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14 다시 만주행에 오르다 ⑶

대모달2011.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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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만주행 도중 의문스러운 순국

 

우당은 이 위기를 정면에서 돌파하기로 하였다. 상해를 떠나 만주를 새로운 활동무대로 삼기로 한 것이다. 당시 만주는 일제가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어떤 면에서는 상해보다 더 위험했다. 그러나 우당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우당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네. 그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이 또한 행복 아니겠는가? 남의 눈에는 불행일 수도 있겠지만 자기가 죽을 곳을 찾는 것은 옛날부터 행복으로 여겨 왔네. 같은 운동선상에 선 동지로서 장래가 만리 같은 귀중한 청년 자제들이 죽음을 제 집에 돌아가는 것으로 여겨 두려움 없이 몇 번이고 사선을 넘고 사지에 뛰어드는데, 내 나이 이미 육십을 넘어 칠십이 멀지 않네. 그런데 이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린다면 청년 동지들에게 부담을 주는 방해물이 될 뿐이니 이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요,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네.”

 

우당과 화암은 중국 국민당의 거물인 오종휘(吳鍾暉)와 이석증(李石曾)을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다. 만주로 가려 한다는 우당의 말에 두 중국인 아나키스트는 이렇게 답변했다.

 

“만주는 중국 못지않게 한국하고도 이해관계가 깊고 더욱이 백만의 교민이 살고 있으니 한국인들이 조금만 힘을 모아 준다면 중국으로서도 만주 문제 해결에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오……. 만약 한국인들이 만주에서도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거행한 것과 같은 의거를 일으키며 광범한 항일전선을 펼 수만 있다면 장래에 중국 정부로서도 당연히 만주를 한국인들의 자치구로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만주를 한국인들의 자치구로 인정하겠다는 말에 우당은 고무되었다. 만주는 역사적으로도 우리 민족의 고토(故土)이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자금이었다. 우당이 되물었다.

 

“한국인들을 단결시켜 한·중 공동전선을 펴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항전의 필수요소인 재정과 무기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그대들도 잘 아는 바가 아닙니까?”

 

오종휘와 이석증이 답변했다.

 

“그대들처럼 물욕과 영예를 모르는 담백한 무정부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온 힘을 기울일 결심이라면, 우리가 장학량(張學良)에게 연락하여 자금과 무기를 제공하도록 해 줄 것이며, 또 장학량의 심복으로 만주에 남아 있는 인물들에게 비밀 연락이 되게 알선해 주겠소.”

 

이 말에 우당은 더욱 고무되었다. 장학량은 일제가 만주를 침공한 이후에도 싸우지 말고 철수하라는 장개석의 명령에 큰 불만을 품고 일본군과 항전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백만 교포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가세는 만주 정세에 큰 변수가 될 수 있었다. 화암의 기록에 의하면 이석증을 통해 이런 제안을 받은 장학량은 며칠간의 여유를 두고 생각하다가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에게 무기를 공급해주겠다고 승낙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런 통보를 받은 우당은 잔뜩 고무되어 만주로 곧장 떠나려 했으나 젊은 동지들이 계속 반대하였다. 우당은 이렇게 말했다.

 

”내 늙은 사람으로서 덥수룩하고 궁색한 차림을 하고 가족을 찾아간다고 하면, 누가 나를 의심하겠는가? 내게는 무슨 증거될 일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나는 만주에 가면 곧바로 사위 장기준에게 의탁할 수 있으니 주거에 관한 걱정도 없지 않은가? 내가 먼저 가서 준비공작을 해 놓을 테니 그대들은 내가 연락을 하거든 2진, 3진으로 뒤따라오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66세 노인의 굳은 결심을 꺾을 수 없음을 안 젊은 아나키스트들은 그의 만주행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우당은 젊은 동지들과 만주에서 할 일을 상의해 결정했다.

 

"첫째, 만주에 조속히 연락 근거지를 만들 것

둘째, 주변 정세를 세밀히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할 것

셋째, 장기준을 앞세워 지하 조직을 설립할 것

넷째, 일본 관동군 사령관 무토오 노부요시[武藤信義] 암살 계획을 세울 것"

 

우당이 만주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연락하면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즉시 오종휘와 이석증에게 연락해 장학량과 연결한 후 한·중·일 3개국 출신의 아나키스트들이 만주로 이동해서 유격대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화암은 우당에게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

 

“선생님이 꼭 만주로 가시겠다니 더 이상 만류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곳 사정이 매우 위험한 것과 마찬가지로, 만주 사정도 과거와는 크게 달라서 위험합니다. 만주에 안착하실 때까지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만주로 가신다는 말씀을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우당은 알았다고 대답했다. 평생을 혁명가로 살아 보안의식이 몸에 밴 우당이었다. 그러나 만나지 않고는 떠날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둘째 형 이석영이 바로 그였다. 이석영은 근처에 살고 있었다. 생전에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작별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당이 아들 규창을 데리고 찾아갔을 때 이석영은 혼자가 아니었다. 연충렬(延忠烈)과 이규서(李圭瑞)란 청년이 함께 있었다. 연충렬은 임정 요인 엄항섭의 처조카였고, 이규서는 태공(太公)이란 가명을 쓰고 있었는데 이석영의 둘째 아들로 이규창보다 한 살 위의 사촌형이다. 둘 다 전혀 의심을 살 사람이 아니었다. 우당은 형 석영에게 큰절을 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우당은 부인 이은숙에게 지금 새로운 곳으로 떠나니 답장을 말라고 하면서, 그곳에 가서 안정이 되면 편지를 하겠다는 내용의 짧막한 서한을 보냈다. 그리고 류자명과 이석증 등이 만주 각처에서 연락할 수 있는 곳과 사무 처리 등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다 듣고, 아들 규학에게도 작별을 고했다.

 

1932년 11월 초, 달이 환한 밤이었다. 우당은 아들 규창과 단둘이 상해의 황포강 부두로 향했다. 규창은 아버지를 모시고 영국 선적의 남창호(南昌號)에 올랐다. 우당이 자리잡은 곳은 제일 밑바닥인 4등 선실이었다. 규창은 부친이 무사히 안착하기를 빌면서 큰절을 올린 후 배에서 내렸다. 이윽고 기선이 대련을 향해 출발하는 것을 보고, 규창은 백정기와 엄형순을 찾아가서 부친이 떠났음을 전했다.

 

이후 우당의 행적을 알 길이 없으나, 이증복의 묘사는 당시 상황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우당 선생이 타고 있는 배가 대련전진(大連前津)을 통과할 즈음, 왜적(倭敵)의 경비선 두 척이 급히 추적하여 정선을 명령했다. 그리고 선내로 급습하여 중국인으로 변장한 우당 이회영 선생을 색출하여 대련경찰서로 압내(押來)하였다. 선생은 모든 것을 체념했다. 악독한 고문에도 자기가 띠고 있는 용무에 대해서는 자백치 않았기에 결국 허리가 부러지고 단근질에 피육(皮肉)이 부란(腐爛)되어 65세의 인생을 일기로 대련 유치장에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선생이 어느 날 어느 시에 운명했다는 것은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증복,〈고종 황제와 우당 선생〉《우당 이회영 약전》

 

이러한 통탄한 상황을 전혀 알 길이 없었던 이규창은 매일같이 만주에서 편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편지는 오지 않았다. 마침내 전보가 왔는데, 만주가 아니라 국내에서였다. 그것도 우당이 보낸 것이 아니라 모친 이은숙이 형 규학에게 보낸 전보였다. 전보 내용은 간단했다.

 

‘11월 17일 부친이 대련 수상경찰서(水上警察署)에서 사망’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규창은 곧 백정기에게 이 전보를 보였다. 깜짝 놀란 백정기는 일단 국내의 모친께 서신을 보내 자세한 내막을 알리라고 말했다. 보다 자세한 내막을 이은숙의 수기를 통해 살펴보자

 

"……하루는 상해에서 가군의 편지가 왔는데 별말씀 없으시고 다만 몇 자뿐으로, ‘지금 신지(新地)로 가서 안정이 되면 편지한다’ 하시고는, ‘지금 떠나니 답장 말라’고 하셨다. 어찌 된 일인지 놀랍고도 궁금하여 우관(又觀:이정규) 선생께 가서 편지를 보이고는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물었더니 그 분 역시 생각하시면서,

 

“아마 만주는 못 오실 것이고, 남경으로 가시는 모양이오.”

 

하며 궁금해하신다……. 이 편지는 10월(음력) 상순에 왔는데 회답도 할 수 없고, 마음이 산란하기가 한량없어 그 날부터 침식이 불안하였다.  

 

현숙을 데리고 통동(通洞)서 경경불매(耿耿不寐)하고 있는 지가 7, 8일 되는 10월 19일에 신경(新京)의 여식(규숙)한테서 편지가 오기를,

 

“오늘 영사관(일본)에서 저에게 조사를 하러 왔는데, 아마 아버님께서 저에게로 오시다가 대련 수상경찰에 피착(被捉)된 것 같으니, 어머님께 조사하러 오거든 다른 말씀 마시고 딸이 신경서 산다고만 하세요”

 

하는 내용이었다.

 

하도 놀랍고 마음이 초조해 편지를 가지고 가서 우관 선생께 여식 편지를 뵈이니 우관께서도 놀라며,

 

“선생님께서 어쩌자고 만주로 오셨단 말인가?”

 

하시고는 걱정스러워하더니,

 

“어쩌면 그놈들이 우당장께서 상해를 떠나셨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네 뒤를 떠보는지도 모르니 며칠 더 기다려 봅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북만은 왜놈들 기세가 잔뜩 차서 오실 수가 없었을 것이니, 너무 걱정 말고 기다려 봅시다.”

 

하거늘, 우관 말씀을 듣고 일분 안심이 되나 어찌 마음놓을 수가 있으리요…….

 

밖에서, “현숙아!” 부르시는 음성이 시외숙모시라. 급히 나가 보니 시외숙모께서 전보를 주시면서,

 

“신경에서 동통으로 전보가 왔다고 가져왔기에 내가 왔다.”

 

하시며 전보를 주고 가신다. 어떤 전보인가 하고 우관 선생에게 주었더니 선생이 보시고,

 

“이게 웬일인가? 내가 전보를 잘못 보았나? 이 전보에는 우당 선생님께서 오늘 오전 다섯시에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내가 일어를 잘 모르니 어디 우편국에 가서 자세리 알아보고 오겠다.”

 

하시고 황망히 나가셨다. 좀 있다가 들어오시면서 말을 제대로 못 하시고는 낙루하시며,

 

“정말 돌아가셨다는 전보다.”

 

하니 슬프도다. 6,7년을 고심열성(苦心熱誠)으로 수만 리 이역에서 상봉할 날만 고대하였더니, 이런 흉보를 받게 될 줄이야. 하늘이 무너지는 듯 호천망조(呼天罔措)하며 붕성지통(崩城之痛)을 당한 이내 박명 무슨 낯을 들고 다니리요!"- 이은숙(李恩淑),《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

 

당시 국내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만주일보(滿州日報)』에 ‘거동이 수상한 노인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실렸는데 국내에서는 그 노인이 이회영이라는 설로 변하면서 의혹이 증폭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련의 관동청(關東廳) 경무국(警務局)은 “18일자『만주일보』에 그 노인이 목매 죽은 듯이 게재하였으나 그 기사의 내용은 오보”이며, “피의자 자살 운운은 전연 사실이 아닌 것이며 이환광이라고 한 것도 실상 그 이름이 아닐 뿐더러 이회영이라는 사람도 아니다”라고 국내 기자에게 전화로 밝혔다.

 

당시『동아일보』와『조선일보』등 국내 신문들은 이 사건에 주목해 연일 크게 보도했다.

 

"우당 이회영 노인의 서거설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풍설이 구구하던 터인데 23일 아침 신경에 있는 그의 따님 규숙 씨로부터 서울에 있는 그의 자당과 오빠 되는 규룡 씨에게 확실한 부음을 전해왔다 한다. 그 기별의 내용에 의지하면 우당 노인은 지난 5일 상해로부터 대련에……상륙하려는 즈음에 수상경찰서원에게 체포를 당해 주소와 성명 등을 심문하매 이회영 씨는 낙양 땅에 사는 양모라 지칭하였으나 여러 가지로 경찰의 의혹을 받아 마침내 대련경찰서로 유치되었다. 그리하여 누차 경찰의 취조를 당하면서도 노장한 기개로 한마디 진술과 답변이 없었으며 사상적으로 불굴 침착한 점에는 취조하는 서원들도 놀랐는데 아무리 취조해도 도리가 없으므로 동서(同署) 후쿠다 고등계 주임은 심문의 방침을 고쳐 본거지로 신분을 조사케 하는 일방 그의 행선지와 목적지 등까지 일일이 조사할 수 있는 데까지 조회하려 하였으나 일체를 함구불언(緘口不言)하므로 취조도 일시 중단하고 말 형편이었다 한다. 그런데 지난 17일 아침 다섯 시경에 이르러 그가 감금되었던 제2감방 속에서 3척여의 노끈으로 자일(自鎰)? 하였다는 바 이 급보를 들은 중국 검찰관은 향취(香臭)의사를 대동하고 동일 아침 9시 반경에 실지 검진을 마치고 시역소(市役所)로 넘기어 가매장(假埋葬)한 후 신경에 있는 그의 따님 규숙 씨에게 이 사실을 통지하였던 바, 이 비보를 들은 규숙 씨는 19일 대련에 이르러 유해를 다시 화장하여 유골을 신경으로 가져왔다 하며 이회영 씨의 유족으로는 서울에 있는 이규룡 씨만 23일 밤 11시 경성역발 열차로 신경에 향할 터이라 한다."

 

이 신문보도에서 ‘자일(自鎰)?’이라 의문부호를 쓴 것은 우당이 고문치사(拷問致死)당하지 않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당시 독립운동을 관할하는 고등계의 고문은 혹독하기로 악명 높았다. 신문보도들은 우당이 대련에 도착한 날짜를 5일로 기록하고 있고, 그가 사망한 날짜를 17일로 적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66세의 노인, 우당은 무려 12일간 잔인한 고문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우당은 심문받는 동안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았다. 혹독한 고문에도 끝내 함구하자 본적지 조회를 하려 했으나 그 자체도 우당은 거부했던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 항거였고, 젊은 동지들을 지키기 위한 칠순 노인의 의로운 투쟁이었다. 우당이 고문치사했다는 것은 부인 이은숙의 수기에서 나타난 딸 규숙의 부친 시신 목격 증언에서도 나타난다.

 

"여식 규숙이가 대련에 도착하여 바로 수상경찰서를 찾아가 저의 부친 함자를 대니, 형사들이 영접은 하나 꼼짝을 못 하게 지키고는, 여러 신문지국장들이 여식을 면회하자고 청하나, 형사들이 허락을 안 해 주니 어찌하리요? 당시 여식 연령이 22세로 저의 부친께서 고문을 못 이겨 최후를 마치셨다는 의심을 가지고……형사가 시키는 대로 시체실에 가서 저의 부친 신체를 뵈었다. 옷을 입으신 채로 이불에 싸서 관에 모셨으나 눈은 차마 감지를 못하시고 뜨신 걸 뵙고 너무나 슬픔이 벅차 기가 막힌데, 형사들은 재촉을 하고 저 혼자는 도리가 없는지라. 하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화장장에 가서 화장을 하고 유해를 모시고 신경으로 왔으니 슬프도다."

 

역시 규숙의 현장 증언을 들은 규창은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규숙 누님이 급히 대련경찰서로 가 그놈들에게 사정을 문의하니 폐일언하고 자결하였으니 화장하여 유해를 가져가라고 위협 공갈까지 하며 강제로 시체를 대강 누님에게 보이고 중국식 의복 타파오[大袍], 모자, 신발만을 갖게 하고 안면을 확인시키고 화장하여 버렸다. 안면을 확인할 때 선혈이 낭자하였고 타파오에도 선혈이 많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이규창,《운명의 여진》

 

‘안면에 선혈이 낭자하고 타파오에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는 목격자의 이 증언들은 우당이 일제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고문치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훗날 밝혀진 사실이지만 우당의 죽음에는 커다란 비밀이 담겨 있었다. 그의 피체와 순국에 밀정이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젊은이도 아니고 칠순 노인을, 그것도 수많은 중국인 4등 선객 중에서 그를 정확히 집어내 심문했다는 것은 대련수상경찰서의 고등계에서 그가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우당의 유해는 1932년 11월 28일 아침, 장자 규룡이 모시고 선영이 있는 경기도 개풍군(파주) 경의선 장단역에 도착했다. 서울에서는 이은슥 모녀 등 가족과 이득년·유진태를 비롯한 평생 동지들, 그리고 변영태·장덕수·여운형 등 독립운동가들과《동아일보》편집국장 김철중,《조선일보》취재기자 서승효 등이 내려왔으며, 박돈서·홍증식·신석우는 평양까지 마중가서 유해를 모시고 돌아왔다. 중국에서부터 함께 지내 온 이정규는 노선생이자 노동지의 유해를 눈물로 맞이했다.

 

한편,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졌던 이규창은 아버지가 일제 밀정의 밀고로 희생된 것이란 소문을 접했다. 이규창과 남화한인청년연맹 동지들은 처음에 이 소문을 듣고 반신반의했으나, 내용이 구체적이고 또한 엄청난 일이었다. 은밀히 여러 사람을 조사한 결과, 당초 우당이 상해를 떠날 때 만난 인물 중 이규서와 연충렬을 떠올렸다.

 

화암과 백정기·엄형순은 이규창에게 두 사람을 유인하라고 지시했다. 이규창은 다시 청년단체를 조직하고 유력 인사를 모시자는 제안으로 두 사람을 상해 남상 근교 입달학원 앞으로 유인했다. 백범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순순히 따라온 그들은 남화한인청년연맹 동지들의 엄중한 취조를 받아야 했다. 화암과 백정기·엄형순 등은 입수한 물증을 들이대며 추궁했고, 이에 두 사람은 울면서 밀정 행위를 시인했다. 동지들은 그들을 입달학원과 정거장 사이의 벌판에서 처단했다.

 

혈육 간의 상잔을 겪은 이규창은 형 규학에게 이 사실을 고하니 탄식만 하였다. 다물의 정신으로 친일파 처단에 앞장섰던 자신이 사촌 형제를 처단하게 되는 비극에 절망한 것이다.

 

우당 이회영 지사의 유해는 개풍군 선영에 안장됐는데, 하기락은 그의 일생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민족주의 태내(胎內)에서의 무정부주의의 성장, 그 사상적 성숙, 그 투쟁 단계, 그리고 전시(戰時)의 전투체제로 전환 등의 과정을 우리는 우당이란 한 사람의 생애에서 읽어낼 수 있다. 우당의 최후는 이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의 장렬한 산화였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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