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유성룡과의 돈독한 우정
이순신(李舜臣)은 1545년 음력 3월 8일 자시(子時)에 서울 건천동에서 이정(李貞)의 세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맏형은 희신(羲臣), 둘째 형은 요신(堯臣), 아우의 이름은 우신(禹臣)으로 그들 4형제의 이름은 모두 중국 전설상의 인물들인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따온 것이다. 이순신의 자인 여해(汝諧)도 서경(書經)에 나오는 '왕재여해(往哉汝諧)'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순신의 출생지인 건천동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1가의 중심부였다. 건천동은 먹절골이라고 불린 오늘의 중구 필동 2가였고, 그 동네에서는 뒷날 영의정을 지낸 세 살 위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살았다.
유성룡은 경상도 의성 외가에서 태어나 13세 때에 서울로 올라왔으니, 그때 이순신의 나이 10세 때였다.
어떤 기록에는 이순신이 14세 무렵 소년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고도 하고, 문중의 가전으로는 20대 전후에 아산으로 낙향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순신과 유성룡이 처음 만난 것은 소년시절이 맞는 듯하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이순신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고, 뒷날 그를 장수감으로 추천한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순신(舜臣)은 말수가 적고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얼굴은 수려하면서도 근엄한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가슴속에는 대담한 기운이 있어서 한 몸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갔으니, 이는 본래부터 수양해온 결과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이순신이 어렸을 때부터 말수가 적고 얌전하기만 한 소년은 아니었다. 이순신은 오히려 매우 활달하고 담대한 편이었다. 군사놀이를 즐겨했고, 또 언제나 자신이 대장이 되어 아이들을 지도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타고난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이다.
전쟁이 위험이 전혀 없던 그 당시에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글공부보다도 군사놀이를 즐겨 했다는 것은 이순신이 운명적으로 타고난 출중한 리더십의 장수감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마땅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순신이 어렸을 때에는 한없이 얌전하고 착하고 소심했으며, 이웃 동네에 살던 다섯 살 위의 원균(元均)에게 늘 눌려 지냈다는 KBS 1-TV 역사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이야기 설정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말이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까지만 해도 이순신은 원균과 만난 적도 없으며 상대방을 잘 알지도 못했다.
이순신의 조부(祖父)인 이백록(李百祿)은 중종(中宗)대에 시장의 관리를 맡은 평시서참봉이라는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소장 개혁파 정치인들과 뜻을 같이 하여 절의(節義)를 지키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사사(賜死)되었다.
이순신의 부친 이정이 평생토록 벼슬살이를 외면한 채 무명의 평범한 선비로 지낸 까닭도 자신의 아버지 이백록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억울하게 화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 문정왕후의 수렴첨정(垂簾瞻政)
그러면 이순신(李舜臣)이 탄생할 무렵인 인종(仁宗) 즉위 전후 나라 안팎의 정세를 살펴본다.
인종은 이순신이 태어나기 30년 전인 1515년 2월에 중종(中宗)의 원자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제1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였다.
중종은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은 직후 산후병으로 죽자 2년 뒤에 같은 파평(坡平) 윤씨(尹氏)인 영돈령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를 제2계비로 맞아들였다.
당시 중종은 31세, 문정왕후는 17세였다. 중종은 문정왕후에게서 명종(明宗)을 비롯하여 의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등 1남 4녀를 낳았다.
그러나 중종에게는 이 두 계비에 앞서서 본부인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가 있었다. 단경왕후는 1487년 1월 14일 연산군(燕山君)대에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태어났다. 신씨는 1499년 13세 때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에게 시잡갔는데, 이 진성대군이 바로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이다. 그런데 연산군의 부인 폐비(廢妃) 신씨는 신수근의 누이였으니 단경왕후에게는 고모가 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주도하여 연산군을 밀어내고 중종을 새로 왕위에 앉힌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진성대군의 부인 신씨를 불과 7일 만에 폐서인으로 만들어 친정으로 쫓아냈다.
중종은 자신을 국왕으로 추대한 반정 세력의 기세에 눌려 사랑하는 왕비가 쫓겨나도 아무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왕비 신씨가 폐출된 뒤 파원부원군 윤여필(尹汝弼)의 딸을 간택하여 숙의로 봉했다가 곧 왕비로 책봉하니 그녀가 바로 제1계비 장경왕후였다. 장경왕후는 효혜공주(孝惠公主)에 이어 뒤에 인종으로 즉위하는 경원대군(慶原大君)을 낳은 직후 산후 조리가 잘못되어 1515년 3월에 불과 25세 한창 나이로 죽었다.
중종은 장경왕후가 죽자 처음에는 새로 왕비를 들이기보다는 폐출당한 신씨를 복위시키든지, 아니면 경빈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려고 했다. 그러나 신씨의 복위는 사람피가 반대하고, 경빈의 왕비 책봉은 반정공신 세력이 그녀의 가문에 한미하다는 이유로 반대했기 때문에 모두 무산되어 버렸다.
그렇게 2년을 보내다가 최종적으로 후보에 오른 처녀가 윤지임의 딸과 이조판서를 지낸 윤금손의 딸이었다. 결국 죽은 장경왕후의 오라비요 원자의 외숙인 윤임(尹任)의 지지에 힘입어 윤지임의 딸이 제2계비로 간택되었으니 그녀가 바로 문정왕후였다.
문정왕후가 중종의 제2계비로 입궐, 대궐의 안주인이 될 당시 조정은 이른바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권력투쟁이 한창이었다. 중종은 즉위하자 연산군 때의 온갖 폐정을 일소하고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애썼다. 조광조(趙光祖)를 대표로 하는 신진 사류를 대거 등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는 동시에 개혁정치를 펼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는 국왕의 신임을 얻고 너무나 급진적이며 과격한 개혁정책을 펼침에 따라 반정공신이 대부분인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중종 자신도 양파의 지나친 갈등에 갈수록 정신적 부담이 커지게 되었다.
이처럼 정권을 잡은 측이 개혁을 내세워 보수적인 구세력을 수구파로 몰아 압박하고, 보수파는 보수파대로 정권의 핵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반발하는 양상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되풀이되는 정치의 속성인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사림파의 공세를 눈치 챈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훈구파는 반정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문제를 계기로 일대 반격을 가했다. 조광조 등이 당파를 꾸며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마침내 신진 사림파를 몰락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였다.
하지만 이렇게 사림파를 몰락시키고 정권을 장악했으나 이번에는 훈구파 안에서도 갈등과 시기와 반목이 일어나고 옥사가 이어지는 등 정치적 소용돌이는 그칠 줄 몰았다.
문정왕후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왕자를 생산한 것이 1534년, 혼인한 지 17년 만이었다. 그 전에 낳은 두 아이는 모두 공주였던 것이다. 문정왕후가 35세에 낳은 이 왕자가 바로 경원대군(慶源大君)이니 곧 뒷날 '눈물의 임금'이라고 불린 명종(明宗)이었다.
경원대군이 태어났을 때 죽은 제1계비 장경왕후의 소생인 세자는 이미 20세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경원대군을 낳자 자신이 낳은 이 아들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기로 결심했다. 그런 이유로 세자를 감싸고 도는 정적들을 모조리 제거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 있다.
그 첫번째 대상이 당시 세자인 동궁(東宮)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좌의정 김안로(金安老)였다.
김안로는 중종과 장경왕후 사이의 소생이며 동궁의 누나이기도 한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이며 동궁의 외숙인 윤임과도 사돈 관계였다. 이들은 합세하여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이 세자를 폐위시키고 경원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구미고 있으므로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문정왕후 일파와 극심한 갈등 관계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문정왕후는 반격을 가해 김안로와 윤임 등이 동궁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신을 폐위시키려 한다고 중종에게 읍소하여 마침내 김안로를 사사토록 했으니 그해가 1537년이었다.
당시 동궁을 보호하려는 제1계비 장경왕후의 오라비 윤임 일파를 이른바 '대윤(大尹)' 제2계비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 일파를 이른바 '소윤(小尹)'이라고 불렀는데, 모두가 파평 윤씨 같은 문중인 이들 대윤과 소윤 외척끼리의 권력투쟁으로 정국은 더욱 혼란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전기』1.출생 당시의 국내 정세 (1)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유성룡과의 돈독한 우정
이순신(李舜臣)은 1545년 음력 3월 8일 자시(子時)에 서울 건천동에서 이정(李貞)의 세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맏형은 희신(羲臣), 둘째 형은 요신(堯臣), 아우의 이름은 우신(禹臣)으로 그들 4형제의 이름은 모두 중국 전설상의 인물들인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따온 것이다. 이순신의 자인 여해(汝諧)도 서경(書經)에 나오는 '왕재여해(往哉汝諧)'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순신의 출생지인 건천동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1가의 중심부였다. 건천동은 먹절골이라고 불린 오늘의 중구 필동 2가였고, 그 동네에서는 뒷날 영의정을 지낸 세 살 위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살았다.
유성룡은 경상도 의성 외가에서 태어나 13세 때에 서울로 올라왔으니, 그때 이순신의 나이 10세 때였다.
어떤 기록에는 이순신이 14세 무렵 소년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고도 하고, 문중의 가전으로는 20대 전후에 아산으로 낙향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순신과 유성룡이 처음 만난 것은 소년시절이 맞는 듯하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이순신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고, 뒷날 그를 장수감으로 추천한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순신(舜臣)은 말수가 적고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얼굴은 수려하면서도 근엄한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가슴속에는 대담한 기운이 있어서 한 몸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갔으니, 이는 본래부터 수양해온 결과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이순신이 어렸을 때부터 말수가 적고 얌전하기만 한 소년은 아니었다. 이순신은 오히려 매우 활달하고 담대한 편이었다. 군사놀이를 즐겨했고, 또 언제나 자신이 대장이 되어 아이들을 지도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타고난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이다.
전쟁이 위험이 전혀 없던 그 당시에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글공부보다도 군사놀이를 즐겨 했다는 것은 이순신이 운명적으로 타고난 출중한 리더십의 장수감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마땅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순신이 어렸을 때에는 한없이 얌전하고 착하고 소심했으며, 이웃 동네에 살던 다섯 살 위의 원균(元均)에게 늘 눌려 지냈다는 KBS 1-TV 역사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이야기 설정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말이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까지만 해도 이순신은 원균과 만난 적도 없으며 상대방을 잘 알지도 못했다.
이순신의 조부(祖父)인 이백록(李百祿)은 중종(中宗)대에 시장의 관리를 맡은 평시서참봉이라는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소장 개혁파 정치인들과 뜻을 같이 하여 절의(節義)를 지키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사사(賜死)되었다.
이순신의 부친 이정이 평생토록 벼슬살이를 외면한 채 무명의 평범한 선비로 지낸 까닭도 자신의 아버지 이백록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억울하게 화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 문정왕후의 수렴첨정(垂簾瞻政)
그러면 이순신(李舜臣)이 탄생할 무렵인 인종(仁宗) 즉위 전후 나라 안팎의 정세를 살펴본다.
인종은 이순신이 태어나기 30년 전인 1515년 2월에 중종(中宗)의 원자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제1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였다.
중종은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은 직후 산후병으로 죽자 2년 뒤에 같은 파평(坡平) 윤씨(尹氏)인 영돈령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를 제2계비로 맞아들였다.
당시 중종은 31세, 문정왕후는 17세였다. 중종은 문정왕후에게서 명종(明宗)을 비롯하여 의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등 1남 4녀를 낳았다.
그러나 중종에게는 이 두 계비에 앞서서 본부인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가 있었다. 단경왕후는 1487년 1월 14일 연산군(燕山君)대에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태어났다. 신씨는 1499년 13세 때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에게 시잡갔는데, 이 진성대군이 바로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이다. 그런데 연산군의 부인 폐비(廢妃) 신씨는 신수근의 누이였으니 단경왕후에게는 고모가 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주도하여 연산군을 밀어내고 중종을 새로 왕위에 앉힌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진성대군의 부인 신씨를 불과 7일 만에 폐서인으로 만들어 친정으로 쫓아냈다.
중종은 자신을 국왕으로 추대한 반정 세력의 기세에 눌려 사랑하는 왕비가 쫓겨나도 아무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왕비 신씨가 폐출된 뒤 파원부원군 윤여필(尹汝弼)의 딸을 간택하여 숙의로 봉했다가 곧 왕비로 책봉하니 그녀가 바로 제1계비 장경왕후였다. 장경왕후는 효혜공주(孝惠公主)에 이어 뒤에 인종으로 즉위하는 경원대군(慶原大君)을 낳은 직후 산후 조리가 잘못되어 1515년 3월에 불과 25세 한창 나이로 죽었다.
중종은 장경왕후가 죽자 처음에는 새로 왕비를 들이기보다는 폐출당한 신씨를 복위시키든지, 아니면 경빈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려고 했다. 그러나 신씨의 복위는 사람피가 반대하고, 경빈의 왕비 책봉은 반정공신 세력이 그녀의 가문에 한미하다는 이유로 반대했기 때문에 모두 무산되어 버렸다.
그렇게 2년을 보내다가 최종적으로 후보에 오른 처녀가 윤지임의 딸과 이조판서를 지낸 윤금손의 딸이었다. 결국 죽은 장경왕후의 오라비요 원자의 외숙인 윤임(尹任)의 지지에 힘입어 윤지임의 딸이 제2계비로 간택되었으니 그녀가 바로 문정왕후였다.
문정왕후가 중종의 제2계비로 입궐, 대궐의 안주인이 될 당시 조정은 이른바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권력투쟁이 한창이었다. 중종은 즉위하자 연산군 때의 온갖 폐정을 일소하고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애썼다. 조광조(趙光祖)를 대표로 하는 신진 사류를 대거 등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는 동시에 개혁정치를 펼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는 국왕의 신임을 얻고 너무나 급진적이며 과격한 개혁정책을 펼침에 따라 반정공신이 대부분인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중종 자신도 양파의 지나친 갈등에 갈수록 정신적 부담이 커지게 되었다.
이처럼 정권을 잡은 측이 개혁을 내세워 보수적인 구세력을 수구파로 몰아 압박하고, 보수파는 보수파대로 정권의 핵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반발하는 양상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되풀이되는 정치의 속성인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사림파의 공세를 눈치 챈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훈구파는 반정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문제를 계기로 일대 반격을 가했다. 조광조 등이 당파를 꾸며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마침내 신진 사림파를 몰락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였다.
하지만 이렇게 사림파를 몰락시키고 정권을 장악했으나 이번에는 훈구파 안에서도 갈등과 시기와 반목이 일어나고 옥사가 이어지는 등 정치적 소용돌이는 그칠 줄 몰았다.
문정왕후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왕자를 생산한 것이 1534년, 혼인한 지 17년 만이었다. 그 전에 낳은 두 아이는 모두 공주였던 것이다. 문정왕후가 35세에 낳은 이 왕자가 바로 경원대군(慶源大君)이니 곧 뒷날 '눈물의 임금'이라고 불린 명종(明宗)이었다.
경원대군이 태어났을 때 죽은 제1계비 장경왕후의 소생인 세자는 이미 20세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경원대군을 낳자 자신이 낳은 이 아들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기로 결심했다. 그런 이유로 세자를 감싸고 도는 정적들을 모조리 제거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 있다.
그 첫번째 대상이 당시 세자인 동궁(東宮)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좌의정 김안로(金安老)였다.
김안로는 중종과 장경왕후 사이의 소생이며 동궁의 누나이기도 한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이며 동궁의 외숙인 윤임과도 사돈 관계였다. 이들은 합세하여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이 세자를 폐위시키고 경원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구미고 있으므로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문정왕후 일파와 극심한 갈등 관계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문정왕후는 반격을 가해 김안로와 윤임 등이 동궁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신을 폐위시키려 한다고 중종에게 읍소하여 마침내 김안로를 사사토록 했으니 그해가 1537년이었다.
당시 동궁을 보호하려는 제1계비 장경왕후의 오라비 윤임 일파를 이른바 '대윤(大尹)' 제2계비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 일파를 이른바 '소윤(小尹)'이라고 불렀는데, 모두가 파평 윤씨 같은 문중인 이들 대윤과 소윤 외척끼리의 권력투쟁으로 정국은 더욱 혼란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