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에서 북아프리카 전선의 신화를 쓴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

대모달2011.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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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빈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은 1891년 11월 15일에 독일 뷔르템베르크 주의 하이덴하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평범한 교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시절을 편안하게 보낸 것으로 알려진 롬멜은 1910년 3월 바인가르텐에서 뷔르템베르크 왕실의 친위군이며 프로이센의 국왕인 빌헬름 1세가 직접 지휘하는 제124보병사단에 사관후보생으로 지원했다. 그의 첫째 동생인 칼은 후에 치과의사가 되었고, 둘째 동생인 게르하르트는 오페라 가수가 되었다. 또 그의 누이는 미술교사가 되었다.

 

1911년에 바인가르텐에 있는 군사학교에서 훈련과정을 모두 마친 롬멜은 1912년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고, 1916년에는 루시에 마리아 몰린과 결혼하였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第一次世界大戰)이 발발하자 1915년에 프랑스 전선(戰線)에 투입된 그는 프랑스 및 루마니아 군대를 상대로 여러 전투를 겪으면서 전략과 전술을 익혔고, 상황 변화에 따라 신속하게 대처하여 적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능력을 발휘했다.  이 때에 두 번에 걸쳐 심한 부상을 입었으나 많은 군공(軍功)을 세움으로써 중위로 진급하고, 1·2급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1917년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마타주르(Matajur) 산의 요새를 공격할 때에 뷔르템베르크 산악대대의 선두에 서서 이탈리아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데에 가장 큰 수훈(殊勳)을 세움으로써 군인들에게 있어서 최고 권위의 훈장인 푸어 르 메리테(pour le merite) 훈장을 수여받게 되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終戰)에 이르고 있을 때에도 대위 계급으로 그대로 군대에 남아 복무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Republic)이 들어섰을 때에 각종 사회주의 계열의 노동자 파업이나 무장봉기 등 각종 소요사태가 일어났었다. 롬멜은 자신의 중대를 이끌고 이 폭동들을 진압하는 작전에 가담하였다. 이후 1920년 12월에 슈투트가르트 제13보병연대의 참모로써 8년간을 그곳에서 근무하였고, 1929년 9월에 드레스텐 보병학교의 교관이 되어 사관후보생들을 가르쳤다.

 

 

1933년 1월에 소령으로 진급한 롬멜은 수도 베를린에서 정권교체를 주의깊게 관찰하면서 나치스 정당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0월에는 고슬라르로 전근을 가서 제17보병연대 제3대대장으로 임명되고 히틀러(Adolf Hitler)가 주창한 군비확장 정책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1934년 7월 고슬라르에서 재임중이던 그는 나치스 돌격대 참모장으로서 에른스트 룀 쿠데타 사건을 계기로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어 8월에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총통의 직책에 올랐는데, 이때에 히틀러가 고슬라르를 방문하자 롬멜은 의장대를 세워 히틀러를 맞이했다. 1935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하고 포츠담에 있는 군사학교에 부임하여 전술교사로 활동했다.

 

1937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자신이 제1차 세계대전 때에 경험한 전투를 회고하여「보병전술록」이란 책을 저술·출간하였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 나치스 세력에 의해 병합됐을 때에 그는 빈 근처에 있는 비너노이슈타트라는 군사학교의 교장으로 재임하였다. 이어서 동시에 그 해 2월 25일에는 히틀러 유겐트(Hitler-Jugend)의 연락 장교가 되었으나, “히틀러 유겐트는 나치스의 그저 그런 군대의 후진 양성 조직에 불과할뿐, 내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조직이 아니다”면서 스스로 사임하였다.

 

1939년 9월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했을 때에 바르샤바로 가서 독일군의 승전기념행진(勝戰記念行進)을 준비했으며, 소장(少將)으로 진급한 뒤에는 총통 지휘본부에서 히틀러의 경호대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폴란드가 독일에게 점령된 지 네 달이 지난 후에 롬멜은 바트고데스베르크의 제7기갑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전차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1940년 5월 10일에 제7기갑사단을 이끌고 프랑스 전선(戰線)에 가담하게 된 롬멜은 3일 뒤에 단숨에 뫼즈(Meuse) 강을 건너 프랑스군의 방어선인 마지노(Maginot) 요새에 도달하였다. 이 때에 그의 상관인 클루게(Hans Guenther von Kluge) 제4군단장은 “보급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절대 선제공격하지 말 것”을 명령했지만, 롬멜의 전차부대는 전격적인 기습공격으로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파죽지세로 랑드르(Landrecies) 시를 통과했다. 독일군 제7기갑사단이 프랑스 내륙에서 승승장구(乘勝長驅)하면서 프랑스·영국 연합군은 혼란과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프랑스인들은 롬멜의 전차부대를 ‘유령군대’라고 부르며 두려워하였다.

 

그는 부하들에게는 항상 예의 바르게 대했으며, 최일선에서 싸우는 말단 병사의 경험과 고충에도 귀를 기울여 그것을 지휘·통솔에 반영하였다. 또한 점령지의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자제했으며, 특히 포로가 된 적군에게도 최대한 예우를 갖추었다.

 

1940년 6월 22일에 콩피에뉴 숲에서 프랑스와 독일간의 휴전협정(休戰協定)이 체결되면서 독일은 프랑스 북부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롬멜은 이 승전(勝戰)의 유공자(有功者)로 인정받아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고 48세의 나이에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한편, 이탈리아는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하자 이에 고무되어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했다. 이탈리아는 이미 1936년에 독일과 동맹을 맺었으므로 추축국(樞軸國)의 하나였다.

 

이탈리아의 참전은 이미 적기를 놓친데다가 공업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준비도 미흡했었기에 커다란 전과가 없었다. 이탈리아의 수상(首相)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동맹국인 독일과 손잡은 상태에서 그라치아니(Rodolfo Graziani) 원수가 거느린 20만 대군을 파견해 당시 영국령인 이집트 국경을 넘어 침공하도록 했다. 이것은 독일과 상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독적으로 진행한 군사공격이었다.

 

그러나 5일 동안 영국군과 가벼운 전투를 치르고 단지 90km밖에 전진하지 못한 채 본국으로부터 물자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어 시디 바라니(Sidi Barrani)에서 전진을 중단하게 된다. 한편, 작전상 후퇴하면서 커다란 손실없이 재정비를 완료한 영국군은 리처드 오코너 장군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여 이탈리아의 이집트 원정군을 단숨에 궤멸시키고 단 8주만에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던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 앞까지 진격하였다. 이탈리아군은 약 13만명의 병사가 영국군의 포로가 되고 전차(戰車) 4백대, 총기(銃器) 3천정이 압수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남은 이탈리아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식민지령 트리폴리로 도망쳤다.  

 

그러던 중 1941년 2월 12일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북아프리카 전선의 영국군 병력을 상당수 그리스의 전장으로 이동시키도록 명령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이집트 침공과 동시에 또 다시 독일과 상의 없이 알바니아 지역을 통해 그리스 침공을 시도했었기 때문에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은 대거 그리스로 이동하게 되어 이탈리아군에 대한 반격이 잠시 멈추어졌다.

 

한편, 북아프리카 지역과 그리스 전선에서 번번이 패전(敗戰)을 거듭하고, 이러한 위기상태에 빠진 이탈리아는 동맹국 독일에 지원요청을 한다. 이에 독일군 제15기갑사단과 제21기갑사단 등이 조직되면서 롬멜은 이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된다. 독일의 총통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식민지 리비아를 잃게 되면 무솔리니 수상의 정치적 입지가 어려워져 독일과 이탈리아간의 동맹 관계가 위협당할 것이다”고 판단하여 2월 6일 롬멜에게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월 12일에 트리폴리 항구를 통해 리비아 땅을 밟은 롬멜은 북아프리카군단의 사열식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고자 하였다. 그는 처음에 트리폴리로 계속 후퇴하는 이탈리아군을 저지해야만 했으며, 최전방 전선이던 시르테(Sirte)에서 방어태세로 전환해야 했다. 2월 16일에 부대를 이끌고 시르테에 도달한 그는 3월 19일에 히틀러에게 상황을 보고하려고 베를린으로 갔다가 ‘백엽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고, 리비아로 다시 돌아왔다.

 

3월 24일에 롬멜은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부하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독일군 북아프리카 전차군단은 진격을 개시하여 별다른 전투 없이 사막의 요새 엘 아게일라를 손쉽게 점령했다. 롬멜의 전차부대는 이탈리아군 총사령관 가리볼디(Italo Gariboldi)의 대기 명령을 어기고 키레나이카로 진격하여 메칠리에 있는 영국군 방어진지를 격파하였다. 당시 북아프리카전선의 영국군은 많은 병력이 그리스로 이동한 탓에 취약한 상태여서 이탈리아·독일 연합군과 전면전을 벌일 능력이 없었다.

 

롬멜은 영국군에 비해 전차병력이 숫적으로 열세하다는 약점을 보완하려고 자동차에 널판지를 붙여서 전차로 보이게 하는 위장전술로 병력을 증강하는 듯이 꾀를 냈으며, 기존의 인습적인 전술에서 벗어나 미리 88mm 대포를 고정 설치하고 경전차를 이용하여 적군의 전차들을 유인해서 포격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벌였다. 그는 이같은 전술과 지휘를 통해 80대의 전차로 영국군 전차 8백대와 교전하여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이로써 독일군 북아프리카 전차군단은 공세를 시작한 지 1주일만에 영국군 지휘관인 오코너 소장(少將)을 포로로 삼고, 2주일만에 슬룸까지 진격하여 영국군 전차부대를 초토화시켰다.

 

독일군 북아프리카 전차군단은 후퇴하는 영국군을 계속 추격하여 1941년 6월에 토브룩까지 도달했다. 후퇴를 거듭하던 영국군은 나일 강까지 후퇴를 고려했었으나, 처칠 수상의 엄명에 의해 토브룩 요새를 끝까지 사수하기로 결정했다. 이탈리아·독일 연합군은 토브룩에 대한 공략을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사상자만 늘어난 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물자 보급에서 큰 곤란을 겪고 있었다. 당시 히틀러는 더 많은 전차와 포탄 및 연료를 보내달라는 롬멜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계속 진격만을 강요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군 북아프리카군단이 비록 전차와 연료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롬멜의 뛰어난 전략만으로 충분히 영국군을 소탕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독일은 기갑군단 병력을 거의 소모하고 단 70대의 전차만이 남은 상황에서 더 이상의 병력 증강을 해줄 수 있는 지원군도 기대할 수 없었다. 아무리 롬멜이 전략과 전술의 귀재라고 해도 전차와 포탄 및 연료의 부족으로는 한계에 이를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이탈리아·독일 연합군에 의해 토브룩에서 포위된 영국·뉴질랜드 연합군은 끈질긴 저항으로 적군을 괴롭히면서 11월까지 계속된 독일군의 포위 공격을 막아냈다. 이 때에 독일군의 포로가 된 오코너 소장 대신 오친레크(Claude Auchinleck) 대장(大將)이 중동 파견군 사령관으로 임명돼 토브룩의 영국군을 지휘했다. 11월 18일에 영국군의 대대적인 반격에 밀려 독일군 북아프리카 전차군단은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부득이하게 12월 7일에 퇴각을 시작하여 마르사 엘 브라가까지 쫓겨갔다. 

 

그러나 오친레크의 반격은 1941년 1월 21일에 끝나게 된다. 일단 독일군 북아프리카 전차군단은 마르사 엘 브라가로 물러나면서 이곳에서 54대의 전차와 연료 등 물자 보급을 받았지만, 숫적으로 열세인 이탈리아·독일 연합군은 여전히 영국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전력이 못되었다. 하지만 롬멜은 이러한 상태에서 어쩌면 무모한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1942년 1월 21일에 대전차포로 전차부대를 엄호하여 기동력으로 역공을 펼치는 방식으로 벵가지에 주둔한 영국군을 패퇴시킨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전세를 다시 뒤집은 독일군 북아프리카 전차군단은 키레나이카로 진격하여 영국군을 다시 토브룩 요새까지 밀어붙였다. 롬멜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의 공로를 본국으로부터 인정받아 1월 24일 중장에서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 무렵에 독일의 적국인 영국의 수상 처칠(Winston Churchill)은 1942년 1월 27일 의회 연설에서 “나는 이 자리에서 현재 키레나이카의 서부전선이 어떤 상황인지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적국에게는 무척이나 용감하고, 유능한 장군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의 참상과 관계없이 개인적인 평가를 해도 된다면 나는 그를 위대한 장군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면서 적장인 롬멜에게 존경심을 표했다. 

 

키레나이카 지역으로 진격한 데 이어서 롬멜은 1942년 5월 26일에 두번째 공세를 시도하였고, 6월 중순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가잘라와 비르 하차임 지역에서 영국군 제8군단을 섬멸하였다. 이어서 6월 20일 토브룩 요새를 재포위하여 독일 공군의 격렬한 지원 공습과 함께 일제돌격을 개시, 마침내 토브룩은 이탈리아·독일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전투는 롬멜에게 군인으로서의 일생에 있어 큰 의미가 있는 승리였지만 적군과 아군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롬멜은 6월 22일에 토브룩 점령의 전공(戰功)을 높이 평가받아 대장에서 원수 계급으로 승진하게 된다.

 

 

이탈리아 식민지령 리비아 지역을 거의 탈환한 이탈리아·독일 연합군은 여기서 전진을 중지하거나 퇴각하는 영국군 제8군단을 쫒아 영국 식민지령인 이집트 국경을 넘느냐 기로에 서게 된다. 롬멜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 북아프리카 전차군단은 영국령 이집트 국경을 넘어 엘 알라마인 지역까지 진격하지만 7월 1일부터 영국 공군기의 맹렬한 폭격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독일군 북아프리카 전차군단은 엘 알라마인에서 영국군과 첫번째 접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곳에서 롬멜의 부대는 연료와 군량이 떨어지고 물자 보급마저 끊기면서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반면에 영국군은 병참기지에서 불과 몇 시간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제1차 엘 알라마인 전투는 이탈리아·독일 연합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 때에 영국군에서는 오친레크가 해임되고 알렉산더(Harold Alexander)가 총사령관에 임명됐으며,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가 신임 제8군단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1942년 10월 23일에 몽고메리는 이탈리아·독일 연합군을 역공하기로 결정하고, 전쟁의 양상은 방어전에서 공격전 형태로 뒤바뀐다. 제2차 엘 알라마인 전투에서 몽고메리가 이끄는 영국군 제8군단이 롬멜 휘하의 독일군 북아프리카 전차군단을 궤멸시킴으로써 이탈리아·독일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에서의 우세를 상실하게 되었다. 전세가 다시 역전되자 롬멜은 본국에 물자 보급을 요청했지만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에서는 “오직 끈질기게 버텨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동원 가능한 화력과 병력을 모두 전투에 투입하라”는 답변만 줄 뿐이었다. 롬멜은 고심 끝에 병사들의 희생을 막고자 본국으로부터의 명령을 무시하고 튀니지 방면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같은 해 12월에 미국·영국 연합군이 이른바 ‘횃불 작전’이라고 명명된 알제리 지역에서의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북아프리카 전선의 양상은 영국군이 압도적인 우세로 주도권을 쥐게 된다.

 

롬멜은 튀니지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1943년 독일 공군 작전사령관 케셀링(Albert Kesselring)과 이탈리아 육군 참모총장 카발레로(Ugo Caballero)와 갈등을 겪게 된다. 케셀링과 카발레로는 롬멜의 무모한 전략을 비난하며 아프리카군단 지휘관에서 퇴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튀니지 철수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동쪽에는 영국군의 반격이 계속되었고, 서쪽에는 알제리의 카사블랑카 지역에서 진격해오는 미국·영국 연합군의 포위망이 좁혀들어오면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의 ‘롬멜 신화’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43년 튀니지 방면으로 퇴각함과 동시에 궁지에 몰리면서 독일군 북아프리카 전차군단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롬멜은 결국 3월에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그가 지휘했던 북아프리카군단은 아르님(Hans-Jürgen von Arnim)의 증원군과 합류해 튀니지 전선에서 다시 미국·영국 연합군과 격전을 벌였지만 전력의 한계는 너무도 명확하게 갈렸다. 결국 5월에 아르님 대장 휘하의 북아프리카군단 소속 패잔병들이 미국·영국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북아프리카 전선은 미국·영국 연합군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한편, 독일로 귀환한 롬멜은 히틀러의 총애를 잃게 되어 패전 책임을 추궁당하며 해임되었다. 롬멜 자신도 역시 히틀러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더는 환상을 품지 않게 되었다.

 

이 무렵 롬멜은 총통 본영간의 접촉이 사실상 단절된 상태로 지냈는데,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앓고 있던 신경통과 위장병 등 병세가 악화되자 병원 당국이 제공한 2층 서재에서 요양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곧 미국·영국 연합군이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 대한 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이탈리아 본토로 진주해오자, 히틀러는 롬멜을 복직시켜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냈다.

 

1943년 9월 23일 롬멜은 건강이 회복될 무렵에 나치스가 운영하는 집단 수용소와 유대인 학살 행위에 관해 소식을 접하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정책을 가리켜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이며, 학살행위는 크나큰 범죄행위”라고 비난하는 등 히틀러의 눈총을 받게 되었다.

 

한편, 미국·영국 연합군이 이탈리아 점령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무솔리니 퇴진 요구가 높아져갔다. 그 무렵에 히틀러의 명령으로 해임상태에서 복직한 롬멜은 7월 23일에 그리스 집단군의 총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살로니키로 출발했다. 25일에는 무솔리니가 실각되면서 바돌리오 내각이 수립되고 이탈리아가 연합군의 편으로 돌아설 무렵에 이내 곧 롬멜은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받아 이탈리아 전선으로 그리스 살로니키에서 이탈리아로 이동하게 된다. 29일에는 국방군 사령부에서 계획한 ‘알라릭 작전’의 개시로 이탈리아 중북부지역을 단숨에 접수하게 되면서 롬멜은 8월 17일에 이탈리아 북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방어선 구축에 힘썼다. 그러던 중 11월 5일에 국방군 사령부로부터 새로운 임무를 받아 11월 21일에 프랑스로 이동, 거기서 ‘대서양 방벽’에 대한 방위를 맡아 이탈리아 전선을 떠나게 된다.

 

롬멜은 이 시기에 연합군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하여 프랑스 해협의 해안방위 책임을 맡아 서부전선 사령관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 휘하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과거 1940년~43년 사이 서부전선과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여러 차례 전격기동작전을 전개하여 많은 승리를 거두었던 경험을 토대로 “연합군이 대규모의 교두보를 설치하는 것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저지해야 하고, 연합군의 반격에 대비하여 해안의 방어선 뒤에 강력한 예비대를 배치해 두어야 하며 적군을 바다로 퇴각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하면 연합군 침공의 운명은 첫날에 결정될 것이다”는 주장을 펼치며 해안 방어시설들을 건설하는 데 비상한 창의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서부전선 사령관 룬트슈테트와 국방군 최고사령관 슈베펜부르크(Geyr von Schweppenburg)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먼저 아무리 해안 방어가 튼튼하다고 한들 후방에 투입될 연합군 공수부대를 기갑사단을 통해 제거하지 않으면 실질적 해안방어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1943년 이탈리아 전선의 살레르노 등지에서 미국 해군의 함포사격에 반격을 가하던 기갑부대가 큰 피해를 당했다는 점이 그 근거였다. 

 

룬트슈테트는 해안지역 방어대신에 미국·영국 연합군을 내륙 깊이 유인하여, 기갑부대로 전멸시키는 계획을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 전선에 있을 때에 연합군의 항공전을 미리 경험한 롬멜은 “제공권이 없는 아군의 현재 상태에서의 기갑부대 이동에 제한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반드시 적이 교두보를 구축하기 전에 해안에서 적군을 격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44년 6월 6일 유럽 주둔 미국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의 지도 아래 미국·영국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Normandy Invasion)을 성공시키는 동안 롬멜은 “이 전쟁은 더 이상 돌이킬 수도 없는 독일의 패배이며, 도저히 승리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또한 그는 히틀러가 현재 전쟁의 상황을 직시할 자세도, 연합군과 강화를 맺어야 한다는 불가피한 결론을 내릴 준비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독일 군인으로서 총통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한 것이 중요한지,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중요한지를 두고 기로에 서게 되었다.

 

7월 17일 연합군의 상륙작전으로 전투가 한참 치열해졌을 때에 롬멜의 전용차가 영국 공군기의 저공비행 폭격을 받아 차로에서 탈선하여 전복되면서 그는 두개골 골절상으로 병원에 후송되었다. 그 후 8월에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독일 울름에 있는 저택으로 돌아가 요양생활을 하면서 차츰 회복되었다.

 

1944년 7월 20일에 루트비히 베크 육군 대장을 중심으로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대장, 헤닝 폰 트레슈코브 소장, 그라프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클라우스 필리프 셴크 중령 등 고위급 장교들이 폭탄으로 히틀러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처형된 사건이 벌어졌다. 암살 음모 관련자들 가운데 롬멜과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그에게 접근하여 “히틀러가 축출된 뒤에는 롬멜이 국가 원수직을 맡아야 한다”고 제의했다. 하지만 롬멜은 정치적인 목적의 살인을 옳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암살 공모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롬멜은 히틀러가 내리는 일체의 처형명령을 한결같이 무시했었고, 6월 6일에 연합군의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에 독일이 전쟁에 패배했다는 사실과 연합군 측과 강화를 맺어야한다는 의견을 수차 지적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롬멜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던 중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동프로이센 지역의 라슈텐부르크에 위치한 총통지휘부 회의에 참석하여 시한폭탄이 든 가방을 놓고 히틀러를 폭살한 뒤 나치스의 주요인사들을 체포하여 나치스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히틀러는 게슈타포를 파견해 공모자들을 색출,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하고 처형했다. 재판과 조사과정에서 롬멜이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한 사람들과 접촉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 역시 살생부(殺生簿)에 거론되었다.

 

1944년 10월 14일 부르크도르프와 마이젤 두 명의 장군은 12명의 게슈타포 요원과 함께 울름에 있는 롬멜의 저택을 둘러쌌다. 그들은 사건 연루의혹을 국민들에게 밝히지 않고 조용히 죽는다면,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고 국장을 치러준다는 조건으로 롬멜 장군에게 자살을 요구하였다. 롬멜은 이에 따라 자신의 저택에서 약 5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여 청산가리가 든 독배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히틀러는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는 롬멜 장군이 암살미수 사건에 관련되어 처벌당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겨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그에게 자살을 권했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때 당시 병원에서의 공식발표 사인은 ‘서부 전선에서 근무 중 입은 부상 악화에 따른 심장마비’라고 발표하였다. 그의 사후 10월 8일 울름 시청에서 공식 추도식을 치루었고, 추도식 사회는 룬트슈테드가 맡았다.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은 롬멜의 장례식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많은 독일 국민들은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시하였다. 그의 묘는 오늘날 뷔르템베르크 주에 위치한 헤를링엔이라는 작은 마을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