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종료 휘슬이 울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절실함을 담아 기도했지만 예정된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 축구팀 입장에서 어떤 대가와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피하고 싶은 역사의 시련, 강등. 그 시련이 생각지도 못했던 팀에게 닥쳤다. 아르헨티나의 명문 클럽 리베르 플레이트(River Plate, 이하 리베르)다.
축구가 국교라는 아르헨티나에서 리베르는 보카 주니어스(이하 보카)와 더불어 국가를 받치는 양대 신앙이었다. 리베르의 강등은 거대한 종교 하나가 무너진 셈이었다. 믿음이 사라진 다음 차례는 분노와 폭동이었다. 이성을 잃은 리베르교 신자들은 홈구장인 엘 모누멘탈의 기물을 때려 부수고, 불을 질렀다. 경기장 밖에서는 인근 상점을 약탈하는 등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였다. 엘 모누멘탈은 1978년 아르헨티나가 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에서 사상 첫 우승에 성공하며 트로피를 들어올린 장소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발로 날아온 외신들은 저마다 ‘역사에 남을 강등(Historic relegation)’이라고 외쳤다. 유럽으로 치면 맨유나 바이에른 뮌헨, 레알 마드리드가 2부 리그로 떨어진 것만큼 충격적인 사건인 셈이다.
경기 종료 후 망연자실한 리베르 선수들 (사진=연합뉴스)
아르헨티나 최고 클럽의 추락 리베르는 아르헨티나 리그(Argentine Primera División) 최고의 팀이다. 리그 우승 33회로 라이벌 보카보다 10회나 더 많은 최다기록을 보유했다. 스페인으로 따지면 레알 마드리드, 이탈리아로 따지면 유벤투스와 같은 존재다. 축구에 웬만큼 지식이 있는 팬이라면 흰 바탕에 빨간색 사선의 유니폼을 보고 단번에 리베르를 떠올릴 정도로 세계적인 인지도를 지녔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를 시작으로 마리오 켐페스,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에르난 크레스포 등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명공격수를 배출했다. 현재 유럽 무대를 주름잡는 에스테반 캄비아소,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곤살로 이과인, 루초 곤잘레스, 라다멜 팔카오(콜롬비아), 알렉시스 산체도(칠레)도 모두 리베르를 거쳐갔다.
1901년 창단해 무려 11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리베르는 이제 오는 8월부터 2부 리그 소속이 된다. 그들은 한국 시간으로 27일 오전 열린 승강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2부 리그(Primera B Nacional) 소속의 벨그라노 데 코르도바와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1차전에서 이미 0-2로 패했던 그들은 1무 1패를 기록하며 강등되고 말았다. 리베르의 강등은 생각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던 사건이다. 그들이 승강 플레이오프로 떨어지자 숙적 보카의 간판스타 후안 로만 리켈메는 “우린 라이벌이 사라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며 응원을 보냈을 정도다.
하지만 이미 날개가 꺾인 리베르의 추락을 막을 순 없었다. 승강 플레이오프에 떨어진 것만으로도 엄청난 비난의 압박을 받았던 그들은 원정에서 0-2로 패하고 돌아왔다. 홈에서 만회를 위해 사력을 다했고 먼저 선제골을 넣었지만 이내 동점골을 허용했다. 달아날 기회는 PK 실축으로 무산됐고, 희망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1908년 1부 리그로 승격한 뒤 102년 넘게 유지해 온 역사의 길은 끊어졌다. 프로 리그가 된 1931년 이후 보카 주니어스, 인디펜디엔테와 더불어 한 번도 2부 리그로 떨어지지 않았던 그들이 하루 아침에 추락하고 만 것이다.
리베르의 팬들 역시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경기장을 바라봤다 (사진=연합뉴스)
빚더미와 부패로 무너지다 리베르를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재정난과 부패다. 전임 회장이었던 호세 마리아 아길라르는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재임 기간 동안 무책임한 경영으로 1억 4,000만 달러(약 1,500억원)의 채무를 남긴 채 팀을 떠났다. 그가 저지른 더 큰 죄는 부정부패를 방조했다는 점이다. 프런트 내에서 파벌이 발생해 선수 이적료, 티켓 등 각종 이권을 나눠 먹는 상황이 발생했다. 폭력조직과 연계한 팬들이 감독과 선수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90년대 말부터 이어진 자국 경제난으로 인해 아르헨티나 리그는 전체가 재정 위기를 겪고 있다. 에스투디안테스 등 성적이 좋은 소수 팀을 제외하곤 매해 단기 채무를 갚지 못해 파산보호를 걱정한다. 30년째 아르헨티나 축구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훌리오 그론도나 축구협회장은 위기를 타개할 방안 마련을 내놓지 못했다. 보카 출신인 아르헨티나의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조차도 이번 리베르의 강등에 분노, “아길라르와 그론도나가 리베르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들은 범죄자다”라며 팀을 위기에 빠뜨린 두 사람을 비난했다.
파산을 잠시라도 연기하기 위한 각 팀들의 방안은 두 가지다. 남미 클럽 챔피언을 가리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같은 큰 대회에서의 우승 상금, 그리고 선수를 이적시켜 마련한 자금이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출전하기 위해선 전기(Apertura)와 후기(Clausura) 대회 중 하나를 우승해야 한다. 리베르는 2008년 후기 우승으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했지만 우승에 실패했다. 결국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건 주요 선수들을 파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스체라노, 이과인, 팔카오, 루초 곤잘레스, 디에고 부오나노테 등의 주요 선수를 차례로 팔자 이번엔 전력 붕괴가 발생했다. 2008년부터 다섯 명의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차례차례 경질되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경기 후 소요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리베르 팬들을 향해 물대포를 쏘고 있는 경찰 (사진=연합뉴스)
리베르를 벼랑 아래로 민 기묘한 승강제 전반기 4위, 후반기 9위. 올 시즌 리베르가 전체 20개팀 중 기록한 성적이다. 상식적으로 강등을 당할 성적이 아닌 그들이 왜 강등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을까? 이를 위해선 아르헨티나의 복잡한 승강제 시스템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아르헨티나 1부 리그는 지난 1983년부터 세계에서 가장 독특하고 복잡한 승강제를 도입했다. 해당 시즌의 성적으로 강등팀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최근 세 시즌 간의 성적을 점수화시켜 합산 점수가 가장 낮은 네 팀으로 강등존을 꾸린다. 최하위인 20위는 곧바로 강등되고 19위와 18위는 자체 플레이오프를 치른 뒤 거기서 패한 팀은 강등되고, 이긴 팀은 2부 리그 3위 팀과 홈앤어웨이로 붙는다. 17위는 2부 리그 4위 팀과 홈앤어웨이 플레이오프를 갖는다. 이는 1981년 명문 팀 산 로렌조가 강등되자 강팀이 추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론도나 축구협회장이 강력하게 추진시킨 시스템이다.
하지만 이 독특한 시스템이 오히려 리베르에겐 독이 됐다. 최근 들어 아르헨티나 1부 리그는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다. 리베르와 보카의 양강체제가 허물어진 지 오래다. 리그 전체가 평준화 돼 어느 팀이 우승을 할 지 점칠 수 없다. 2010/2011시즌의 경우 전기 우승은 에스투디안테스가, 후기 우승은 한국인 김귀현의 소속팀으로 유명한 벨레스 사스필드가 차지했다. 리베르는 2007/2008시즌 후기 우승, 보카는 2008/2009시즌 전기 우승이 마지막이다. 만년 하위팀인 라뉴스와 반필드가 통산 첫 우승을 차지한 게 최근의 아르헨티나 1부 리그 상황이다.
이런 춘추전국시대에서 아르헨티나식 승강제가 만든 결과물은 기묘했다. 지난 3년 간 아르헨티나 1부 리그 최고 팀은 벨레스 사스필드, 2위는 라뉴스, 3위는 에스투디안테스가 차지했다. 명문 클럽으로 익숙한 산 로렌조(우승 10회, 역대 4위)는 8위, 보카 주니어스(우승 23회, 역대 2위)는 9위, 인디펜디엔테(우승 14회, 역대 3위)는 13위였다. 그리고 리베르 플레이트는 17위로 강등존에 빠지고 말았다. 리베르는 2008/2009시즌 전기 최하위(20위), 후기 8위를 기록했고 2009/2010시즌에는 전기 14위 후기 13위를 기록했다. 명문 클럽을 살리기 위한 그론도나 회장의 아이디어는 30여 년이 흘러 최고의 팀을 2부 리그로 떨어트리는 재앙을 몰고 온 것이다.
과연 리베르는 내년에 1부 리그로 돌아올 수 있을까? 남미 축구의 슬픈 자화상을 볼 땐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사진=연합뉴스)
남미 축구의 슬픈 자화상 아르헨티나에는 “전국의 축구팬 중 반은 보카고, 반은 리베르다”라는 얘기가 있다. 실제 2010년 아르헨티나 내 한 단체의 조사 결과에서도 보카는 축구팬의 41.5%, 리베르는 31.8%의 지지를 받는 국민 클럽이다. 리베르의 2부 리그 추락으로 다음 시즌 전 세계는 10대 더비 중 하나라는 엘 수페르클라시코(El Superclásico)를 볼 수 없게 됐다. 엘 수페르클라시코는 보카와 리베르가 충돌하는 아르헨티나 최고의 라이벌전이다. 1913년 처음 시작돼 지금까지 300회가 넘는 승부를 겨뤘다. 지난 수년간 부진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리그의 영원한 버팀목이었던 라이벌전마저 최소 1년 간 중지다.
문제는 과연 1년 뒤 리베르를 1부 리그에서 볼 수 있을 지도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상당한 부채를 안고 있는 리베르에게 이번 강등은 더 거대한 재정적 충격을 안겨줄 수 있다. 우선 스폰서십 문제다. 현재 리베르는 스폰서쉽을 통해 매년 600만 달러(약 65억원)를 확보하고 있다. 메인 스폰서인 브라질 석유회사 페트론라스(Petronras)가 250만 달러, 브라질 주방용품 회사인 트라몬티나(Tramontina)가 60만 달러를 후원한다. 아디다스도 스포츠용품 계약을 통해 매년 300만 달러를 안겨줬다. 만일 이들이 2부리그로 떨어진 리베르를 버릴 경우 새로운 스폰서를 구할 수 있을 지가 의문이다. 아르헨티나 경제의 침체로 글로벌 기업 혹은 활황인 이웃나라 브라질 기업들의 도움을 받아왔지만 2부 리그에 있는 팀을 후원하기 위해 선뜻 나설 기업은 없다.
2년 전 다니엘 파사렐라가 회장으로 부임한 뒤 부채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리베르는 여전히 2억 8,000만 페소(약 730억원)의 빚을 지고 있다. 게다가 이번 강등으로 팀의 수입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TV 중계권료도 잃게 됐다. 아르헨티나 1부 리그의 1년 중계권료는 약 1억 페소(약 260억원)인데 그 중 팬이 가장 많은 리베르와 보카가 각각 2,650만 페소씩을 가져갔다. 나머지 팀들이 350만 페소 이하를 가져가는 것을 상상하면 엄청난 액수다. 리베르로서는 100억원이 훨씬 넘는 돈을 한 순간 잃게 될 처지에 놓였다. 리베르가 사라진 1부 리그 중계권료 역시 하락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선수 유출도 본격화된다. 현재 리베르에는 에릭 라멜라, 호드리고 푸네스 모리 같은 아르헨티나의 특급 유망주들이 있다. 유럽 클럽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는 이들은 자연스레 2부 리그로 떨어진 팀을 떠나 유럽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리베르만의 우울한 자화상이 아니다. 브라질 역시 최근 팔메이라스와 바스쿠 다 가마가 차례로 강등당했다. 보카 역시 다음 시즌 10위권 밖의 성적을 맴돌 경우 강등존으로 떨어질 수 있다. 팀 내의 부정부패, 과도한 선수 연봉 등으로 인한 재정 악화를 주요선수를 이적시켜 마련한 자금으로 해결하려 하다 전력 저하로 추락하는 모습은 최근 남미의 명문 클럽들이 몰락하는 하나의 공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유럽으로 떠났던 스타들이 돌아오면 값비싼 연봉을 지불하며 그들을 잡으려고 애쓴다. 그렇게 돌아온 옛 스타들은 추억 외에는 어떤 것도 채워주지 못한 채 1, 2년 뒤 은퇴한다. 전세계 누구보다 축구를 사랑하는 팬들의 무한한 애정으로 커왔지만 냉정하지 못한 경영, 고위층 개인의 축재와 비리, 도덕적 해이로 얼룩진 축구 클럽은 남미 국가 사회 전반의 어지러운 자화상을 그대로 대변한다. 리베르가 보란 듯이 승격해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오는 감동적인 드라마보다 유럽 축구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리즈시절’과 같은 ‘리베르시절’로 고착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야말로 슬픈 남미 축구의 현 주소다.
리베르 플레이트의 몰락, 남미 리그의 자화상
[풋볼리스트 2011-06-28]
팬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종료 휘슬이 울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절실함을 담아 기도했지만 예정된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 축구팀 입장에서 어떤 대가와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피하고 싶은 역사의 시련, 강등. 그 시련이 생각지도 못했던 팀에게 닥쳤다. 아르헨티나의 명문 클럽 리베르 플레이트(River Plate, 이하 리베르)다.
축구가 국교라는 아르헨티나에서 리베르는 보카 주니어스(이하 보카)와 더불어 국가를 받치는 양대 신앙이었다. 리베르의 강등은 거대한 종교 하나가 무너진 셈이었다. 믿음이 사라진 다음 차례는 분노와 폭동이었다. 이성을 잃은 리베르교 신자들은 홈구장인 엘 모누멘탈의 기물을 때려 부수고, 불을 질렀다. 경기장 밖에서는 인근 상점을 약탈하는 등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였다. 엘 모누멘탈은 1978년 아르헨티나가 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에서 사상 첫 우승에 성공하며 트로피를 들어올린 장소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발로 날아온 외신들은 저마다 ‘역사에 남을 강등(Historic relegation)’이라고 외쳤다. 유럽으로 치면 맨유나 바이에른 뮌헨, 레알 마드리드가 2부 리그로 떨어진 것만큼 충격적인 사건인 셈이다.
경기 종료 후 망연자실한 리베르 선수들 (사진=연합뉴스)
아르헨티나 최고 클럽의 추락리베르는 아르헨티나 리그(Argentine Primera División) 최고의 팀이다. 리그 우승 33회로 라이벌 보카보다 10회나 더 많은 최다기록을 보유했다. 스페인으로 따지면 레알 마드리드, 이탈리아로 따지면 유벤투스와 같은 존재다. 축구에 웬만큼 지식이 있는 팬이라면 흰 바탕에 빨간색 사선의 유니폼을 보고 단번에 리베르를 떠올릴 정도로 세계적인 인지도를 지녔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를 시작으로 마리오 켐페스,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에르난 크레스포 등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명공격수를 배출했다. 현재 유럽 무대를 주름잡는 에스테반 캄비아소,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곤살로 이과인, 루초 곤잘레스, 라다멜 팔카오(콜롬비아), 알렉시스 산체도(칠레)도 모두 리베르를 거쳐갔다.
1901년 창단해 무려 11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리베르는 이제 오는 8월부터 2부 리그 소속이 된다. 그들은 한국 시간으로 27일 오전 열린 승강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2부 리그(Primera B Nacional) 소속의 벨그라노 데 코르도바와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1차전에서 이미 0-2로 패했던 그들은 1무 1패를 기록하며 강등되고 말았다. 리베르의 강등은 생각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던 사건이다. 그들이 승강 플레이오프로 떨어지자 숙적 보카의 간판스타 후안 로만 리켈메는 “우린 라이벌이 사라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며 응원을 보냈을 정도다.
하지만 이미 날개가 꺾인 리베르의 추락을 막을 순 없었다. 승강 플레이오프에 떨어진 것만으로도 엄청난 비난의 압박을 받았던 그들은 원정에서 0-2로 패하고 돌아왔다. 홈에서 만회를 위해 사력을 다했고 먼저 선제골을 넣었지만 이내 동점골을 허용했다. 달아날 기회는 PK 실축으로 무산됐고, 희망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1908년 1부 리그로 승격한 뒤 102년 넘게 유지해 온 역사의 길은 끊어졌다. 프로 리그가 된 1931년 이후 보카 주니어스, 인디펜디엔테와 더불어 한 번도 2부 리그로 떨어지지 않았던 그들이 하루 아침에 추락하고 만 것이다.
리베르의 팬들 역시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경기장을 바라봤다 (사진=연합뉴스)
빚더미와 부패로 무너지다리베르를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재정난과 부패다. 전임 회장이었던 호세 마리아 아길라르는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재임 기간 동안 무책임한 경영으로 1억 4,000만 달러(약 1,500억원)의 채무를 남긴 채 팀을 떠났다. 그가 저지른 더 큰 죄는 부정부패를 방조했다는 점이다. 프런트 내에서 파벌이 발생해 선수 이적료, 티켓 등 각종 이권을 나눠 먹는 상황이 발생했다. 폭력조직과 연계한 팬들이 감독과 선수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90년대 말부터 이어진 자국 경제난으로 인해 아르헨티나 리그는 전체가 재정 위기를 겪고 있다. 에스투디안테스 등 성적이 좋은 소수 팀을 제외하곤 매해 단기 채무를 갚지 못해 파산보호를 걱정한다. 30년째 아르헨티나 축구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훌리오 그론도나 축구협회장은 위기를 타개할 방안 마련을 내놓지 못했다. 보카 출신인 아르헨티나의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조차도 이번 리베르의 강등에 분노, “아길라르와 그론도나가 리베르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들은 범죄자다”라며 팀을 위기에 빠뜨린 두 사람을 비난했다.
파산을 잠시라도 연기하기 위한 각 팀들의 방안은 두 가지다. 남미 클럽 챔피언을 가리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같은 큰 대회에서의 우승 상금, 그리고 선수를 이적시켜 마련한 자금이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출전하기 위해선 전기(Apertura)와 후기(Clausura) 대회 중 하나를 우승해야 한다. 리베르는 2008년 후기 우승으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했지만 우승에 실패했다. 결국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건 주요 선수들을 파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스체라노, 이과인, 팔카오, 루초 곤잘레스, 디에고 부오나노테 등의 주요 선수를 차례로 팔자 이번엔 전력 붕괴가 발생했다. 2008년부터 다섯 명의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차례차례 경질되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경기 후 소요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리베르 팬들을 향해 물대포를 쏘고 있는 경찰 (사진=연합뉴스)
리베르를 벼랑 아래로 민 기묘한 승강제전반기 4위, 후반기 9위. 올 시즌 리베르가 전체 20개팀 중 기록한 성적이다. 상식적으로 강등을 당할 성적이 아닌 그들이 왜 강등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을까? 이를 위해선 아르헨티나의 복잡한 승강제 시스템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아르헨티나 1부 리그는 지난 1983년부터 세계에서 가장 독특하고 복잡한 승강제를 도입했다. 해당 시즌의 성적으로 강등팀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최근 세 시즌 간의 성적을 점수화시켜 합산 점수가 가장 낮은 네 팀으로 강등존을 꾸린다. 최하위인 20위는 곧바로 강등되고 19위와 18위는 자체 플레이오프를 치른 뒤 거기서 패한 팀은 강등되고, 이긴 팀은 2부 리그 3위 팀과 홈앤어웨이로 붙는다. 17위는 2부 리그 4위 팀과 홈앤어웨이 플레이오프를 갖는다. 이는 1981년 명문 팀 산 로렌조가 강등되자 강팀이 추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론도나 축구협회장이 강력하게 추진시킨 시스템이다.
하지만 이 독특한 시스템이 오히려 리베르에겐 독이 됐다. 최근 들어 아르헨티나 1부 리그는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다. 리베르와 보카의 양강체제가 허물어진 지 오래다. 리그 전체가 평준화 돼 어느 팀이 우승을 할 지 점칠 수 없다. 2010/2011시즌의 경우 전기 우승은 에스투디안테스가, 후기 우승은 한국인 김귀현의 소속팀으로 유명한 벨레스 사스필드가 차지했다. 리베르는 2007/2008시즌 후기 우승, 보카는 2008/2009시즌 전기 우승이 마지막이다. 만년 하위팀인 라뉴스와 반필드가 통산 첫 우승을 차지한 게 최근의 아르헨티나 1부 리그 상황이다.
이런 춘추전국시대에서 아르헨티나식 승강제가 만든 결과물은 기묘했다. 지난 3년 간 아르헨티나 1부 리그 최고 팀은 벨레스 사스필드, 2위는 라뉴스, 3위는 에스투디안테스가 차지했다. 명문 클럽으로 익숙한 산 로렌조(우승 10회, 역대 4위)는 8위, 보카 주니어스(우승 23회, 역대 2위)는 9위, 인디펜디엔테(우승 14회, 역대 3위)는 13위였다. 그리고 리베르 플레이트는 17위로 강등존에 빠지고 말았다. 리베르는 2008/2009시즌 전기 최하위(20위), 후기 8위를 기록했고 2009/2010시즌에는 전기 14위 후기 13위를 기록했다. 명문 클럽을 살리기 위한 그론도나 회장의 아이디어는 30여 년이 흘러 최고의 팀을 2부 리그로 떨어트리는 재앙을 몰고 온 것이다.
과연 리베르는 내년에 1부 리그로 돌아올 수 있을까? 남미 축구의 슬픈 자화상을 볼 땐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사진=연합뉴스)
남미 축구의 슬픈 자화상아르헨티나에는 “전국의 축구팬 중 반은 보카고, 반은 리베르다”라는 얘기가 있다. 실제 2010년 아르헨티나 내 한 단체의 조사 결과에서도 보카는 축구팬의 41.5%, 리베르는 31.8%의 지지를 받는 국민 클럽이다. 리베르의 2부 리그 추락으로 다음 시즌 전 세계는 10대 더비 중 하나라는 엘 수페르클라시코(El Superclásico)를 볼 수 없게 됐다. 엘 수페르클라시코는 보카와 리베르가 충돌하는 아르헨티나 최고의 라이벌전이다. 1913년 처음 시작돼 지금까지 300회가 넘는 승부를 겨뤘다. 지난 수년간 부진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리그의 영원한 버팀목이었던 라이벌전마저 최소 1년 간 중지다.
문제는 과연 1년 뒤 리베르를 1부 리그에서 볼 수 있을 지도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상당한 부채를 안고 있는 리베르에게 이번 강등은 더 거대한 재정적 충격을 안겨줄 수 있다. 우선 스폰서십 문제다. 현재 리베르는 스폰서쉽을 통해 매년 600만 달러(약 65억원)를 확보하고 있다. 메인 스폰서인 브라질 석유회사 페트론라스(Petronras)가 250만 달러, 브라질 주방용품 회사인 트라몬티나(Tramontina)가 60만 달러를 후원한다. 아디다스도 스포츠용품 계약을 통해 매년 300만 달러를 안겨줬다. 만일 이들이 2부리그로 떨어진 리베르를 버릴 경우 새로운 스폰서를 구할 수 있을 지가 의문이다. 아르헨티나 경제의 침체로 글로벌 기업 혹은 활황인 이웃나라 브라질 기업들의 도움을 받아왔지만 2부 리그에 있는 팀을 후원하기 위해 선뜻 나설 기업은 없다.
2년 전 다니엘 파사렐라가 회장으로 부임한 뒤 부채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리베르는 여전히 2억 8,000만 페소(약 730억원)의 빚을 지고 있다. 게다가 이번 강등으로 팀의 수입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TV 중계권료도 잃게 됐다. 아르헨티나 1부 리그의 1년 중계권료는 약 1억 페소(약 260억원)인데 그 중 팬이 가장 많은 리베르와 보카가 각각 2,650만 페소씩을 가져갔다. 나머지 팀들이 350만 페소 이하를 가져가는 것을 상상하면 엄청난 액수다. 리베르로서는 100억원이 훨씬 넘는 돈을 한 순간 잃게 될 처지에 놓였다. 리베르가 사라진 1부 리그 중계권료 역시 하락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선수 유출도 본격화된다. 현재 리베르에는 에릭 라멜라, 호드리고 푸네스 모리 같은 아르헨티나의 특급 유망주들이 있다. 유럽 클럽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는 이들은 자연스레 2부 리그로 떨어진 팀을 떠나 유럽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리베르만의 우울한 자화상이 아니다. 브라질 역시 최근 팔메이라스와 바스쿠 다 가마가 차례로 강등당했다. 보카 역시 다음 시즌 10위권 밖의 성적을 맴돌 경우 강등존으로 떨어질 수 있다. 팀 내의 부정부패, 과도한 선수 연봉 등으로 인한 재정 악화를 주요선수를 이적시켜 마련한 자금으로 해결하려 하다 전력 저하로 추락하는 모습은 최근 남미의 명문 클럽들이 몰락하는 하나의 공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유럽으로 떠났던 스타들이 돌아오면 값비싼 연봉을 지불하며 그들을 잡으려고 애쓴다. 그렇게 돌아온 옛 스타들은 추억 외에는 어떤 것도 채워주지 못한 채 1, 2년 뒤 은퇴한다. 전세계 누구보다 축구를 사랑하는 팬들의 무한한 애정으로 커왔지만 냉정하지 못한 경영, 고위층 개인의 축재와 비리, 도덕적 해이로 얼룩진 축구 클럽은 남미 국가 사회 전반의 어지러운 자화상을 그대로 대변한다. 리베르가 보란 듯이 승격해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오는 감동적인 드라마보다 유럽 축구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리즈시절’과 같은 ‘리베르시절’로 고착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야말로 슬픈 남미 축구의 현 주소다.
〈풋볼리스트 서호정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