. 누구 탓인지도 말하기 어렵다. 국운이 쇠퇴할 때 아버지의 귀여움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태어난 옥남은 할머니 그늘에서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자라다가 천신만고 끝에 아버지를 만났으나 척추의 골수가 썩어가는 희귀병으로 생애 12년만에 다시 피어보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이역만리의 만주 땅에서 아버지를 보자마자 감겨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고 말았다.
김좌진과 어머니 이씨의 슬픔도 컸지만 누구보다 억장이 무너지는 사람은 김좌진의 아내 오숙근이었다. 남편이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가정을 떠나 만주로 망명한 이후 혼자서 집안 살림을 도맡으며 어려운 역경을 이겨낸 데에는 딸인 옥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옥남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숙근은 결국 만주를 벗어나 홍성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