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부인 신씨는 폐비 신씨(愼氏)로 불린다. 연산군이 폐출되면서 그녀 역시 쫓겨났기 때문이다.
거창부원군 신승선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신씨는 만 열두 살 때인 성종 19년(1488) 세자 연산군과 가례를 치렀다.
역사상 가장 황음한 것으로 기록된 연산군의 부인으로 사는 것은 어떠했을까?
<연산군일기> 9년(1503) 6월 13일자는 "왕이 미행하면서 환관 5,6인에게 몽둥이를 쥐어주어 정업원(淨業院) 으로 달려가 늙고 추한 비구니를 내쫓고 연소하고 자색있는 7,8인만 남게 해 간음하니 이것이 왕이 색욕을 마음대로 한 시초이다"라고 적고 있다.
머리 깎은 여승을 좋아하는 변태성욕자처럼 묘사하고 있다.
<중종실록>은 "(연산군이) 처음 전전비. 장녹수를 들여놓으면서부터 날이 갈수록 거기에 빠져들었고, 미모가 빼어난 창기를 궁안으로 뽑아 들인 것이 처음에는 백으로 셀 정도였으나, 마침내는 천으로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연산군이 1,000여 명의 후궁을 거느린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산군 부부의 사이는 어떠했을까?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연산군이 한창 황음에 젖어 갈등에 있어야 할 재위 11년(1505) 8월 연산군은 뜻밖의 조치를 내린다.
연산군은 "왕비 신씨는 현숙하고 부드럽고 가상하여 부덕(婦德)을 갖추 지니되 오래도록 게을리하지 않고 끝내 더욱삼가서....인애(仁愛)을 펴니....부도(婦道)르 권장하여 마땅하다"라고 칭찬하면서 제인원덕왕비 (齊仁元德王妃)라는 존호를 더했다. 이날 연산군은 "지금 세상의 부부가 서로 어김을 한탄하고, 군자에 짝하기가 더욱 어렵다"면서 신씨를 극구 추켜올렸다.
이런 말은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연산군 부부는 실제 사이가 좋았다. 다만 연산군을 쫓아낸 신하들이 자신들의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연산군을 황음무도한 인물로 그려놓은 것이다.
연산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귀양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황음무도하지는 않았다.
중종 1년 9월 7일 연산군을 강화교동에 안치하고 온 심순경(沈順徑)등은 "(연산군이)울타리 안에 들어가자 시녀들이 목 놓아 울었습니다. 제가 하직을 고하니, '나 때문에 먼 길을 고생했으니 고맙다'라고 치하했습니다" 라고 중종에게 보고했다.
약 20일쯤 지난 후 중종 정권은 연산군의 네 아들인 세자 이황과 창녕대군 이성,양평군 이인 및 이돈수(李敦壽)등을 모두 죽여버렸다.
세자와 창녕대군은 왕비 신씨 소생이고, 양평군과 이돈수는 후궁 조씨 소생이었다. 세자가 열 살이었으니 나머지 동생들은 더 어렸을 것이다.
연산군 부부의 사이가 좋았다는 것은 <소문쇄록>의 다음 기사로도 확인된다. 연산군이 교동으로 쫓겨난 후 신씨는 "그때에 여러 대장에게 청해서 귀양간 곳에 따라가지 못한 것이 한이다" 라고 말했다. 연산군은 쫓겨난 지 두 달쯤 후인 중종 1년(1506)11월 6일 사망하는데 독살혐의가 짙다.
교동 수직장 김양필과 군관 구세장(具世璋)이 연산군의 죽음을 보고하면서, "죽을 때 다른 말은 없었고 다만 신씨가 보고 싶다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귀양갔을때 신씨의 반응과 죽을 대 연산군의 마지막 말은 부부의 사이를 잘 말해준다.
신씨는 연산군이 죽은 후에도 31년을 더 살다가 만 61세 때인 중종 32년 (1537) 4월 8일 사망했다.
환갑은 지냈지만 행복한 삶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편과 자식은 물론 친정아버지까지 중종정권에 잃었기 때문이다.
연산군 부인, 거창군부인 신씨
연산군 부인 신씨는 폐비 신씨(愼氏)로 불린다. 연산군이 폐출되면서 그녀 역시 쫓겨났기 때문이다.
거창부원군 신승선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신씨는 만 열두 살 때인 성종 19년(1488) 세자 연산군과 가례를 치렀다.
역사상 가장 황음한 것으로 기록된 연산군의 부인으로 사는 것은 어떠했을까?
<연산군일기> 9년(1503) 6월 13일자는 "왕이 미행하면서 환관 5,6인에게 몽둥이를 쥐어주어 정업원(淨業院) 으로 달려가 늙고 추한 비구니를 내쫓고 연소하고 자색있는 7,8인만 남게 해 간음하니 이것이 왕이 색욕을 마음대로 한 시초이다"라고 적고 있다.
머리 깎은 여승을 좋아하는 변태성욕자처럼 묘사하고 있다.
<중종실록>은 "(연산군이) 처음 전전비. 장녹수를 들여놓으면서부터 날이 갈수록 거기에 빠져들었고, 미모가 빼어난 창기를 궁안으로 뽑아 들인 것이 처음에는 백으로 셀 정도였으나, 마침내는 천으로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연산군이 1,000여 명의 후궁을 거느린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산군 부부의 사이는 어떠했을까?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연산군이 한창 황음에 젖어 갈등에 있어야 할 재위 11년(1505) 8월 연산군은 뜻밖의 조치를 내린다.
연산군은 "왕비 신씨는 현숙하고 부드럽고 가상하여 부덕(婦德)을 갖추 지니되 오래도록 게을리하지 않고 끝내 더욱삼가서....인애(仁愛)을 펴니....부도(婦道)르 권장하여 마땅하다"라고 칭찬하면서 제인원덕왕비 (齊仁元德王妃)라는 존호를 더했다. 이날 연산군은 "지금 세상의 부부가 서로 어김을 한탄하고, 군자에 짝하기가 더욱 어렵다"면서 신씨를 극구 추켜올렸다.
이런 말은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연산군 부부는 실제 사이가 좋았다. 다만 연산군을 쫓아낸 신하들이 자신들의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연산군을 황음무도한 인물로 그려놓은 것이다.
연산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귀양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황음무도하지는 않았다.
중종 1년 9월 7일 연산군을 강화교동에 안치하고 온 심순경(沈順徑)등은 "(연산군이)울타리 안에 들어가자 시녀들이 목 놓아 울었습니다. 제가 하직을 고하니, '나 때문에 먼 길을 고생했으니 고맙다'라고 치하했습니다" 라고 중종에게 보고했다.
약 20일쯤 지난 후 중종 정권은 연산군의 네 아들인 세자 이황과 창녕대군 이성,양평군 이인 및 이돈수(李敦壽)등을 모두 죽여버렸다.
세자와 창녕대군은 왕비 신씨 소생이고, 양평군과 이돈수는 후궁 조씨 소생이었다. 세자가 열 살이었으니 나머지 동생들은 더 어렸을 것이다.
연산군 부부의 사이가 좋았다는 것은 <소문쇄록>의 다음 기사로도 확인된다. 연산군이 교동으로 쫓겨난 후 신씨는 "그때에 여러 대장에게 청해서 귀양간 곳에 따라가지 못한 것이 한이다" 라고 말했다. 연산군은 쫓겨난 지 두 달쯤 후인 중종 1년(1506)11월 6일 사망하는데 독살혐의가 짙다.
교동 수직장 김양필과 군관 구세장(具世璋)이 연산군의 죽음을 보고하면서, "죽을 때 다른 말은 없었고 다만 신씨가 보고 싶다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귀양갔을때 신씨의 반응과 죽을 대 연산군의 마지막 말은 부부의 사이를 잘 말해준다.
신씨는 연산군이 죽은 후에도 31년을 더 살다가 만 61세 때인 중종 32년 (1537) 4월 8일 사망했다.
환갑은 지냈지만 행복한 삶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편과 자식은 물론 친정아버지까지 중종정권에 잃었기 때문이다.
글/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 연구소장
출처 : http://e-dongbrewery.com/bbs/bbs.htm?dbname=B0083&mode=read&seq=1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