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15 두 아나키스트의 장엄한 순국 ⑴
대모달2011.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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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목숨을 버리기 위해 제비를 뽑는 사람들
1930년대 상해에는 아나키스트의 근거지가 몇 군데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프랑스 조계 복리리로(福履理路)에 있는 정원방(亭元坊)이라는 공동주택의 2층 마루방이었다. 20여명의 아나키스트들이 이 곳에서 합숙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 활동에 참가했던 이강훈(李康勳)이 이 곳에 도착한 것은 1933년 1월경이었다.
그는 이 곳에 있는 백정기(白貞基)를 만났다. 백정기는 엄형순(嚴亨淳)·정해리(鄭海理) 등 다른 아나키스트들과 채시로(菜市路) 한 모퉁이의 또 다른 근거지에서 공동으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백정기는 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 활동을 하던 1931년 3월경 지병인 폐병이 재발해, 그 해 5월 중순 화암(華岩) 정현섭(鄭賢燮)의 호송을 받으며 먼저 상해로 와 있었다. 만주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동지인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았다. 이강훈은 만주 시절의 동지였으므로 곧 남화한인청년연맹 가입이 허락되었다.
그 무렵 화암은 원심창(元心昌)의 소개로 한 일본인 아나키스트를 만났다. 통신사에 근무한다는 자칭 아나키스트인 오키는 부유한 일본인이었다. 오키는 고급 승용차를 가지고 있었고, 홍등가나 고급 요정에서 돈을 잘 쓰는 멋쟁이로 알려져 있어서 의심한 측면이 많았다. 그러나 혁명가는 만일에 대비해 평소의 거동을 위장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교제를 허락했다. 때때로 고기와 술을 사 와 화암과 원심창을 위로하던 오키는 1933년 초기에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왔다. 공동 조계(租界) 무창로(武昌路)에 있는 고급 요정 육삼정(六三亭)에서 일본 정계와 군사계의 거물들과 중국 국민당 고관들이 회합을 갖는다는 정보였다.
참석자 중에는 일본 육군 고위급 지휘관인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대장(大將)과 중국 주재 공사 아리요시 아키[有吉明]도 있다는 사실이 이들을 흥분시켰다. 아라키 대장은 일본 군부를 대표하는 육군 대신으로서 당시 군산복합체인 일본 사정상 총리대신보다 더 실권이 있는 인물이었고, 아리요시 공사는 무수히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했던 장본인이었다. 이들이 중국 국민당 내의 친일분자들과 회식을 하며 현 정세를 논하고 그 대책을 논의한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만주 점령 후 청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를 집정으로 하는 만주국을 수립했다. 그 뒤 만주국은 팽창정책을 계속해 요동·길림·흑룡강·열하의 네 성에 인구는 3천만명에 달했다.
이러한 영토확장은 당연히 중국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제의 군부가 국민당 친일분자들을 만나는 목적은 이들과 결탁해 중국인들의 거센 반발을 무마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는 아라키 대장이 아리요시 공사에게 준 4천만엔의 거금이 큰 작용을 했다.
육삼정 회합에 대한 정보를 들은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는 곧 동지들을 모았다. 1933년 3월 5일 화암과 백정기·엄형순·양여주 등 주요 구성원들이 참석했다. 백정기는 홍구공원의거의 아쉬움과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당연히 자기가 하겠다고 앞장섰다.
“나의 구국일념은 첫째 강도(强盜) 일제(日帝)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爭取)함이요, 둘째는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와 평화를 위해 세계 일가(一家)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공생(共生)·공사(共死)의 맹우(盟友) 여러분, 대륙(大陸)침략의 왜적(倭敵)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주시오. 겨레에 바치는 마지막 소원을…”
백정기뿐만 아니라 이강훈도 마찬가지였다.
“이 거사는 내가 하겠소. 동지들은 듣기만 하시오. 백범 선생님이 양여주 동지에게 맡긴 폭탄이 있으니 내가 단독으로 이놈들을 끝장내 주겠소.”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백정기와 이강훈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다음 날 제비를 뽑아 결행자를 선발하기로 결정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붙잡힐 수밖에 없었고 윤봉길 의사처럼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항일전선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 따위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화암은 제비를 열한 개 만들어 한 개에만 ‘유(有)’자를 써넣었다. 혼자서는 성공하기 힘든 일이므로 제비를 뽑은 사람이 한 명을 지명해 같이 거행하기로 했다.
모두 한 개씩 제비를 골랐다. 그 다음, 한 사람씩 제비를 뽑았다. 한 사람씩 제비를 펼쳤다. 한 명, 두 명을 지나 열 명째 제비를 펼쳤으나 ‘유’자는 나오지 않았다. 이제 제비를 펼치지 않은 사람은 백정기뿐이었다. 백정기가 마지막으로 제비를 펼치더니 환호성을 질렀다. 그가 ‘유’자가 쓰인 제비를 뽑은 것이었다. 그는 옆에 있던 이강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 동지, 나와 같이 갑시다. 이 거사를 우리 둘이서 꼭 성공시킵시다!”
거행자가 결정되었으니 거사 준비를 해야 했다. 화암에게는 백범이 가흥으로 피신하면서 주고 간 폭탄 두 개와 왕아초와 화균실로부터 받은 권총 두 자루와 탄환 스무 발이 있었다. 그는 수류탄도 한 개 더 준비했다.
드디어 1933년 3월 17일, 그 날이 왔다. 당시 의거를 기획했던 화암의 자서전『나의 회고록』을 통해 생생한 현장을 보자.
"아리요시를 비롯해 일본군의 수뇌들이 육삼정에서 중국의 군벌들과 회합을 갖는 시간은 오후 9시에서 11시까지다.
웃고 즐기는 연회석상에 폭탄을 던지고 나오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동지들과 합세하여 뒤쫓아오는 일본 군경에 권총으로 대항하여 저지하기로 했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준비했던 폭탄과 권총을 그들에게 넘겨 주니 목이 메었다. 이제 그들을 보내면 영원히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은 선입감에 말문이 막혔다. 어찌나 불안한지 원심창·이규호(이규창)·오수민을 따라 보내면서 일의 진행상황을 즉각즉각 알리라고 했다.
백정기는 육삼정에서 2백 미터쯤 떨어진 송강춘(松江春)이란 중국음식점에서 자세한 현장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일본인 동지 오키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백정기는 육삼정에서 가까운 음식점 송강춘에서 일본인 동지 오키를 기다렸다. 오키가 자세한 현장 상황을 전해 주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약속시간이 되었는데도 오키는 나타나지 않았다. 백정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식점 종업원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함정이었다. 백정기가 품안에서 폭탄을 빼드는 순간 종업원으로 변장한 형사들이 그를 덮쳤다. 그러자 체념한 백정기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내뱉었다.
“이놈들 참 빠르구나. 한 발만 늦었어도 너희 놈들과 우리가 모두 한 불길 속에 휩싸였을 텐데.”
이강훈에게도 인력거꾼과 행인으로 변장한 일본 형사들이 덤벼들었다. 손쓸 겨를도 없이 백정기·이강훈·원심창이 모두 권총과 폭탄을 압수당한 채 체포되고 말았다. 오키가 일본 영사관에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육삼정을 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상해의 일본 영사관 경찰대에서 기를 쓰고 체포하려던 세 사람은 이렇게 붙잡혀 일본 나가사키의 형무소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그 해 11월 15일 ‘치안유지법 위반·폭발물취체법 위반·살인예비·기물파손’ 등의 혐의로 나가사키의 지방재판소에서 공판을 받았다. 검찰관은 백정기와 원심창에게는 무기징역을, 이강훈에게는 15년형을 각각 구형했는데, 11월 24일 최종 공판에서 재판장은 검찰관의 구형대로 선고했다. 상고를 포기한 백정기는 복역 중 1936년 5월 22일에 옥사했다. 그 때 그의 나이 만 40세였다.
1896년 동학혁명운동의 진원지인 전북 정읍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구파(鷗波) 백정기(白貞基) 열사는 3·1운동에 참가했고 1919년 8월에 인천에서 일본군 보급부대 병영을 파괴하려는 공작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봉천으로 망명해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을 만나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모든 것을 자기가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반일 테러의 혐의를 자기 혼자 뒤집어쓰려는 생각에서였다. 건강한 동지들은 가벼운 형을 받고 출옥해 독립운동을 계속하라는 뜻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대개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 함께 운동했던 사람들 중에서 평가가 엇갈리는 사람이 많은데 백정기는 예외였다. 그와 함께 자취했던 이규창은 “그 많은 사람 중에 백정기 선생과 엄형순 선생 같은 분은 이 세계에 둘도 없는 분으로 생각되었다. 그 두 분은 참으로 인간으로서 훌륭한 점을 다 갖추었다고 생각이 되었다”라고 회고하고 있으며, 육삼정 습격 공작을 함께 했던 이강훈도 이정식 미국 펜실베니아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와의 면담에서 “지금 생각해도 백 열사는 의리가 대단한 분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모든 것을 자기가 주도했다고 강조하곤 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강훈은 그 때를 회상하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백정기에 대한 화암 정현섭의 회상은 보다 구체적이다. 그의 자서전 곳곳에서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구파 백정기는 술을 무척 좋아했고 식욕이 왕성했기 때문에 언제나 배고프다는 타령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제나 활기에 차 있었다. 돈이 없을 때에는 천진과 북경 사이를 걸어다닐 만큼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전에도 광동까지 갔다가……상해까지 수만리 길을 걸어왔던 사람이다.
한번은 천장만 쳐다보고 누워 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고기를 한번 실컷 먹어 봐야지. 화암, 저녁때쯤 성암 댁으로 오시오.”
하고 나갔다. 돈 한푼 없는 그가 무슨 수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미심쩍어 하면서도 이광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는 만두와 고기, 술병을 한아름 안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호탕하게 경위를 설명했다.
서직문(西直門) 밖 조용한 골목의 푸줏간에 들어가 고기가 먹고 싶어서 왔으니 외상을 달라고 솔직히 말하자, 푸줏간 주인이 그의 호탕하고도 담백한 성격에 감복하여 고기를 떼어 주고 돈까지 줘서 술과 만두를 사왔다는 것이었다. 그의 대담성도 대담성이려니와 푸줏간 주인의 대륙인다운 기질이 감탄스러웠다."
백정기가 폐병에 걸린 이유도 감동적이다.
"한번은 우리가 곤궁에 빠진 처지를 보고 백범이 찾아왔다. 임정에 소속된 젊은이들이 전차회사에 나가 일하고 있으니 우리 측 젊은 사람들도 거기에 나가라고 하여 백정기·허열추(許烈秋)·진수인(陳壽鱗)이 그 곳에 나가게 되었다. 이 때 백정기는 전차회사에 다니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중노동을 하느라 몸이 몹시 허약해졌다.
여기에 의열단에 있던 김모가 북경에서 폐병에 걸려 상해로 돌아왔다. 당시 의열단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폐병 환자라 아무도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이것을 안 백정기는 김모를 우리가 있는 곳으로 데려와 숙식을 같이하고 간호도 해 주었다. 비번일엔 그를 데리고 시내로 나가 밥도 사서 먹이고 동지들이 짜증을 낼까 봐 여인숙에서 잠을 재웠다.
정성껏 간호를 했지만 병이 악화되자 노자를 마련하여 귀국시켰다. 그 후 숙식을 같이 한 백정기에게 폐병이 전염되었다. 그 당시 폐병은 불치병으로 규정되어 있던 때였다. 백정기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고 날이 갈수록 기력을 잃어 갔다. 처음에는 중노동에 피로하여 그러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피까지 토해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병원에 가 진찰을 받아 보니 폐병이란 진단이 나왔다.
자기 자신이 폐병 환자라는 것을 안 백정기는 모든 일에 처신을 달리했다. 식사 때나 대화를 하면서도 신중을 기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일말의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듯 갖은 노력을 다했다. 상해의 교민 사회에서도 백정기의 행동과 태도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번은 망지로(望志路) 김두봉(金枓奉)의 집에 갔다가 어린 아이들이 병에 걸려 먹지도 못하고 누워서 죽어 가는 꼴을 보고는 속옷과 겉옷을 몽땅 벗고 두루마기만 걸친 채 시장에 있는 전당포를 돌아다니다가 겨우 돈 몇푼을 얻어 빵과 약을 사들고 김두봉의 집으로 달려간 일도 있었다.
그 옷도 자기의 것이 아닌 동지들의 옷이었고 추운 겨울에 거리를 몇 시간씩 쏘다녔으니 그의 몸은 얼음장처럼 되어 있었다."
아나키스트들이 상해에서 자금 마련을 위해 아이스크림 가게를 할 때였다. 아이스크림을 만들려면, 큰 통에 얼음과 다른 재료들을 넣고 밤새워 휘저어야 했는데 이 일도 백정기와 신현상이 도맡았다. 화암의 회고에 의하면 백정기는 “불평 한 마디 없이 밤을 새워 일했다”고 한다.
백정기에게서 우리는 이회영처럼 공의에 목숨을 걸면서도 한없이 이타(利他)적이고 남을 억압하지 않는 한 완성된 인격을 만나게 된다.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이강훈은 12년 반을 복역한 후 일제가 패망하자 석방되었다. 그 후 박열과 함께 일본에서 거류민단 활동을 하다가 귀국해서는 광복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무기형을 선고받은 원심창도 8·15광복 후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그도 박열과 함께 거류민단에서 통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71년 7월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15 두 아나키스트의 장엄한 순국 ⑴
① 목숨을 버리기 위해 제비를 뽑는 사람들
1930년대 상해에는 아나키스트의 근거지가 몇 군데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프랑스 조계 복리리로(福履理路)에 있는 정원방(亭元坊)이라는 공동주택의 2층 마루방이었다. 20여명의 아나키스트들이 이 곳에서 합숙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 활동에 참가했던 이강훈(李康勳)이 이 곳에 도착한 것은 1933년 1월경이었다.
그는 이 곳에 있는 백정기(白貞基)를 만났다. 백정기는 엄형순(嚴亨淳)·정해리(鄭海理) 등 다른 아나키스트들과 채시로(菜市路) 한 모퉁이의 또 다른 근거지에서 공동으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백정기는 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 활동을 하던 1931년 3월경 지병인 폐병이 재발해, 그 해 5월 중순 화암(華岩) 정현섭(鄭賢燮)의 호송을 받으며 먼저 상해로 와 있었다. 만주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동지인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았다. 이강훈은 만주 시절의 동지였으므로 곧 남화한인청년연맹 가입이 허락되었다.
그 무렵 화암은 원심창(元心昌)의 소개로 한 일본인 아나키스트를 만났다. 통신사에 근무한다는 자칭 아나키스트인 오키는 부유한 일본인이었다. 오키는 고급 승용차를 가지고 있었고, 홍등가나 고급 요정에서 돈을 잘 쓰는 멋쟁이로 알려져 있어서 의심한 측면이 많았다. 그러나 혁명가는 만일에 대비해 평소의 거동을 위장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교제를 허락했다. 때때로 고기와 술을 사 와 화암과 원심창을 위로하던 오키는 1933년 초기에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왔다. 공동 조계(租界) 무창로(武昌路)에 있는 고급 요정 육삼정(六三亭)에서 일본 정계와 군사계의 거물들과 중국 국민당 고관들이 회합을 갖는다는 정보였다.
참석자 중에는 일본 육군 고위급 지휘관인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대장(大將)과 중국 주재 공사 아리요시 아키[有吉明]도 있다는 사실이 이들을 흥분시켰다. 아라키 대장은 일본 군부를 대표하는 육군 대신으로서 당시 군산복합체인 일본 사정상 총리대신보다 더 실권이 있는 인물이었고, 아리요시 공사는 무수히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했던 장본인이었다. 이들이 중국 국민당 내의 친일분자들과 회식을 하며 현 정세를 논하고 그 대책을 논의한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만주 점령 후 청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를 집정으로 하는 만주국을 수립했다. 그 뒤 만주국은 팽창정책을 계속해 요동·길림·흑룡강·열하의 네 성에 인구는 3천만명에 달했다.
이러한 영토확장은 당연히 중국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제의 군부가 국민당 친일분자들을 만나는 목적은 이들과 결탁해 중국인들의 거센 반발을 무마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는 아라키 대장이 아리요시 공사에게 준 4천만엔의 거금이 큰 작용을 했다.
육삼정 회합에 대한 정보를 들은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는 곧 동지들을 모았다. 1933년 3월 5일 화암과 백정기·엄형순·양여주 등 주요 구성원들이 참석했다. 백정기는 홍구공원의거의 아쉬움과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당연히 자기가 하겠다고 앞장섰다.
“나의 구국일념은 첫째 강도(强盜) 일제(日帝)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爭取)함이요, 둘째는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와 평화를 위해 세계 일가(一家)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공생(共生)·공사(共死)의 맹우(盟友) 여러분, 대륙(大陸)침략의 왜적(倭敵)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주시오. 겨레에 바치는 마지막 소원을…”
백정기뿐만 아니라 이강훈도 마찬가지였다.
“이 거사는 내가 하겠소. 동지들은 듣기만 하시오. 백범 선생님이 양여주 동지에게 맡긴 폭탄이 있으니 내가 단독으로 이놈들을 끝장내 주겠소.”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백정기와 이강훈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다음 날 제비를 뽑아 결행자를 선발하기로 결정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붙잡힐 수밖에 없었고 윤봉길 의사처럼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항일전선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 따위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화암은 제비를 열한 개 만들어 한 개에만 ‘유(有)’자를 써넣었다. 혼자서는 성공하기 힘든 일이므로 제비를 뽑은 사람이 한 명을 지명해 같이 거행하기로 했다.
모두 한 개씩 제비를 골랐다. 그 다음, 한 사람씩 제비를 뽑았다. 한 사람씩 제비를 펼쳤다. 한 명, 두 명을 지나 열 명째 제비를 펼쳤으나 ‘유’자는 나오지 않았다. 이제 제비를 펼치지 않은 사람은 백정기뿐이었다. 백정기가 마지막으로 제비를 펼치더니 환호성을 질렀다. 그가 ‘유’자가 쓰인 제비를 뽑은 것이었다. 그는 옆에 있던 이강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 동지, 나와 같이 갑시다. 이 거사를 우리 둘이서 꼭 성공시킵시다!”
거행자가 결정되었으니 거사 준비를 해야 했다. 화암에게는 백범이 가흥으로 피신하면서 주고 간 폭탄 두 개와 왕아초와 화균실로부터 받은 권총 두 자루와 탄환 스무 발이 있었다. 그는 수류탄도 한 개 더 준비했다.
드디어 1933년 3월 17일, 그 날이 왔다. 당시 의거를 기획했던 화암의 자서전『나의 회고록』을 통해 생생한 현장을 보자.
"아리요시를 비롯해 일본군의 수뇌들이 육삼정에서 중국의 군벌들과 회합을 갖는 시간은 오후 9시에서 11시까지다.
웃고 즐기는 연회석상에 폭탄을 던지고 나오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동지들과 합세하여 뒤쫓아오는 일본 군경에 권총으로 대항하여 저지하기로 했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준비했던 폭탄과 권총을 그들에게 넘겨 주니 목이 메었다. 이제 그들을 보내면 영원히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은 선입감에 말문이 막혔다. 어찌나 불안한지 원심창·이규호(이규창)·오수민을 따라 보내면서 일의 진행상황을 즉각즉각 알리라고 했다.
백정기는 육삼정에서 2백 미터쯤 떨어진 송강춘(松江春)이란 중국음식점에서 자세한 현장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일본인 동지 오키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백정기는 육삼정에서 가까운 음식점 송강춘에서 일본인 동지 오키를 기다렸다. 오키가 자세한 현장 상황을 전해 주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약속시간이 되었는데도 오키는 나타나지 않았다. 백정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식점 종업원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함정이었다. 백정기가 품안에서 폭탄을 빼드는 순간 종업원으로 변장한 형사들이 그를 덮쳤다. 그러자 체념한 백정기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내뱉었다.
“이놈들 참 빠르구나. 한 발만 늦었어도 너희 놈들과 우리가 모두 한 불길 속에 휩싸였을 텐데.”
이강훈에게도 인력거꾼과 행인으로 변장한 일본 형사들이 덤벼들었다. 손쓸 겨를도 없이 백정기·이강훈·원심창이 모두 권총과 폭탄을 압수당한 채 체포되고 말았다. 오키가 일본 영사관에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육삼정을 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상해의 일본 영사관 경찰대에서 기를 쓰고 체포하려던 세 사람은 이렇게 붙잡혀 일본 나가사키의 형무소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그 해 11월 15일 ‘치안유지법 위반·폭발물취체법 위반·살인예비·기물파손’ 등의 혐의로 나가사키의 지방재판소에서 공판을 받았다. 검찰관은 백정기와 원심창에게는 무기징역을, 이강훈에게는 15년형을 각각 구형했는데, 11월 24일 최종 공판에서 재판장은 검찰관의 구형대로 선고했다. 상고를 포기한 백정기는 복역 중 1936년 5월 22일에 옥사했다. 그 때 그의 나이 만 40세였다.
1896년 동학혁명운동의 진원지인 전북 정읍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구파(鷗波) 백정기(白貞基) 열사는 3·1운동에 참가했고 1919년 8월에 인천에서 일본군 보급부대 병영을 파괴하려는 공작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봉천으로 망명해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을 만나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모든 것을 자기가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반일 테러의 혐의를 자기 혼자 뒤집어쓰려는 생각에서였다. 건강한 동지들은 가벼운 형을 받고 출옥해 독립운동을 계속하라는 뜻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대개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 함께 운동했던 사람들 중에서 평가가 엇갈리는 사람이 많은데 백정기는 예외였다. 그와 함께 자취했던 이규창은 “그 많은 사람 중에 백정기 선생과 엄형순 선생 같은 분은 이 세계에 둘도 없는 분으로 생각되었다. 그 두 분은 참으로 인간으로서 훌륭한 점을 다 갖추었다고 생각이 되었다”라고 회고하고 있으며, 육삼정 습격 공작을 함께 했던 이강훈도 이정식 미국 펜실베니아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와의 면담에서 “지금 생각해도 백 열사는 의리가 대단한 분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모든 것을 자기가 주도했다고 강조하곤 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강훈은 그 때를 회상하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백정기에 대한 화암 정현섭의 회상은 보다 구체적이다. 그의 자서전 곳곳에서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구파 백정기는 술을 무척 좋아했고 식욕이 왕성했기 때문에 언제나 배고프다는 타령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제나 활기에 차 있었다. 돈이 없을 때에는 천진과 북경 사이를 걸어다닐 만큼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전에도 광동까지 갔다가……상해까지 수만리 길을 걸어왔던 사람이다.
한번은 천장만 쳐다보고 누워 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고기를 한번 실컷 먹어 봐야지. 화암, 저녁때쯤 성암 댁으로 오시오.”
하고 나갔다. 돈 한푼 없는 그가 무슨 수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미심쩍어 하면서도 이광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는 만두와 고기, 술병을 한아름 안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호탕하게 경위를 설명했다.
서직문(西直門) 밖 조용한 골목의 푸줏간에 들어가 고기가 먹고 싶어서 왔으니 외상을 달라고 솔직히 말하자, 푸줏간 주인이 그의 호탕하고도 담백한 성격에 감복하여 고기를 떼어 주고 돈까지 줘서 술과 만두를 사왔다는 것이었다. 그의 대담성도 대담성이려니와 푸줏간 주인의 대륙인다운 기질이 감탄스러웠다."
백정기가 폐병에 걸린 이유도 감동적이다.
"한번은 우리가 곤궁에 빠진 처지를 보고 백범이 찾아왔다. 임정에 소속된 젊은이들이 전차회사에 나가 일하고 있으니 우리 측 젊은 사람들도 거기에 나가라고 하여 백정기·허열추(許烈秋)·진수인(陳壽鱗)이 그 곳에 나가게 되었다. 이 때 백정기는 전차회사에 다니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중노동을 하느라 몸이 몹시 허약해졌다.
여기에 의열단에 있던 김모가 북경에서 폐병에 걸려 상해로 돌아왔다. 당시 의열단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폐병 환자라 아무도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이것을 안 백정기는 김모를 우리가 있는 곳으로 데려와 숙식을 같이하고 간호도 해 주었다. 비번일엔 그를 데리고 시내로 나가 밥도 사서 먹이고 동지들이 짜증을 낼까 봐 여인숙에서 잠을 재웠다.
정성껏 간호를 했지만 병이 악화되자 노자를 마련하여 귀국시켰다. 그 후 숙식을 같이 한 백정기에게 폐병이 전염되었다. 그 당시 폐병은 불치병으로 규정되어 있던 때였다. 백정기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고 날이 갈수록 기력을 잃어 갔다. 처음에는 중노동에 피로하여 그러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피까지 토해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병원에 가 진찰을 받아 보니 폐병이란 진단이 나왔다.
자기 자신이 폐병 환자라는 것을 안 백정기는 모든 일에 처신을 달리했다. 식사 때나 대화를 하면서도 신중을 기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일말의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듯 갖은 노력을 다했다. 상해의 교민 사회에서도 백정기의 행동과 태도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번은 망지로(望志路) 김두봉(金枓奉)의 집에 갔다가 어린 아이들이 병에 걸려 먹지도 못하고 누워서 죽어 가는 꼴을 보고는 속옷과 겉옷을 몽땅 벗고 두루마기만 걸친 채 시장에 있는 전당포를 돌아다니다가 겨우 돈 몇푼을 얻어 빵과 약을 사들고 김두봉의 집으로 달려간 일도 있었다.
그 옷도 자기의 것이 아닌 동지들의 옷이었고 추운 겨울에 거리를 몇 시간씩 쏘다녔으니 그의 몸은 얼음장처럼 되어 있었다."
아나키스트들이 상해에서 자금 마련을 위해 아이스크림 가게를 할 때였다. 아이스크림을 만들려면, 큰 통에 얼음과 다른 재료들을 넣고 밤새워 휘저어야 했는데 이 일도 백정기와 신현상이 도맡았다. 화암의 회고에 의하면 백정기는 “불평 한 마디 없이 밤을 새워 일했다”고 한다.
백정기에게서 우리는 이회영처럼 공의에 목숨을 걸면서도 한없이 이타(利他)적이고 남을 억압하지 않는 한 완성된 인격을 만나게 된다.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이강훈은 12년 반을 복역한 후 일제가 패망하자 석방되었다. 그 후 박열과 함께 일본에서 거류민단 활동을 하다가 귀국해서는 광복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무기형을 선고받은 원심창도 8·15광복 후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그도 박열과 함께 거류민단에서 통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71년 7월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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