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13 만주에서 부는 새로운 바람
대모달2011.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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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아나키스트들과 손을 잡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을 비롯한 북경과 상해의 아나키스트들이 국제연대운동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만주에서는 김좌진(金佐鎭)과 김종진(金宗鎭)을 중심으로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 조직과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 출범이 그것이다. 이러한 새 바람은 실로 우당이 그동안 오랜 세월 꿈꾸어왔던 것이고 이제 그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작은 불씨는 1927년 10월 천진(天津)에서의 사상담화를 거친 김종진 지사에 의해 발화되었다.
김종진은 천진역에서 우당을 만나 큰 사상적 감화를 받은 이후 북만으로 떠나는 기차를 탔다. 고향인 홍성을 떠나 만주와 북경, 광동과 베트남을 거쳐 운남까지 떠돌아다니면서 숱한 고비를 겪었던 김종진이었지만, 노혁명가이자 자신에게 사상적 감화를 준 우당과 작별할 때처럼 북받치는 서러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김종진은 이렇게 천진을 떠나 중동선 목단강(牧丹江)역에 도착했다. 그는 가장 먼저 김좌진 장군을 찾았다. 멀리 고향 홍성에서 오랜 시간을 거쳐 자신을 찾아온 사촌동생을 보고 김좌진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당시 김좌진은 참모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때였다.
김종진은 우선 만주 교포들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키는 한편, 이를 토대로 독립군을 양성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계획을 실천을 옮기려 했다. 이른바 독립전쟁을 위해 ‘둔전양병(屯田養兵)’하자는 계획인데, 그러기 위해 우선 그는 만주 전역을 수개 구역으로 나눠 각 지역별 조직을 확대하여 연합조직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신민부(新民府)가 관할하는 북만주 각 지역에 대한 실태 파악에 나서기로 했다. 교포들의 생활 실태와 의식 정도를 파악한 다음, 그 기초 위에서 실정에 맞는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서였다.
김좌진도 이런 계획에 적극 찬동해 김종진은 1928년 새해 연초부터 여정에 올라 무려 8개월 동안 북만주 각지를 순행했다. 그는 수백리 눈길을 걸어 다니며 민정을 살폈다. 중국 관헌들 속에 잠입해 있는 일본 경찰에 의해 언제 체포될지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조직망을 통해 소개된 인물과 함께 적정을 살핀 후 마을에 들어가야 했다. 이 순방은 눈이 쌓인 엄동설한에 시작하여 삼복더위까지 겪은 후에야 끝이 났다. 김종진은 순방을 통해 동북 지방 이주 한국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
이주 한국인 교포들은 중국인 토착지주들의 일상적인 착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리 교포들이 척박한 불모지를 애써 개간해 옥토로 만들어 놓으면 중국인 지주들이 갖은 명목으로 임대료를 올리거나 땅을 빼앗는 등 무제한의 착취를 강요했다. 일제는 일제대로 친일파 세력을 앞장세워 교란작전을 폄으로써 교포 사회 내부를 분열시켰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이 각종 감언이설(甘言利說)로 농민들을 꾀어내어 자기편으로 만들고 있었다.
당시 김종진과 함께 활동한 이을규(李乙奎)는 ‘좌익이란 자들이 그 지방에 끼어 있거나 넘나드는 곳에서는 반드시 운동자 상호간은 물론이요, 주민들 사이에서도 불화와 알력이 일어나고 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한국인 교포들은 이중 삼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니 김종진이 우려한 것은 이런 핍박을 견디다 못한 일부 교포들이 언제 일본 영사관에 호소할지 모르며, 그렇지 않더라도 일제가 한국인 교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중국 당국과 함께 한국인 독립운동 단체들을 강압·침탈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김종진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통치조직과 교포사회를 ‘경제 공동체적 성격의 농촌 자치조직’으로 개편하자는 구상을 내놓았다. 여기에는 4년제 소학교와 3년제 중학교를 설립하고 중학 출신의 성적 우수자를 선발해 1년간 단기 군사교육을 시켜 정예 간부를 양성하는 것 등이 주요 계획으로 덧붙여졌다. 나아가 각 운동단체의 통일단결을 위해서는 각 단체의 완전한 자주권을 인정하고 대목적을 위한 행동통일에는 상호협조와 협동을 꾀하는 자유연합적 조직 구성을 구상하였다.
김종진 지사는 곧 김좌진 장군을 만나 자신의 순방 결과를 보고하면서 교포사회 개편 구상을 피력했다. 이에 큰 감동을 받은 김좌진은 의견에 찬성을 표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주의(主義)를 갖고 실행해야 할 것인지 물었다. 이에 김종진은 독립운동을 설계하는 데 꼭 이념이나 주의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권력과 지배욕을 배제하고 자율자치를 강조하는 아나키즘 사상에 대해 들려주었다.
또한 천진에서 들은 우당과의 대화 내용을 전해주고 아나키스트들과 제휴할 것을 권고했다. 김좌진은 즉석에서 그들을 북만주 지역으로 부를 것을 요청했고, 곧바로 김종진은 천진에 있는 우당과 상해의 이을규에게 편지를 보냈다. 철저한 대종교 신자이자 민족주의자였던 김좌진이 아나키즘 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지도부의 권위나 절대 명령에 의존하지 않고 교민의 자율과 자치에 의해 움직이자는 주장에 따라 이들을 혼쾌히 초청하게 되었다. 곧 그들이 주장하는 신민부 개편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운동을 수행해나갈 동지를 규합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에 김종진은 순방 기간에 만난 동지들의 규합에 나섰으니, 이들의 논의 결과 탄생한 조직이 곧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었다.
1929년 7월 해림소학교(海林小學校)에서 열린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맹원은 김종진과 이을규를 비롯해 만주 생활 이래 만주 각지를 순시하면서 새로 얻은 동지들이었다. 해림의 이붕해(李鵬海)와 엄형순(嚴亨淳), 밀산의 이강훈(李康勳), 석두하자의 김야봉(金野蓬), 산시의 이달(李達), 신안진의 이준근 등 17명이었다. 이붕해는 신민부의 경비대장이었고, 이종주는 군사부위원, 이강훈 역시 신민부 군정파의 일원이었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 줄여서 재만무련은 3개 항의 강령을 작성하였다.
"첫째, 우리는 인간의 존엄과 개인의 자유를 완전 보장하는 무지배 사회의 구현을 기약한다. 둘째,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므로 각인은 자주, 창의 또는 상호부조적 자유합작으로써 각인의 자유발전을 기한다. 셋째, 각인은 능력껏 생산에 근로를 바치며 각인의 수요에 응하여 소비하는 경제질서의 확립을 기한다."
또 6개 항의 당면 강령이 있었는데 이로 비춰본 재만무련의 정치적 노선을 요약하면 ‘항일·반공·친민족주의’였다. 재만무련의 첫번째 임무는 신민부를 개편하는 문제였다.
당시 신민부는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운영하며 5백여명에 달하는 독립군을 길러내고 있었다. 이런 일에는 큰 자본이 필요했다. 신민부는 1925년 10월에 개최된 총회에서 호당 6원씩 의무금을 징수할 것을 결의하고 가능한 지역에서 이를 실천에 옮겼다.
이렇게 거둔 자금은 독립군 양병사업(獨立軍養兵事業)에 쓰였으나, 가난에 시달리던 농민들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했다. 당시 공산주의 단체인 북만조선인농민총동맹(北滿朝鮮人農民總同盟)은 이를 신민부 비판의 도구로 활용했다. 즉 신민부가 조선 독립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독립운동의 가면을 쓰고 자금을 징수하여 농민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신민부 지도부는 이러한 공산주의자들의 악의적인 비난에 대응할 이론적 토대나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민부 지도부는 젊고 사심 없는 아나키스트들을 새로 영입하여 공산주의 세력에 맞설 뿐 아니라 새로운 독립운동 단체로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②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 한족총연합회, 그리고 김좌진 장군의 사망
우당은 1929년 봄 이을규가 남경에서 돌아오자 동지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만주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김좌진과 김종진의 활동 계획을 협의하여 이을규를 북만으로 파견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1929년 8월초 무렵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가 발족되었다.
한족총연합회는 위원장에 김좌진, 부위원장에 권화산이 추대되었다. 가장 실무적인 자리라 할 수 있는 농무 및 조직선전위원장에 김종진이, 그리고 교육위원장을 이을규가 맡는 등 아나키스트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한족총연합회는 만주 지역 독립운동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농촌 자치조직을 건설하면서도 과거 일부 운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농민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스스로 농민이 되어 함게 일하며 토론하고 숙식했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 일하는 이러한 방식으로 농민들에게 신뢰를 얻은 후 그들은 집단부락을 만들어 이를 협동조합으로 묶어 농민 스스로 운영하도록 했다.
한족총연합회는 교민들이 미곡 생산뿐만 아니라 도정 과정에서 중국인 지주들에게 부당한 피해를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산시(山市)에 정미소를 차렸다. 미곡 도정뿐만 아니라 위탁 판매까지 담당함으로써 교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자는 의견에서 출발한 사업이었다. 또 이들은 중학교를 설립해 훈련소로 활용하고자 북만중학기성회(北滿中學期成會)를 만들었으며, 경제와 교육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안정적인 농촌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협동조합과 학교를 연결하는 안정적 기반 위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것이었다.
한족총연합회가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세력을 확장해 나가자 일제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세력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신안현에 있던 김종진에게 공산주의자 김남천이 찾아와 대중 앞에서 토론회를 열자고 제의했다. 이에 따라 한족총연합회에서는 김종진과 이을규가 나서고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김남천 등 두 명이 나서 100여명의 농민들 앞에서 일대 격론을 벌였다. 이을규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만주에서 그들의 반민족적이고 비인도적인 행위를 열거 성토하여 민족의 죄인이요, 인류의 반역자라고 단죄하고 소련의 주구는 물러가라고 호령을 하자 청중들이 만세를 부르며 일제히 환호하는 바람에 그 일당은 형세의 불리함을 알고 도망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대한 이러한 극단적인 대응은 서로의 감정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중동선 일대에 이 소문이 퍼지자 위기감을 느낀 공산주의 세력은 암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으로 대비책을 세웠다. 불행히도 그 첫번째 대상자가 김좌진이었다.
1930년 새해 벽두는 김좌진에게 오랜만의 희망과 자신감을 되찾아준 시기였다. 신민부가 군정파와 민정파로 갈라진 데다 3부 통합회의마저 실패하여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아나키스트들과 연합한 것이 성과를 거두자 김좌진은 과거의 자신감을 되찾아갔던 것이다.
1930년 1월 20일, 김좌진은 자신이 만든 희망의 보금자리인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인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서 대표적인 항일무장투쟁 영웅이며 조선 민족의 희망이었던 그가 동포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니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랜만에 부풀어 오르던 희망이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에 의해 절망으로 바뀌고 있을 무렵, 다행히 북경에서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국내에 잠입했던 아나키스트 신현상(申鉉商)이 그해 4월 막대한 운동자금을 구해왔으니, 전체 회의에 참석하라는 소식이었다.
충남 예산 출신인 신현상은 고향에서 미곡상을 하는 친지 최석영(崔錫榮)이 호서은행(湖西銀行)에 상당한 신용이 있는 점을 이용해 양곡 거래 자금 약 5만 8천원의 거금을 빼내 탈출한 것이다.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이 기회로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고 그 일환으로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지들을 소집해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다. 백범도 이 자금을 같이 나눠 쓰자고 제의하였다. 북만에서는 김종진과 이을규가 이 회의에 참석할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일제의 감시가 심한 중동선을 수천리나 우회에 3일만에 천진 우당의 집에 도착했다.
며칠 후 상해에서 백정기와 김성주·황웅과 학생 3명이 왔고, 복건에서도 상해를 거쳐 화암과 장기준·양여주·김동우 등이 도착했다. 어린 이규창은 각지에 있는 동지들에게 연락을 띄우고 모임 장소 주변에서 망을 보았다.
우당은 천진 소왕장 빈민촌에 나타난 김종진·이을규를 보고 너무 반가운 나머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은 만주 운동의 정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고, 우당은 신현상이 최석영·차고동과 함게 자금을 빼내온 경위와 앞으로의 운동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중국 각지에서 자유협동적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아나키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여 열린 회의에서 우당은 다시금 만주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당부했다. 나아사 상해와 복건·북경에 연락원을 두어서 상호 연락하고 호응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 참석자들은 모두 동의하여 운동 방침이 결의되었다.
그런데 신현상과 촤석영이 북경으로 잠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제는 조선인 강도단이 잠입했다고 사칭하여 중국 경찰에 그들의 체포를 의뢰했다. 일본 경찰은 북경의 위수사령부를 움직여 숙소를 급습함으로써 10명을 구금했다. 이들 모두가 국내로 압송되면 장기간 투옥되는 것은 물론 경우에 따라 사형까지 각오해야 했으므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마침 천진에 가 있어 피체를 면했던 우당은 급히 군벌의 막료들과 친분이 있던 류기석에게 연락해 사방으로 구명운동을 벌였다.
만약 류기석이 없었다면 이들의 운명은 예측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것이다. 중국대학을 졸업한 류기석은 당시 북경 정부에서 외교를 담당하는 요직을 맡고 있어 중국 정계에 지인들이 많았다. 당시 북경 시장 장인우도 그중 한 명으로 같은 아나키스트였다.
류기석은 부랴부랴 장인우에게 달려가 일제의 간계라고 주장했다. 그 덕분에 국내에서 자금을 들여온 신현상과 최석영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될 수 있었으나, 중요하게 쓰일 운동 자금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세웠던 계획, 특히 만주에서 운동 계획 또한 물거품이 되었다. 더욱이 이을규가 천진에서 기선을 탔다가 선상에서 일제 관헌에게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우당의 북경 생활도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아들 이규창에게 북경 사건에 대해 자세히 전해들은 우당은 즉각 이사를 결심했다. 이규창까지 한때 구금되었으니 일제가 기필코 자기를 찾아낼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당은 금양교를 건너 금양교장(金煬橋莊)이란 빈민촌을 새로운 숙소로 정해 곧 이사했고, 북경의 동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이을규(李乙奎)·백정기(白貞基)·오면직(吳冕稙)·장기준(莊麒俊)·김성수(金聖壽)·김동우(金東宇) 등의 아나키스트들이 천진으로 찾아와 근처에 큰 방을 구해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북만으로 보낼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우당과 백정기를 비롯한 천진에 있는 아나키스트들은 숙의를 거듭한 결과 무슨 수를 써거라도 운동 자금을 마련해 만주로 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논의 끝에 내린 결론은 천진 시내에 있는 중·일합작은행인 정실은호(正實銀號)를 털자는 것이었다. 이때 은행 습격 계획에 대해 우당은 크게 고민했다. 며칠 동안 고민하던 우당도 중론에 따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화암이 계획하고 김성수와 장기준 등 4명이 나섰다.
12월 초 정오 무렵, 백주대낮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 대범한 정실은호 습격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중국 돈 3천원과 일본 돈 몇백원이라는 많은 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천진에서 발간된 신문에는 ‘희대의 백주 강도단’으로 보도되었으나, 끝내 범인은 밝혀내지 못했다.
③ 다시 만주로, 그러나……
드디어 1930년 9월경 천진의 아나키스트들이 만주로 떠났다. 우당도 북만행을 고집했으나, 동지들이 16세인 아들 규창의 교육 문제와 노인으로서의 건강문제를 내세우고 또 복건성의 농민자치운동에 대한 연락문제 등을 이유로 극구 만류했다. 이에 우당은 규창과 함께 일단 상해로 가기로 했다.
동지들과 헤어지려는 순간에 동지들이 우당의 딸 규숙과 장기준의 혼사 문제를 제의했다. 혼기가 넘은 딸을 멀리 만주로 보내야 하는 상황 때문에 다급해진 우당은 부인과 상의도 하지 못한 채, 이를 허락했다. 이렇게 우당의 가족은 뿔뿔이 헤어져야 했다. 그는 규창을 데리고 상해로, 막 결혼한 이규숙은 동생 현숙을 데리고 남편과 여러 동지들과 함께 흑룡강성 해림으로 떠났다.
북만주로 모두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은 위험했으므로 인원을 3진으로 나누었다. 제1진으로 막 결혼한 장기준과 이규숙 그리고 현숙이 가기로 했고, 제2진으로 백정기와 오면직, 제3진으로 화암 등 총 15인이 가기로 했다.
제1진이 떠난 다음날 제2진이 출발하고, 그 다음날 제3진이 출발하는 방식으로 천진의 아나키스트들은 만주로 향했다. 그들은 무사히 해림에 도착했다. 장기준의 아내이자 우당의 딸인 이규숙이 몸속과 짐에 권총 10여정과 폭탄 10여개를 감추고 무사히 도착하니, 만주의 동지들이 역시 혁명가의 자재답다고 탄복했다.
한족총연합회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사이에 싹튼 갈등이 심화되던 참에 이을규·화암 등이 도착했으니 모두를 반겼다. 하지만 이들은 당시 내분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 만주 운동의 중심인물들을 한 음식점에 모두 초대하여 아나키스트들이 해림까지 오게 된 배경과 목적을 소개했다. 화암 정현섭의 증언을 들어보자.
"먼저 우리는 정치적 우위를 주장하는 조직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고 만주에 있는 교민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교육, 일제와 공산주의에 대한 반일·반공 사상훈련, 항일전선에 나가 투쟁할 수 있는 전술과 자질 양성, 재만교포의 대부분인 농민을 위한 농업지도와 정착사업, 생활개혁, 자치적 방위체제의 확립 등을 사업목표로 내세웠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배타적이고 비협조적인 고질적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불미스러웠던 과거를 청산하고 협동정신으로 새로운 만주 교민사회를 건설하는 데 적극 협조해줄 것을 당부했다. 만주에서의 사업을 위해 일체 남의 경제적 후원을 받지 않을 것이며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농사를 지으며 활동하겠다는 계획서까지 제시하자 참석자들은 모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김좌진이 암살된 후, 원군을 맞이한 한족총연합회는 내부를 정돈하고 다시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했다. 아나키스트들은 농민들 위에 있지 않고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괴로움을 나누며 함께 사업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했으므로 금방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족총연합회는 모든 것을 교민들의 자치로 결정하기로 하고, 일 년에 한 번씩 각 지역 대표자 총회를 열어 모든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했다. 그리고 일제와 공산주의 세력과의 싸움을 위해 각 지방 단위의 자위대를 편성해 지역 경비를 맡게 했다.
한족총연합회의 재건 움직임에 공산주의 세력은 또 다시 위기감을 느끼고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다. 화암의 회고를 들어보자.
"……한때는 공산 세력권이었던 영안현에서 불시에 습격을 해오거나 일본이 중국 호로군과 결탁하여 교민을 남치해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해림을 중심으로 한족총연합회 지역과 영안을 중심으로 한 공산 지역은 항상 팽팽한 대결 상태에 있었다. 어쩌다 잘못하여 상대방 지역으로 들어서면 죽고 죽이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밀을 지키기 위해 한족총연합회의 주요 간부 암살에 나섰는데,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최초 결성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한족총연합회 간부 차장인 이준근과 김야운이 이 무시무시한 암살공작의 희생자가 되었다. 두 사람은 7월 초순 석두하자에 있는 김좌진 장군의 동생 김동진의 집에서 저격당했다.
공산주의자들의 다음 암살 목표는 한족총연합회의 사실상 리더인 김종진에게 맞춰졌다. 김종진은 1931년 7월 11일 해림역 근처에 있는 조영원의 집에 갔다가 역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납치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김좌진의 휘하에 있던 조영원은 아나키스트들이 북만운동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자신이 소외된 데 불만을 품고 공산주의 세력에 협조한 인물이다.
1931년 9월 11일자『동아일보』는 김종진 지사가 박내춘·이백호·이익화 등에게 살해되었다고 보도했다. 그의 나이 31세, 한창 조국 광복을 위해 매진할 나이에 동족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납치되어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꺼번에 주요 간부 셋을 잃은 한족총연합회는 망연자실했다. 게다가 병 때문에 상해로 호송된 백정기까지 합하면 한꺼번에 네 명의 운동자가 사라진 셈이었다. 이런 잇따른 불행에 한족총연합회는 넋이 빠져 수습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나 넋을 잃고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일제가 북만 일대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1931년 여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만주 전체를 점령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만주 주둔 관동군의 일부 장교들은 심양 북쪽 유조구(柳條溝)의 만철선로를 폭파했다. 그런 다음 이를 중국군의 소행이라고 우기며 만주를 본격적으로 침략했다. 이것이 1931년 9월 18일에 발생한 만주사변(滿洲事變)이었다.
일본군은 만주사변의 예비 작업으로 마적과 조선공산당을 소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북만 일대에서 대규모 수색전을 펼쳤다. 수색 작전에서 가장 주요한 소탕 대상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이었다. 한족총연합회의 아나키스트들은 일제가 대규모 군사 행동을 시작하자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토의했다. 그 결과 일제 및 공산주의자들과 직접 대결하다가 희생되는 것보다는 일단 후퇴해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따라 8월 하순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철수도 쉽지 않았는데 이때 김좌진의 처제 나혜정이 무사히 빠져나오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우당의 사위 장기준과 규숙·현숙은 장춘(長春)으로 피했고, 송순보는 남만주로 피신했다. 북만주를 철수하면서 느낀 소회를 화암은 이렇게 적고 있다.
"북만운동을 돕기 위해 우리는 전력을 기울였고, 정실은호에서 모험적으로 빼내온 돈이며, 천주지방의 강연에서 얻어진 돈들을 몽땅 바치고, 산서(山西)의 안소정게까지 가 그 곤역을 다 치렀고, 이회영 선배를 북경에서 상해로 옮겨 드리면서까지 우리 최후의 거점을 확보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북만운동이 어이없이 와해되고 보니, 그때의 심정이야말로 참담한 것이었다. 북만으로 달려갔다가 금쪽같은 세 동지를 잃고, 피와 땀으로 이룩해 놓은 건설보와 동포들을 그대로 두고 철수하게 되었으니 그동안에 기울였던 공로가 한없이 아까웠다. 만일 일본의 그 만주 침략이 아니었던들, 만주 아니 최소한 우리의 활동 지역이었던 북만주는 우리 독립운동가와 동포들의 이상향이 되었을 것이다." - 화암 정현섭,《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13 만주에서 부는 새로운 바람
①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아나키스트들과 손을 잡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을 비롯한 북경과 상해의 아나키스트들이 국제연대운동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만주에서는 김좌진(金佐鎭)과 김종진(金宗鎭)을 중심으로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 조직과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 출범이 그것이다. 이러한 새 바람은 실로 우당이 그동안 오랜 세월 꿈꾸어왔던 것이고 이제 그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작은 불씨는 1927년 10월 천진(天津)에서의 사상담화를 거친 김종진 지사에 의해 발화되었다.
김종진은 천진역에서 우당을 만나 큰 사상적 감화를 받은 이후 북만으로 떠나는 기차를 탔다. 고향인 홍성을 떠나 만주와 북경, 광동과 베트남을 거쳐 운남까지 떠돌아다니면서 숱한 고비를 겪었던 김종진이었지만, 노혁명가이자 자신에게 사상적 감화를 준 우당과 작별할 때처럼 북받치는 서러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김종진은 이렇게 천진을 떠나 중동선 목단강(牧丹江)역에 도착했다. 그는 가장 먼저 김좌진 장군을 찾았다. 멀리 고향 홍성에서 오랜 시간을 거쳐 자신을 찾아온 사촌동생을 보고 김좌진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당시 김좌진은 참모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때였다.
김종진은 우선 만주 교포들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키는 한편, 이를 토대로 독립군을 양성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계획을 실천을 옮기려 했다. 이른바 독립전쟁을 위해 ‘둔전양병(屯田養兵)’하자는 계획인데, 그러기 위해 우선 그는 만주 전역을 수개 구역으로 나눠 각 지역별 조직을 확대하여 연합조직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신민부(新民府)가 관할하는 북만주 각 지역에 대한 실태 파악에 나서기로 했다. 교포들의 생활 실태와 의식 정도를 파악한 다음, 그 기초 위에서 실정에 맞는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서였다.
김좌진도 이런 계획에 적극 찬동해 김종진은 1928년 새해 연초부터 여정에 올라 무려 8개월 동안 북만주 각지를 순행했다. 그는 수백리 눈길을 걸어 다니며 민정을 살폈다. 중국 관헌들 속에 잠입해 있는 일본 경찰에 의해 언제 체포될지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조직망을 통해 소개된 인물과 함께 적정을 살핀 후 마을에 들어가야 했다. 이 순방은 눈이 쌓인 엄동설한에 시작하여 삼복더위까지 겪은 후에야 끝이 났다. 김종진은 순방을 통해 동북 지방 이주 한국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
이주 한국인 교포들은 중국인 토착지주들의 일상적인 착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리 교포들이 척박한 불모지를 애써 개간해 옥토로 만들어 놓으면 중국인 지주들이 갖은 명목으로 임대료를 올리거나 땅을 빼앗는 등 무제한의 착취를 강요했다. 일제는 일제대로 친일파 세력을 앞장세워 교란작전을 폄으로써 교포 사회 내부를 분열시켰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이 각종 감언이설(甘言利說)로 농민들을 꾀어내어 자기편으로 만들고 있었다.
당시 김종진과 함께 활동한 이을규(李乙奎)는 ‘좌익이란 자들이 그 지방에 끼어 있거나 넘나드는 곳에서는 반드시 운동자 상호간은 물론이요, 주민들 사이에서도 불화와 알력이 일어나고 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한국인 교포들은 이중 삼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니 김종진이 우려한 것은 이런 핍박을 견디다 못한 일부 교포들이 언제 일본 영사관에 호소할지 모르며, 그렇지 않더라도 일제가 한국인 교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중국 당국과 함께 한국인 독립운동 단체들을 강압·침탈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김종진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통치조직과 교포사회를 ‘경제 공동체적 성격의 농촌 자치조직’으로 개편하자는 구상을 내놓았다. 여기에는 4년제 소학교와 3년제 중학교를 설립하고 중학 출신의 성적 우수자를 선발해 1년간 단기 군사교육을 시켜 정예 간부를 양성하는 것 등이 주요 계획으로 덧붙여졌다. 나아가 각 운동단체의 통일단결을 위해서는 각 단체의 완전한 자주권을 인정하고 대목적을 위한 행동통일에는 상호협조와 협동을 꾀하는 자유연합적 조직 구성을 구상하였다.
김종진 지사는 곧 김좌진 장군을 만나 자신의 순방 결과를 보고하면서 교포사회 개편 구상을 피력했다. 이에 큰 감동을 받은 김좌진은 의견에 찬성을 표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주의(主義)를 갖고 실행해야 할 것인지 물었다. 이에 김종진은 독립운동을 설계하는 데 꼭 이념이나 주의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권력과 지배욕을 배제하고 자율자치를 강조하는 아나키즘 사상에 대해 들려주었다.
또한 천진에서 들은 우당과의 대화 내용을 전해주고 아나키스트들과 제휴할 것을 권고했다. 김좌진은 즉석에서 그들을 북만주 지역으로 부를 것을 요청했고, 곧바로 김종진은 천진에 있는 우당과 상해의 이을규에게 편지를 보냈다. 철저한 대종교 신자이자 민족주의자였던 김좌진이 아나키즘 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지도부의 권위나 절대 명령에 의존하지 않고 교민의 자율과 자치에 의해 움직이자는 주장에 따라 이들을 혼쾌히 초청하게 되었다. 곧 그들이 주장하는 신민부 개편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운동을 수행해나갈 동지를 규합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에 김종진은 순방 기간에 만난 동지들의 규합에 나섰으니, 이들의 논의 결과 탄생한 조직이 곧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었다.
1929년 7월 해림소학교(海林小學校)에서 열린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맹원은 김종진과 이을규를 비롯해 만주 생활 이래 만주 각지를 순시하면서 새로 얻은 동지들이었다. 해림의 이붕해(李鵬海)와 엄형순(嚴亨淳), 밀산의 이강훈(李康勳), 석두하자의 김야봉(金野蓬), 산시의 이달(李達), 신안진의 이준근 등 17명이었다. 이붕해는 신민부의 경비대장이었고, 이종주는 군사부위원, 이강훈 역시 신민부 군정파의 일원이었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 줄여서 재만무련은 3개 항의 강령을 작성하였다.
"첫째, 우리는 인간의 존엄과 개인의 자유를 완전 보장하는 무지배 사회의 구현을 기약한다. 둘째,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므로 각인은 자주, 창의 또는 상호부조적 자유합작으로써 각인의 자유발전을 기한다. 셋째, 각인은 능력껏 생산에 근로를 바치며 각인의 수요에 응하여 소비하는 경제질서의 확립을 기한다."
또 6개 항의 당면 강령이 있었는데 이로 비춰본 재만무련의 정치적 노선을 요약하면 ‘항일·반공·친민족주의’였다. 재만무련의 첫번째 임무는 신민부를 개편하는 문제였다.
당시 신민부는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운영하며 5백여명에 달하는 독립군을 길러내고 있었다. 이런 일에는 큰 자본이 필요했다. 신민부는 1925년 10월에 개최된 총회에서 호당 6원씩 의무금을 징수할 것을 결의하고 가능한 지역에서 이를 실천에 옮겼다.
이렇게 거둔 자금은 독립군 양병사업(獨立軍養兵事業)에 쓰였으나, 가난에 시달리던 농민들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했다. 당시 공산주의 단체인 북만조선인농민총동맹(北滿朝鮮人農民總同盟)은 이를 신민부 비판의 도구로 활용했다. 즉 신민부가 조선 독립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독립운동의 가면을 쓰고 자금을 징수하여 농민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신민부 지도부는 이러한 공산주의자들의 악의적인 비난에 대응할 이론적 토대나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민부 지도부는 젊고 사심 없는 아나키스트들을 새로 영입하여 공산주의 세력에 맞설 뿐 아니라 새로운 독립운동 단체로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②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 한족총연합회, 그리고 김좌진 장군의 사망
우당은 1929년 봄 이을규가 남경에서 돌아오자 동지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만주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김좌진과 김종진의 활동 계획을 협의하여 이을규를 북만으로 파견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1929년 8월초 무렵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가 발족되었다.
한족총연합회는 위원장에 김좌진, 부위원장에 권화산이 추대되었다. 가장 실무적인 자리라 할 수 있는 농무 및 조직선전위원장에 김종진이, 그리고 교육위원장을 이을규가 맡는 등 아나키스트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한족총연합회는 만주 지역 독립운동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농촌 자치조직을 건설하면서도 과거 일부 운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농민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스스로 농민이 되어 함게 일하며 토론하고 숙식했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 일하는 이러한 방식으로 농민들에게 신뢰를 얻은 후 그들은 집단부락을 만들어 이를 협동조합으로 묶어 농민 스스로 운영하도록 했다.
한족총연합회는 교민들이 미곡 생산뿐만 아니라 도정 과정에서 중국인 지주들에게 부당한 피해를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산시(山市)에 정미소를 차렸다. 미곡 도정뿐만 아니라 위탁 판매까지 담당함으로써 교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자는 의견에서 출발한 사업이었다. 또 이들은 중학교를 설립해 훈련소로 활용하고자 북만중학기성회(北滿中學期成會)를 만들었으며, 경제와 교육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안정적인 농촌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협동조합과 학교를 연결하는 안정적 기반 위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것이었다.
한족총연합회가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세력을 확장해 나가자 일제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세력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신안현에 있던 김종진에게 공산주의자 김남천이 찾아와 대중 앞에서 토론회를 열자고 제의했다. 이에 따라 한족총연합회에서는 김종진과 이을규가 나서고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김남천 등 두 명이 나서 100여명의 농민들 앞에서 일대 격론을 벌였다. 이을규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만주에서 그들의 반민족적이고 비인도적인 행위를 열거 성토하여 민족의 죄인이요, 인류의 반역자라고 단죄하고 소련의 주구는 물러가라고 호령을 하자 청중들이 만세를 부르며 일제히 환호하는 바람에 그 일당은 형세의 불리함을 알고 도망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대한 이러한 극단적인 대응은 서로의 감정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중동선 일대에 이 소문이 퍼지자 위기감을 느낀 공산주의 세력은 암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으로 대비책을 세웠다. 불행히도 그 첫번째 대상자가 김좌진이었다.
1930년 새해 벽두는 김좌진에게 오랜만의 희망과 자신감을 되찾아준 시기였다. 신민부가 군정파와 민정파로 갈라진 데다 3부 통합회의마저 실패하여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아나키스트들과 연합한 것이 성과를 거두자 김좌진은 과거의 자신감을 되찾아갔던 것이다.
1930년 1월 20일, 김좌진은 자신이 만든 희망의 보금자리인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인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서 대표적인 항일무장투쟁 영웅이며 조선 민족의 희망이었던 그가 동포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니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랜만에 부풀어 오르던 희망이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에 의해 절망으로 바뀌고 있을 무렵, 다행히 북경에서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국내에 잠입했던 아나키스트 신현상(申鉉商)이 그해 4월 막대한 운동자금을 구해왔으니, 전체 회의에 참석하라는 소식이었다.
충남 예산 출신인 신현상은 고향에서 미곡상을 하는 친지 최석영(崔錫榮)이 호서은행(湖西銀行)에 상당한 신용이 있는 점을 이용해 양곡 거래 자금 약 5만 8천원의 거금을 빼내 탈출한 것이다.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이 기회로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고 그 일환으로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지들을 소집해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다. 백범도 이 자금을 같이 나눠 쓰자고 제의하였다. 북만에서는 김종진과 이을규가 이 회의에 참석할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일제의 감시가 심한 중동선을 수천리나 우회에 3일만에 천진 우당의 집에 도착했다.
며칠 후 상해에서 백정기와 김성주·황웅과 학생 3명이 왔고, 복건에서도 상해를 거쳐 화암과 장기준·양여주·김동우 등이 도착했다. 어린 이규창은 각지에 있는 동지들에게 연락을 띄우고 모임 장소 주변에서 망을 보았다.
우당은 천진 소왕장 빈민촌에 나타난 김종진·이을규를 보고 너무 반가운 나머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은 만주 운동의 정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고, 우당은 신현상이 최석영·차고동과 함게 자금을 빼내온 경위와 앞으로의 운동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중국 각지에서 자유협동적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아나키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여 열린 회의에서 우당은 다시금 만주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당부했다. 나아사 상해와 복건·북경에 연락원을 두어서 상호 연락하고 호응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 참석자들은 모두 동의하여 운동 방침이 결의되었다.
그런데 신현상과 촤석영이 북경으로 잠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제는 조선인 강도단이 잠입했다고 사칭하여 중국 경찰에 그들의 체포를 의뢰했다. 일본 경찰은 북경의 위수사령부를 움직여 숙소를 급습함으로써 10명을 구금했다. 이들 모두가 국내로 압송되면 장기간 투옥되는 것은 물론 경우에 따라 사형까지 각오해야 했으므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마침 천진에 가 있어 피체를 면했던 우당은 급히 군벌의 막료들과 친분이 있던 류기석에게 연락해 사방으로 구명운동을 벌였다.
만약 류기석이 없었다면 이들의 운명은 예측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것이다. 중국대학을 졸업한 류기석은 당시 북경 정부에서 외교를 담당하는 요직을 맡고 있어 중국 정계에 지인들이 많았다. 당시 북경 시장 장인우도 그중 한 명으로 같은 아나키스트였다.
류기석은 부랴부랴 장인우에게 달려가 일제의 간계라고 주장했다. 그 덕분에 국내에서 자금을 들여온 신현상과 최석영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될 수 있었으나, 중요하게 쓰일 운동 자금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세웠던 계획, 특히 만주에서 운동 계획 또한 물거품이 되었다. 더욱이 이을규가 천진에서 기선을 탔다가 선상에서 일제 관헌에게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우당의 북경 생활도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아들 이규창에게 북경 사건에 대해 자세히 전해들은 우당은 즉각 이사를 결심했다. 이규창까지 한때 구금되었으니 일제가 기필코 자기를 찾아낼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당은 금양교를 건너 금양교장(金煬橋莊)이란 빈민촌을 새로운 숙소로 정해 곧 이사했고, 북경의 동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이을규(李乙奎)·백정기(白貞基)·오면직(吳冕稙)·장기준(莊麒俊)·김성수(金聖壽)·김동우(金東宇) 등의 아나키스트들이 천진으로 찾아와 근처에 큰 방을 구해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북만으로 보낼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우당과 백정기를 비롯한 천진에 있는 아나키스트들은 숙의를 거듭한 결과 무슨 수를 써거라도 운동 자금을 마련해 만주로 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논의 끝에 내린 결론은 천진 시내에 있는 중·일합작은행인 정실은호(正實銀號)를 털자는 것이었다. 이때 은행 습격 계획에 대해 우당은 크게 고민했다. 며칠 동안 고민하던 우당도 중론에 따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화암이 계획하고 김성수와 장기준 등 4명이 나섰다.
12월 초 정오 무렵, 백주대낮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 대범한 정실은호 습격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중국 돈 3천원과 일본 돈 몇백원이라는 많은 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천진에서 발간된 신문에는 ‘희대의 백주 강도단’으로 보도되었으나, 끝내 범인은 밝혀내지 못했다.
③ 다시 만주로, 그러나……
드디어 1930년 9월경 천진의 아나키스트들이 만주로 떠났다. 우당도 북만행을 고집했으나, 동지들이 16세인 아들 규창의 교육 문제와 노인으로서의 건강문제를 내세우고 또 복건성의 농민자치운동에 대한 연락문제 등을 이유로 극구 만류했다. 이에 우당은 규창과 함께 일단 상해로 가기로 했다.
동지들과 헤어지려는 순간에 동지들이 우당의 딸 규숙과 장기준의 혼사 문제를 제의했다. 혼기가 넘은 딸을 멀리 만주로 보내야 하는 상황 때문에 다급해진 우당은 부인과 상의도 하지 못한 채, 이를 허락했다. 이렇게 우당의 가족은 뿔뿔이 헤어져야 했다. 그는 규창을 데리고 상해로, 막 결혼한 이규숙은 동생 현숙을 데리고 남편과 여러 동지들과 함께 흑룡강성 해림으로 떠났다.
북만주로 모두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은 위험했으므로 인원을 3진으로 나누었다. 제1진으로 막 결혼한 장기준과 이규숙 그리고 현숙이 가기로 했고, 제2진으로 백정기와 오면직, 제3진으로 화암 등 총 15인이 가기로 했다.
제1진이 떠난 다음날 제2진이 출발하고, 그 다음날 제3진이 출발하는 방식으로 천진의 아나키스트들은 만주로 향했다. 그들은 무사히 해림에 도착했다. 장기준의 아내이자 우당의 딸인 이규숙이 몸속과 짐에 권총 10여정과 폭탄 10여개를 감추고 무사히 도착하니, 만주의 동지들이 역시 혁명가의 자재답다고 탄복했다.
한족총연합회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사이에 싹튼 갈등이 심화되던 참에 이을규·화암 등이 도착했으니 모두를 반겼다. 하지만 이들은 당시 내분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 만주 운동의 중심인물들을 한 음식점에 모두 초대하여 아나키스트들이 해림까지 오게 된 배경과 목적을 소개했다. 화암 정현섭의 증언을 들어보자.
"먼저 우리는 정치적 우위를 주장하는 조직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고 만주에 있는 교민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교육, 일제와 공산주의에 대한 반일·반공 사상훈련, 항일전선에 나가 투쟁할 수 있는 전술과 자질 양성, 재만교포의 대부분인 농민을 위한 농업지도와 정착사업, 생활개혁, 자치적 방위체제의 확립 등을 사업목표로 내세웠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배타적이고 비협조적인 고질적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불미스러웠던 과거를 청산하고 협동정신으로 새로운 만주 교민사회를 건설하는 데 적극 협조해줄 것을 당부했다. 만주에서의 사업을 위해 일체 남의 경제적 후원을 받지 않을 것이며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농사를 지으며 활동하겠다는 계획서까지 제시하자 참석자들은 모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김좌진이 암살된 후, 원군을 맞이한 한족총연합회는 내부를 정돈하고 다시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했다. 아나키스트들은 농민들 위에 있지 않고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괴로움을 나누며 함께 사업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했으므로 금방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족총연합회는 모든 것을 교민들의 자치로 결정하기로 하고, 일 년에 한 번씩 각 지역 대표자 총회를 열어 모든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했다. 그리고 일제와 공산주의 세력과의 싸움을 위해 각 지방 단위의 자위대를 편성해 지역 경비를 맡게 했다.
한족총연합회의 재건 움직임에 공산주의 세력은 또 다시 위기감을 느끼고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다. 화암의 회고를 들어보자.
"……한때는 공산 세력권이었던 영안현에서 불시에 습격을 해오거나 일본이 중국 호로군과 결탁하여 교민을 남치해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해림을 중심으로 한족총연합회 지역과 영안을 중심으로 한 공산 지역은 항상 팽팽한 대결 상태에 있었다. 어쩌다 잘못하여 상대방 지역으로 들어서면 죽고 죽이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밀을 지키기 위해 한족총연합회의 주요 간부 암살에 나섰는데,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최초 결성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한족총연합회 간부 차장인 이준근과 김야운이 이 무시무시한 암살공작의 희생자가 되었다. 두 사람은 7월 초순 석두하자에 있는 김좌진 장군의 동생 김동진의 집에서 저격당했다.
공산주의자들의 다음 암살 목표는 한족총연합회의 사실상 리더인 김종진에게 맞춰졌다. 김종진은 1931년 7월 11일 해림역 근처에 있는 조영원의 집에 갔다가 역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납치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김좌진의 휘하에 있던 조영원은 아나키스트들이 북만운동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자신이 소외된 데 불만을 품고 공산주의 세력에 협조한 인물이다.
1931년 9월 11일자『동아일보』는 김종진 지사가 박내춘·이백호·이익화 등에게 살해되었다고 보도했다. 그의 나이 31세, 한창 조국 광복을 위해 매진할 나이에 동족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납치되어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꺼번에 주요 간부 셋을 잃은 한족총연합회는 망연자실했다. 게다가 병 때문에 상해로 호송된 백정기까지 합하면 한꺼번에 네 명의 운동자가 사라진 셈이었다. 이런 잇따른 불행에 한족총연합회는 넋이 빠져 수습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나 넋을 잃고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일제가 북만 일대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1931년 여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만주 전체를 점령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만주 주둔 관동군의 일부 장교들은 심양 북쪽 유조구(柳條溝)의 만철선로를 폭파했다. 그런 다음 이를 중국군의 소행이라고 우기며 만주를 본격적으로 침략했다. 이것이 1931년 9월 18일에 발생한 만주사변(滿洲事變)이었다.
일본군은 만주사변의 예비 작업으로 마적과 조선공산당을 소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북만 일대에서 대규모 수색전을 펼쳤다. 수색 작전에서 가장 주요한 소탕 대상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이었다. 한족총연합회의 아나키스트들은 일제가 대규모 군사 행동을 시작하자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토의했다. 그 결과 일제 및 공산주의자들과 직접 대결하다가 희생되는 것보다는 일단 후퇴해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따라 8월 하순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철수도 쉽지 않았는데 이때 김좌진의 처제 나혜정이 무사히 빠져나오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우당의 사위 장기준과 규숙·현숙은 장춘(長春)으로 피했고, 송순보는 남만주로 피신했다. 북만주를 철수하면서 느낀 소회를 화암은 이렇게 적고 있다.
"북만운동을 돕기 위해 우리는 전력을 기울였고, 정실은호에서 모험적으로 빼내온 돈이며, 천주지방의 강연에서 얻어진 돈들을 몽땅 바치고, 산서(山西)의 안소정게까지 가 그 곤역을 다 치렀고, 이회영 선배를 북경에서 상해로 옮겨 드리면서까지 우리 최후의 거점을 확보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북만운동이 어이없이 와해되고 보니, 그때의 심정이야말로 참담한 것이었다. 북만으로 달려갔다가 금쪽같은 세 동지를 잃고, 피와 땀으로 이룩해 놓은 건설보와 동포들을 그대로 두고 철수하게 되었으니 그동안에 기울였던 공로가 한없이 아까웠다. 만일 일본의 그 만주 침략이 아니었던들, 만주 아니 최소한 우리의 활동 지역이었던 북만주는 우리 독립운동가와 동포들의 이상향이 되었을 것이다." - 화암 정현섭,《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이로써 피땀 흘려 일궈 놓았던 만주 운동의 발판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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