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은 독립군(獨立軍)의 대일항전(對日抗戰)을 지도했던 대표적인 항일투사로 백범(白凡) 김구(金九)·안중근(安重根)·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등과 더불어 항일독립운동사(抗日獨立運動史)에 돋보이는 족적을 남긴 영웅이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1909년 합이빈의거(哈爾濱義擧), 1919년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1920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1932년 홍구공원의거(虹口公園義擧)를 한국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의 4대 쾌거(快擧)라고 평가한다.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전투를 독립군의 승리로 이끌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던 장본인이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민족의 생존을 위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애국지사들은 반일언론활동(反日言論活動)·외교선전활동(外交宣傳活動)·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항일지하공작(抗日地下工作)·교육계몽운동(敎育啓蒙運動)·문화보존운동(文化保存運動)·식산진흥사업(殖産振興事業)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였다. 이 가운데 조·만국경(朝滿國境) 지역에서 여러 독립군이 형성되어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이나 군사시설을 습격·파괴하고 일본의 군경과 교전하는 무장투쟁은 일제의 당국자들을 가장 긴장하게 하였다.
김좌진 장군의 독립운동 방향은 오직 일관되게 무장투쟁에 있었다. 그는 한때 교육계몽운동이나 지하공작에도 참여한 바 있으나 만주로 망명한 이후에는 군사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 양성에 힘쓰고 독립군의 무장력을 강화하기 위해 무기구입에 매진하는 등 오로지 무장투쟁 노선의 독립운동에만 헌신하였다. 1925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국무위원(國務委員)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은 이유도 장차 민족의 무력(武力)을 길러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구축(驅逐)하고 전쟁을 통한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는 목적을 이루는 데에 임시정부의 실력이 너무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우리 민족이 동양에서 가장 문화적 수준이 뒤떨어진 나라인 일본에게 주권을 강탈당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무력(武力)의 약세(弱勢)라고 보았다. 조선왕조는 5백년 역사 내내 문약(文弱)에 빠져 오랑캐 나라인 일본에게 멸망당했으니 이제부터라도 군사력을 길러 빼앗긴 국토를 되찾고 무강(武强)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던 김좌진 장군은 강한 전투력의 독립군을 양병(養兵)하여 치밀하게 일본과의 전면전(全面戰)을 준비하는 일에 열성을 쏟았다.
김좌진 장군은 누구보다 군사훈련과 병력통솔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32세의 젊은 나이에 정의단(正義團) 산하의 군사조직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인 청산리승첩(靑山里勝捷)을 이룩하였다.
1920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는 북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한민회(韓民會)·의군부(義軍府)·신민단(新民團)·의민단(義民團)·광복단(光復團) 등 약 2천명의 독립군 장병들이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일본군 제19사단 예하 아즈마[東正彦] 지대(支隊)의 기마·보병 5천~6천여명을 맞아 10회의 교전을 통해 1천 2백여명의 일본군을 살상한 승전(勝戰)이었다. 일본군 제19사단의 작전보고서에서 이 전투의 일본군 사상자를 겨우 30여명이라고 허위기록(虛僞記錄)을 할 정도로 일제(日帝) 입장에서는 숨기고 싶은 수치스러운 패전(敗戰)이 바로 청산리전투였다.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이 전투에서 독립군의 주력으로 활약하여 일본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독립군의 청산리전투 승리는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 뿐만 아니라 비무력독립운동(非武力獨立運動) 관련자들까지 만주에서 모조리 색출하여 처단하고 간도지방에서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을 완전히 소멸시키려는 일제(日帝)의「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이 실패로 돌아가게 하였다. 또한 독립군의 전투력을 고스란히 유지시켜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의 삼부정치시대(三府政治時代)에도 국내잠입유격작전(國內潛入遊擊作戰)이 전개되도록 하는 데 중요한 기반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패전 보복으로 만주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경신참변(庚申慘變)을 막지 못했으며, 청산리전투 승리가 대규모의 대일전면전(對日全面戰)으로 숭화되지 못한 채 독립군의 군사력이 더욱 크게 강화되지 못한 점은 분명한 역사의 한계였다. 또한 김좌진 장군이 신민부의 군사위원장을 지내면서 군정파(軍政派)와 민정파(民政派)간의 대립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 채 도리어 자신의 주장을 더욱 고집하여 갈등의 골만 키우고 결국 신민부의 분열에 이르게 한 것은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과 삼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의 실패에 원인 제공을 하였다.
하지만 김좌진 장군은 우리 민족이 무력(武力)을 강화하는데 힘쓴다면 장차 일제와 무력으로 대결해도 승산이 있으며 무력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안겨 준 영웅이었다. 그는 조선왕조의 세도가(勢道家)인 안동(安東) 김씨(金氏) 출신인데도 어릴 때부터 봉건주의(封建主義)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개화사상(開化思想)을 실천하였고, 집안 소유의 토지와 전답을 팔아 국권회복운동(國權恢復運動)에 투자했으며, 일제의 압력에 굴복해 한국의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중국 관헌의 탄압에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 민족의 국토와 주권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던 훌륭한 애국지사였다. 그가 지휘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는 우리 민족이 외세의 침략에 일치단결(一致團結)로 저항했던 전통적인 대외항전(對外抗戰)의 의지를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자들에게 보여준 불굴의 승리였다.
이러한 김좌진 장군이 1930년 1월 24일에 일본인도 아닌 동족(同族)의 손에 살해되어 만주 무장투쟁의 명맥이 끊겼던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홍진(洪震)·신숙(申肅)·이청천(李靑天) 등이 이끄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현익철(玄益哲)·이웅(李雄)·고이허(高而虛) 등이 구성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에서 1930년대에 군사조직을 따로 만들어 무장투쟁에 나섰지만 독자적인 항일전(抗日戰)이 아니라 중국 의용군의 일원으로서 일본군과 싸웠기 때문에 사실상 한국인들의 항일무장투쟁은 김좌진 장군의 피살로 소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좌진 장군 사후(死後)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정식 군대인 광복군(光復軍)이 창설될 때까지 10여년간 무장투쟁 노선의 독립운동은 명맥이 끊어졌던 것이니 1945년에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종결되고 임시정부는 승전국(勝戰國)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해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진주로 3·8선이 그어져 분단국가(分斷國家) 상태가 지금까지도 지속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군사관학교(韓國軍士官學校)는 전쟁사(戰爭史)나 군사전술(軍事戰術)에 관련된 교육을 할 때 6·25남북전쟁(六二五南北戰爭)에 범위를 한정시켜 냉전체제(冷戰體制)의 지속을 마치 정당화하는 듯한 분위기를 고수하고 있다. 표명렬 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는 “한국군의 정통성은 6·25남북전쟁이 아니라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에 있다고 봐야 옳다. 자랑스러운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도외시하고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현재 한국군 장병들에게 무슨 애국심이나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게 할 수 있는가?”라고 비판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법통은 민족해방운동의 구심체였던 임시정부에 있기에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한 9월 17일을 국군의 날로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참으로 당연하고 올바른 발언이다.
지금 한국군사관학교의 사관생도들은 일제강점기에 항일유격대를 토벌하는 임무를 맡았던 간도특설대장으로 만주국군에서 복무했던 백선엽(白善燁)을 한국군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1950년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를 한국군의 위대한 전승(戰勝)으로 평가하는 교육을 받고 있다. 장차 한국군의 장교가 될 그들에게 군인으로서의 진정한 자부심을 느끼게 하려면 한국군의 정통성이 항일무장투쟁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도록 교육 방식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1920년대 동양에서 일어난 가장 치열한 무력충돌(武力衝突)이었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를 독립군의 승리로 이끌었던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좌진 장군의 무장투쟁과 업적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한국 근대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영원불멸의 큰 별이다.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8백야 김좌진의 독립운동과 역사적 의의
★ 한국군사관학교(韓國軍士官學校)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가르쳐야 할 군인의 표상(表象)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은 독립군(獨立軍)의 대일항전(對日抗戰)을 지도했던 대표적인 항일투사로 백범(白凡) 김구(金九)·안중근(安重根)·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등과 더불어 항일독립운동사(抗日獨立運動史)에 돋보이는 족적을 남긴 영웅이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1909년 합이빈의거(哈爾濱義擧), 1919년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1920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1932년 홍구공원의거(虹口公園義擧)를 한국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의 4대 쾌거(快擧)라고 평가한다.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전투를 독립군의 승리로 이끌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던 장본인이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민족의 생존을 위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애국지사들은 반일언론활동(反日言論活動)·외교선전활동(外交宣傳活動)·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항일지하공작(抗日地下工作)·교육계몽운동(敎育啓蒙運動)·문화보존운동(文化保存運動)·식산진흥사업(殖産振興事業)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였다. 이 가운데 조·만국경(朝滿國境) 지역에서 여러 독립군이 형성되어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이나 군사시설을 습격·파괴하고 일본의 군경과 교전하는 무장투쟁은 일제의 당국자들을 가장 긴장하게 하였다.
김좌진 장군의 독립운동 방향은 오직 일관되게 무장투쟁에 있었다. 그는 한때 교육계몽운동이나 지하공작에도 참여한 바 있으나 만주로 망명한 이후에는 군사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 양성에 힘쓰고 독립군의 무장력을 강화하기 위해 무기구입에 매진하는 등 오로지 무장투쟁 노선의 독립운동에만 헌신하였다. 1925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국무위원(國務委員)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은 이유도 장차 민족의 무력(武力)을 길러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구축(驅逐)하고 전쟁을 통한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는 목적을 이루는 데에 임시정부의 실력이 너무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우리 민족이 동양에서 가장 문화적 수준이 뒤떨어진 나라인 일본에게 주권을 강탈당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무력(武力)의 약세(弱勢)라고 보았다. 조선왕조는 5백년 역사 내내 문약(文弱)에 빠져 오랑캐 나라인 일본에게 멸망당했으니 이제부터라도 군사력을 길러 빼앗긴 국토를 되찾고 무강(武强)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던 김좌진 장군은 강한 전투력의 독립군을 양병(養兵)하여 치밀하게 일본과의 전면전(全面戰)을 준비하는 일에 열성을 쏟았다.
김좌진 장군은 누구보다 군사훈련과 병력통솔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32세의 젊은 나이에 정의단(正義團) 산하의 군사조직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인 청산리승첩(靑山里勝捷)을 이룩하였다.
1920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는 북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한민회(韓民會)·의군부(義軍府)·신민단(新民團)·의민단(義民團)·광복단(光復團) 등 약 2천명의 독립군 장병들이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일본군 제19사단 예하 아즈마[東正彦] 지대(支隊)의 기마·보병 5천~6천여명을 맞아 10회의 교전을 통해 1천 2백여명의 일본군을 살상한 승전(勝戰)이었다. 일본군 제19사단의 작전보고서에서 이 전투의 일본군 사상자를 겨우 30여명이라고 허위기록(虛僞記錄)을 할 정도로 일제(日帝) 입장에서는 숨기고 싶은 수치스러운 패전(敗戰)이 바로 청산리전투였다.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이 전투에서 독립군의 주력으로 활약하여 일본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독립군의 청산리전투 승리는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 뿐만 아니라 비무력독립운동(非武力獨立運動) 관련자들까지 만주에서 모조리 색출하여 처단하고 간도지방에서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을 완전히 소멸시키려는 일제(日帝)의「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이 실패로 돌아가게 하였다. 또한 독립군의 전투력을 고스란히 유지시켜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의 삼부정치시대(三府政治時代)에도 국내잠입유격작전(國內潛入遊擊作戰)이 전개되도록 하는 데 중요한 기반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패전 보복으로 만주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경신참변(庚申慘變)을 막지 못했으며, 청산리전투 승리가 대규모의 대일전면전(對日全面戰)으로 숭화되지 못한 채 독립군의 군사력이 더욱 크게 강화되지 못한 점은 분명한 역사의 한계였다. 또한 김좌진 장군이 신민부의 군사위원장을 지내면서 군정파(軍政派)와 민정파(民政派)간의 대립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 채 도리어 자신의 주장을 더욱 고집하여 갈등의 골만 키우고 결국 신민부의 분열에 이르게 한 것은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과 삼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의 실패에 원인 제공을 하였다.
하지만 김좌진 장군은 우리 민족이 무력(武力)을 강화하는데 힘쓴다면 장차 일제와 무력으로 대결해도 승산이 있으며 무력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안겨 준 영웅이었다. 그는 조선왕조의 세도가(勢道家)인 안동(安東) 김씨(金氏) 출신인데도 어릴 때부터 봉건주의(封建主義)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개화사상(開化思想)을 실천하였고, 집안 소유의 토지와 전답을 팔아 국권회복운동(國權恢復運動)에 투자했으며, 일제의 압력에 굴복해 한국의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중국 관헌의 탄압에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 민족의 국토와 주권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던 훌륭한 애국지사였다. 그가 지휘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는 우리 민족이 외세의 침략에 일치단결(一致團結)로 저항했던 전통적인 대외항전(對外抗戰)의 의지를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자들에게 보여준 불굴의 승리였다.
이러한 김좌진 장군이 1930년 1월 24일에 일본인도 아닌 동족(同族)의 손에 살해되어 만주 무장투쟁의 명맥이 끊겼던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홍진(洪震)·신숙(申肅)·이청천(李靑天) 등이 이끄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현익철(玄益哲)·이웅(李雄)·고이허(高而虛) 등이 구성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에서 1930년대에 군사조직을 따로 만들어 무장투쟁에 나섰지만 독자적인 항일전(抗日戰)이 아니라 중국 의용군의 일원으로서 일본군과 싸웠기 때문에 사실상 한국인들의 항일무장투쟁은 김좌진 장군의 피살로 소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좌진 장군 사후(死後)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정식 군대인 광복군(光復軍)이 창설될 때까지 10여년간 무장투쟁 노선의 독립운동은 명맥이 끊어졌던 것이니 1945년에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종결되고 임시정부는 승전국(勝戰國)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해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진주로 3·8선이 그어져 분단국가(分斷國家) 상태가 지금까지도 지속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군사관학교(韓國軍士官學校)는 전쟁사(戰爭史)나 군사전술(軍事戰術)에 관련된 교육을 할 때 6·25남북전쟁(六二五南北戰爭)에 범위를 한정시켜 냉전체제(冷戰體制)의 지속을 마치 정당화하는 듯한 분위기를 고수하고 있다. 표명렬 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는 “한국군의 정통성은 6·25남북전쟁이 아니라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에 있다고 봐야 옳다. 자랑스러운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도외시하고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현재 한국군 장병들에게 무슨 애국심이나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게 할 수 있는가?”라고 비판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법통은 민족해방운동의 구심체였던 임시정부에 있기에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한 9월 17일을 국군의 날로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참으로 당연하고 올바른 발언이다.
지금 한국군사관학교의 사관생도들은 일제강점기에 항일유격대를 토벌하는 임무를 맡았던 간도특설대장으로 만주국군에서 복무했던 백선엽(白善燁)을 한국군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1950년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를 한국군의 위대한 전승(戰勝)으로 평가하는 교육을 받고 있다. 장차 한국군의 장교가 될 그들에게 군인으로서의 진정한 자부심을 느끼게 하려면 한국군의 정통성이 항일무장투쟁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도록 교육 방식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1920년대 동양에서 일어난 가장 치열한 무력충돌(武力衝突)이었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를 독립군의 승리로 이끌었던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좌진 장군의 무장투쟁과 업적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한국 근대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영원불멸의 큰 별이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