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중앙간부 다수를 잃은 후에도 골간세력이 여럿이 빠져나감으로써 일시 조직력에 균열이 갔던 신민부(新民府)도 김좌진을 중심으로 부서를 재정비하여 보다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군정부로 변혁을 시도하였다.
중앙집행위원장 겸 군사부위원장 김좌진(金佐鎭)
참모부위원장 황학수(黃學秀)
경리부위원장 정신(鄭信)
보안대 제1대대장 백종렬(白鍾烈)
보안대 제2대대장 오상세(吳祥世)
보안대 제3대대장 장종철(張宗哲)
보안대 제4대대장 주혁(朱赫)
보안대 제5대대장 김종진(金宗鎭)
군사부위원 김종진·조각산(趙角散)·이종수(李鐘洙)·민무(閔茂)
별동대 부관 임강(林綱)
김좌진은 오로지 무력(武力)을 길러 일제(日帝)의 군사력과 대결하는 무장투쟁만이 조국 독립의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우선 신민부의 체제를 바로잡기 위해 부내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진력했다. 그러나 군정파(軍政派)와 민정파(民政派)간의 대립은 그 뿌리가 깊게 박혀 있었다.
이럴 즈음에 신채호(申采浩)·신숙(申肅)·이회영(李會榮) 등 북경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제의에 의하여 중국 각지의 단체 대표들이 함께 모이기로 한 계획이 늦어졌고 또한 민족주의(民族主義)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共産主義)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한 달이나 더 지연되었다가 11월 7일에서야 준비회의를 개최하고 11월 22일에 본회의를 열어 선언서를 발표했다.
‘전민족의 생사를 가늠하는 우리의 독립운동은 지금 어떠한 현실에 놓여 있는가! 2천년간의 입구(入寇)와 3백년전의 원수와 180년간의 치욕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및 장래에 있어 우리의 생존조건을 아무런 꺼리낌 없이 박탈하는 저 왜적(倭敵)에 대하여 사활(死活)을 결단하는 이 독립운동이 과연 어떠한 상태에 있으며 말할 수 없는 전율 속에 떨고 있다는 사실은 위미부진(葦靡不振)한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창한 내용으로 서두를 꺼내는 선언문은 앞으로 독립운동 진영이 나갈 방향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할 내용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첫째, 조선의 유일한 대독립당(大獨立黨) 성립을 촉구할 촉성회 조직준비회 성립에 노력할 것
둘째, 조선 독립에 필요한 전민족적 일체 혁명역량을 총집중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할 것
셋째, 현재의 상황과 세계정세를 감안한 대독립당 조직계획과 이에 따른 연구를 하여 강령을 결의하고 만주지역의 유일당 촉성을 위해 대표를 상해와 북경에 각각 1명씩 파견할 것’
이러한 근거에 의하여 만주 전지역과 조선 본토에서도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2월에 들어서자 정의부(正義府)의 외교부위원장 김동삼(金東三)이 주축인 시사연구회(時事硏究會)의 반석 위에서 남만혁명동지연석회의(南滿革命同志聯席會議)를 열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28년 3월 1일에 유일당 촉성회의를 개최하고자 만주의 32개 각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에게 통지서를 보냈다. 이 통지서는 신민부에도 접수되었고 이것을 읽어본 김좌진은 “뒤늦게 이런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니 그나마 잘된 일이다”고 만족해했다. 그러나 신민부는 12월 25일 석두하자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군정파와 민정파로 분열되어 논쟁을 벌이는 양상을 보였다.
군정파는 김좌진 장군과 함께 독립군을 이끌고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을 비롯해 일제의 군사력에 맞선 직접적인 전투를 벌였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 인물들이었고, 민정파는 최호를 중심으로 하여 민중을 위한 자치활동에 주로 관여해 오던 인물들이었다. 분열의 초점은 신민부가 무장투쟁 위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교육사업이나 산업진흥을 위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론에 있었고 이들의 대립은 점점 첨예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아무런 성과도 올릴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한 김좌진은 신민부를 소원(疏遠)하고 혐오하는 조선인들을 설득하고 정세변화에 따른 실태조사와 분석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러한 점 등을 감안하여 사업지점을 해림(海林)으로 정하고 신민부의 군사부위원인 김종진을 자기의 대변인으로 삼아 지방순회를 계획했다. 김좌진은 김종진이 떠나면 연계될 지역의 실정을 자세히 말해주고 또한 그 방면에 익숙한 오지영(吳智永)·권화산(權華山)·이붕해(李鵬海) 등에게 가르쳐 주도록 했다. 그리고 김종진에게 심웅(深雄)이라는 가명(假名)을 지어주고 출발시켰다.
그러나 1928년에 이르면서 신민부의 주요 간부인 김혁(金爀)과 유정근(兪正根)이 일본 영사관 경찰대에게 체포되고 정의부(正義府) 의용군 사령관인 오동진(吳東振) 장군도 일본 헌병대의 밀정인 김종원(金宗源)의 모략에 빠져 체포되니 만주의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은 큰 동요를 일으켰고 통합의 필요성을 한층 더 절감하게 했다. 그러므로 동년(同年) 2월 3일에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의 간부들은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회합을 갖고 4월 중순에 3부연합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신민부내에서는 지난 연말에 분열되었던 군정파와 민정파간의 주도권 다툼이 점점 더 심해졌다. 최호·박관해·박세황 등이 주축으로 있는 민정파에서는 지난 1927년 11월 18일 빈주사변(賓州事變)을 명분으로 군정파를 비판하면서 김좌진과 정신을 ‘혁명전선의 교란자’로 매도하고 나름대로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것은 주중국청년동맹(住中國靑年同盟)과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이 빈주의 주민 50여명을 신민부에서 탈퇴시키려고 연설회를 열자 신민부의 별동대원들이 연설회를 저지하기 위해 총격을 가하고 10여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군정파에서 저지른 일이다 보니 그 책임이 김좌진에게 쏠리고 있었다.
신민부도 원래 무장 단체였던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과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가 주축이 되어 창설한 것이다. 그 실질적 지도자이자 청산리대첩의 주역이었던 김좌진 장군은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을 자신의 신조처럼 여기고 있었다.
이와 같이 나중소(羅仲昭)·황학수(黃學秀)·박두희(朴斗熙)·오상세(吳祥世)·백종렬(白鍾烈) 등 신흥무관학교 출신 인물들은 군정파의 핵심이 되어 김좌진(金佐鎭) 장군을 따르며 그의 방략까지 실천하려고 했다.
신민부의 분열이 갈수록 첨예화되는 것을 걱정하던 김좌진 장군 앞에 3부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 있던 정의부의 외교부위원장 김동삼(金東三)과 중앙집행위원 김원식(金元植)이 찾아왔다. 김좌진은 그들에게 독립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무장투쟁 노선임을 역설했다.
“지금 왜놈들은 영사관 경찰대를 출동시키고 총독부 산하 헌병대마저 만주에 끌어들여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느라고 혈안이 되어 날뛰는 판인데, 무장투쟁을 반대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왜놈들과 싸운단 말이오?”
이처럼 김좌진은 민족의 지상과제인 조국 독립의 가장 중요한 방법은 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뿐이므로 오로지 3부의 군사력을 통합하여 강력한 무장을 형성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공격해야 한다고 재삼 강조했다. 김좌진의 군략은 첫째, 3부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 진영의 모든 병력을 하나의 연합군단으로 편성해 만주에 세력을 뻗친 일본의 군경을 소탕하고 둘째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를 강점하고 있는 총독부와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을 구축(驅逐)한 뒤 일본 본토를 침공해 도쿄를 점령하고 일본 국왕의 항복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군략일 수도 있겠지만 일본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중국 군벌 세력과 손을 잡는다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김좌진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그의 뚜렷한 주장에 김동삼과 김원식도 동감하면서 어쨌든 3부의 통합은 하루 속히 실현해 보자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3부 모두 내부의 분열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이 시점에서 구체적인 통합방안은 차후에 다시 상의하자고 미루고 서로 작별했다.
★ 중국 국민당 군대와의 항일연합작전(抗日聯合作戰) 추진
정의부의 김동삼과 김원식이 돌아간 뒤 김좌진은 중국 국민당 군대와 연합작전을 시도하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당시 동삼성의 군벌 장학량(張學良)은 삼시협정(三矢協定) 체결 이후 일본 영사관의 경찰대와 합세하여 만주의 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와 한국인 민족운동 지도자를 체포하는데 앞장서 왔고 장개석(蔣介石)은 장학량의 세력과 경쟁하면서 북벌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당 군대의 고위급 지휘관인 풍옥상(馮玉祥)은 공패성(貢沛誠)을 신민부의 김좌진에게 먼저 보내어 협조를 요청했으므로 일제와 합작하고 있는 장학량의 군대를 원조하기 위한 군수열차를 습격하여 파괴한 바 있었기 때문에 장학량 휘하의 군인들도 김좌진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던 가운데 마침내 1928년 5월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 제13군단장 양우일(揚宇一)이 그의 참모인 손림(孫林)을 보내어 김좌진의 방문을 요청했다. 김좌진은 강인수(姜寅秀)·유창덕(兪昌德)·박두희(朴斗熙) 등을 수행원으로 거느리고 왕청현 석두하자에 있는 구국군 제13군단 병영을 찾아가 양우일을 만났다.
김좌진과 양우일은 일제(日帝)의 대륙 진출에 맞서 공동대적(共同對敵)의 필요성을 진지하게 논의하였다. 그리고 국민당의 동삼성 담당 대적공작과장인 공패성과 2만 3천여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는 악유준(岳維峻), 그리고 그와 비슷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가헌(史可軒) 등과도 한자리에 모여 한중연합전선(韓中聯合戰線) 구축에 협의했다.
“나와 사가헌 장군의 군대에 이미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경험했던 김좌진 장군 휘하의 용맹스러운 조선 독립군이 연합군을 형성하면 북간도에서 설치는 일본군은 문제가 아니라고 믿소.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의문은 장학량의 태도요. 장차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악유준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자 사가헌이 격렬한 어조로 말했다.
“장학량은 중국 인민들의 영토와 주권을 모두 일본에게 내주기로 작정한 역적이오! 그러나 장학량이 어떤 조치를 취한다 해도 우리가 밀고 나가야 할 것은 그대로 행해야 하오. 우리에게는 오로지 뜨거운 애국심과 철저한 항쟁만이 있을 뿐이오! 마침 우리와 함께 싸우겠다는 조선 독립군을 만난 것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고 생각하오. 우선 북간도에서부터 시작하여 만주 천지에서 일본인들의 그림자를 깨끗이 씻어 버려야 합니다.”
공패성도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사가헌의 주장에 동조했다.
“여기 사가헌 장군과 악유준 장군의 병력을 합하면 5만 대군 가까이 되며 비록 수천명에 지나지 않지만 김좌진 장군의 조선 독립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의 정예군에게 크게 타격을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내 비록 정치에 대한 경험이 없고 가진 것도 넉넉치는 못하지만 장학량을 제압할 만한 배경과 한번 전투에 충당할 만한 재력을 아직은 가지고 있습니다. 뒷일은 내가 맡을 테니 안심하고 장군들은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해두시오.”
이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호응하자 김좌진은 감동을 받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고마운 말씀들이오. 이 김좌진과 우리 독립군 병사들은 최후의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중국군을 도와 한·중 양민족의 완전한 자유를 위해 싸우리다!”
김좌진이 이렇게 중국군의 고위급 지휘관들과 연계를 맺기에는 민족유일당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연병호(延秉昊)의 노력이 컸다.
이렇게 하여 신민부 군사위원장 김좌진과 중국 구국군 측에서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 구성에 합의를 보고 신민부의 독립군은 표면상으로는 중국 구국군 제8사단이라는 군호(軍號)를 사용하기로 하면서 군자금 4백만원과 기타 군수물자의 조달을 받기도 했다.
이것은 중국을 통일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공화국을 수립하겠다는 장개석의 의지가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김좌진의 노선과 같았기 때문에 연합군을 편성하면 중국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축출하고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판단 아래 진행되었던 일이었다. 즉 국민당 정권 입장에서는 한국의 독립군 지도자 가운데 가장 믿을만한 김좌진과 손을 잡은 것은 북벌을 위해 상당히 환영할 일이었다.
그러나 한중연합군 편성에 대한 기밀이 누설되어 즉시 장학량에게 전달되었다. 장학량은 즉시 대규모 병력을 출동시켜 중국 구국군 제13군단을 무장해제시키고 악유준과 사가헌, 공패성 등을 모두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도록 했다.
김좌진은 국민당 측과의 연합전선 형성 계획이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변하자 “자기 앞날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왜놈과 한통속이 되어 우리의 독립운동을 방해하면서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거역하는 장학량 그 놈도 언젠가는 제 아비처럼 비명횡사하게 될 것이다”면서 장학량을 저주했다.
한편, 3부통합을 의논하기 위한 한국 민족해방운동 지도자들간의 회의는 어떤 노선도 불문하고 18개 단체 39명의 대표자와 방청자 30명이 참가하여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全民族唯一黨組織促成會)라는 명칭으로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화전(樺甸) 및 반석(盤石)에서 자리를 옮겨가며 개최되었다.
처음에는 3부의 조직만을 통합하여 유일당을 구성하고자 하였으나, 민주주의 진영이나 공산주의 진영이나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 및 자치활동 단체 모두가 거족적인 민족유일당을 구성해야 한다는 공동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어 촉성회가 개최된 것이었다.
촉성회는 제1차 회의가 12일부터 16일까지 화전현의 화흥학교에서 열렸는데, 각 대표들의 자격심사와 국제 정세 및 일제 타도를 위한 방안과 토의가 진행되었다. 또 유일당의 조직과 실천과제가 논의되었다. 제2차 회의는 17일부터 20일까지 반석현 호란양창자에서 열렸는데, 추진사항으로 5개 분과 설치가 결정되었다. 제3차 회의가 진행된 것은 26일부터 27일까지였으며, 장소는 반석현 남문밖의 대동농장이었다. 여기에서는 집행위원 21명이 선출되고 헌장의 기초안은 집행위원회에 위임되었으며 소요되는 재정부담은 각 단체별로 분담하기로 하였다.
이상과 같이 촉성회는 순조롭게 추진되는 듯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각자의 주도권 다툼으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민족유일당 결성 방법론에서 각 대표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속해 있는 단체들의 형편에 따라 통일의 방법을 주장하면서 종래 분산적으로 조직되어 있던 각 독립운동 단체의 존재를 본위로 한 연합체로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자는 단체본위조직론(團體本位組織論), 기존의 군소 단체가 대부분 지방적이고 파벌적으로 결합된 단체이므로 이들 단체를 완전히 무시하고 철저하게 개인위주로 참가하는 민족유일당을 구성해야 한다는 개인본위조직론(個人本位組織論), 기성단체 가운데 가장 권위가 있는 유력한 단체를 중심으로 군소 단체가 종속되어 결합한 다음 점차 그 세력을 확충해 나가야 한다는 단체중심조직론(團體中心組織論) 등으로 이견이 도출되었다. 결국 민족유일당 결성 방법론에서 이와 같은 의견차이는 좁혀지지 않아, 전민족유일당촉성회의는 결국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7아나키스트들과 연대하다 ⑵
★ 3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
한편 중앙간부 다수를 잃은 후에도 골간세력이 여럿이 빠져나감으로써 일시 조직력에 균열이 갔던 신민부(新民府)도 김좌진을 중심으로 부서를 재정비하여 보다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군정부로 변혁을 시도하였다.
중앙집행위원장 겸 군사부위원장 김좌진(金佐鎭)
참모부위원장 황학수(黃學秀)
경리부위원장 정신(鄭信)
보안대 제1대대장 백종렬(白鍾烈)
보안대 제2대대장 오상세(吳祥世)
보안대 제3대대장 장종철(張宗哲)
보안대 제4대대장 주혁(朱赫)
보안대 제5대대장 김종진(金宗鎭)
군사부위원 김종진·조각산(趙角散)·이종수(李鐘洙)·민무(閔茂)
별동대 부관 임강(林綱)
김좌진은 오로지 무력(武力)을 길러 일제(日帝)의 군사력과 대결하는 무장투쟁만이 조국 독립의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우선 신민부의 체제를 바로잡기 위해 부내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진력했다. 그러나 군정파(軍政派)와 민정파(民政派)간의 대립은 그 뿌리가 깊게 박혀 있었다.
이럴 즈음에 신채호(申采浩)·신숙(申肅)·이회영(李會榮) 등 북경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제의에 의하여 중국 각지의 단체 대표들이 함께 모이기로 한 계획이 늦어졌고 또한 민족주의(民族主義)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共産主義)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한 달이나 더 지연되었다가 11월 7일에서야 준비회의를 개최하고 11월 22일에 본회의를 열어 선언서를 발표했다.
‘전민족의 생사를 가늠하는 우리의 독립운동은 지금 어떠한 현실에 놓여 있는가! 2천년간의 입구(入寇)와 3백년전의 원수와 180년간의 치욕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및 장래에 있어 우리의 생존조건을 아무런 꺼리낌 없이 박탈하는 저 왜적(倭敵)에 대하여 사활(死活)을 결단하는 이 독립운동이 과연 어떠한 상태에 있으며 말할 수 없는 전율 속에 떨고 있다는 사실은 위미부진(葦靡不振)한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창한 내용으로 서두를 꺼내는 선언문은 앞으로 독립운동 진영이 나갈 방향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할 내용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첫째, 조선의 유일한 대독립당(大獨立黨) 성립을 촉구할 촉성회 조직준비회 성립에 노력할 것
둘째, 조선 독립에 필요한 전민족적 일체 혁명역량을 총집중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할 것
셋째, 현재의 상황과 세계정세를 감안한 대독립당 조직계획과 이에 따른 연구를 하여 강령을 결의하고 만주지역의 유일당 촉성을 위해 대표를 상해와 북경에 각각 1명씩 파견할 것’
이러한 근거에 의하여 만주 전지역과 조선 본토에서도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2월에 들어서자 정의부(正義府)의 외교부위원장 김동삼(金東三)이 주축인 시사연구회(時事硏究會)의 반석 위에서 남만혁명동지연석회의(南滿革命同志聯席會議)를 열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28년 3월 1일에 유일당 촉성회의를 개최하고자 만주의 32개 각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에게 통지서를 보냈다. 이 통지서는 신민부에도 접수되었고 이것을 읽어본 김좌진은 “뒤늦게 이런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니 그나마 잘된 일이다”고 만족해했다. 그러나 신민부는 12월 25일 석두하자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군정파와 민정파로 분열되어 논쟁을 벌이는 양상을 보였다.
군정파는 김좌진 장군과 함께 독립군을 이끌고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을 비롯해 일제의 군사력에 맞선 직접적인 전투를 벌였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 인물들이었고, 민정파는 최호를 중심으로 하여 민중을 위한 자치활동에 주로 관여해 오던 인물들이었다. 분열의 초점은 신민부가 무장투쟁 위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교육사업이나 산업진흥을 위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론에 있었고 이들의 대립은 점점 첨예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아무런 성과도 올릴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한 김좌진은 신민부를 소원(疏遠)하고 혐오하는 조선인들을 설득하고 정세변화에 따른 실태조사와 분석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러한 점 등을 감안하여 사업지점을 해림(海林)으로 정하고 신민부의 군사부위원인 김종진을 자기의 대변인으로 삼아 지방순회를 계획했다. 김좌진은 김종진이 떠나면 연계될 지역의 실정을 자세히 말해주고 또한 그 방면에 익숙한 오지영(吳智永)·권화산(權華山)·이붕해(李鵬海) 등에게 가르쳐 주도록 했다. 그리고 김종진에게 심웅(深雄)이라는 가명(假名)을 지어주고 출발시켰다.
그러나 1928년에 이르면서 신민부의 주요 간부인 김혁(金爀)과 유정근(兪正根)이 일본 영사관 경찰대에게 체포되고 정의부(正義府) 의용군 사령관인 오동진(吳東振) 장군도 일본 헌병대의 밀정인 김종원(金宗源)의 모략에 빠져 체포되니 만주의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은 큰 동요를 일으켰고 통합의 필요성을 한층 더 절감하게 했다. 그러므로 동년(同年) 2월 3일에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의 간부들은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회합을 갖고 4월 중순에 3부연합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신민부내에서는 지난 연말에 분열되었던 군정파와 민정파간의 주도권 다툼이 점점 더 심해졌다. 최호·박관해·박세황 등이 주축으로 있는 민정파에서는 지난 1927년 11월 18일 빈주사변(賓州事變)을 명분으로 군정파를 비판하면서 김좌진과 정신을 ‘혁명전선의 교란자’로 매도하고 나름대로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것은 주중국청년동맹(住中國靑年同盟)과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이 빈주의 주민 50여명을 신민부에서 탈퇴시키려고 연설회를 열자 신민부의 별동대원들이 연설회를 저지하기 위해 총격을 가하고 10여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군정파에서 저지른 일이다 보니 그 책임이 김좌진에게 쏠리고 있었다.
신민부도 원래 무장 단체였던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과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가 주축이 되어 창설한 것이다. 그 실질적 지도자이자 청산리대첩의 주역이었던 김좌진 장군은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을 자신의 신조처럼 여기고 있었다.
이와 같이 나중소(羅仲昭)·황학수(黃學秀)·박두희(朴斗熙)·오상세(吳祥世)·백종렬(白鍾烈) 등 신흥무관학교 출신 인물들은 군정파의 핵심이 되어 김좌진(金佐鎭) 장군을 따르며 그의 방략까지 실천하려고 했다.
신민부의 분열이 갈수록 첨예화되는 것을 걱정하던 김좌진 장군 앞에 3부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 있던 정의부의 외교부위원장 김동삼(金東三)과 중앙집행위원 김원식(金元植)이 찾아왔다. 김좌진은 그들에게 독립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무장투쟁 노선임을 역설했다.
“지금 왜놈들은 영사관 경찰대를 출동시키고 총독부 산하 헌병대마저 만주에 끌어들여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느라고 혈안이 되어 날뛰는 판인데, 무장투쟁을 반대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왜놈들과 싸운단 말이오?”
이처럼 김좌진은 민족의 지상과제인 조국 독립의 가장 중요한 방법은 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뿐이므로 오로지 3부의 군사력을 통합하여 강력한 무장을 형성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공격해야 한다고 재삼 강조했다. 김좌진의 군략은 첫째, 3부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 진영의 모든 병력을 하나의 연합군단으로 편성해 만주에 세력을 뻗친 일본의 군경을 소탕하고 둘째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를 강점하고 있는 총독부와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을 구축(驅逐)한 뒤 일본 본토를 침공해 도쿄를 점령하고 일본 국왕의 항복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군략일 수도 있겠지만 일본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중국 군벌 세력과 손을 잡는다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김좌진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그의 뚜렷한 주장에 김동삼과 김원식도 동감하면서 어쨌든 3부의 통합은 하루 속히 실현해 보자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3부 모두 내부의 분열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이 시점에서 구체적인 통합방안은 차후에 다시 상의하자고 미루고 서로 작별했다.
★ 중국 국민당 군대와의 항일연합작전(抗日聯合作戰) 추진
정의부의 김동삼과 김원식이 돌아간 뒤 김좌진은 중국 국민당 군대와 연합작전을 시도하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당시 동삼성의 군벌 장학량(張學良)은 삼시협정(三矢協定) 체결 이후 일본 영사관의 경찰대와 합세하여 만주의 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와 한국인 민족운동 지도자를 체포하는데 앞장서 왔고 장개석(蔣介石)은 장학량의 세력과 경쟁하면서 북벌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당 군대의 고위급 지휘관인 풍옥상(馮玉祥)은 공패성(貢沛誠)을 신민부의 김좌진에게 먼저 보내어 협조를 요청했으므로 일제와 합작하고 있는 장학량의 군대를 원조하기 위한 군수열차를 습격하여 파괴한 바 있었기 때문에 장학량 휘하의 군인들도 김좌진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던 가운데 마침내 1928년 5월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 제13군단장 양우일(揚宇一)이 그의 참모인 손림(孫林)을 보내어 김좌진의 방문을 요청했다. 김좌진은 강인수(姜寅秀)·유창덕(兪昌德)·박두희(朴斗熙) 등을 수행원으로 거느리고 왕청현 석두하자에 있는 구국군 제13군단 병영을 찾아가 양우일을 만났다.
김좌진과 양우일은 일제(日帝)의 대륙 진출에 맞서 공동대적(共同對敵)의 필요성을 진지하게 논의하였다. 그리고 국민당의 동삼성 담당 대적공작과장인 공패성과 2만 3천여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는 악유준(岳維峻), 그리고 그와 비슷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가헌(史可軒) 등과도 한자리에 모여 한중연합전선(韓中聯合戰線) 구축에 협의했다.
“나와 사가헌 장군의 군대에 이미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경험했던 김좌진 장군 휘하의 용맹스러운 조선 독립군이 연합군을 형성하면 북간도에서 설치는 일본군은 문제가 아니라고 믿소.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의문은 장학량의 태도요. 장차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악유준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자 사가헌이 격렬한 어조로 말했다.
“장학량은 중국 인민들의 영토와 주권을 모두 일본에게 내주기로 작정한 역적이오! 그러나 장학량이 어떤 조치를 취한다 해도 우리가 밀고 나가야 할 것은 그대로 행해야 하오. 우리에게는 오로지 뜨거운 애국심과 철저한 항쟁만이 있을 뿐이오! 마침 우리와 함께 싸우겠다는 조선 독립군을 만난 것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고 생각하오. 우선 북간도에서부터 시작하여 만주 천지에서 일본인들의 그림자를 깨끗이 씻어 버려야 합니다.”
공패성도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사가헌의 주장에 동조했다.
“여기 사가헌 장군과 악유준 장군의 병력을 합하면 5만 대군 가까이 되며 비록 수천명에 지나지 않지만 김좌진 장군의 조선 독립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의 정예군에게 크게 타격을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내 비록 정치에 대한 경험이 없고 가진 것도 넉넉치는 못하지만 장학량을 제압할 만한 배경과 한번 전투에 충당할 만한 재력을 아직은 가지고 있습니다. 뒷일은 내가 맡을 테니 안심하고 장군들은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해두시오.”
이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호응하자 김좌진은 감동을 받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고마운 말씀들이오. 이 김좌진과 우리 독립군 병사들은 최후의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중국군을 도와 한·중 양민족의 완전한 자유를 위해 싸우리다!”
김좌진이 이렇게 중국군의 고위급 지휘관들과 연계를 맺기에는 민족유일당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연병호(延秉昊)의 노력이 컸다.
이렇게 하여 신민부 군사위원장 김좌진과 중국 구국군 측에서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 구성에 합의를 보고 신민부의 독립군은 표면상으로는 중국 구국군 제8사단이라는 군호(軍號)를 사용하기로 하면서 군자금 4백만원과 기타 군수물자의 조달을 받기도 했다.
이것은 중국을 통일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공화국을 수립하겠다는 장개석의 의지가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김좌진의 노선과 같았기 때문에 연합군을 편성하면 중국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축출하고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판단 아래 진행되었던 일이었다. 즉 국민당 정권 입장에서는 한국의 독립군 지도자 가운데 가장 믿을만한 김좌진과 손을 잡은 것은 북벌을 위해 상당히 환영할 일이었다.
그러나 한중연합군 편성에 대한 기밀이 누설되어 즉시 장학량에게 전달되었다. 장학량은 즉시 대규모 병력을 출동시켜 중국 구국군 제13군단을 무장해제시키고 악유준과 사가헌, 공패성 등을 모두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도록 했다.
김좌진은 국민당 측과의 연합전선 형성 계획이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변하자 “자기 앞날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왜놈과 한통속이 되어 우리의 독립운동을 방해하면서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거역하는 장학량 그 놈도 언젠가는 제 아비처럼 비명횡사하게 될 것이다”면서 장학량을 저주했다.
한편, 3부통합을 의논하기 위한 한국 민족해방운동 지도자들간의 회의는 어떤 노선도 불문하고 18개 단체 39명의 대표자와 방청자 30명이 참가하여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全民族唯一黨組織促成會)라는 명칭으로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화전(樺甸) 및 반석(盤石)에서 자리를 옮겨가며 개최되었다.
처음에는 3부의 조직만을 통합하여 유일당을 구성하고자 하였으나, 민주주의 진영이나 공산주의 진영이나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 및 자치활동 단체 모두가 거족적인 민족유일당을 구성해야 한다는 공동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어 촉성회가 개최된 것이었다.
촉성회는 제1차 회의가 12일부터 16일까지 화전현의 화흥학교에서 열렸는데, 각 대표들의 자격심사와 국제 정세 및 일제 타도를 위한 방안과 토의가 진행되었다. 또 유일당의 조직과 실천과제가 논의되었다. 제2차 회의는 17일부터 20일까지 반석현 호란양창자에서 열렸는데, 추진사항으로 5개 분과 설치가 결정되었다. 제3차 회의가 진행된 것은 26일부터 27일까지였으며, 장소는 반석현 남문밖의 대동농장이었다. 여기에서는 집행위원 21명이 선출되고 헌장의 기초안은 집행위원회에 위임되었으며 소요되는 재정부담은 각 단체별로 분담하기로 하였다.
이상과 같이 촉성회는 순조롭게 추진되는 듯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각자의 주도권 다툼으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민족유일당 결성 방법론에서 각 대표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속해 있는 단체들의 형편에 따라 통일의 방법을 주장하면서 종래 분산적으로 조직되어 있던 각 독립운동 단체의 존재를 본위로 한 연합체로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자는 단체본위조직론(團體本位組織論), 기존의 군소 단체가 대부분 지방적이고 파벌적으로 결합된 단체이므로 이들 단체를 완전히 무시하고 철저하게 개인위주로 참가하는 민족유일당을 구성해야 한다는 개인본위조직론(個人本位組織論), 기성단체 가운데 가장 권위가 있는 유력한 단체를 중심으로 군소 단체가 종속되어 결합한 다음 점차 그 세력을 확충해 나가야 한다는 단체중심조직론(團體中心組織論) 등으로 이견이 도출되었다. 결국 민족유일당 결성 방법론에서 이와 같은 의견차이는 좁혀지지 않아, 전민족유일당촉성회의는 결국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