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10 다물단과 김달하 피살사건 ⑵

대모달2011.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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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망명자의 숙명, 가난

 

우당의 북경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그가 북경의 이안정(二眼井)에서 천안문 남쪽 영정문(永定門) 안의 관음사(觀音寺) 호동(胡同)으로 이사한 이유도 단순히 집값이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1년에 두어차례씩 와서 운동자금을 주던 임경호가 불필요한 오해 탓에 구타를 당하고 발길을 끊은 것이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이규창은 이 시절을 1주일에 세 번 밥을 지어 먹으면 재수가 대통한 것이라며 북경의 최하층민이 먹는 ‘짜도미’로 쑨 죽 한 사발로 끼니를 때우는 때가 많았다고 회고하였다. 심산의 자서전에도 우당의 어려운 생활 형편이 잘 드러나 있다.

 

"우당 이회영은 곧 성재(이시영의 호)의 형이다. 가족을 데리고 북경에 우거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생활 형편이 극난한 모양이었지만 조금도 기색을 나타내지 않아 나는 매우 존경하였다. 하루는 내가 우당을 집으로 찾아가서 함께 공원에 나가 바람이나 쏘이자고 청하였더니 거절하였다.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자못 초췌한 빛이 역력했다. 내가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여 그의 아들 규학에게 물었더니, “이틀 동안 밥을 짓지 못하였고 의복도 모두 전당포에 잡혔습니다. 아버지께서 문 밖에 나서지 않으시려는 것은 입고 나갈 옷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 주머니를 털어 땔감과 식량을 사 오고 전당포에 잡힌 옷도 찾아오게 하였다. 이윽고 규학이 의복을 들고 와서 올리니 우당은 “이것은 김창숙씨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냐?”고 하기에 나도 “선생이 나한테 실정을 말씀하지 않다니 원망스럽소이다” 하고 한바탕 웃었다. 그로부터 우의가 날로 더욱 친밀해졌다."

 

젊은 동지들이 상해로 떠난 상황에서 우당의 어려움은 더해 갔다. 결국 우당은 궁여지책으로 부인 이은숙을 국내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1925년 반 년 동안 김달하 피살사건의 여파로 반 이상 굶어 지내게 되니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이은숙은 국내로 돌아가 생활비라도 다소 마련해 오기로 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이 때의 광경을 이은숙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작별하고 나올 때 가군께서 내가 떠나는 걸 보지 않으시려고 그러셨던지, 현숙이 7세라, 엄마를 따라 나서는 걸 저의 부친께서 데리고 들어가며 달래시기를, “네 어머니는 속히 다녀올 제 과자 사고 네 비단 옷 해 가져올 거다” 하며 달래시던 말씀 지금도 역력하도다. 슬프다! 이 날이 우리 부부 천고영결(千古永訣)이 될 줄 알았으면 생사간(生死間)에 같이 있지 이 길을 왜 택했으리요?"

 

무사히 귀국한 이은숙은 친척과 우당의 동지 이득년(李得秊)·유진태(兪鎭泰) 등에게 다소간 변통을 해 북경에 보낼 수 있었다. 특히 우당의 의형제인 진사 이씨가 1백원을 주어 부쳤으나 이은숙의 회고대로 ‘그 돈을 부친 후로는 1백원이란 다시 생각할 수도 없는’ 거금이 되었다. 모든 재산을 다 팔아 독립운동에 바친 터라 더 이상 돈을 마련할 방도가 없었다.

 

이은숙이 귀국한 1925년 무렵 국내의 독립운동 의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3·1운동 직후 곧 독립이 다 된 듯하던 기운이 꺾이자 독립은 요원한 것이 되어,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들의 자금 모듬에 극히 냉담했던 것이다. 독립운동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이은숙은 독립운동 자금 모금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어렵고 그 자신 한 몸 추스리기도 힘들게 되자 친척 집안을 전전하며 일을 도와 주는 것으로 호구지책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은숙은 국내로 잠입할 때 이미 임신한 몸으로서 귀국한 이듬해 2월에 막내 이규동(李圭東)을 순산했다. 그러나 이후 산후조리 때문에 활동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진사 이씨가 준 1백원을 중국으로 부친 일을 일본 경찰이 알아차리고 수사에 나서 더욱 곤란을 겪었다. 며느리 조규진이 시집 올 때 가져왔던 한복을 판 돈이라고 말을 맞추어 구속은 겨우 모면했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자금 모금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은숙은『동아일보(東亞日報)』사장 김성수(金性洙)의 동생 김연수(金秊洙)가 경영하는 고무공장에서 여공생활을 하기도 하고, 유곽(遊廓) 기생들의 옷 수선 등을 하는 등 근근이 돈을 모아 중국으로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이니 부인을 고국에 보냈어도 우당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천진에 살고 있던 이석영 일가와 합쳐야 했다. 영의정 이유원이 물려준 만석 재산을 모두 털어 독립운동에 쓰고 자신 한 몸 의탁할 곳이 없게 되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석영 부부와 아들이 북경으로 와서 함께 기거하게 되지 그렇지 않아도 궁핍한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아들 이규창은 형수의 입을 빌리는 형식으로 이렇게 자서전에 적고 있다.

 

"쌀이 없어 종일 밥을 못 짓고 밤이 다 되었다. 때마침 보름달이 중천에 떴는데, 아버님께서는 시장하실 텐데 어디서 그런 기력이 나셨는지 처량하게 퉁소를 부셨다. 하도 처량하여 눈물이 저절로 난다며 퉁소를 부시니 사방은 고요하고 달빛은 찬란한데 밥을 못 먹어서 배는 고프고 이런 처참한 광경과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시어머님도 안 계시는데 아버님 진지를 종일 못 해 드리니 얼마나 죄송한가 생각을 했다."

 

이렇게 굶으며 지내던 무렵 구세주처럼 찾아온 인물이 성암(星巖) 이광(李光)이었다. 일본 와세다대학과 중국 남경의 민국대학을 졸업한 성암은 신민회(新民會) 출신으로 우당과 함께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운영한 가까운 동지였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북경 주재 외무위원을 겸임하며 한·중 양국의 외교사항을 처리할 만큼 중국통이었다.

 

성암은 근 1년여 동안 소식이 두절되었다가 불쑥 나타났다. 그 1년 동안 성암은 섬서성 출신의 중국 국민군 부사령관으로서 제2군장 및 하남성 독판을 역임한 호경익(胡景翼)의 행정고문이 되어 있었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던 이회영 일가에게 성암의 출현은 하나의 복음이었다. 성암이 호경익으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성암은 그 자금으로 ‘할 일’이 있다면서 상해의 아나키스트들을 불렀다.

 

상해의 젊은 아나키스트들이 권총과 폭탄을 구해 올라오는 동안 우당은 천진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어느 정도 알려진 북경을 떠나 천진을 새로운 운동 근거지로 삼기로 한 것이다. 북경 집에서는 이석영이 기거하고 우당은 천진의 프랑스 조계지 대길리(大吉里)로 옮겼다. 프랑스 조계지는 내전 때 부호들의 좋은 피난처였기 때문에 집값이 비쌌으나, 일본 영사관 경찰대의 수색을 피할 수 있었다. 우당은 성암의 자금으로 천진에 집 두채를 구해 한채는 이회영 일가가 쓰고, 다른 한 채는 상해에서 오는 동지들의 숙소로 삼기로 했다.

 

그동안 무기를 구입해 오라는 연락을 받은 상해의 아나키스트들은 무기 중개상 조기천(曺基天)을 통해 권총과 폭탄 10여정을 구입한 후 두꺼운 책을 폭탄과 권총 모양으로 오려내어 넣은 후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천진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 화암을 비롯해 이을규·이정규·백정기·이상일(李相日)·이기인(李基寅) 등 상해의 아나키스트들이 대거 도착하자, 천진은 자연히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본거지로 변했다. 도착 소식을 들은 성암은 우당의 집으로 달려가 ‘할 일’에 대해 설명했다.

 

독립운동에 획기적인 전기가 있을까 기대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무기를 운반해 온 이들은 성암의 설명을 듣고 실망했다. 성암의 계획은 결국 호경익의 정적을 제거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에 섣불리 나섰다가는 자칫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중국 내 입지가 축소될 가능성이 컸다. 화암의 회고대로 ‘잘 돼도 소득은 없고 잘못되면 중국 군벌과의 싸움이 되어 무모한 희생만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경익으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받았으므로 거행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런 곤란한 문제는 호경익이 1925년 말 급사(急死)하면서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천진에 대거 모인 아나키스트들은 성암이 준 자금으로 식생활은 해결할 수 있었으나, 점차 생활비가 떨어지면서 다시 곤란을 겪게 되었다. 생활 규모를 줄여애 했으므로 집세가 싼 천진 남개(南開)의 대흥리(大興里)에 방 두칸을 빌려서 이사를 했다. 새로운 일거리도 찾고 규모도 줄이기 위해서 화암은 북경으로 가고, 이을규·정규 형제와 백정기만 천진에 남게 되었다. 우당과 아들 규창 그리고 세 동지가 한 방에 기거하고 다른 방은 송동집 아주머니와 현숙이 썼다.

 

이 무렵 상해에서는 한·중·일 세 나라의 아나키스트들이 조직적인 대중운동을 전개하려는 움직임이 크게 일었다. 이들은 대중운동의 두 축인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노동운동의 방법으로 상해에 노동대학을 설립해 노동운동가를 조직적으로 배출해 공산주의와 이론적, 실천적으로 맞서 싸우기로 했다. 농민운동 쪽에서는 복건성(福建省)에 농민자위조직인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를 설립해 군벌·마적들에게 대항하였다.

 

이 운동에 아나키스트 진망산(秦望山)·진춘배(陳春培)·양용광(梁龍光) 등이 한국 동지들의 참가를 요청한 것이다. 이을규·정규 형제가 중국인 아나키스트 이석증 등과 함께 상해노동대학의 주비위원(籌備委員)이 되었다.

 

이을규는 곧 우당에게 편지를 보내 이 대학에 중·고등학교를 부설하기로 했다면서 이규창을 상해로 보내라고 했다. 학비를 면제해 줄 뿐만 아니라 장차 대학까지 갈 수 있다는 희소식이었으나, 불행히도 상해까지 갈 여비가 없었다. 배삯이 6원이었는데, 가진 돈을 모두 합해야 2원밖에 안 되어서 무임승차하는 수 밖에 없었다. 선표(船票)가 없으면 식사를 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 배에서 오송(吳淞) 대학생들을 만나 그들이 규창을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는 고려인 독립운동가 자손이라며 밥을 사주었다.

 

이규창은 상해의 프랑스 조계 애인리(愛仁里) 12호를 찾았다. 김달하 피살사건에 연루되어 상해로 피신한 우당의 아들 이규학의 거처였다. 규창이 고생 끝에 도착했으나, 중국 정세가 복잡해지는 바람에 노동대학과 부성 중학교 개교가 불투명해졌다. 규창은 어렵게 찾아온 상해를 떠나 천진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규학과 이을규·정규 형제, 류자명 등이 여비를 보조해주었고, 게다가 백범(白凡) 김구(金九) 지사가 자기의 지갑을 몽땅 털어 대양(大洋) 3원을 준 것도 보탬이 되었다.

 

다시 천진으로 돌아온 규창은 명문 남개(南開)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그러나 등록금이 있을 리 없었다. 규창은 어린 나이에 학교 창설자인 장백령(張伯玲)을 찾아가 사정하는 용기를 냈다. 청년 주은래(周恩來)를 은신시켜주기도 했던 반일지사 장백령이 다행히 열심히 공부해 한국 독립에 이바지하라는 말과 함께 무료로 입학 수속을 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1926년 12월 일어난 나석주(羅錫疇) 의사(義士)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폭탄 투척과 일본인 사원 총살 의거(義擧)와 관련해 이듬해 4월 천진의 일본 영사관에서 우당의 집을 찾아온 것이다. 나석주 의사는 류자명을 통해 심산을 만났고, 우당의 집에 감춰두었던 권총과 폭탄을 받아 거사에 임했다. 일본 영사관 경찰대의 체포를 면한 우당은 구러시아 공사관 공원으로 피신했으나, 추적은 계속되었다. 이에 우당은 상해로 피신하기로 하고 두 딸을 천진에서 운영하는 빈민구제원에 보내고, 아들 규창과 김사집(金思集)을 대동해 무전여행(無錢旅行)을 떠나기로 했다.

 

1927년 5월 3일 새벽, 세 사람은 몰래 집을 나서 상해로 가는 진포선 철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천진을 떠난 그들은 하북성을 지나 산동선 평원을 거쳐 제남까지 닿았다. 굶으며 걷기를 계속해서 근 3개월만에 도착한 곳이 강소성 서주였다. 우당 일행은 서주에서 2백여리 남쪽에 떨어진 숙현에 도착했는데, 이곳에서 우당은 돌연 천진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보따리마저 도둑맞아 돈도 떨어져 수천리 상해까지 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지금쯤 일본 영사관에서도 이들 찾는 일을 포기했으리란 판단에서였다.

 

무전여행을 한다는 소식에 놀란 이은숙은 부랴부랴 일주일 후에 조선은행을 통해 10원을 보내주었다. 우당은 그 돈으로 천진의 빈민가인 금탕교 소왕장(小王莊)에 방을 한 칸 얻었다. 전당포에 잡힌 이불을 찾아와 덮으니 비록 천진의 빈민가 토방(土房)이지만 수개월만에 처음으로 자보는 편안한 잠이었다. 하지만 겨울은 다가오고 생활비는 다시 떨어져갔다. 그때가 1927년 겨울, 우당이 이미 환갑을 넘은 나이였다.

 

우당의 천진 생활은 극도의 가난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러한 가난 속에서도 그의 내면은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이미 향후 항일투쟁의 방략뿐 아니라 독립된 한국사회의 운영과 국제 관계까지도 깊이 숙고했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이 무렵, 우당을 찾은 젊은 혁명가 김종진을 아나키스트로 인도하는 대목에서 잘 나타나 있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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