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3신민회의 반일운동 ⑵

대모달2011.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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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삼원포(三源浦) 추가가(鄒家街)에 모인 독립운동(獨立運動) 지사(志士)들

 

삼원보(三源堡)는 현재 삼원포(三源浦)라고 부르는데, 작은 강물 세 줄기가 합쳐 흐른다 해서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이회영 일가는 삼원보에서 서쪽으로 3~$칼로미터 떨어진 추가가에 새로운 둥지를 틀기로 했다. 삼원포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오도구(五道溝)는 1895년 김형진(金炯眞)과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두 번 답사하여 보고한 바 있고, 의병항쟁을 지도했던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선생(先生)이 왕조부흥항쟁(王朝復興抗爭)을 구상하며 머물던 곳이다.

 

이회영과 이동녕 일행은 1910년 8월 서간도 답사 때 이곳 이주민들에게서 정보를 듣고 직접 답사한 다음, 군사학교 설립의 적지로 점찍은 것이다. 삼원포 일대가 독립운동 기지 건설지가 된 것은 그곳이 고구려·발해의 옛 땅이었다는 점 이외에도 지리적인 여건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원포는 통화현(通化縣)에서 47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고 유하현(柳河懸)까지도 비슷한 거리이다. 교통이 아주 나쁘다고 말할 수 없고 통화에서 오는 길은 산지가 많고 평야가 적어 다소 산속 깊숙이 들어간다는 인상을 주었다. 게다가 추가가 뒤에는 소고산(小孤山)과 꽤 멀리서도 눈에 띄는 대고산(大孤山)이 있고, 그 뒤에도 산이 연이어 펼쳐 있어 유사시 피신하기에 좋은 지형이다. 또한 비교적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니 장차 군사훈련과 농사일을 함께 할 수 있는 병농체제(兵農體制)를 갖추기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이회영(李會榮)과 이동녕(李東寧)은 이곳 추가가 일대를 첫 군사기지 건설자리로 꼽게 된 것이다.

 

추가가(鄒家街)는 추가가(鄒之街)라고 불리는데, 추씨(鄒氏) 성(姓)을 쓰는 중국인들이 여러 대에 걸쳐 살았기 때문에 그리 불렸다. 이회영 일가는 이곳에서 세 칸 방을 얻어 두 집 권속이 머물렀다. 추가가는 농사라고는 강냉이와 좁쌀, 두태를 짓는 것뿐이었다. 쌀은 2~3백리나 떨어진 곳에서 사와야 했는데, 제사 때나 쌀밥을 지었다. 쌀이 귀한 곳이라 그곳 아이들이 이름 짓기를 ‘좋다밥’이라 했다.

 

이회영 일가가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신민회의 간부나 의병대장 등 많은 독립운동 종사자들도 삼원포 일대로 이주해 합류했다. 안동 혁심유림의 거두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과 김대락(金大洛)·황호(黃浩)·김동삼(金東三) 일가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1911년 1월부터 3월까지 압록강을 건너 삼원포 추가가에 도착하니, 그 일대는 곧 한인촌(韓人村)처럼 변했다.

 

그러자 현지 중국인들은 한국인의 집단 이주 동기를 극히 의심했다. 추씨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의 뒤를 다라 일본군이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여긴 것이다. 급기야 추가네 어른인 순경(巡警) 위 지서장이 유하현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이왕에는 조선인이 왔어도 남부여대(男負女戴)로 산전박토나 일구어 감자나 심어 연명하면서 근근이 부지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오는 조선인은 살림 차가 수십대씩 짐차로 군기(軍器)를 얼마씩 실어오니, 필경 일본인과 합세하여 우리 중국을 치려고 온 게 분명하니, 빨리 고려인(高麗人)을 몰아내주시오……’ - 이은숙,「어느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추씨 중국인들은 회의를 열어 한국인들에게 토지나 가옥의 매매를 일체 거부하고, 한국인들의 가옥 건축이나 학교 시설도 금지하며, 한국인과의 교제까지도 금지한다고 결의했다. 이 때문인지 중국 경찰관 수백여명이 이회영의 숙소를 급습해 조사하기도 했다.

 

이회영이 필담으로 일제의 첩자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러 왔음을 알린 후에야 이들이 물러갔고 그 뒤에 동네사람들이 동정했지만, 이후에도 가옥과 전답을 살 수 없어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같은 시기에 통화현과 유하현에서는 구한국(舊韓國) 교민[韓僑]을 축출한다는 고시문까지 붙었다. 중국의 실정법에 따라 중국인으로 귀화하지 않으면, 즉 입적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조차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좌절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이에 이회영 일행은 토지매매 허가를 얻기 위해 정부 당국과 교섭에 나섰다.

 

④ 만주의 첫 반일운동 단체, 경학사(耕學社) 

 

1911년 어렵게 서간도 일대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첫 삽을 뜨게 된 반일지사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사업은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설립이다. 경학사는 만주 일대 한국인 혁명결사운동의 개시이며, 동북 한국 민족 혁명운동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이는 1909년 미주에서 조직된 국민회(國民會)나 연해주의 권업회(勸業會), 북간도의 간민회(墾民會) 등과 같이 이주 한국인들의 단결과 자치를 꾀하고자 하는 뜻으로 조직된 것이다.

 

1911년 음력 4월경 삼원포 추가가 대고산 아래에서 이주 한국인 3백여명이 모여 노천 군중대회가 열렸다. 이동녕을 임시 의장으로 추대한 이 대회에서 참가자들은 이주 동포들의 안착과 농업 생산을 지도하는 기관으로서 경학사를 조직했다. 경학사는 일제가 ‘105인 사건’ 판결문에서 “서간도에 단체적 이주를 기도하고… 민단을 일으키고 학교 및 교회를 설립하고 나아가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실시해 기회를 타서 독립전쟁을 일으켜서 구한국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다”고 적시한 것처럼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방침에 따라 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 등 망명자들이 창립한 ‘민단적(民團的)인 성격의 자치기관’이었다.

 

경학사는 ‘경학사 취지문’을 통해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으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널리 천명했다. 취지문에서 이들은 칼로 자결하거나 곡기(穀氣)를 끊고 죽는 것으로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하면서, 독립을 쟁취할 힘을 길러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만주 땅이 결코 이민족의 땅이 아니라 고구려·발해가 있었던 우리 조상들이 일군 고토이니, 이곳에서 사람들의 열성으로 희망을 양식으로 삼아 먹지 않은 밥에 스스로 배부르고 곤란을 초석으로 삼아 여기 집 없는 집을 지어 경학사를 조직했다고 설명하였다. 설립자들은 자신들의 무리를 잘 보전하는 것이 한민족 백성을 보전하는 것이며, 경학사를 사랑하는 것이 곧 우리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니 모두 경학사를 중심으로 모이자고 호소했다.

 

또한 군중대회에서 채택한 결의문에 따르면, 경학사는 누구나 농사를 짓는 ‘개농주의(漑農主義)’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표방하였다. 나아가 “기성 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장교로 삼고 애국 청년을 수용하여 국가의 동량인재를 육성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어 군사훈련을 통한 독립군 양성의 목적을 뚜렷이 하였다.

 

경학사 사장에는 이상룡이 추대되었으며, 부사장에는 이회영의 셋째 형인 이철영이 선임되었다. 내무부장에 이회영, 농무부장에 장유순(張裕淳), 재무부장에 이동녕, 교무부장에 유인식(柳寅植)이 각각 선출되었다. 지금껏 별다른 직책을 갖지 않은 채 대개 뒤에서 일을 도모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회영이 내무부장을 맡은 것은 그만큼 경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이고, 이후에도 그러한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후 경학사는 이주민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어서 민호를 배정하고 구획을 정해서 자치제를 실시하는데 긴밀히 관여했다.

 

나아가 경학사는 결의문에 주경야독을 표방한 바대로 밤에 지역주민들의 교육을 맡았다. 의병들과 함께 이곳에 찾아와 무관학교 생도가 되었다는 전성집의 손녀 권영신 어르신이 전하는 ‘이 판서댁과 나의 외조부 그리고 부친’이란 글에서 “일자무식인 부친은 외조부의 권유에 못 이겨 경학사에서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가나다라와 1,2,3,4를 배웠고 장기도 배웠다”라고 증언하듯이, 경학사는 민중계몽의 역할도 담당했다.

 

경학사를 설립한 애국지사들은 군관학교 설립을 서둘렀다. 이회영과 이동녕 등 이주자들은 현지 중국인의 옥수수 창고를 빌료 개교식을 강행했다. 이렇게 해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첫 깃발이 올랐다. 그러나 여럽게 문을 연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는 현지 중국인들의 비협조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학교 이름을 강습소라고 한 이유도 중국인들과 일제 관헌의 의혹을 피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은 이동녕이 맡았는데 새롭게 다시 일어난다는 뜻으로 신흥(新興)이란 단어를 붙였다.

 

신흥강습소는 본과와 특과 두 과정을 두었다. 본과는 보통 4년제 중학 과정이었는데, 교사로 중국인 한 사람과 장도순(張道純)·윤기섭(尹琦燮)을 채용했다. 특과는 군사학을 전수하는 과정으로 6개월, 3개월의 속성과였다. 교두(敎頭)는 이관직이, 대장은 이장녕(李章寧)이 맡았다. 특과를 맡은 이관직·이장녕·김창환 등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특별 우등생으로 최고의 승급에 있던 엘리트들이었다. 이 교관들은 체육 선생으로 근무하였는데, 웬만한 추위에도 새벽 세시만 되면 훈령을 내려 인근의 제일 큰 산을 한 시간에 돌고 올 정도였다고 한다.

 

신흥강습소 학생 수는 최소 40여명이었다. 1911년 음력 12월 18일에 학교 연종(年終) 시험과 진급 포상회가 열렸다. 본과 학생 중 반장과 우등자 5명이, 소학과 학생 중 반장과 우등자 4명이 포상을 받았다. 이어 이듬해인 1912년 7월에 열린 합니하(哈泥河)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에는 7명의 졸업자가 상을 받았다고 한다. 졸업생 중에는 변영태·성주식·강한연 등 약 40명 내외가 1911년 말경 신흥강습소 제1기생으로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흥강습소는 합니하에 군사훈련과 함께 중등 교육과정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의 시설을 갖춘 새로운 학교가 세워지면서 자연히 신흥무관학교 또는 신흥중학교로 변모하였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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