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2망국의 한복판에 선 우국지사 ⑵
대모달2011.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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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온 몸으로 막으려
1905년 11월 9일,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한 사내가 서울에 도착했다. 일본 군인들의 삼엄한 경호 속에 남대문 역사에 도착한 그 사내는 바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이토가 한국을 방문한 이유는 이른바 보호조약(保護條約)을 체결하기 위해서였다.
일제(日帝)가 을사늑약 체결을 결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계기는 러일전쟁[露日戰爭]에서의 승리였다. 일본이 러시아를 선제공격한 이유는 러시아를 점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자마자 일본 각의에서 ‘한국 보호권 확립의 건’을 의결한 것이 러일전쟁의 이런 배경을 말해 준다. 1904년 4월 8일 의결된 ‘한국 보호권 확립의 건’은 “한국에 대한 정책은 기존 방침과 계획에 근거, 보호의 실권을 장악하는 견지에서 점차 그 토대를 확대해 나가 마침내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고, 그 나라의 대외관계를 모두 우리 손 안에 넣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전문으로 시작되고 있다.
1905년 1월에 러시아의 조차지였던 여순(旅順)을 점령하고, 3월에 만주 봉천회전(奉天會戰)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의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강화(講和)를 제안하자 재빨리 받아들였다. 이미 국력이 많이 소진되었기 때문이었다.
1905년 9월 5일, 미국 뉴햄프셔주의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 각의가 일년 반 전에 의결한 ‘한국 보호권 확립의 건’이 국제적인 동의와 승인을 얻게 되었다. 강화조약 안에 ‘한국에 있어서 일본의 정치·군사·경제상의 특별 권리를 승인할 것’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의 일본 대표인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무대신은 1905년 10월 16일에 귀국했는데, 불과 11일 후인 10월 27일에 일본 각의는 ‘한국 보호권 확립 실행에 관한 각의 결정의 건’을 의결했다. 그 전문은 일본이 조약을 밀어붙이는 속셈을 잘 설명하고 있다.
"한국에서 우리의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은 이미 조정에서 결정된 바이지만 그 실행은 지금이 바로 최적기라고 본다. 왜냐 하면 우리의 결정에 대해 영·미 양국이 이미 동의했을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국가들도 역시 일·한 양국의 특수한 관계와 전쟁의 결과를 감안해서……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결과임을 묵인하여……"
이 결의가 있은 지 12일 후에 이토가 서울에 온 것이다. 이토는 다음날 덕수궁(德壽宮)을 방문해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을 알현하고 무쓰히토[睦仁] 일본 황제가 보낸 친서를 봉정(捧呈)하였다. 본격적으로 을사늑약 체결 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고종은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이토를 물리친 후, 다음날부터 병이 있다 칭하고 거듭 그의 알현 요청을 거절했다.
바로 그 무렵,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의 집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의정부 참찬을 지낸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과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임명되는 석오(石梧) 이동녕(李東寧)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의 표정은 침통했다. 이토의 방한 목적이 한국에 대한 예속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 안의 무거운 공기를 깨며 보재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이토가 우리 나라에 온 저의가 매우 의심스럽소. 러시아와 일본간의 강화조약에서 러시아가 우리 나라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했으니, 이토는 이번에 그 우월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어떤 조약을 맺자고 제시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 조약은 필시 우리 나라에 치명적인 피해를 줄 터이니,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한 대비책을 시급히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석오가 그의 말을 받았다.
“이번 조약은 필경 망국의 조약이 될 터인즉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나라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참으로 통곡할 일이오.”
우당은 목이 메어 길게 탄식하다가 보재를 바라보고 말한다.
“올 것이 온 것이오. 그러나 장탄비분(長嘆悲憤)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보재는 의정부 참찬의 직책에 있으니 영의정 한규설(韓圭卨)과 만나 숙의하도록 합시다. 이토는 조약문서를 내밀고 필경 날인을 요구할 것이니, 그 때 한규설이 조약서를 찢고 그들을 욕하는 것이 어떻겠소?”
우당의 말은 계속되었다.
“내 동생 시영(始榮)이 외부교섭국장으로 있으니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을 만날 것이오. 그리고 민영환(閔泳煥)이 시종무관장으로서 항상 임금 곁에 있으니 이토가 어전에서 조약서를 내밀면 이를 한사코 제지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그러나 시국은 무너지는 왕조를 붙잡으려는 지사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1월 15일 고종을 비공개로 알현한 이토는 협박조로 외교권 이양을 요구했다.
“이 문안은 제국 정부가 여러 가지 고려를 거듭한 끝에 이미 조금도 변동할 여지가 없이 만든 확정안으로서……결코 움직일 수 없는 제국 정부의 확정된 의논인 바, 오늘 필요한 것은 오직 폐하의 결심 여하입니다. 이를 승낙하시거나 거부하시는 것은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만, 만약 거부하시면 제국 정부는 이미 결심한 바 있어, 그 결과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짐작하건대 귀국의 지위는 이 조약을 체결하는 것 이상으로 곤란한 경우에 이를 것이며 더 불리한 결과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 때 고종과 이토의 만남을 전하고 있는「이등박문한국봉사기사적요(伊藤博文韓國奉使記摘要)」는 이토의 이런 의사 표시에 대해 “고종은 매우 당황한 모양으로서 정부에 자문을 구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고 적고 있다. 이토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기의 바람을 일본 황실과 정부에 전해 주기 바란다고 간청했다. 하지만 이토는 강경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희망이 전혀 쓸모없는 것이니 단념하시기 바랍니다.”
16일에는 이토가 직접 조선의 대신들을 불러 조약체결을 강요했고, 다음날에는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대신들을 초대해 점심을 들면서 오후 3시까지 보호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강요했다.
하야시 곤스케의『나의 70년을 말한다』라는 회상기에는 이 때의 정경이 잘 나타나 있다.
‘이토에게 말하기를, 제가 담판을 시작하기 위해서 한국 정부의 각 대신을 회유하여 아침부터 일본 공사관에 참집하도록 하겠으며, 담판이 적당히 무르익어 갈 즈음에 그 자리에 참석하시도록 전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전 중에는 이야기의 매듭이 지어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십송. 그렇게 되면 점심이라도 들고 나서, 아무래도 임금님에게 직재를 바라자…이렇게 이야기가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물론 저도 같이 갈 작정입니다. 그리고 담판의 경과 여하에 따라 당신께서 그곳에 와 주시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전 조치로서는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대장에게 부탁해 둔 파수를 보는 일입니다. 그것은 사전 계획대로 내가 있는 곳에 각 대신이 모이면 그 이야기의 내용이 한국으로서는 매우 큰 문제의 일이어서 열석한 대신들이 싫어할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일단 공사관에서 철수하여 궁중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되면 도중에서 도망치는 놈도 생길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에 신중히 대처하기 위해 몇 명의 헌병을 대치해 두고 도중에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를 해 주었으면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이것도 하세가와 대장에게 부탁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정작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면 대신들 가운데 하나 둘쯤은 자살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나야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없도록 이것도 미리 대비를 해 두었습니다.’
일은 하야시의 계획대로 돌아갔다. 하야시의 통보에 따라 하세가와 대장이 이끄는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궁내 회의장에 들어간 이토는 각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협약의 찬부를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이 반대했을뿐 기타는 찬성이었다. 권중현은 나중에 찬성해 을사오적(乙巳五賊)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끝내 이 조약을 재가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은 황제국이었으므로 황제의 재가 없는 결정은 무효였다. 그러나 이토는 11월 18일 새벽 2시에 을사오적의 찬성을 근거로 조약 체결을 선포했다.
이것이 ‘제1조 일본국 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에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및 사무를 감리 지휘할 것이요…’로 시작되는 망국 조약인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인 선교사인 헐버트(Homer B. Hulbert:1863년~1949년)는 조약 체결 한 달 전 고종 황제의 친서를 휴대하고 워싱턴에 가 있었는데, 11월 26일에 고종이 청나라를 경유해 보낸 비밀전문을 받았다.
“짐은 최근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보호조약이 일본의 위협과 협박을 받으며 강압적으로 맺어진 것이므로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朕)은 거기에 동의한 일도 없으며, 또 앞으로 결코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미국 정부에 이 사실을 전하라.”
그러나 이 비밀전문을 받기 하루 전에 헐버트는 미국의 국무부 장관 루트(Elihu Root)에게서 이런 내용의 서신을 받았다.
“한국 황제가 이미 일본과 새로운 협정을 맺고 일본으로 하여금 친서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를 처리하도록 결정한 이상 황제 친서에 따른 대책을 강구할 수는 없다.”
미국은 을사늑약을 합법적 공식 조약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좌의정을 지냈던 조병세(趙秉世)는 시종무관장 민영환과 함께 백관을 인솔하고 궁궐에 연좌해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연금되었다. 풀려난 그는 고종에게 유소(遺疏)를 올리고 각국 공사에게 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글을 남긴 뒤 자결했으며 민영환 역시 민족에게 거국적인 반일운동을 당부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반면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조약 체결에 찬성해 을사오적이 되었다.
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황성신문(皇城新聞)』사장 장지연(張志淵)은「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일제(日帝)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조약 체결 소식을 들은 우당은 보재·석오와 더불어 종로 네거리에 나와 머리를 땅에 대고 길게 통곡했다. 그는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와 함께 학생과 군중을 종로 거리에 모아 온 국민이 모두 궐기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런 열변에 군중은 뜨겁게 환호했지만 그것으로 왕조의 몰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당은 홍암(弘巖) 나철(羅喆)과 기산도(奇山度)·김석항(金錫恒) 등에게 자금을 주어 을사오적 암살을 계획하도록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우당은 여러 형제와 한자리에 모여 시국을 의논했다. 그는 동생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에게 관직에서 물러나 구국의 길에 나서라고 권고했다. 이에 성재는 자신의 미력함을 통분하면서 사직했다. 또한 조약 체결 며칠 전에 우당의 조카와 외부대신 박제순의 딸이 약혼했었는데, 매국노와 사돈을 맺을 수 없다면서 즉각 파혼하고 절교했다.
형의 말에 따라 사직했던 성재는 고종 황제가 다시 평안도 관찰사를 맡기자 고민했다. 그는 당장 관직을 그만두는 게 능사가 아니라, 이후 광복운동을 위해서는 나름의 준비와 정보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벼슬에 연연해서가 아니라, 관계(官系)에 있으면서 나름의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고 특히 황제 고종과의 비밀연락망을 활용하려 한 것이다. 성재는 이후 국내와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인사들의 활동 소식을 고종에게 보고하고, 신민회와 같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데 일조했다. 형제가 나름대로 역할을 분담한 것도 이런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④ 헤이그 밀사 파견의 숨은 주역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전국 각지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비밀결사단체가 많이 조직되었다. 그 가운데 우당과 석오는 1904년부터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에서 함께 일해왔던 동지들을 규합하여 비밀단체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제가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를 설치하자, 반일운동의 거점을 국외로 옮기기로 하였다. 1906년 초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석오(石梧) 이동녕(李東寧), 시당(時堂) 여준(呂準), 야은(野隱) 장유순(張裕淳) 등이 우당의 집에 모여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자고 협의했다. 이들은 만주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우리 민족이 많이 이주해 간 서간도 일대 가운데 용정촌(龍井村)을 주목했다. 우리 동포가 많아 교육시킬 여건이 좋고, 국내와는 물론 러시아나 연해주도 가까워 외교나 왕래가 비교적 쉬웠기 때문이다.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책임은 보재가 맡았다.
보재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모임에 참석했던 동지들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간단히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났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은 도성 모퉁이에서 기약 없는 망명길에 오르는 보재를 전송했다. 우당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보재는 웃는 얼굴로 작별했다.
보재는 인천에서 중국 상선을 타고 상하이에 머물다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여 용정촌에 도착했다. 석오와 시당이 그의 뒤를 따라 북간도로 갔는데, 이들은 1906년 8월경 용정에 반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건립했다. 보재가 바로 이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06년 10월, 국외 민족운동 기지의 효시인 서전서숙은 이렇게 용정에서 문을 열었다.
서전서숙은 신학문을 보급하고 철저한 민족교육을 일관하는 등 독립군 양성소 역할을 담당했다. 비록 보재와 석오 그리고 정순만(鄭淳萬) 등이 헤이그 밀사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바람에 자금난과 일제의 간섭을 못이겨 1907년 10월경 문을 닫고 말았지만 짧은 기간에 적지 않은 인재를 키워냈다. 그리고 서전서숙의 영향으로 이 일대에 명동학교(明東學校)과 광성학교(光成學校), 창동 및 북일학교 등이 잇달아 세워지면서 북간도 일대의 민족교육사업에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우당은 석오와 함께 전국 규모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결성하기 전에 중요한 일을 기획했는데, 그것이 바로 헤이그 특사 파견이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보재를 비롯하여 이위종(李瑋鍾)·이준(李儁) 세 사람을 밀사로 파견한 이 사건의 배후에 우당이 있었다. 어떤 경로로 세 사람이 헤이그에 파견되었는지는 그동안 미궁 속에 빠져 있었는데,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던 성재가 고종의 서명과 옥새가 찍인 친서를 우당과 전덕기(全德基), 그리고 전덕기의 처 이종사촌이 되는 상궁 김씨를 통해 보재에게 전달했다.
우당은 만국평화회의 개최 소식을 듣고 한국통감부와 친일 관료들의 감시를 피해 안호영이라는 궁중 내시를 통해 고종 황제에게 회의사절을 특파할 것을 주청했다. 대표로는 만주용정에서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 있던 보재와 이준을 추천했다. 그리하여 고종은 조카 조남승을 통해 내탕금(內帑金)과 신임장을 헐버트 박사에게 주었고, 헐버트는 이를 다시 우당에게 전하여 보재에게 건네주도록 한 것이다.
우당이 추천한 정사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부사전 평리원검사 이준과 러시아 주재 한국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등 3인으로 구성된 한국 대표단은 1907년 6월 헤이그에 도착해 시내의 융(jong)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태극기를 게양한 다음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른 의장은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Nelidof) 백작과 개최국인 네덜란드의 외무대신 후온데스는 물론 미국·프랑스·중국·독일 등 각국 대표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세 특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영국의 언론인 스테드(Y.T. Stead)가 주관한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었다. 그 결과 즉석에서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는 결의안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만국평화회의를 이용해 외교권을 되찾으려던 이들의 노력은 제국주의자들의 야심에 가로막혀 실패했다.
오히려 헤이그 특사 파견은 고종의 지위를 더욱 위테롭게 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물러나게 하고 순종(純宗)을 등극시켰다. 이에 분개한 군중이 각처에서 일제 군경과 충돌하고, 새로 참정대신이 된 이완용의 집을 방화하는 등 민중의 저항이 높아졌다.
이회영이 헤이그 밀사 파견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그가 1932년 11월 일본 경찰관들의 고문으로 치사했을 때, 신문에 실린 그의 약력에서도 알 수 있다. ‘우당 노인의 약력’ 가운데에는 “헤이그 밀사 음모, 상동예배당 중심 크럽을 안태국·이동녕·전덕기와 조직”이라는 항목도 적혀 있었다. 그가 누구보다 이 사건에 깊이 관여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1907년 7월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이어 8월에는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한국군 시위대(侍衛隊)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參領)이 이에 분노해 자결하자,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가 봉기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당시 우당은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장렬히 전사한 시위대 장병들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현장에서 받은 감동을 ‘시위대 장병을 애도하며’란 제목의 오언절구(五言絶句)로 남겼다.
‘장사가 머리에 총을 쏘아 피 흘리니 / 꽃다운 이름 민공(閔公)과 함께하리다 / 전군이 모두 죽음을 달게 받았으니 / 뜨거운 충의(忠義) 영원히 전해지리다.’ - 이정규(李丁奎)·이관직(李觀稙),「우당 이회영 실기(友堂李會榮實記)」
그러나 시위대의 봉기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 진압되었고, 조선 각지는 일제와 전면전을 치루는 의병항쟁에 휩싸였다.
『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2망국의 한복판에 선 우국지사 ⑵
③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온 몸으로 막으려
1905년 11월 9일,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한 사내가 서울에 도착했다. 일본 군인들의 삼엄한 경호 속에 남대문 역사에 도착한 그 사내는 바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이토가 한국을 방문한 이유는 이른바 보호조약(保護條約)을 체결하기 위해서였다.
일제(日帝)가 을사늑약 체결을 결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계기는 러일전쟁[露日戰爭]에서의 승리였다. 일본이 러시아를 선제공격한 이유는 러시아를 점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자마자 일본 각의에서 ‘한국 보호권 확립의 건’을 의결한 것이 러일전쟁의 이런 배경을 말해 준다. 1904년 4월 8일 의결된 ‘한국 보호권 확립의 건’은 “한국에 대한 정책은 기존 방침과 계획에 근거, 보호의 실권을 장악하는 견지에서 점차 그 토대를 확대해 나가 마침내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고, 그 나라의 대외관계를 모두 우리 손 안에 넣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전문으로 시작되고 있다.
1905년 1월에 러시아의 조차지였던 여순(旅順)을 점령하고, 3월에 만주 봉천회전(奉天會戰)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의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강화(講和)를 제안하자 재빨리 받아들였다. 이미 국력이 많이 소진되었기 때문이었다.
1905년 9월 5일, 미국 뉴햄프셔주의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 각의가 일년 반 전에 의결한 ‘한국 보호권 확립의 건’이 국제적인 동의와 승인을 얻게 되었다. 강화조약 안에 ‘한국에 있어서 일본의 정치·군사·경제상의 특별 권리를 승인할 것’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의 일본 대표인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무대신은 1905년 10월 16일에 귀국했는데, 불과 11일 후인 10월 27일에 일본 각의는 ‘한국 보호권 확립 실행에 관한 각의 결정의 건’을 의결했다. 그 전문은 일본이 조약을 밀어붙이는 속셈을 잘 설명하고 있다.
"한국에서 우리의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은 이미 조정에서 결정된 바이지만 그 실행은 지금이 바로 최적기라고 본다. 왜냐 하면 우리의 결정에 대해 영·미 양국이 이미 동의했을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국가들도 역시 일·한 양국의 특수한 관계와 전쟁의 결과를 감안해서……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결과임을 묵인하여……"
이 결의가 있은 지 12일 후에 이토가 서울에 온 것이다. 이토는 다음날 덕수궁(德壽宮)을 방문해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을 알현하고 무쓰히토[睦仁] 일본 황제가 보낸 친서를 봉정(捧呈)하였다. 본격적으로 을사늑약 체결 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고종은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이토를 물리친 후, 다음날부터 병이 있다 칭하고 거듭 그의 알현 요청을 거절했다.
바로 그 무렵,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의 집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의정부 참찬을 지낸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과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임명되는 석오(石梧) 이동녕(李東寧)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의 표정은 침통했다. 이토의 방한 목적이 한국에 대한 예속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 안의 무거운 공기를 깨며 보재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이토가 우리 나라에 온 저의가 매우 의심스럽소. 러시아와 일본간의 강화조약에서 러시아가 우리 나라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했으니, 이토는 이번에 그 우월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어떤 조약을 맺자고 제시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 조약은 필시 우리 나라에 치명적인 피해를 줄 터이니,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한 대비책을 시급히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석오가 그의 말을 받았다.
“이번 조약은 필경 망국의 조약이 될 터인즉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나라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참으로 통곡할 일이오.”
우당은 목이 메어 길게 탄식하다가 보재를 바라보고 말한다.
“올 것이 온 것이오. 그러나 장탄비분(長嘆悲憤)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보재는 의정부 참찬의 직책에 있으니 영의정 한규설(韓圭卨)과 만나 숙의하도록 합시다. 이토는 조약문서를 내밀고 필경 날인을 요구할 것이니, 그 때 한규설이 조약서를 찢고 그들을 욕하는 것이 어떻겠소?”
우당의 말은 계속되었다.
“내 동생 시영(始榮)이 외부교섭국장으로 있으니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을 만날 것이오. 그리고 민영환(閔泳煥)이 시종무관장으로서 항상 임금 곁에 있으니 이토가 어전에서 조약서를 내밀면 이를 한사코 제지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그러나 시국은 무너지는 왕조를 붙잡으려는 지사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1월 15일 고종을 비공개로 알현한 이토는 협박조로 외교권 이양을 요구했다.
“이 문안은 제국 정부가 여러 가지 고려를 거듭한 끝에 이미 조금도 변동할 여지가 없이 만든 확정안으로서……결코 움직일 수 없는 제국 정부의 확정된 의논인 바, 오늘 필요한 것은 오직 폐하의 결심 여하입니다. 이를 승낙하시거나 거부하시는 것은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만, 만약 거부하시면 제국 정부는 이미 결심한 바 있어, 그 결과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짐작하건대 귀국의 지위는 이 조약을 체결하는 것 이상으로 곤란한 경우에 이를 것이며 더 불리한 결과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 때 고종과 이토의 만남을 전하고 있는「이등박문한국봉사기사적요(伊藤博文韓國奉使記摘要)」는 이토의 이런 의사 표시에 대해 “고종은 매우 당황한 모양으로서 정부에 자문을 구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고 적고 있다. 이토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기의 바람을 일본 황실과 정부에 전해 주기 바란다고 간청했다. 하지만 이토는 강경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희망이 전혀 쓸모없는 것이니 단념하시기 바랍니다.”
16일에는 이토가 직접 조선의 대신들을 불러 조약체결을 강요했고, 다음날에는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대신들을 초대해 점심을 들면서 오후 3시까지 보호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강요했다.
하야시 곤스케의『나의 70년을 말한다』라는 회상기에는 이 때의 정경이 잘 나타나 있다.
‘이토에게 말하기를, 제가 담판을 시작하기 위해서 한국 정부의 각 대신을 회유하여 아침부터 일본 공사관에 참집하도록 하겠으며, 담판이 적당히 무르익어 갈 즈음에 그 자리에 참석하시도록 전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전 중에는 이야기의 매듭이 지어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십송. 그렇게 되면 점심이라도 들고 나서, 아무래도 임금님에게 직재를 바라자…이렇게 이야기가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물론 저도 같이 갈 작정입니다. 그리고 담판의 경과 여하에 따라 당신께서 그곳에 와 주시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전 조치로서는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대장에게 부탁해 둔 파수를 보는 일입니다. 그것은 사전 계획대로 내가 있는 곳에 각 대신이 모이면 그 이야기의 내용이 한국으로서는 매우 큰 문제의 일이어서 열석한 대신들이 싫어할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일단 공사관에서 철수하여 궁중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되면 도중에서 도망치는 놈도 생길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에 신중히 대처하기 위해 몇 명의 헌병을 대치해 두고 도중에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를 해 주었으면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이것도 하세가와 대장에게 부탁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정작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면 대신들 가운데 하나 둘쯤은 자살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나야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없도록 이것도 미리 대비를 해 두었습니다.’
일은 하야시의 계획대로 돌아갔다. 하야시의 통보에 따라 하세가와 대장이 이끄는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궁내 회의장에 들어간 이토는 각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협약의 찬부를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이 반대했을뿐 기타는 찬성이었다. 권중현은 나중에 찬성해 을사오적(乙巳五賊)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끝내 이 조약을 재가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은 황제국이었으므로 황제의 재가 없는 결정은 무효였다. 그러나 이토는 11월 18일 새벽 2시에 을사오적의 찬성을 근거로 조약 체결을 선포했다.
이것이 ‘제1조 일본국 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에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및 사무를 감리 지휘할 것이요…’로 시작되는 망국 조약인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인 선교사인 헐버트(Homer B. Hulbert:1863년~1949년)는 조약 체결 한 달 전 고종 황제의 친서를 휴대하고 워싱턴에 가 있었는데, 11월 26일에 고종이 청나라를 경유해 보낸 비밀전문을 받았다.
“짐은 최근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보호조약이 일본의 위협과 협박을 받으며 강압적으로 맺어진 것이므로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朕)은 거기에 동의한 일도 없으며, 또 앞으로 결코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미국 정부에 이 사실을 전하라.”
그러나 이 비밀전문을 받기 하루 전에 헐버트는 미국의 국무부 장관 루트(Elihu Root)에게서 이런 내용의 서신을 받았다.
“한국 황제가 이미 일본과 새로운 협정을 맺고 일본으로 하여금 친서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를 처리하도록 결정한 이상 황제 친서에 따른 대책을 강구할 수는 없다.”
미국은 을사늑약을 합법적 공식 조약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좌의정을 지냈던 조병세(趙秉世)는 시종무관장 민영환과 함께 백관을 인솔하고 궁궐에 연좌해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연금되었다. 풀려난 그는 고종에게 유소(遺疏)를 올리고 각국 공사에게 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글을 남긴 뒤 자결했으며 민영환 역시 민족에게 거국적인 반일운동을 당부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반면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조약 체결에 찬성해 을사오적이 되었다.
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황성신문(皇城新聞)』사장 장지연(張志淵)은「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일제(日帝)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조약 체결 소식을 들은 우당은 보재·석오와 더불어 종로 네거리에 나와 머리를 땅에 대고 길게 통곡했다. 그는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와 함께 학생과 군중을 종로 거리에 모아 온 국민이 모두 궐기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런 열변에 군중은 뜨겁게 환호했지만 그것으로 왕조의 몰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당은 홍암(弘巖) 나철(羅喆)과 기산도(奇山度)·김석항(金錫恒) 등에게 자금을 주어 을사오적 암살을 계획하도록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우당은 여러 형제와 한자리에 모여 시국을 의논했다. 그는 동생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에게 관직에서 물러나 구국의 길에 나서라고 권고했다. 이에 성재는 자신의 미력함을 통분하면서 사직했다. 또한 조약 체결 며칠 전에 우당의 조카와 외부대신 박제순의 딸이 약혼했었는데, 매국노와 사돈을 맺을 수 없다면서 즉각 파혼하고 절교했다.
형의 말에 따라 사직했던 성재는 고종 황제가 다시 평안도 관찰사를 맡기자 고민했다. 그는 당장 관직을 그만두는 게 능사가 아니라, 이후 광복운동을 위해서는 나름의 준비와 정보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벼슬에 연연해서가 아니라, 관계(官系)에 있으면서 나름의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고 특히 황제 고종과의 비밀연락망을 활용하려 한 것이다. 성재는 이후 국내와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인사들의 활동 소식을 고종에게 보고하고, 신민회와 같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데 일조했다. 형제가 나름대로 역할을 분담한 것도 이런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④ 헤이그 밀사 파견의 숨은 주역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전국 각지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비밀결사단체가 많이 조직되었다. 그 가운데 우당과 석오는 1904년부터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에서 함께 일해왔던 동지들을 규합하여 비밀단체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제가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를 설치하자, 반일운동의 거점을 국외로 옮기기로 하였다. 1906년 초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석오(石梧) 이동녕(李東寧), 시당(時堂) 여준(呂準), 야은(野隱) 장유순(張裕淳) 등이 우당의 집에 모여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자고 협의했다. 이들은 만주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우리 민족이 많이 이주해 간 서간도 일대 가운데 용정촌(龍井村)을 주목했다. 우리 동포가 많아 교육시킬 여건이 좋고, 국내와는 물론 러시아나 연해주도 가까워 외교나 왕래가 비교적 쉬웠기 때문이다.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책임은 보재가 맡았다.
보재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모임에 참석했던 동지들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간단히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났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은 도성 모퉁이에서 기약 없는 망명길에 오르는 보재를 전송했다. 우당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보재는 웃는 얼굴로 작별했다.
보재는 인천에서 중국 상선을 타고 상하이에 머물다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여 용정촌에 도착했다. 석오와 시당이 그의 뒤를 따라 북간도로 갔는데, 이들은 1906년 8월경 용정에 반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건립했다. 보재가 바로 이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06년 10월, 국외 민족운동 기지의 효시인 서전서숙은 이렇게 용정에서 문을 열었다.
서전서숙은 신학문을 보급하고 철저한 민족교육을 일관하는 등 독립군 양성소 역할을 담당했다. 비록 보재와 석오 그리고 정순만(鄭淳萬) 등이 헤이그 밀사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바람에 자금난과 일제의 간섭을 못이겨 1907년 10월경 문을 닫고 말았지만 짧은 기간에 적지 않은 인재를 키워냈다. 그리고 서전서숙의 영향으로 이 일대에 명동학교(明東學校)과 광성학교(光成學校), 창동 및 북일학교 등이 잇달아 세워지면서 북간도 일대의 민족교육사업에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우당은 석오와 함께 전국 규모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결성하기 전에 중요한 일을 기획했는데, 그것이 바로 헤이그 특사 파견이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보재를 비롯하여 이위종(李瑋鍾)·이준(李儁) 세 사람을 밀사로 파견한 이 사건의 배후에 우당이 있었다. 어떤 경로로 세 사람이 헤이그에 파견되었는지는 그동안 미궁 속에 빠져 있었는데,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던 성재가 고종의 서명과 옥새가 찍인 친서를 우당과 전덕기(全德基), 그리고 전덕기의 처 이종사촌이 되는 상궁 김씨를 통해 보재에게 전달했다.
우당은 만국평화회의 개최 소식을 듣고 한국통감부와 친일 관료들의 감시를 피해 안호영이라는 궁중 내시를 통해 고종 황제에게 회의사절을 특파할 것을 주청했다. 대표로는 만주용정에서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 있던 보재와 이준을 추천했다. 그리하여 고종은 조카 조남승을 통해 내탕금(內帑金)과 신임장을 헐버트 박사에게 주었고, 헐버트는 이를 다시 우당에게 전하여 보재에게 건네주도록 한 것이다.
우당이 추천한 정사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부사전 평리원검사 이준과 러시아 주재 한국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등 3인으로 구성된 한국 대표단은 1907년 6월 헤이그에 도착해 시내의 융(jong)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태극기를 게양한 다음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른 의장은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Nelidof) 백작과 개최국인 네덜란드의 외무대신 후온데스는 물론 미국·프랑스·중국·독일 등 각국 대표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세 특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영국의 언론인 스테드(Y.T. Stead)가 주관한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었다. 그 결과 즉석에서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는 결의안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만국평화회의를 이용해 외교권을 되찾으려던 이들의 노력은 제국주의자들의 야심에 가로막혀 실패했다.
오히려 헤이그 특사 파견은 고종의 지위를 더욱 위테롭게 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물러나게 하고 순종(純宗)을 등극시켰다. 이에 분개한 군중이 각처에서 일제 군경과 충돌하고, 새로 참정대신이 된 이완용의 집을 방화하는 등 민중의 저항이 높아졌다.
이회영이 헤이그 밀사 파견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그가 1932년 11월 일본 경찰관들의 고문으로 치사했을 때, 신문에 실린 그의 약력에서도 알 수 있다. ‘우당 노인의 약력’ 가운데에는 “헤이그 밀사 음모, 상동예배당 중심 크럽을 안태국·이동녕·전덕기와 조직”이라는 항목도 적혀 있었다. 그가 누구보다 이 사건에 깊이 관여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1907년 7월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이어 8월에는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한국군 시위대(侍衛隊)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參領)이 이에 분노해 자결하자,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가 봉기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당시 우당은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장렬히 전사한 시위대 장병들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현장에서 받은 감동을 ‘시위대 장병을 애도하며’란 제목의 오언절구(五言絶句)로 남겼다.
‘장사가 머리에 총을 쏘아 피 흘리니 / 꽃다운 이름 민공(閔公)과 함께하리다 / 전군이 모두 죽음을 달게 받았으니 / 뜨거운 충의(忠義) 영원히 전해지리다.’ - 이정규(李丁奎)·이관직(李觀稙),「우당 이회영 실기(友堂李會榮實記)」
그러나 시위대의 봉기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 진압되었고, 조선 각지는 일제와 전면전을 치루는 의병항쟁에 휩싸였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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