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14 다시 만주행에 오르다 ⑴

대모달2011.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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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의 결성과 흑색공포단[Black Terrorist Party]의 폭력 투쟁

 

젊은 아나키스트들을 북만으로 떠나보낸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이 천진에서 쓸쓸하게 상해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1930년 10월 중순, 막내동생 이호영(李護榮)이 찾아왔다. 이호영은 넷째 형 이회영의 소재지를 모르다가 북경 연락책인 민국대생 정래동과 오남기를 만나서 형의 거처를 알게 되어 찾아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리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회영 일가가 구국의 일념으로 전 재산을 처분해 망명길에 오른 지도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 많던 재산을 독립운동에 다 쏟아붓고 수중에는 돈 한 푼조차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우당은 이틀 밤을 보내고 다시 북경으로 떠나는 동생에게 상해까지 갈 자기의 여비 일부를 나누어 주었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호영과 그의 아들 형제 등 모든 식구가 1931년~32년경 북경에서 모두 사망했다고 전해질 뿐 자세한 경위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우당은 1930년 10월 말경 아들 규창과 함께 천진을 떠나 상해에 도착했다. 실로 오랜만에 와 보는 상해였다. 상해의 프랑스 조계(租界) 애인리(愛仁里)에는 김달하 피살사건(金達河被殺事件)으로 피산한 아들 규학이 전차회사 검표원으로 일하며 살고 있었다. 우당은 규학의 집 근처인 정자간(亭子間)이란 값싼 방에서 아들 규창과 함께 기거하면서 식사는 규학의 집에서 했다.

 

우당이 상해에 도착한 사실을 알고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요인들이 간단한 환영만찬을 베풀었다.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백범(白凡) 김구(金九)·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우천(藕泉) 조완구(趙琬九) 지사(志士)를 비롯해 김두봉(金枓奉)·조소앙(趙素昻)·이유필(李裕弼)·홍남표(洪南杓)·조상섭(趙尙燮)·안공근(安恭根) 등 임정 요인들은 만찬에서 우당이 상해에 왔으므로 조국 독립운동의 앞길에 서광이 비친다는 말로 환영해주었다.

 

당시 임정 요인들의 생활은 지극히 곤란했다. 백범 김구가 남긴 문헌인『백범일지(白凡逸志)』에는 임정 요인들의 생활상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나는 잠은 임시정부 정청(政廳)에서 자고, 밥은 돈벌이 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을 이곳 저곳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었다. 동포의 직업이라 함은 전차회사의 차표 검사원인 ‘인스펙터’가 제일 많아서 70명 가량 되었다. 나는 이들의 집을 돌아나디며 아침 저녁을 빌어먹는 것이니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였다. 다들 내 처지를 잘 알고 있으므로 누구나 내게 미움밥은 아니 주었을 것으로 믿는다."

 

항주 지강대학을 졸업한 엄항섭(嚴恒燮)은 프랑스 공무국에서 근무했는데 그 역시 월급을 쪼개 백범이나 석오 같은 임정 요인들을 먹여 살렸다. 임정(臨政)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젊은 청년들의 자기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해에는 우당 이회영의 셋째 형인 이석영(李石榮)과 바로 아랫 동생인 성재 이시영도 살고 있었는데, 성재는 프랑스 조계의 한 초옥(草屋)에서 아들 규홍과 함께 자취했고, 석오나 우천도 자취를 하는 형편이었다.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의 사위로서 젊은 나이에 승정원 부승지 등의 고관을 지냈던 성재나 석오·우천 모두 명문가의 후예들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참가한 다음에는 스스로 부엌을 출입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밥 지을 쌀이나 있으면 다행이었다.

 

이규창은 상해에서 임시정부 부설 학교인 인성학교(仁成學校)를 다녔다. 인성학교는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 등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이 교장이나 교사로 있었다.「일본 외무성 특수조사문서」에 따르면 이규창이 이 학교에 다닐 무렵인 1929년~32년 사이에는 50여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있었다.

 

1931년 9월경 만주를 탈출한 동지들이 상해로 속속 모여들면서 우당의 상해 생활은 활기를 띠었다. 자연히 상해는 아나키즘 운동의 중심기가 되어 갔다. 백정기(白貞基)·원심창(元心昌)·박기성(朴基成)·엄형순(嚴亨淳)·김성수(金聖秀)·이달(李達) 등은 방 하나를 얻어 자취를 했다. 이들 모두 만주에서 빈몸으로 겨우 빠져나왔으니 생활이 넉넉할 리 없었다. 입으로 불면 날아갈 듯 찰기라고는 전혀 없는 안남미(安南米)와 저린 고등어 반찬 한 가지가 끼니의 전부였다.

 

이 때 백당(白堂) 현채(玄采)의 아들 현영섭(玄永燮)이 경성제국대학에 다니다 상해에 오게 되었다. 백당은 나중에는 일제가 설치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도 간여했으나 한때는 신민회(新民會)의 중심 인물인 전덕기(全德基) 목사(牧師)와 함께 활동했으므로 우당도 아는 사이였다. 현영섭이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혼숙하는 모습을 보고 “국제도시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생활이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자기 돈을 생활비에 보탤 정도로, 이들은 어려운 가운데서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이런 가난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도 우당과 젊은 아나키스트들은 상해에 본격적인 아나키즘 조직을 구성했다. 상해의 일본인들과 친일주구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은 이렇게 탄생했다. 만주사변(滿洲事變) 발발과 때를 맞추어 결성된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의 산하 기관이었다. 류자명(柳子明)·백정기(白貞基)·오면직(吳冕稙)·이강훈(李康勳)·엄형순(嚴亨淳)·나월환(羅月煥)·화암(華岩) 정현섭(鄭賢燮) 등이 참석한 창립대회에서 청년 지사들은 우당을 의장에 추대했다. 그러나 우당은 한사코 거절했다.

 

“내가 의장의 직책을 감당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장래에 조직을 이끌어 갈 사람은 청년 여러분이니 여러분 가운데서 의장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오.”

 

그러면서 우당은 류자명을 의장으로 추천했다. 젊은 청년 동지들은 우당의 사양과 추천을 받아들이면서 “앞으로도 노선생의 지도 편달을 바란다”고 의결한 후 류자명을 의장 겸 대외책임자로 추대했다. 중앙집권을 배격하는 아나키즘 조직의 수장은 의장의 성격보다는 대외책임자의 성격이 강했다. 내부의 일은 모두 함께 의논해서 처리하고 다만 외부접촉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 대외책임자를 두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산하에 남화구락부를 두는 한편 기관지『남화통신(南華通信)』을 발간했는데 기관지 인쇄는 이규창이 맡았다. 이규창의 자서전 뒤에는 부록으로 남화한인청년연맹의 강령·규약·선언이 덧붙여 있다.

 

“우리의 일체 조직은 자유협동의 원칙에 의거한다”, “우리는 절대 자유·평등의 이상적 신사회를 건설코자 한다” 같은 강령과 “본연맹은 강령에 의해 사회혁명을 수행함을 목적으로 한다” 같은 규약 10개항이 있는데, 다른 독립운동 단체들과는 다른 조항이 있어 눈여겨 볼만하다.

 

"본연맹은 강령의 목적 수행을 위해 맹원 전체가 승인하는 바 모든 방법을 채용한다. 당 강령에 저촉되지 않는 본연맹원 각 개인의 자유발의 또는 자유합의에 의한 행동은 설사 그것이 본연맹으로서는 직접 관여하지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아무 간섭도 하지 않는다."

 

"본연맹의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서기부를 둔다. 단, 맹원 전체의 호선에 의해 피선된 서기부 약간 명을 두되 그 임기는 각 1년으로 한다."

 

"연맹원은 자유로 탈퇴할 수 있다"

 

“친애하는 조선 민족 여러분! 우리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으로 약탈당한 이래 우리 2천 3백만 민중은 자유의 빛을 잃고 기아와 모욕으로 억눌려 날로 멸망의 구렁에 떨어져 가고 있다”로 시작되는 선언문은 왕정과 자본주의 국가,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절대적인 자유연합사회의 구현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 조선 민중이 조선 땅에 건설할 사회는 이들처럼 사회적으로 병든 사유재산, 국가정부의 조직 및 위(僞)도덕을 완전히 파괴한 후에야 비로소 건설할 수 있는 것이리라. 누구나가 만물이 내 것이라고 주장할 권리는 없다. ‘각인이 자기의 필요에 의해 취하고 자기의 능력에 따라 일하기’의 절대 자유연합사회가 아니면 안 된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민족개량주의자(民族改良主義者)들의 자치론(自治論)이나 참정권론(參政權論)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압제 아래에서 부여하는 자치나 참정권을 승인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을 그들에게 팔아넘기는 수작인 것이다."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비판은 신랄하다.

 

"……현재 우리를 학살·탄압하고 있는 조직 그대로를 탈취하여 자당(自黨)이 그 대신 같은 권력을 행사하고자 공공연히 운동을 개시하고 있는 사회민주당·공산당의 행위를 엄격하게 배격, 박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분, 그들은 이미 우리의 자유해방을 요구하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탈취해야 할 2천 3백만의 자유를 러시아에 팔아넘기려는 장사치이다."

 

"압박자의 지위에 있는 자를 모조리 타도하고 무정부자유의 신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모이자! 청년 아나키스트 기치 아래 모이자!"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이러한 기치 아래 선전공작도 전개했지만, 이런 간접 활동보다는 직접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여기서 말하는 직접 행동이란 일제 고관 암살이나 행정기관 폭파 등을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조직은 건립했지만 자금이 없었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권총과 폭탄 같은 무기를 구입할 자금이 어디에 있겠는가? 목숨을 바치겠다는 젊은이들은 있었으나 일본인들을 공격할 무기를 구할 자금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해 준 인물이 중국인 왕아초(王亞樵)와 화균실(華均實)이었다. 이들이 우당과 화암을 찾아와 공동항일전선을 펴자고 제의한 것이다. 원래 아나키즘이 국제주의 운동인 데다가 다른 것도 아닌 공동항일전선을 펴자는 제의를 해 왔으니, 한국인들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왕아초와 함께 움직이면 도움 받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들은 중국 정계의 핵심과도 선이 닿아 있었다. 왕아초는 안휘성(安徽省) 출신이었는데 광동성과 광서성을 기반으로 하는 서남 계열의 정치 세력인 호한민(胡漢民)·백숭희(白崇禧)·이종인(李宗仁) 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중국군의 핵심인 상해 주둔 19로군과도 밀접한 사이였다.

 

그러나 우당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자금과 무기를 대겠다고 제안한 사실이었다. 무기와 자금만 있으면 일제를 상대로 치열한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드디어 1931년 10월 말, 상해의 프랑스 조계지에 모인 한·중·일 세 나라의 아나키스트들은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을 결성했다. 한국인과 중국인 각 7명과 일본인 3명이 참여한 항일구국연맹은 기획부·선전부·연락부·행동부·재정부 등을 두었다. 우당이 의장격인 기획위원을 맡았고, 왕아초는 재정부장을 맡았다.

 

왕아초는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항일구국연맹에 매달 재정 지원을 하다가 한국인들이 스스로 경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 주겠다고 했다. 그는 프랑스 조계 내 성모원로(聖母院路)에 인쇄소를 차려 주었고, 조계 외에는 미곡상을 차려 주었다. 또 한국인 동지 몇 사람을 19로군에 박아 놓고, 19로군을 통해 무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은 화암(華岩) 정현섭(鄭賢燮)과 함께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세웠다.

 

"일본의 군경 기관 및 수송 기관의 조사와 파괴, 일본의 정계·군부 요인 암살, 중국인 친일분자 숙청, 중국 각지의 배일선전(排日宣傳)을 위한 각 문화기관의 동원 계획 수립, 선전망 조직, 이상에 관한 인원 및 경비의 구체적인 설계"

 

항일구국연맹은 이런 목표를 실행하기 위해 백정기(白正基)를 중심으로 한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이라는 직접 행동대를 조직했다. 공산주의 운동의 상징적인 색깔이 붉은색이라면 아나키스트들의 색깔은 검은색이었다. 흑색공포단은 우당과 화암이 지휘하고 왕아초가 재정과 무기공급을 맡아 활발히 활동을 전개했다. 자금과 무기가 공급되자마자 날개 돋친 듯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을 벌였다.

 

그 중 하나가 상해 북군역(北軍驛)에서 국민당 정부의 외교부장 왕정위(汪精衛)를 저격한 일이다. 왕정위는 국민당 좌파의 수장으로서 장개석(蔣介石)과 대립하던 급진적 민족주의자였는데, 이 무렵에는 대일굴욕외교를 거듭해 친일파로 분류되고 있었다. 한국인 이용준(李容俊)과 중국인 화균실, 일본인 사노 이지로우가 왕정위 저격을 시도했으나 총상(銃傷)만 입히는 데 그쳤다. 그 대신에 그의 부관이 절명했다. 왕정위 역시 몸에 박힌 탄환을 빼내지 못해 후일 일본에 가서 병사했다.

 

흑색공포단은 멀리 북쪽으로 올라와 일본의 화북 교통의 요지인 천진을 맹타해 일본군의 수송로를 끊으려는 계획도 세웠다. 이 임무를 맡은 류기석은 이용준과 함께 올라와 북경 민국대생 정래동·오남기·국순엽 등과 협의해 천진의 일청기선과 일본 영사관을 공격했다. 1931년 12월 류기석은 일제의 육군과 군수물자를 싣고 입항한 1만 1천톤급 일청기선에 폭탄을 던졌다. 그 결과 선체 일부가 파손되고 많은 사상자가 났다. 같은 시각에 이용준은 천진의 일본 영사관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헌병 4~6명을 권총으로 사살했다. 또한 복건성 하문(廈門)에 있는 일본 영사관에도 폭탄을 던져 불길에 휩싸이게 했다.

 

이 모든 일들이 불과 며칠 사이에 발생했다. 중국 내 각 신문들은 이를 중국항일구국군(中國抗日救國軍)의 특공작전이라고 보도하며 대서특필했다. 자금과 무기공급이 원활해지자 짧은 시간 안에 이런 일들이 가능했던 것이다.

 

심지어 중국인 왕아초는 장개석 암살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왕아초와 같이 일했던 화암은 ‘왕아초의 정치적 활동을 살펴보면 그는 무정부주의자라기보다 정치에 관계하여 테러를 책동하는 유민’이라고 왕아초를 규정지었다. 그렇게 생각한 까닭은 왕아초가 중국 내부 정치에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을 끌어들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왕아초는 장개석이 죽으면 자신과 가까운 호한민·백숭희·이종인 등의 서남파가 집권한다며, 그렇게 되면 한국 독립운동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논리로 화암을 설득했다. 장개석의 휴양지인 여산까지 무기도 운반해 주겠다는 제의에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처지에 빠졌다.

 

장개석을 암살하기도 어렵거니와 설혹 장개석을 제거한다고 해도 새 정부가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울 것이란 보장도 없었다. 만일 실패해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장개석을 저격하려 했던 사실이 밝혀지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만 곤란한 처지에 빠질 것이 뻔했다.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이중 방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왕아초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하고 실제 저격은 하지 않는 절충안이었다. 화암이 승낙하자 왕아초는 백정기를 실행자로 요구했다. 그의 강직한 성격을 높이 산 것이다. 화암은 백정기에게 흑색공포단의 입장, 특히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처지를 충분히 설명한 후 양여주와 함께 여산으로 보냈다. 왕아초는 햄과 빵 속에 권총과 폭탄을 감춰 여산까지 운반해 준 후 이제나 저제나 암살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신문들은 장개석이 살해된 소식이 아니라 그들이 여산을 떠났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었다.

 

상해로 돌아온 백정기와 양여주는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왕아초에게 워낙 경비가 심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지만, 화암에게는 저격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고 말했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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