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7아나키스트들과 연대하다 ⑴

대모달2011.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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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정부주의운동(無政府主義運動)의 대두(擡頭)

 

중국의 군사 지도자 장개석(蔣介石)은 1926년에 국민당(國民黨)을 창당하고 북벌을 시작하여 1927년 남경(南京)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 정권을 수립했다. 국민당 정권은 중국 통일을 목표로 북진정책을 펼쳤으나 만약 만주의 군벌 장작림(張作林)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손을 잡고 거세게 항전한다면 북진정책에 상당한 차질이 생기고 정부의 존립에도 위험성이 따른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더욱이 일본군은 동양 정복을 위하여 갖은 악랄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약점이 보이면 만주는 물론 중원 본토까지도 강점당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장작림이 1928년 6월 일제의 음모로 폭살된 이후 그의 자리를 이어받은 장학량(張學良)은 도리어 친일적인 태도를 보여 장개석의 의구심을 사게 했다.

 

만약 장학량이 일제의 농간에 넘어간다면 중국으로서도 중대한 사태가 벌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동안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을 냉담하게 대해 왔던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은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그제서야 무력(武力)으로 일제를 구축(驅逐)하겠다고 봉기한 독립군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국민당 군대의 부사령관이었던 풍옥상(馮玉祥)은 동삼성(東三省) 대적공작과장 공패성(貢沛誠)을 밀사로 보내 김좌진(金佐鎭) 장군과 접촉하게 하였다.

 

김좌진은 공패성과 회담을 갖고 다각도로 당시의 만주 정세와 중국 대륙의 전반적인 문제를 검토·분석하고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이 국민당 정권과 제휴할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했다.

 

“여라 가지 의견이 있겠으나 어떻게 해서라도 장학량의 군대를 우리 국민당의 통일과업 달성에 적극 가담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배후에서 압박하여 일본군과 손잡지 못하게 강요하는 것밖에는 없을 듯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김 장군의 협조가 가장 아쉽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입장입니다.”

 

공패성은 미리 가지고 온 복안을 김좌진에게 제시하고 협조를 간청했다. 원래 의리를 중요시하는 김좌진으로서는 막강한 국민당 정권이 그들의 눈높이로 본다면 일개 필부(匹夫)로 보일뿐인 자신을 특별히 지적하여 협조를 간청하는 태도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협조를 약속하고 공패성을 돌려보낸 김좌진 장군은 고려혁명군 결사대(高麗革命軍決死隊)를 이끌고 활동하던 이범석(李範奭)에게 연통을 넣었다. 이범석이 김좌진의 집무실에 들어오자 김좌진은 이범석의 손을 잡고 “이 장군에게 꼭 알맞는 일이 있어서 만나자고 했는데 한번 더 수고해 주시겠소?”라고 물었다. 이범석은 흔쾌히 “폭탄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들라고 하셔도 김 장군의 말씀이라면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대답하였다.

 

김좌진은 국민당 정권의 협조 요구사항을 이범석에게 전하면서 “이 장군도 알다시피 우리 자체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장학량에게 압력을 가할 수 없소. 내가 궁여지책으로 한 가지 방책을 생각하고 있는데 적임자는 이 장군밖에 없을 것 같소. 이 일이 잘 되면 앞으로 우리의 항일투쟁에 국민당 정권이 적극 지원하겠다는 확약을 받아 놓았소”하고 말했다.

 

김좌진은 마적단(馬賊團)을 매수하여 장학량에게 타격을 주고 장학량으로 말미암아 기반을 상실하고 있는 만주의 군소 군벌을 교묘히 포섭한다면 상당한 세력을 구축(構築)할 수 있을 듯했다. 우선 이들 군세를 한데 묶어서 중동철도 연변으로부터 무력활동을 개시하여 서서히 그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장학량을 고립시킬 수 있다면 국민당 정권이 요구하는대로 일이 잘 진행될 것으로 생각했다.

 

“참으로 묘안(妙案)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의 만주 침략의 발판인 중동철도를 봉쇄함으로써 장학량의 배후를 찌를 수 있는 소지가 마련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 아는 마적단 두목에게 자세히 소개장을 써 드릴 테니 그를 찾아가서 계획대로 되도록 해 주시오.”

 

이와 같이 서로 의사를 규합한 김좌진과 이범석은 굳은 악수를 나누고 성공을 빌었다. 김좌진의 소개로 극비리에 위당구(葦塘溝)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는 마적단을 찾아간 이범석은 그들의 군사고문을 맡으면서 마적단 규합의 임무를 띠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먼저 일본군에게 탐지되었다. 관동군(關東軍) 참모부는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장학량에게 마적단 토벌에 필요한 상당량의 총기(銃器)와 탄약(彈藥)을 공급하기로 하고 총기와 탄약을 가득 실은 군용열차를 출발시켰다. 그런데 철도를 따라 북상하던 군용열차가 마적단의 급습을 받아 파괴되고 일본군의 호위대와 장학량 휘하의 병사 7천여명이 전몰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학량은 1개 사단 병력을 동원하여 위당구 일대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군용열차를 습격·파괴한 마적단이 독립군 지도자 이범석의 전략에 따라 움직였다는 상세한 정보를 파악하고 이범석의 목숨에 막대한 현상금을 걸어 수색·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적단을 이용하여 장학량에게 타격을 준 이범석은 상황을 예측하고 사선을 넘어 몽골 지역으로 도주하여 한동안 만주 땅에 나타나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만주의 군벌 장작림을 매수하고 만주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중국 침략을 준비하다가 장작림을 당고에서 폭살하고 그의 아들 장학량에게 전권을 넘기게 한 것은 마치 대한제국 병탄 과정에서 고종을 폐위하고 순종을 즉위시킨 뒤 1910년 8월 경술병합늑약(庚戌倂合勒約)을 강행했던 수법과 같았다. 일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장학량을 위협하고 매수하여 공조를 이룬 다음 한국 독립군 토벌을 시도하였다. 장학량은 소련 공산당을 등에 업고 장개석 국민당 세력의 북상을 막는데 힘쓰고 있을 무렵,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 의용군이 장개석의 국민당과 손을 잡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들도 사상적 배경에서 두 갈래로 분열되었으니 하나는 사회주의 이념의 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주의 진영이었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조선의 독립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권력 장악의 욕심이 팽배하여 내홍(內紅)의 요인이 항상 잠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주의 반일독립운동 단체들이 1925년경에는 대체적으로 뚜렷한 지역적 안배 밑에서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 등이 정립(鼎立)하여 상호협조 아래 항일투쟁을 전개해왔다. 그러나 일제가 만주의 군벌 장학량을 움직여 독립군 토벌에 열을 올리자 반일독립운동 단체들은 대항할 힘이 부족해 쇠퇴일로의 위기에 처해졌고 각기 단체를 통합해 조직적인 대항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이 문제를 염려한 김좌진은 여러가지 구상 끝에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구성하기로 결정하고 이 모임의 형태(形態)에 대한 구도(構圖)를 어떠한 방법으로 할 것인가 고민했다.

 

한편 만주에서는 반일독립운동에 필요한 교민들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여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3부 통합이 절실하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 때 일제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무능력과 장학량 군벌의 친일적 경향에 기회를 잡고 만주 침략의 야욕을 뻗치고 있었으므로 정의부의 주도하에 8월에 신민부와 참의부의 대표까지 참여한 제4차 중앙위원회를 열고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을 조속히 추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하나,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 통일을 위하여 신민부·참의부와의 연합을 적극적으로 도모함.

하나, 모든 민족운동의 통일조직을 위하여 유일당 촉성을 준비할 것’

 

이와 같이 만주에서 3부의 통합운동이 추진되면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다른 단체들도 나름대로 자기들만의 이론에 근거를 두고 민족유일당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3년전부터 즉, 1924년 4월에 이회영(李會榮)·이을규(李乙奎)·정현섭(鄭賢燮)·백정기(白貞基)·유자명(柳子明) 등은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고 기관지로 정의공보(正義公報)를 간행하여 흥사단(興士團)과 임시정부의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 주장하는 외교독립론(外交獨立論)을 비판하였으며 아울러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에도 강력한 비난을 가했다. 그들은 1927년에 상해에서 노동대학(勞動大學)을 설립하고 상해 남쪽 복건성의 천주(泉州)에 민단훈련소까지 설치하여 무려 500여명의 무정부주의자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더욱이 민단훈련소의 중심 인물인 천주일대의 실제적 지배자였던 진망산(陳望産)이었으며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수뇌였던 이을규와 이정규(李丁奎)도 여기에 참여하고 있었다.

 

★ 시야(是也) 김종진(金宗鎭) 지사(志士)의 합류

 

김좌진(金佐鎭) 장군은 목단강역에 가서 자기를 찾아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북만주로 들어온 김종진(金宗鎭) 지사를 만났다. 김종진은 1901년 12월 26일생으로 충남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가 고향이었다. 8세 때에 병오의병항쟁(丙午義兵抗爭)의 주모자이며 유학계의 거두인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선생의 문하에서 한문수학을 했다.

 

1919년 3월 7일에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의 열풍으로 홍성 시장터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을 때 일본군 헌병대의 탄압으로 현장에서 체포되어 옥중에서 수개월 동안 고초를 치뤘으나 동년 6월 말에 석방되었다. 김종진은 그 길로 서울로 올라와서 중등학교 중학속성과에서 공부하면서 각 학교에 연락망을 구축하고 비밀리에 출판·회의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에 서울을 떠나 만주로 망명한 그는 임시정부의 법무총장인 이시영(李始榮)의 둘째 형 이석영(李石榮)의 가족과 함께 숙식을 하면서 정세를 살펴보다가 이듬해 운남성(雲南省)의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군사 교육을 받았다. 임시정부의 교통국(交通局) 직원이었던 백연진(白淵鎭)으로부터 종형(從兄)인 김좌진의 거취 소식을 전해들은 김종진은 1927년 하순에서야 중동선(中東線) 목단강역(牧丹江驛)에 당도하여 김좌진과 상면하게 된 것이다.

 

이미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으로 재만교포(在滿僑胞)들 사이에서 유명한 항일전(抗日戰) 영웅인 김좌진 장군을 만나게 되니 김종진 지사는 잠시 침체되어 있던 반일독립운동(反日獨立運動)이 활기를 띠는 듯한 느낌에 가슴이 벅찼다.

 

“종진이 네가 이렇게 찾아오니 반갑구나. 그 동안 고생이 많았지?”

 

김좌진은 집안 동생인 김종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김종진의 눈에서는 금새 닭똥같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고생이야 형님께서 더 많이 하셨지요. 소련 땅에서 공산당 놈들의 흉계에 걸려 독립군이 무장해제를 당하고 나서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형님께서 독립군을 존속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붓고 계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불민한 동생이 이제서야 이렇게 나타났으니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

 

김종진은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에서 졸업하고 3개월간 중국군에 복무했으며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서 공부하는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동포 학생들을 만났던 일을 이야기했다. 또 상해에 들려 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한 여러 방면의 인사들을 만나본 일이며, 남경에 들려 만주로 동행할 동지들을 규합하려 했으나 동조자를 겨우 한명밖에 얻지 못하면서 공연히 시간만 낭비하고 한구(漢口)로 향했던 일 등을 상세히 김좌진에게 전했다.

 

종형인 김좌진을 만나 그 동안 그리웠던 회포를 풀고는 여러 날을 휴식한 김종진은 다시 김좌진을 찾아가 자신이 성심껏 작성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형님, 이것을 좀 보십시오.”

 

김좌진이 그 보고서를 받아서 펼쳐보니 그것이 바로 ‘만주를 근거로 한 한국독립운동의 기본계획안’이라는 제목으로 쓰여져 있는 김종진의 의견서였다.

 

김좌진은 그의 계획서를 상세히 정독하면서 집안 동생이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지었다. 그 때 마침 조성환이나 이범석 등 신민부의 중견인물들이 빠져나감으로써 신민부의 지도적 역량을 강화하자면 이같은 열성적인 독립운동가들을 영입해야 할 입장이었다. 그로부터 몇 주일이 지나서 김종진과 다시 단둘이 앉아서 정담을 나눌 기회가 마련되었다.

 

“형님, 제가 이곳에 와 보니 신민부는 외부로는 활기로운 것 같으면서 내부는 긴장된 감이 엿보입니다. 어째서 그러한 냄새가 풍깁니까?”

 

김종진이 느낀 소감을 말하자 김좌진은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온 지 며칠도 안 되는 사람이 내부의 분위기를 빠르게 눈치챈 것에 대하여서는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민부가 군정파와 민정파로 갈려 갈등과 반목을 일삼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신민부의 고위급 책임자인 김좌진 입장에서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제수씨는 몸 성히 계시냐? 장차 어떻게 할 작정이냐? 식솔들을 여기로 데려와 살림해야 되지 않겠니?”

 

“그래야겠지요.”

 

김종진은 종형의 말에 간단히 답변하고 다시 물었다.

 

“형님, 듣자니 임시정부에서 형님을 군무총장으로 임명하고 부임하라는 전갈을 보냈다고 하던데 왜 응하지 않으셨습니까?”

 

“거기보다 여기 만주가 나를 더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

 

김좌진은 심중의 사정을 구구하게 말하지 않고 가볍게 긴 한숨만 내쉬었다.

 

“아우, 대일전선(對日戰線)인 이 만주 땅을 버리고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형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병사들을 통솔하는 장수(將帥)가 실질적인 전장(戰場)을 놓아두고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정부기관에 들어 앉아 자리나 지키고 앉아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역시 형님이십니다.”

 

김종진은 김좌진의 의중을 구체적으로 모르겠지만 임시정부의 내부형편이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인식하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종형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1919년 4월 상해(上海)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는 초창기에는 국내로부터 운영자금을 조달받아 활동했지만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재정공급이 어렵게 되어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1920년에 들어 미국에 있던 이승만(李承晩)은 미주지방에서 자금수급을 받아 쓰고 극히 적은 자금만 임시정부로 보내니 임시정부의 일부 인사들은 그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다. 더욱이 대통령으로서 현지 실정에 맞지 않는 지시를 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물의가 일고 있는데다가 1918년에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을 당분간 국제연맹(國際聯盟)의 위임통치하에 둘 것을 청원(請願)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자 임시정부는 물론 다른 독립운동 단체에서도 이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불만은 마침내 1920년 5월 임시정부 차장회의(次長會議)에서 불신임(不信任) 결의로 번지게 되었다. 이에 침체기에 빠진 임시정부를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임시정부 의정원에서는 이승만에게 임시정부 유지방안 제시를 요구하면서 상해로 돌아올 것을 정식으로 촉구했다. 이승만은 1920년 12월 8일 상해에 도착하여 특별한 정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현상 유지만 주장함으로써 임시정부는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외부에서는 독립운동 방법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었고 심지어 이동휘(李東輝) 국무총리가 몰고 온 사상(思想) 문제까지 겹치면서 임시정부는 매우 혼란스런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또한 미주교민 사회에서도 독립운동 노선은 이미 세 가지로 갈라져 있었다. 외교적 활동만을 중시하자는 이승만의 주장, 무력(武力)을 길러 독립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박용만(朴容萬)의 주장, 민족적 자각에 의한 실력배양이 우선이라는 안창호(安昌浩)의 주장이 논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특히 이승만과 박용만 사이에는 미국 땅에서 두 사람의 지지자들이 난투극과 법정 투쟁까지 벌일 정도로 감정이 대립되어 있었고 상해의 임시정부까지 파문이 확산되었다.

 

박용만은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통령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반발하여 외무총장 자리를 거부하고 만주의 독립군 진영과 합세하여 임시정부를 비판하는 세력을 형성하였다. 신채호(申采浩)·유림(柳林) 등도 이승만의 퇴출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를 떠났고, 이동휘도 역시 국무총리 취임을 한동안 거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의 내홍(內紅)이 있기까지에는 그 배후에 그럴 만한 원인도 있었다. 우선 지역적 파벌중심의 붕당형성(朋黨形成)이 크게 작용했다. 평안도 출신 인사들은 대체로 안창호의 실력양성론(實力養成論)을 지지했고 기호(畿湖)지방 출신 인사들은 이승만의 외교독립론(外交獨立論)을 내세웠고, 함경도 출신 인사들은 이동휘의 무장투쟁론(武裝鬪爭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동휘의 사상적 동향이 문제로 작용하게 되었는데, 즉 1919년 11월에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취임하였을 때 소련 정부로부터 60만 루블을 원조받아 그 가운데 40만 루블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조직기금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임시정부는 몹시 소란스러워졌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동휘는 급기야 국무총리의 직책을 스스로 사임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도 이에 대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사임의사를 표명하였다가 다시 번의하여 대통령 직책을 고수하려 하였음으로 소란을 더욱 부채질한 셈이 되어 버렸다.

 

한때 이승만의 대통령직 사퇴를 종용했던 안창호와 김규식(金奎植)이 내각에서 물러나가 임시정부는 더욱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정부에서 물러난 안창호가 여운형(呂運亨)·원세훈(元世勳)·김규식 등과 더불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전개하고 있을 무렵인 1921년 5월 20일에 이승만은 태평양 국제회의를 이유로 상해를 떠났다.

 

이러한 시기에 임시정부의 개조 혹은 해체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북경과 만주에서 적극적으로 진행되자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대동단결해야 한다며 반박하였다. 임시정부를 유지하자는 집단과 해체 혹은 개조해야 한다는 집단 사이에 상호비방이 심해지니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25년 3월 13일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대통령 탄핵안을 상정하여 통과시키고 박은식(朴殷植)을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박은식은 임시정부의 위기를 수습하기 위한 기본 방책의 하나로 1925년 3월 30일에 헌법개정안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개헌의 초점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國務領制)를 실시해 국무령을 중심으로 한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박은식은 새로운 헌법에 기초해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총재인 이상룡(李相龍)을 국무령으로 선출하고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이상룡은 임시정부내의 사상적 대립과 파쟁으로 정치적 경륜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역시 국무령을 사임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은 1926년에서야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체제정비를 이루고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을 달성하여 임시정부의 떨어진 권위를 회복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연합전선(民族聯合戰線)을 제기하였다. 이로써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으로 구체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