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은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신민단(新民團)·구국단(救國團) 등 여러 독립군 부대가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영도 아래 일본군 제19사단 동지대(東支隊)를 격파한 쾌거의 승전(勝戰)이었으나, 이후 독립군은 소련 공산당(蘇聯共産黨)의 속임수에 걸려 1921년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으로 무장해제를 당하고 많은 병사가 희생됨으로써 그동안 양성했던 무력(武力)이 와해되고 말았다. 게다가 일본군이 독립군과의 교전에서 패배한 것을 보복하려고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켜 많은 재만한인(在滿韓人)이 학살당하고, 만주를 향해 경찰력(警察力)을 확대한 일제(日帝)는 만주의 조선인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하니 만주의 공기는 겉으로 조용했으나, 속으로는 한(恨)이 되어 어느 누구도 조선인이라면 절치부심하고 기회를 노리며 숨어 지내고 있었다.
이러한 반일 민족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중국 본토에서는 국민당(國民黨) 정권이 집권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절실히 요구되는 총기(銃器)·탄약(彈藥) 구입이 용이해졌다. 그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만주의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보유하고 있던 군수품과 병력을 합친다면 몇개의 사단병력을 무장시켜도 남을만치 많은 숫자였다.
이러한 좋은 조건은 공교롭게도 1924년 1월에 중국 본토에서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이뤄지면서 독립군 각 부대에게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국민당 정부는 중국 공산당(中國共産黨) 측과 연합정권을 수립하기로 협의하면서 공산당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만주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한국인에 대해 무장해제를 감행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심각한 타격이었다.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은 중대한 상태에 직면하였고 반대로 이러한 위기를 맞으면서 각 단체의 통합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소련 공산당의 마수(魔手)를 피해 영고탑(寧古塔)에 자리를 잡고 행상대(行商隊)를 조직하여 정보를 수집하면서 꾸준히 동지를 규합하여 때를 기다리던 김좌진 장군은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으로 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 시도의 압력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여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부딪치게 되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고? 또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의 독립운동을 방해하려고 획책하는구나.”
김좌진 장군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흥업단(興業團)의 최고 지도자였던 김혁(金爀)을 찾아갔다.
김혁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주역인 김좌진이 자신의 거처를 찾아오자 버선발로 나가 맞이했다.
“김 장군이 웬 일이시오? 이렇게 누추한 곳을 다 찾으시다니...”
“송구합니다. 벌써 찾아 뵙고자 하였으나 좀 늦어서 뵐 면목이 없습니다.”
“여하간 잘 오셨소? 요즘 농사를 짓고 있다고 들었는데 잘 됩니까?”
김혁은 김좌진의 손을 맞잡고 안부부터 묻는다.
“염려해 주신 덕분으로 잘 지냅니다. 그런데 요즘 중국 정부의 관리가 한국인들로 구성된 단체 가운데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정보만 있으면 바로 가서 무기를 내놓으라고 요구한다더군요. 중국 땅에서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무장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오석(烏石) 선생님과 상의를 하려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오석은 김혁의 호(號)였다. 김혁이 근심스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음, 김 장군에게도 찾아갔던 모양이로군요. 지금 우리도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그래, 김 장군은 무슨 묘안이라도 있소?”
“제가 오석 선생님께 그 문제를 여쭈어 보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달라고 한다고 우리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총을 함부로 내줄 수도 없고 안주자니 그들과 갈등이 생겨 다른 문제가 될 것 같고 해서 생각다 못하여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뭐,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소?”
“선생님, 참으로 답답합니다. 우리가 이대로 중국 정부에 무기를 내준다면 무장투쟁으로 일본의 침략자들을 타도하겠다는 우리의 독립운동 노선은 이대로 끝나게 됩니다. 우리는 조국을 잃은 백성이라 그렇다지만 중국은 천하의 대국으로서 일본군의 침략을 받아 우리와 같은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우리를 무장해제시키겠다는 것은 중국의 공산당원들이 일본군과 내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강력한 힘만 있다면 중국 정부도 이렇게 마구 대하지는 않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어찌 하겠소? 그 사람들 비위를 건드렸다가는 그나마 발 붙일 곳도 없어질 판국이니...”
서로 정다운 말씨가 오고 갔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만주에 흩어져 있는 우리 독립군들이 한데 뭉쳐서 하나의 커다란 세력을 형성한다면 중국 정부에서도 그리 소흘히 다루지 못할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도 잘 아시다시피 강한 자만이 살아 남는 각박한 현실에서 우리 민족이 살아 남는 방법은 우리 스스로 강력한 힘을 기르는 수 밖에는 없는 듯 싶습니다.”
“그러니까 김 장군의 견해는 여러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여 준정부적(準政府的) 형태의 기관을 설립하자는 것이로군요? 그러나 그 생각을 현실로 옮기자면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오.”
“하루 아침에 만리장성을 쌓을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요. 우선 가까운 이웃부터 합치고 그 통합체가 또 가까운 이웃을 합치는 접선 방법을 쓰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들 애국지사 두 명의 의견이 교환되었다. 우선 총기(銃器)와 탄약(彈藥)은 중국군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숨기고 피차간에 다른 단체와 합치기 위한 보다 활발하고 적극적인 접촉을 벌여 독립운동 단체들이 서로 통합하는 길을 모색하기로 두 사람간에 협의가 진행되었다.
지금 중국 본토에서도 아직까지 만주의 군권이 장학량(張學良)에게 장악되고 있어서 중앙정부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한국 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라는 것도 하나의 엄포에 불과한 것이었으므로 아직 독립군들에게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충격을 받은 독립운동 단체들로서는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에 암암리에 통합의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단체간 통합의 움직임은 1922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등의 통합으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구성되면서 시작되었다. 대한통군부는 기존의 조직에서 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의군부(義軍府)·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한교회(韓僑會)·광한단(光韓團)·보합단(普合團) 등이 가세하여 규모가 커지자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확대·발전하였다.
그러나 대한통의부 내에서 채상덕(蔡相悳)·이웅해(李雄海)·전덕원(全德元) 등 복벽주의(復辟主義) 계열과 김동삼(金東三)·오동진(吳東振)·현정경(玄正卿) 등 공화주의(共和主義) 계열이 서로 의견 대립을 보여 결국 복벽주의 계열이 대한통의부를 탈퇴하고 따로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였다. 통의부와 의군부 간의 대립과 갈등이 점점 심해지자 백광운(白狂雲)·최석순(崔碩淳)·김창빈(金昌彬) 등은 통의부를 탈퇴하여 상해의 임시정부와 손잡고 참의부(參議府)를 창설하였다.
1924년 7월에는 대한통의부를 중심으로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가 주최되어 통의부를 비롯, 대한의용군사의회(大韓義勇軍事議會)·광정단(匡正團)·의우단(義友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한인노동회(韓人勞動會)·변론자치회(辯論自治會)·고본계(固本契) 등의 조직을 합쳐 정의부(正義府)라는 거대 기관을 창설하였다. 정의부의 주요 간부로는 중앙집행위원장에 이탁(李鐸), 민사부위원장에 현정경, 선전부위원장에 김이대(李鍾乾), 군사부위원장에 이청천(李靑天), 법무부위원장에 이진산(李震山), 학무부위원장에 김용대(金容大), 교통부위원장에 윤덕보(尹德甫), 생계부위원장에 오동진, 외교부위원장에 김동삼 등이 선임되었다.
한편 북만주 일대에서는 1921년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으로 해체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1922년 8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혈성단(血誠團)·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신민단(新民團)·구국단(救國團)·광복단(光復團)·대진단(大震團)·의민단(義民團)·독립군비단(獨立軍備團) 등 9개의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재결성하였다.
이 군단에는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을 비롯한 만주에서의 대일항전(對日抗戰)에 여러 차례 참전하였던 역전의 용사들이 포진되어 있었고, 1천 2백여명의 병사들을 거느렸으며, 김좌진(金佐鎭)·김규식(金奎植)·최진동(崔振東)·현천묵(玄天默)·최호(崔浩)·박두희(朴斗熙)·이장녕(李章寧) 등 만주의 한국인들에게 명망이 높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간부진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1924년 3월 동빈현(東賓縣)에서 나중소(羅仲昭)·조성환(曺成煥)·정신(鄭信)·계화(桂和) 등이 출범시킨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와의 재통합을 추진하여 1925년 1월 길림성(吉林省) 목릉현(穆陵縣)에서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는 김혁(金爀)·김좌진(金佐鎭)·유현(柳賢)·이장녕(李章寧)·박세황(朴世晃)·이근(李根)·김규현(金奎鉉)·유광진(兪廣進) 등 독립운동 단체와 각 지역의 유지들이 참여, 준정부적(準政府的) 기관을 새로 건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 계열 적기단(赤旗團)은 이 회의에서 제외되었다.
그리하여 3월 10일에는 마침내 영안성(寧安城) 내에서 신민부(新民府)의 창립과 진로를 천명하는 선포문과 기관 명칭·제도·사업 방침·군사·재정·교육·헌장 등 12개항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마침내 만주에서 독립운동의 삼부시대(三府時代)가 열린 것이었다.
신민부 창설에 참여한 지도자들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주역으로서 재만한인(在滿韓人)들에게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던 김좌진을 총재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김좌진은 “나는 전장(戰場)에 나가 적군과 교전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군인일 뿐이오. 나보다 더 훌륭한 지도자가 얼마든지 있소. 그런 분들을 총재로 추대하는 것이 옳소. 나에게는 군사부 정도나 맡겨두시오. 그 이상은 감당할 능력이 없소”라며 극구 사양했다. 그리고 김혁을 신민부 총재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추천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의 재결성이나 신민부의 창립에 있어서 김좌진은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자신이 최고 지위에 오르는 것을 사양하여 독립운동 진영 내부에서 권력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려고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1924년 봄에는 상해의 임시정부에서 김붕준(金朋濬)을 특사로 파견하여 김좌진에게 군무부(軍務部)의 정보국장으로 임명할 것이니 업무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김좌진은 “전선(戰線)만 오가던 나 같은 무인(武人)이 반반한 양복을 입고 앉아서 정사(政事)를 맡아 볼 만한 능력이 있겠소?”라며 임시정부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김좌진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노선이 외교활동(外交活動)에만 한정되어 있고, 만주의 독립군에게 군자금이나 물자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를 질타하고 있었다.
★ 신민부의 군사부위원장에 선임되다
김좌진(金佐鎭) 장군은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으로 붕괴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전투력을 재건하여 조선 땅을 점령하고 있는 일제(日帝)의 군사력을 능가하는 강대한 독립군을 육성하는 길만이 자력으로 민족해방(民族解放)·조국광복(祖國光復)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가 구상하고 있는 독립군양병사업(獨立軍養兵事業)이 성공적으로 전개되기 위해서는 만주 각 지역에 할거하고 있는 반일독립운동(反日獨立運動) 세력이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만주의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상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불신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들의 화합을 도모하여 민족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금씩 양보하여 모든 독립운동 단체가 임시정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하나의 공동체로 일원화하자는 필요성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교포사회에 내재되어 있었던 문제점들을 조율하고 각 단체들 사이에 암암리에 싹트고 있었던 갈등의 요소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펼친 끝에 드디어 1925년 3월 15일에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할 수 있었다. 22일에는 신민부 창설 결의안과 선포문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우리는 민족의 요구에 응하고 아래 단체의 의사에 따라 각 단체의 명의를 취소하고 일치된 정신으로 신민부의 조직이 성립되었음을 선포한다. 희(噫)라! 과거를 생각하건대 사회상태가 분열되고 민족의 심리가 분산하여 우리의 사업은 날로 어려워 위미(委靡)하는 일방이 되었다. 이를 각오한 우리는 만반의 동작에 합일하여 국가의 완전한 건설과 민중의 철저한 해방을 도모하기 위하여 강제폭력의 침략주의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다시 일보를 전진하여 우리와 동일한 지위에 있는 세계민중과 협동의 동작을 취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 새로운 사명을 받은 신민부의 운명은 오직 우리 민중의 희생적 정신에 놓였다. 내(來)하라. 단결하고 일어나 분투하라.’
신민부는 또한 국가의 형태를 갖춘 준헌법적 조항 12개항을 채택하고 결의하였다.
‘첫째, 기관의 명칭은 신민부(新民府)라 한다.
둘째, 제도는 위원제로 하며 중앙, 지방, 구(區)로 정한다.
셋째, 민사(民事)는 필요에 의하여 기성의 자치기관이 서로 설치할 것. 외교·대외관계는 가능한 신중·원만히 해결할 것.
넷째, 군사(軍事)는 의무제를 실시할 것. 둔전제 혹은 기타의 방법에 의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할 것. 군관학교를 설치하여 간부를 양성할 것. 군사 서적을 편찬할 것.
다섯째, 재정(財政)은 의무금 및 모연금으로 충용할 것. 의무금은 토지에 대하여 수전은 소쌍은 2원, 대쌍은 3원으로 하고 밭은 소쌍은 1원, 대쌍은 2원 5각으로 하며 상가에 대해서는 소유재산의 20분의 1을 징수하되 단 대양(大洋)으로 함. 기관하에 조직된 지방은 일체의 모금은 폐지할 것.
여섯째, 토지의 매매와 조세는 기관의 지도하에서 행하기로 할 것. 작인(作人)은 노동력작을 원할 것. 공농제를 실시하며 공동농지를 경영할 것. 식산조합을 둘 것. 부업을 장려할 것. 필요한 지방에는 소비조합을 설치할 것.
일곱째, 교육에 있어서 소학교 졸업 연한은 6년, 중학교 졸업 연한은 4년으로 할 것. 단 100호 이상 촌에는 1개의 소학교를 둘 것. 필요에 의하여 기관에서 중학교 또는 사범학교를 설립할 것.
여덟째, 헌장(憲章)은 기초위원회에 위임하여 창립총회로부터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할 것.
아홉째, 금년도의 경상비(經常費:음력 3월 10일까지)는 현대양(現大洋) 3천원으로 결정함.
열째, 연호(年號)는 민국(民國)연호를 사용한다.
열첫째, 본 기관의 총회는 매년 3월 15일까지로 정한다.
열둘째, 인선(人選)은 중앙집행위원회, 참의원, 감사원이 맡는다.’
이렇게 삼권분립(三權分立)을 기초로 하여 구성된 신민부의 중앙조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이로써 만주 지방에서 50여개로 난립되었던 독립운동 단체들은 길림성(吉林省)·봉천성(奉天省)에 걸쳐 하얼빈 이남과 흥경(興京)·흥화(興和)를 포괄하고 넓은 지역을 관할했던 정의부(正義府), 봉천성에서 집안(吉安) 관전현(寬甸縣)을 중심으로 압록강 대안(對岸) 일대에 세력을 형성한 참의부(參議府), 영안(永安縣)을 중심으로 한 북만주의 중동선 일대에서 북간도 일중을 걸쳐서 세력을 형성한 신민부(新民府) 등으로 정립하게 되었다.
이들 3부(三府)는 만주 땅에서 생활하고 있는 조선 민간인들의 자치권을 행사하는 민정기관으로서 각기 소속 독립군을 통솔하고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을 전개하는 군정기관의 결합체로서 최종 목표도 독립군의 전투력 규모를 확대하여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으로 일제(日帝)의 군사력을 축출하고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비록 삼부 가운데 신민부의 조직력과 세력이 가장 약했지만 거의 완전한 재만한인(在滿韓人)의 자치정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고 가장 큰 목표가 국내진공작전인 만큼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주역으로서 교포사회에서 가장 명성이 높았던 김좌진 장군이 군사부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였다.
신민부는 그 성격에 있어 망명정부(亡命政府)의 역할을 담당했을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재만한인의 통치기능(統治技能)을 수행하였다. 신민부는 창설과 함께 교포들에 대하여 그들의 능력에 알맞은 정도의 세금 징수를 본격화하였고 효과적인 징병 제도를 마련하여 청년들의 항일무장투쟁 참여를 의무화시키고 곳곳에 학교를 설립하여 자라나는 교포 2세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신민부의 중심지가 북만주의 영안현인 것은 북만주의 교통요지일뿐 아니라 황무지가 많아 마음대로 개간작업을 할 수 있고 영안·해림·동경성에 많은 교포들이 모여 살고 있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였다.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6.신민부의 출현 ⑴
★ 활기띠는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1920년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은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신민단(新民團)·구국단(救國團) 등 여러 독립군 부대가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영도 아래 일본군 제19사단 동지대(東支隊)를 격파한 쾌거의 승전(勝戰)이었으나, 이후 독립군은 소련 공산당(蘇聯共産黨)의 속임수에 걸려 1921년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으로 무장해제를 당하고 많은 병사가 희생됨으로써 그동안 양성했던 무력(武力)이 와해되고 말았다. 게다가 일본군이 독립군과의 교전에서 패배한 것을 보복하려고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켜 많은 재만한인(在滿韓人)이 학살당하고, 만주를 향해 경찰력(警察力)을 확대한 일제(日帝)는 만주의 조선인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하니 만주의 공기는 겉으로 조용했으나, 속으로는 한(恨)이 되어 어느 누구도 조선인이라면 절치부심하고 기회를 노리며 숨어 지내고 있었다.
이러한 반일 민족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중국 본토에서는 국민당(國民黨) 정권이 집권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절실히 요구되는 총기(銃器)·탄약(彈藥) 구입이 용이해졌다. 그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만주의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보유하고 있던 군수품과 병력을 합친다면 몇개의 사단병력을 무장시켜도 남을만치 많은 숫자였다.
이러한 좋은 조건은 공교롭게도 1924년 1월에 중국 본토에서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이뤄지면서 독립군 각 부대에게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국민당 정부는 중국 공산당(中國共産黨) 측과 연합정권을 수립하기로 협의하면서 공산당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만주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한국인에 대해 무장해제를 감행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심각한 타격이었다.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은 중대한 상태에 직면하였고 반대로 이러한 위기를 맞으면서 각 단체의 통합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소련 공산당의 마수(魔手)를 피해 영고탑(寧古塔)에 자리를 잡고 행상대(行商隊)를 조직하여 정보를 수집하면서 꾸준히 동지를 규합하여 때를 기다리던 김좌진 장군은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으로 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 시도의 압력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여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부딪치게 되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고? 또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의 독립운동을 방해하려고 획책하는구나.”
김좌진 장군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흥업단(興業團)의 최고 지도자였던 김혁(金爀)을 찾아갔다.
김혁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주역인 김좌진이 자신의 거처를 찾아오자 버선발로 나가 맞이했다.
“김 장군이 웬 일이시오? 이렇게 누추한 곳을 다 찾으시다니...”
“송구합니다. 벌써 찾아 뵙고자 하였으나 좀 늦어서 뵐 면목이 없습니다.”
“여하간 잘 오셨소? 요즘 농사를 짓고 있다고 들었는데 잘 됩니까?”
김혁은 김좌진의 손을 맞잡고 안부부터 묻는다.
“염려해 주신 덕분으로 잘 지냅니다. 그런데 요즘 중국 정부의 관리가 한국인들로 구성된 단체 가운데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정보만 있으면 바로 가서 무기를 내놓으라고 요구한다더군요. 중국 땅에서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무장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오석(烏石) 선생님과 상의를 하려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오석은 김혁의 호(號)였다. 김혁이 근심스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음, 김 장군에게도 찾아갔던 모양이로군요. 지금 우리도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그래, 김 장군은 무슨 묘안이라도 있소?”
“제가 오석 선생님께 그 문제를 여쭈어 보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달라고 한다고 우리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총을 함부로 내줄 수도 없고 안주자니 그들과 갈등이 생겨 다른 문제가 될 것 같고 해서 생각다 못하여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뭐,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소?”
“선생님, 참으로 답답합니다. 우리가 이대로 중국 정부에 무기를 내준다면 무장투쟁으로 일본의 침략자들을 타도하겠다는 우리의 독립운동 노선은 이대로 끝나게 됩니다. 우리는 조국을 잃은 백성이라 그렇다지만 중국은 천하의 대국으로서 일본군의 침략을 받아 우리와 같은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우리를 무장해제시키겠다는 것은 중국의 공산당원들이 일본군과 내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강력한 힘만 있다면 중국 정부도 이렇게 마구 대하지는 않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어찌 하겠소? 그 사람들 비위를 건드렸다가는 그나마 발 붙일 곳도 없어질 판국이니...”
서로 정다운 말씨가 오고 갔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만주에 흩어져 있는 우리 독립군들이 한데 뭉쳐서 하나의 커다란 세력을 형성한다면 중국 정부에서도 그리 소흘히 다루지 못할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도 잘 아시다시피 강한 자만이 살아 남는 각박한 현실에서 우리 민족이 살아 남는 방법은 우리 스스로 강력한 힘을 기르는 수 밖에는 없는 듯 싶습니다.”
“그러니까 김 장군의 견해는 여러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여 준정부적(準政府的) 형태의 기관을 설립하자는 것이로군요? 그러나 그 생각을 현실로 옮기자면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오.”
“하루 아침에 만리장성을 쌓을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요. 우선 가까운 이웃부터 합치고 그 통합체가 또 가까운 이웃을 합치는 접선 방법을 쓰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들 애국지사 두 명의 의견이 교환되었다. 우선 총기(銃器)와 탄약(彈藥)은 중국군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숨기고 피차간에 다른 단체와 합치기 위한 보다 활발하고 적극적인 접촉을 벌여 독립운동 단체들이 서로 통합하는 길을 모색하기로 두 사람간에 협의가 진행되었다.
지금 중국 본토에서도 아직까지 만주의 군권이 장학량(張學良)에게 장악되고 있어서 중앙정부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한국 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라는 것도 하나의 엄포에 불과한 것이었으므로 아직 독립군들에게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충격을 받은 독립운동 단체들로서는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에 암암리에 통합의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단체간 통합의 움직임은 1922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등의 통합으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구성되면서 시작되었다. 대한통군부는 기존의 조직에서 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의군부(義軍府)·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한교회(韓僑會)·광한단(光韓團)·보합단(普合團) 등이 가세하여 규모가 커지자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확대·발전하였다.
그러나 대한통의부 내에서 채상덕(蔡相悳)·이웅해(李雄海)·전덕원(全德元) 등 복벽주의(復辟主義) 계열과 김동삼(金東三)·오동진(吳東振)·현정경(玄正卿) 등 공화주의(共和主義) 계열이 서로 의견 대립을 보여 결국 복벽주의 계열이 대한통의부를 탈퇴하고 따로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였다. 통의부와 의군부 간의 대립과 갈등이 점점 심해지자 백광운(白狂雲)·최석순(崔碩淳)·김창빈(金昌彬) 등은 통의부를 탈퇴하여 상해의 임시정부와 손잡고 참의부(參議府)를 창설하였다.
1924년 7월에는 대한통의부를 중심으로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가 주최되어 통의부를 비롯, 대한의용군사의회(大韓義勇軍事議會)·광정단(匡正團)·의우단(義友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한인노동회(韓人勞動會)·변론자치회(辯論自治會)·고본계(固本契) 등의 조직을 합쳐 정의부(正義府)라는 거대 기관을 창설하였다. 정의부의 주요 간부로는 중앙집행위원장에 이탁(李鐸), 민사부위원장에 현정경, 선전부위원장에 김이대(李鍾乾), 군사부위원장에 이청천(李靑天), 법무부위원장에 이진산(李震山), 학무부위원장에 김용대(金容大), 교통부위원장에 윤덕보(尹德甫), 생계부위원장에 오동진, 외교부위원장에 김동삼 등이 선임되었다.
한편 북만주 일대에서는 1921년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으로 해체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1922년 8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혈성단(血誠團)·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신민단(新民團)·구국단(救國團)·광복단(光復團)·대진단(大震團)·의민단(義民團)·독립군비단(獨立軍備團) 등 9개의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재결성하였다.
이 군단에는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을 비롯한 만주에서의 대일항전(對日抗戰)에 여러 차례 참전하였던 역전의 용사들이 포진되어 있었고, 1천 2백여명의 병사들을 거느렸으며, 김좌진(金佐鎭)·김규식(金奎植)·최진동(崔振東)·현천묵(玄天默)·최호(崔浩)·박두희(朴斗熙)·이장녕(李章寧) 등 만주의 한국인들에게 명망이 높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간부진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1924년 3월 동빈현(東賓縣)에서 나중소(羅仲昭)·조성환(曺成煥)·정신(鄭信)·계화(桂和) 등이 출범시킨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와의 재통합을 추진하여 1925년 1월 길림성(吉林省) 목릉현(穆陵縣)에서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는 김혁(金爀)·김좌진(金佐鎭)·유현(柳賢)·이장녕(李章寧)·박세황(朴世晃)·이근(李根)·김규현(金奎鉉)·유광진(兪廣進) 등 독립운동 단체와 각 지역의 유지들이 참여, 준정부적(準政府的) 기관을 새로 건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 계열 적기단(赤旗團)은 이 회의에서 제외되었다.
그리하여 3월 10일에는 마침내 영안성(寧安城) 내에서 신민부(新民府)의 창립과 진로를 천명하는 선포문과 기관 명칭·제도·사업 방침·군사·재정·교육·헌장 등 12개항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마침내 만주에서 독립운동의 삼부시대(三府時代)가 열린 것이었다.
신민부 창설에 참여한 지도자들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주역으로서 재만한인(在滿韓人)들에게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던 김좌진을 총재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김좌진은 “나는 전장(戰場)에 나가 적군과 교전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군인일 뿐이오. 나보다 더 훌륭한 지도자가 얼마든지 있소. 그런 분들을 총재로 추대하는 것이 옳소. 나에게는 군사부 정도나 맡겨두시오. 그 이상은 감당할 능력이 없소”라며 극구 사양했다. 그리고 김혁을 신민부 총재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추천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의 재결성이나 신민부의 창립에 있어서 김좌진은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자신이 최고 지위에 오르는 것을 사양하여 독립운동 진영 내부에서 권력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려고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1924년 봄에는 상해의 임시정부에서 김붕준(金朋濬)을 특사로 파견하여 김좌진에게 군무부(軍務部)의 정보국장으로 임명할 것이니 업무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김좌진은 “전선(戰線)만 오가던 나 같은 무인(武人)이 반반한 양복을 입고 앉아서 정사(政事)를 맡아 볼 만한 능력이 있겠소?”라며 임시정부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김좌진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노선이 외교활동(外交活動)에만 한정되어 있고, 만주의 독립군에게 군자금이나 물자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를 질타하고 있었다.
★ 신민부의 군사부위원장에 선임되다
김좌진(金佐鎭) 장군은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으로 붕괴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전투력을 재건하여 조선 땅을 점령하고 있는 일제(日帝)의 군사력을 능가하는 강대한 독립군을 육성하는 길만이 자력으로 민족해방(民族解放)·조국광복(祖國光復)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가 구상하고 있는 독립군양병사업(獨立軍養兵事業)이 성공적으로 전개되기 위해서는 만주 각 지역에 할거하고 있는 반일독립운동(反日獨立運動) 세력이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만주의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상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불신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들의 화합을 도모하여 민족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금씩 양보하여 모든 독립운동 단체가 임시정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하나의 공동체로 일원화하자는 필요성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교포사회에 내재되어 있었던 문제점들을 조율하고 각 단체들 사이에 암암리에 싹트고 있었던 갈등의 요소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펼친 끝에 드디어 1925년 3월 15일에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할 수 있었다. 22일에는 신민부 창설 결의안과 선포문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우리는 민족의 요구에 응하고 아래 단체의 의사에 따라 각 단체의 명의를 취소하고 일치된 정신으로 신민부의 조직이 성립되었음을 선포한다. 희(噫)라! 과거를 생각하건대 사회상태가 분열되고 민족의 심리가 분산하여 우리의 사업은 날로 어려워 위미(委靡)하는 일방이 되었다. 이를 각오한 우리는 만반의 동작에 합일하여 국가의 완전한 건설과 민중의 철저한 해방을 도모하기 위하여 강제폭력의 침략주의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다시 일보를 전진하여 우리와 동일한 지위에 있는 세계민중과 협동의 동작을 취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 새로운 사명을 받은 신민부의 운명은 오직 우리 민중의 희생적 정신에 놓였다. 내(來)하라. 단결하고 일어나 분투하라.’
신민부는 또한 국가의 형태를 갖춘 준헌법적 조항 12개항을 채택하고 결의하였다.
‘첫째, 기관의 명칭은 신민부(新民府)라 한다.
둘째, 제도는 위원제로 하며 중앙, 지방, 구(區)로 정한다.
셋째, 민사(民事)는 필요에 의하여 기성의 자치기관이 서로 설치할 것. 외교·대외관계는 가능한 신중·원만히 해결할 것.
넷째, 군사(軍事)는 의무제를 실시할 것. 둔전제 혹은 기타의 방법에 의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할 것. 군관학교를 설치하여 간부를 양성할 것. 군사 서적을 편찬할 것.
다섯째, 재정(財政)은 의무금 및 모연금으로 충용할 것. 의무금은 토지에 대하여 수전은 소쌍은 2원, 대쌍은 3원으로 하고 밭은 소쌍은 1원, 대쌍은 2원 5각으로 하며 상가에 대해서는 소유재산의 20분의 1을 징수하되 단 대양(大洋)으로 함. 기관하에 조직된 지방은 일체의 모금은 폐지할 것.
여섯째, 토지의 매매와 조세는 기관의 지도하에서 행하기로 할 것. 작인(作人)은 노동력작을 원할 것. 공농제를 실시하며 공동농지를 경영할 것. 식산조합을 둘 것. 부업을 장려할 것. 필요한 지방에는 소비조합을 설치할 것.
일곱째, 교육에 있어서 소학교 졸업 연한은 6년, 중학교 졸업 연한은 4년으로 할 것. 단 100호 이상 촌에는 1개의 소학교를 둘 것. 필요에 의하여 기관에서 중학교 또는 사범학교를 설립할 것.
여덟째, 헌장(憲章)은 기초위원회에 위임하여 창립총회로부터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할 것.
아홉째, 금년도의 경상비(經常費:음력 3월 10일까지)는 현대양(現大洋) 3천원으로 결정함.
열째, 연호(年號)는 민국(民國)연호를 사용한다.
열첫째, 본 기관의 총회는 매년 3월 15일까지로 정한다.
열둘째, 인선(人選)은 중앙집행위원회, 참의원, 감사원이 맡는다.’
이렇게 삼권분립(三權分立)을 기초로 하여 구성된 신민부의 중앙조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중앙집행위원장 김혁(金爀)
중앙집행위원 조성환(曺成煥)·김좌진(金佐鎭)·박성호(朴性鎬)·최호(崔灝)·최정호(崔正浩)·허빈(許斌)·유현(劉賢)
보안총지휘 박두희(朴斗熙)·정신(鄭信)·이영백(李英伯)
참의원장 이범윤(李範允)
참의원 김이윤(金裏潤)·양재헌(梁在憲)·황공삼(黃公三)·이장녕(李章寧)·안용수(安龍洙)·김규진(金奎鎭)·차동산(車東山)·홍종림(洪鐘林)·김송암(金松岩)·최문일(崔文一)·윤당(尹黨)·안호연(安浩然)·허영(許榮)·남극(南極)·이백향(李白鄕)
검사원장 현천묵(玄天默)
검사원 노호산(盧湖山)·강인수(姜寅秀)·강규상(姜奎尙)·황국민(黃國敏)·손일민(孫一民)·김기남(金基南)·지장염(池章念)·양윤삼(楊允三)·나중소(羅仲昭)·강명경(姜明鏡)
민사부위원장 최호
군사부위원장 김좌진
참모부위원장 나중소
외교부위원장 조성환
외교부 길림성청(吉林省廳) 전임외교관 윤복영(尹復榮)
법무부위원장 박성태(朴性泰)
경리부위원장 유정근(兪正根)
교육부위원장 허빈
선전부위원장 허성묵(許聖默)
연락부위원장 정신
실업부위원장 이일세(李一世)
심판원장 김돈(金墩)
이로써 만주 지방에서 50여개로 난립되었던 독립운동 단체들은 길림성(吉林省)·봉천성(奉天省)에 걸쳐 하얼빈 이남과 흥경(興京)·흥화(興和)를 포괄하고 넓은 지역을 관할했던 정의부(正義府), 봉천성에서 집안(吉安) 관전현(寬甸縣)을 중심으로 압록강 대안(對岸) 일대에 세력을 형성한 참의부(參議府), 영안(永安縣)을 중심으로 한 북만주의 중동선 일대에서 북간도 일중을 걸쳐서 세력을 형성한 신민부(新民府) 등으로 정립하게 되었다.
이들 3부(三府)는 만주 땅에서 생활하고 있는 조선 민간인들의 자치권을 행사하는 민정기관으로서 각기 소속 독립군을 통솔하고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을 전개하는 군정기관의 결합체로서 최종 목표도 독립군의 전투력 규모를 확대하여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으로 일제(日帝)의 군사력을 축출하고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비록 삼부 가운데 신민부의 조직력과 세력이 가장 약했지만 거의 완전한 재만한인(在滿韓人)의 자치정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고 가장 큰 목표가 국내진공작전인 만큼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주역으로서 교포사회에서 가장 명성이 높았던 김좌진 장군이 군사부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였다.
신민부는 그 성격에 있어 망명정부(亡命政府)의 역할을 담당했을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재만한인의 통치기능(統治技能)을 수행하였다. 신민부는 창설과 함께 교포들에 대하여 그들의 능력에 알맞은 정도의 세금 징수를 본격화하였고 효과적인 징병 제도를 마련하여 청년들의 항일무장투쟁 참여를 의무화시키고 곳곳에 학교를 설립하여 자라나는 교포 2세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신민부의 중심지가 북만주의 영안현인 것은 북만주의 교통요지일뿐 아니라 황무지가 많아 마음대로 개간작업을 할 수 있고 영안·해림·동경성에 많은 교포들이 모여 살고 있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