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전기』2.험난한 관직생활 ⑵

대모달2011.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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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대기만성형 군인

이순신은 1576년 2월 32세 때에 되어서야 식년무과(式年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함북 동구비보의 권관(權管)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갔으면서도 남의 힘을 빌려 출세하여 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의 직분을 수행했다. 또한 항상 청렴하고 강직한 자세로 관직 생활에 임했는데, 이에 관한 몇가지 일화가 있다.

당시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였던 이후백(李後白)은 부하들이 조그만 잘못이 있어도 사정없이 곤장으로 다스렸고, 각 진을 순회하면서 군무를 점검하다가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책임자에게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벌을 주는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  이 지역 군관 중에는 이후백에게 곤장을 맞지 않은 자가 없어서 모두들 그를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후백이 동구비보를 살펴보고 나서는 만면에 흡족한 웃음을 띠고 이순신을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동구비보의 군기가 엄정함은 말할 나위도 없고, 만일 있을 여진족의 침범에 대비한 방어태세가 다른 어떤 진보와 비교해보더라도 빈틈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의 궁술(弓術) 솜씨 또한 출중했기 때문이었다.

초임 하급장교인 이순신은 이후백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용기를 내어 이렇게 건의를 했다.

"사또의 형벌이 너무나 엄하여 변경의 장수들이 손발 둘 곳을 몰라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후백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대의 말이 옳다. 그러나 난들 어찌 옳고 그른 것을 가리지 않고 그렇게 했겠는가?"

그렇게 이순신이 동구비보에서 국경 경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기를 2개월이 지나고 1577년에 이르러 고향에서 그의 셋째 아들 면(免)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강직한 성품은 그것을 이해해 주는 상관을 만나지 못할 경우에는 오히려 불행과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그 이후의 고단한 관직생활이 이것을 증명한다.

이순신은 첫 부임지에서 3년 동안의 임기를 마치고, 1579년 2월에 한 직급 위인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병조좌랑(兵曹佐郎) 서익(徐益)과의 불화로 8개월만에 충청도 병사(忠淸道兵使)의 권관으로 전임되었다가 다음해 7월에 발포만호(鉢浦萬戶)로 좌천되었다. 발포성(鉢浦城)에서는 처음으로 수군 경험을 쌓을 수 있었지만, 그로서는 계속되는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타협 없는 원칙적인 자세 때문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손식(孫植),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성박(成搏), 남병사(南兵使) 이용(李用) 등에게 연이어 미움을 받다가 1581년 봄에 이미 그와 사이가 나빴던 서익이 특별 감사관으로 내려와서는 군기 정비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이순신을 파면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몇 달 안 돼서 누명을 벗고 훈련원 봉사로 복직하여 근무하다가 1583년 10월에 함경도의 진원보 권관으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훈련원의 참군(參軍)으로 진급하여 근무하다던 중에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탈상(脫喪)하고 나서 42세 되던 해에 궁중의 말들을 관리하는 사복시(司僕寺)의 주부(主簿)로 임명되었으나, 16일 만에 다시 함경도의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로 발령이 났다. 다음해에는 두만강 어귀에 있는 녹둔도(鹿屯島) 둔전(屯田) 수비대장을 겸임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여진족의 출몰이 심한 지역이어서 이순신은 여러 차례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북병사(北兵使)로 있던 이일(李鎰)이 번번이 이를 묵살하여, 어쩔 수 없이 적은 병력을 유지하다가 추수기에 여진족의 대대적인 습격을 받게 되었다.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의 지원을 받으며 간신히 여진족을 격퇴시킨 이순신은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으면서도 달아나는 적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사로잡혀간 백성 60여명을 구해 되돌아왔다.

하지만 이일은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에 급급하여 이순신을 패전지장(敗戰之將)으로 몰아서 모든 책임을 그에게 덮어씌워 버렸다. 결국 이순신은 이경록과 더불어 삭탈관직된 후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신세가 되었다. 다음해 6월에 겨우 특사를 받고 44세의 나이로 세파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귀향하였다. 12년의 무관 생활 동안 갖은 모함과 시련을 겪으면서 불행한 시절을 보내다가 아무런 공훈도 얻지 못하고 병든 몸으로 낙향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던 중에 1588년 2월 45세 때에 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 이광(李洸)의 군관과 선전관(宣傳官)으로 복직되고 1589년 12월에는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정읍현감(井邑縣監)으로 부임하였다. 무과에 급제한지 13년만에 작은 지방이나마 수령의 자리에 오른 것인데, 그때 그의 나이 벌써 45세였다. 이때부터 비로소 관리로서 명성을 높이기 시작하여 1591년 2월에 일약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임명되었다. 그의 나이 47세에 지역 방위 해군 사령관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순신이 초기에는 주위의 질시 때문에 불우한 운명을 겪다가 후기에 들어 갑자기 고속으로 진급한 것은 그의 훌륭한 재능과 인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던 죽마고우(竹馬故友) 유성룡이 적극적으로 이순신을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즉, 이순신이 정읍현감일 때 병조판서(兵曹判書)였던 유성룡은 그후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오르면서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강력하게 천거하였던 것이다.                                          

이순신을 천거할 당시의 정황에 대해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 이렇게 적고 있다.

"왜(倭)가 군사를 움직인다는 소식이 날로 급해지자 위에서 비변사(備邊司)에게 명하여 제각기 장수될 만한 인물을 천거하라고 하므로 내가 순신(舜臣)을 천거하여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승진시켰는데, 그러한 갑작스러운 승진을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을 보면 당시 사간원(司諫院)에서 "이순신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임명하시니 관직 남용이 이보다 더 심할 수는 없습니다."하고 반대하자 선조가 "이순신의 일은 나도 잘 안다. 지금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면서 무마한 일도 있었다.

그때 유성룡은 이순신만 천거한 것이 아니라 늦깎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있던 권율(權慄)도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추천했으니 그는 참으로 사람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마치 운명처럼 이순신은 일본의 조선 침략이 있기 14개월 전에 전라좌도수군(全羅左道水軍)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부임한 이후 휘하에 있는 각 진영의 실태를 파악하고 군대의 기강을 엄정히 세우면서 군비 강화에 힘썼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터지기 직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 휘하에는 고작 10여척도 안되는 군선이 있었던 반면, 이순신이 있는 전라좌수영은 30여척이 넘는 크고 작은 군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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