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6왜 임시정부 수립을 반대했는가? ⑴

대모달2011.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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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임시정부를 둘러싼 파문

 

1919년 2월 북경(北京)으로 망명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지사(志士)는 그 곳에서 동생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과 석오(石梧) 이동녕(李東寧)을 다시 만났다. 당시 북경에는 이들 외에도 조성환(曺成煥)·이광(李光) 등이 망명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중국 각지에서 경쟁적으로 임시정부가 조직되는 등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을 계기로 독립운동의 기세가 불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심지어 독립이 다 된 것처럼 생각하는 분위기까지 있었다. 이범석(李範奭)은 자서전『우등불』에서 “기미년(己未年) 직후 상해의 우리 나라 사람은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독립이 다 된 것 같은 기대감 속에 있었기 때문에 국적을 밝히고 있어 중국 사람은 한국 사람을 알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상주의적 성향이 강한 민족성 때문에 곧 독립이 쟁취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우당과 성재, 그리고 석오와 우천(藕泉) 조완구(趙琬九) 등이 상해(上海)에 도착했을 때는 이런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상해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독립운동가도 많이 모여들었다. 상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에서 들불같이 일어난 만세운동에 한껏 고무되어 향후 독립운동을 어떻게 지도해 나갈 것인지를 두고 활발히 토론했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임시정부 수립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우당은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왜 우당은 당시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선호하고 주장하는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하였을까? 3·1반일시위운동이 전국 각지에 해외 각지에서 들불처럼 퍼지고 곧 독립이 될 것처럼 모두가 흥분하여 다투어 새로운 정부와 지도부를 만들자고 하는 판에 그는 어째서 홀로 이를 거부한다고 했을까?

 

우선 우당은 지난 6년 동안 국내에 잠입해 다양한 인사들과 젊은이들을 만나면서 국내의 인심, 특히 청년들의 정신에 뚜렷한 변화가 일고 있음을 보았고, 이것이 세계적인 추세라는 것을 이해하였다. 즉 과거와 달리 국내의 주요 인사들과 젊은이들은 이미 겉모습만 화려한 황제 중심의 봉건왕조가 아니라 어렴풋하게나마 자유와 평등, 인권사상이 담긴 민주주의 체제를 갈망하고 있었으며, 특히 다수의 군중이 몇몇 지도자를 무조건 뒤따르는 일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고종 황제가 붕어(崩御)한 이 시점에서 어느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모이고 단결을 꾀한다는 것이 이제 불가능하며 무의미한 희생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이미 지난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이나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을 통해 뼈저리게 겪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대다수의 국외 지도자들은 다년간의 망명생활 때문에 급변하는 국내 정세나 인심 동향을 모른 채 여전히 누구를 중심으로 뭉칠 것인가만 고민하고 있음을 우당은 탄식했다. 심지어 동생인 성재나 평생 동지인 석오조차도 어떤 인물을 중심으로 단체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어 그들과 많은 격론을 벌였고, 결국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우당은 이 문제가 장차 한국 독립운동의 앞날에 나쁜 영향을 끼칠게 분명하므로 서둘러 해외 동지들과 만나 국내 실정을 얘기하고 의견을 나누고자 하였다.

 

우당의 당시 의견은 첫째 군주시대가 이미 몰락하고 정세가 확연히 달라진 만큼 그에 걸맞은 새로운 운동 방향과 방법을 세워야 한다는 것, 둘째 우리가 지닌 온 힘을 합하여 하나로 단결된 항쟁을 해야 하는 만큼 과거에서부터 내려온 지방색 또는 인물 중심의 대립을 일체 근절하여 통합의 방법을 강구하자는 것이었다.

 

이처럼 우당은 당시 3·1반일시위운동으로 조성된 국내외에 독립운동 기운을 정부라는 행정적인 조직보다는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본부를 통해 지도하고 통합해 나가자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각 독립운동 조직이 서로 연락체계를 갖추어 실제 중복이나 마찰 없이 운동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조직 형태가 정부라는 행정적인 조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유연합적 독립운동 지도부를 구성하자는 새로운 제안을 한 것이다. 우당이 1919년 3월 하순 상해에서 온 현순(玄楯) 목사(牧師)와 함께 상해로 출발해 초기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 가담한 것은 이런 방안을 계속 주장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갈적봉(葛赤峰)이 1945년에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펴낸『조선혁명기(朝鮮革命記』에는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구성된 임시의정원 29명의 대표 명단이 나오는데, 여기에 우당은 동생인 성재를 비롯해 김동삼(金東三)·조소앙(趙素昻)·김대지(金大地) 등과 더불어 동삼성(東三省) 대표로 분류되어 있다.

 

임시의정원에서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헌법을 기초하게 되자 우당은 다시 석오와 우천, 그리고 손정도(孫貞道)·조소앙 등을 차례로 만나 정부가 아닌 독립운동의 총본부를 조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부를 조직하면 지위와 권력을 다투는 분규가 끊이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도 우당이 정부 조직을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였다.

 

그러자 우당의 진심을 오해한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우당이 구황제(舊皇帝)를 다시 추대하려는 복벽주의자(復辟主義者)이기 때문에 정부 조직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 때만 해도 우당은 아나키즘(Anarchism)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때 벌써 정부 형태보다는 각 조직이 협동·협력할 수 있는 독립운동본부 조직을 주장한 것은 그에게 선천적인 아나키스트(Anarchist) 기질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상해의 프랑스 조계(租界) 금신부로(金神父路)에서 개최된 임시의정원 회의는 곧 내홍(內訌)에 휩싸이고 만다. 이승만(李承晩)이 내각책임제하의 국무총리로 천거되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단재가 이승만의 국무총리 피선에 강력하게 항의한 이유는 이승만이 미국 정부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인물이라는 데 있었다.

 

이승만은 1919년 초기 파리 강화회의에 미국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의 대표로 파견되어, 그 해 2월 25일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위임통치를 요청하는 공한을 보냈다. 단재는 이것을 문제삼았다.

 

"미국 대통령 각하, 대한인국민회 위원회는 본 청원서에 서명한 대표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공식청원서를 각하에게 제출합니다……우리는 자유를 사랑하는 2천만의 이름으로 각하에게 청원하니……열강이 먼저 일본의 학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장래 완전한 독립을 보증하고 당분간은 한국을 국제연맹 통치 밑에 두게 할 것을 빌며……"

 

이것이 이승만이 보낸 청원서이다. 이승만이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큰 파문과 분노를 일으켰다. 이 내용은 국내는 물론 상해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미국에 사는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과 단재의 친구가 그 원문과 번역문을 상해의 단재에게 보냄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상해의 같은 여관에서 단재와 함께 기거하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先生)의「독립운동비화」를 들어 보자.

 

"하루는 백암 선생과 내가 여관에서 있자니까 신채호씨가 편지 한 장을 들고 들어와 아무 말도 없이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기에 말도 없이 우시오?”라고 물었더니, 그는 미국의 친구가 보내온 서신을 내보였다. 물론 왜인의 한국 침략이 분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조국을 미국의 위임통치하에 넣겠다고 하므로……우리 3인이 통곡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 3인은 이승만씨를 임시정부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의 제거 공작에 착수했다."­-『경향신문(京鄕新聞)』1962년 3월 2일자. 

 

단재는 이승만을 이렇게까지 성토했다.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은 따지고 보면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던 나라를 왜적에게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되찾기도 전에 팔아먹으려 한 놈이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임시정부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19년 7월에 개최된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충청도 의원으로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의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재는 결국 임시정부를 떠나고 만다. 1919년 8월에 개최된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상해와 노령, 국내에서 수립된 3개처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大韓國民議會·大朝鮮共和國漢城政府]의 통합을 추진하면서 통합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기 때문이었다.

 

단재가 임시정부 자체에 등을 돌렸다기보다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임정(臨政)에 등을 돌린 것이었다. 단재는 임시정부가 자신들이 제기한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를 ‘이승만과 사감(私感)이 있는 자의 고발’이라고 격하하며 철저히 조사하지 않자 임시정부에 대해 분노를 금치 못했다. 단재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죄는 더 중대’하다며 임시정부를 맹렬히 성토했다.

 

이승만 비판 세력과 옹호 세력 사이의 분열이 심각해지자 나창헌(羅昌憲)이 검사가 되고 최창식(崔昌植)이 재판장이 된 특별법정이 열리기도 했다. 나창헌 검사가 이승만을 위음통치 청원죄로 기소하였고, 최창식 재판장이 이를 받아들여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했다. 그러나 이 역시 한때의 소동으로 끝나고 이승만의 대통령직은 고정되어 갔다.

 

임시정부는 출범부터 전 독립운동가의 총의로 출발하지 못하고 이승만을 거부하는 세력과 맞서는 형태로 출범해야 했다. 그 이후로 임정에 실망한 독립운동가들은 상해를 떠나기 시작했는데 우당 이회영 지사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우당이 북경으로 돌아온 것은 1920년 3월경이었다. 우당뿐만 아니라 임시의정원 의장을 맡았던 석오 이동녕과 재무총장이었던 성재 이시영, 외무총장이던 박용만(朴容萬)을 비롯해서 단재 신채호·우천 조완구와 조성환·이광·김규식 등이 북경으로 돌아왔다. 물론 이들 모두가 임정에 반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우당과 단재, 박용만 등은 반임정(反臨政) 노선을 뚜렷이 한 인물들로서 이른바 이승만을 규탄하는 북경 그룹의 주요 성원이 되었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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