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4.항일무장투쟁의 전초기지 신흥무관학교 ⑵

대모달2011.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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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3천 5백여명의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 없었다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2년간 모교를 위해 복무해야 했다. 각 지방 소학교에서는 이들을 앞 다투어 초빙해갔다. 이들은 학교 운영에 참여하고 지역 주민 계몽을 맡아 낮에는 아동교육, 밤에는 지방 청년의 군사훈련에 힘썼다. 노동강습소와 노동학교도 여러 곳에 설립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이란 비밀결사단체도 조직하였다. 이는 1913년 3월 교장 여준(呂準)과 교감 윤기섭(尹琦燮)을 비롯하여 제1기 졸업생들인 김석(金石)·강일수(姜一秀)·이근호(李根澔)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조직이었다.

 

‘혁명 대열에 참여해 대의를 생명으로 삼아 조국 광복을 위해 모교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함’을 목적으로 삼은 신흥학우단은 첫째 강령이 “‘다물(多勿)’의 원동력인 모교의 정신을 후인에게 전수하자”는 것이어서 처음엔 다물단이라 하였다가 그 뒤 부르기 쉽게 학우단으로 불렸다. 다물은 ‘고토를 회복한다’는 뜻의 고구려식 단어로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신흥학우단은 서간도 청년 독립운동의 핵심 결사로, 삼원보 대화사(大花斜)에 본부가 있었다. ‘혁명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삼았는데, 다음과 같은 선열의 시범을 외쳤다.

 

"1. 나는 국토를 찾고자 이 몸을 바쳤노라

2. 나는 겨레를 살리려 생명을 바쳤노라

3. 나는 조국을 광복하고자 세사(世事)를 잊었노라

4. 나는 뒤의 일을 겨레에 맡기노라

5. 너는 나를 따라 국가와 겨레를 지키라"

 

신흥학우단은 교사와 졸업생이 정단원이 되고 재학생이 준단원으로서 사실상 신흥무관학교의 동창회였으나 실제 조직과 행동은 일반 동창회와 달리 혁명결사였다. 신흥학우단의 사업 중에는 군사적 실력양성과 학교 설립, 노동강습소 설립과 함께 ‘민중의 자위체를 조직하여 주구(走狗) 침입을 예방하는 것’도 들어 있었다. 일제 군경의 습격을 막는 일종의 군대 역할도 겸했던 것이다.

 

신흥학우단은 서간도 지역 이주 한국인들의 계몽을 위해《신흥학우보(新興學友報)》라는 잡지를 만들어 배포하였다. 1913년 6월에 창간된 이 잡지는 격월간 또는 월간으로 발간하였다. 분량이 많음에도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편인데, 잡지가 일반 주민을 상대로 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잡지는 단원과 이주민들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것은 물론, 농업문제나 여성·주택문제 등 이주민들의 당면 사항을 주요 기사로 다루고 학술 지식을 전파하여 이주 한국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신흥학우단 활동에 만족하지 않고 깊은 산속 고원에 제2의 군영을 만들기로 하였다. 신흥학우단이 주동해 정예군대를 양성하기 위한 이 특별훈련대는 중국 당국이나 일제 관헌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백서농장(白西農莊) 또는 유장(酉庄)이라 불리었다. 1917년 봄 무렵부터 백두산 서쪽 작은 산맥이 있는 고원평야인 오관하(五管下)에 있는 소백차(小白此)에 건립된 백서농장 사업은 김동삼(金東三) 등 1회부터 4회까지의 졸업생 약 385명이 참여하였다.

 

사방 200여리 인가조차 없는 적막한 고원지대였던 만큼, 군영은 추위와 배고픔은 물론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정예군대를 창설하겠다는 정열 하나로 군영을 만든 이들은 1919년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이후 한족회(韓族會) 총회에서 폐지 결정을 내리기까지 만 4년 동안 극한 자연환경에 맞서 버텼다. 비록 군영 설치에는 실패했으나 백서농장의 경험은 이후 독립전쟁사(獨立戰爭史)에 값진 밑거름이 되었다.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총장과 정의부(正義府) 의용군 참모장을 지내며 ‘만주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김동삼의 활약은 물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참의부(參議府) 등에서 활동한 지사(志士)들도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용맹성과 단결력을 갖추었다.

 

한편, 1919년 2월 멀리 일본 제국주의 심장부인 도쿄 한복판에서 불붙기 시작한 “조선독립만세” 시위운동은 3월 내내 전 한반도 일대와 중국 관내 및 만주에 커다란 변화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서간도 일대에도 3·13 만세 시위 이후 고조된 독립운동 열의에 부응하기 위해 그 해 4월에 한족회와 군정부가 발족되었고, 여기에서 신흥무관학교를 확충하는 일이 논의되었다. 몰려드는 청년들을 수용하기에는 합니하가 지리적으로 외지고 협소하여 불충분했던 것이다.

 

이에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고산자진(孤山子鎭)으로 본부를 이전하고 군관학교를 늘려 군사교육을 확대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919년 5월 초순 신흥무관학교 본부를 고산자진 대두자 마을로 옮기고, 합니하 신흥무관학교는 분교로 두어 김창환(金昌煥)이 교장직을 맡게 하였다. 대두자 신흥무관학교는 현재 독립군의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승리를 기뻐한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전승향(全勝鄕) 승희촌(勝喜村)’이라 불리는 조선족 마을 뒷산에 위치해 있다.

 

대두자 마을에서 산길로 뻗은 용강(龍岡)산맥을 넘으면 곧장 합니하 신흥무관학교가 나오는데, 이는 상호 연락망을 갖추고 유사시를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밖의 지방에서도 결사대 조직의 목적으로, 17세부터 30세까지의 남자들을 모집해 약 3개월의 속성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시달렸다. 마적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1919년 7월 하순 유하현 고산자에 있던 신흥무관학교 본교의 교감인 윤기섭과 교관 박영희, 그리고 학생 여러 명이 장강호가 거느린 마적 무리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내부 문제도 불거졌다. ‘윤치국 치사 사건’이 그것인데 이 사건은 고산자의 본교에서 윤기섭 교감에 대한 배척문제로 파벌이 생겨 급기야 졸업생인 윤치국이 희생당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유가족 측의 항의가 극심하자, 무관학교 사이에서도 편이 갈려 서로 감정이 악화되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한국인 사회의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급기야 교장인 이장녕이 사임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한족회의 서무사장(庶務司長) 김동삼이 사태가 확대되지 않는 범위에서 겨우 수습했지만, 저하돤 사기를 만회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 일제의 압력도 가해졌다. 일제는 만주 지역의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1920년 5월 만주 군벌 장작림(張作霖)과 봉천·길림 등지에서 중·일합동수사를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봉천성 안에 일본인 경찰 간부를 수사반장으로 하는 합동수사반이 편성되었다. 일제는 5월부터 8월 중순까지 여러 현을 돌며 독립운동자들을 체포하고 살해하였다. 이에 따라 결국 신흥무관학교도 1920년 8월에 폐교되기에 이른다. 이 지역의 대표적 무장 단체인 서로군정서는 일제의 수색전을 피해 일시 피난하기로 하고 교성대를 편성해 생도들을 유하현에서 안도현으로 이동시켰다. 이렇게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12월 첫 졸업생을 낸 이후 1919년 11월 안도현 삼림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본교 및 분교를 통틀어 약 3천 5백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사(民族解放運動史)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기로 결심했고, 졸업 후에는 대부분 독립군의 장교·병사나 비밀결사단체의 특공대원이 되어 일제(日帝)와 맞서 싸웠다.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성과인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은 신흥무관학교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1천 4백여명의 독립군 장병들은 1만 5천여명의 일본군을 상대로 10회의 교전을 통해 일본군 3천여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리며 일제를 경악에 빠뜨렸다. 이 청산리대첩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용사들이 대거 참전했다.

 

승전(勝戰)을 이끌었던 독립군 부대는 김좌진(金佐鎭)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이었다. 1919년 8월 이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가 출범했을 때,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이장녕(李章寧)은 북로군정서에서 참모장이라는 요직을 맡고 있었다.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은 신흥무관학교에 요청해 김춘식(金春植)·오상세(吳祥世)·박영희(朴寧熙)·백종렬(白鍾烈)·강화린(姜華麟)·최해(崔海)·이운강(李雲岡) 등을 교관으로 초빙해 자체의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운영했다. 이들이 훈련시킨 독립군 장병들이 바로 청산리대첩에서 막강한 일본군을 격퇴한 주역들이었다.

 

청산리대첩에서 박영희는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부관 겸 사관연성소 학도단장으로, 강화린은 제1중대장 서리로, 오상세는 제4중대장으로, 그 밖에도 백종렬·김훈 등이 소대장으로 각각 참전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들처럼 훈련받은 장교들이 있었기에 일제(日帝)의 강력한 정규군을 대적하여 승전(勝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간도 지역의 무장독립군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도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대거 가담해 있었다. 김학규(金學奎)와 백광운(白狂雲)을 비롯해 오광선(吳光鮮) 등 서로군정서와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간부로 활동했던 이들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만주 지역의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국민부(國民府) 등 독립운동 무장 단체에도 신흥무관학교 출신 지사들이 빠지지 않았다. 또 의열단(義烈團)과 광복군(光復軍)처럼 국내와 중국 본토에서 벌어지는 무장투쟁의 현장에는 반드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있었다.

 

만주에 남아 중국공산당 휘하의 항일유격대에 참여한 이들도 많았다. 중공만주성위원회의 군위서기이며 홍군 참모장을 맡은 양림(楊林)이나 중공북평시위 서기였던 장지락(張志樂)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이회영과 그 일가 형제가 뿌린 작은 불씨는 신흥무관학교라는 불꽃으로 살아나 만주 벌판을 활활 타오르게 했던 것이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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