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올해로 고3이 되는, 학교는 다니지 않는 빠른 94년생입니다. 제 지극히 개인적이고 수치스러운 이야기.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곳에 적는다는 걸 꽤나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렇게 글을 적는 이유는요, 누군가는 제 얘기를 들어줬으면 해서요. 저 지금 계속 눈물이 키보드 위에 떨어져서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미리 말하지만 전 정말 바닥이구요.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까 뭐부터 써야할지 모르겠네요. 별로 오래된 일도 아닌데 지나간 일을 떠올리려고 하니까 감정이 북받쳐 올라요. 물론 이 글이 묻힐 수도 있겠지만, 그럴 확률이 농후해 보이지만, 여태까지 남에게 들킬까 두려워했던 이야기를 이런 곳에 풀어놓았다는 것 자체로도 전 만족합니다. 여기에 올리는 순간, 제가 아는 누군가가 이 글을 볼 수도 있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글 중간에 구체적인 인물의 설명으로. 굳이 숨기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지금 보고 있어? 나 이렇게 힘들었다고. 이렇게 내 인생 꼬여버렸다고. 그럼 지금부터 쓰레기같은. 진짜 병신같고 못된 제 얘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중학교 2학년 열 네살 여름방학까지 저는 반에 꼭 하나씩은 있는 공부만 하는 범생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범생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던 것 같네요. 저는 정말 평범했습니다. 회사원 아버지에, 교사 어머니. 성적은 상위권이었습니다. 그 흔한 피씨방이나 찜질방, 노래방조차 가보지 못했습니다. 제 인생의 틀어짐, 그 시발점은 부모님의 이혼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크게 사이가 좋으신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저때문에 두분이서 살고 계셨죠. 그러다가 사소한 말싸움이 크게 번져서 이혼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두분이 이혼하는 게 너무 싫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 인생인데, 제가 뭐라고. 저는 아버지가 맡기로 되었습니다. 그렇게 3개월동안 아버지와 살았구요. 그렇게 아버지와 사는 것도 아버지가 재혼을 하시게 되면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중3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평소 좋아하던 남학생으로부터 고백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2분단 네번째 자리에서 저와 짝이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와 사귀게 되었고. 점점 공부를 등한시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게는 갈길을 알려주고 통제를 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혼자였거든요. 그맘때쯤에 어머니께서는 교사일을 그만두시고 친척들이 있는 LA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중3의 나이에 남자친구의 집에서 남자친구와 관계를 가졌습니다. 저도 좋아서 했습니다. 강간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까지지도 않았고, 바닥도 아니었지만 그냥 관계 때의 느낌이 궁금했습니다. 남자친구도 너무 좋았고 그냥 해달라는대로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 후에 일주일 쯤 지나고 학교에 가니 제가 수건란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제가 남자친구랑 했고, 그 전에도 경험이 많았다는 식으로요.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눈물이 다 났습니다. 저는 남자친구가 처음이었거든요? 남자친구에게 가서 따지니까 처음에는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 떼더군요. 계속 추궁하니까 나중에는 실토하더군요. 친구들한테 저랑 한 걸 자랑삼아 얘기했답니다. 그것도 아주 세세하게요. 그 후에는 선생님들도 절 이상하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여자애들은 대놓고 절 까고 더럽게 보고요. 그게 못견딜 정도였습니다. 남자애들은 제가 지나가면 휘파람을 불면서 음담패설을 했고 선생님들은 말리지 않았습니다. 전 한 순간에 수건년으로 찍혀버린 거예요. 여기에 다 적을 순 없지만. 생 지옥이었다는 거. 그거면 설명이 될까요? 더 떠올리고 싶지 않네요. 그때 쯤에 진지하게 자살도 고민해봤습니다. 하루에도 수백번 혀깨무고 죽을까. 진짜 수면제 많이 먹으면 죽을까. 농약이라도 마실까. 진짜 수천 수만 수억번을 고민한 것 같습니다. 결국 중학교는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약 한달 정도를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아버지께 전화를 했던지 아버지가 혼자 사는 원룸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학교에서 제 행실이 나쁘고, 불량하다는 소리를 들으셨던지 다짜고짜 제 뺨을 때렸습니다. 아버지로서는 믿었던 딸에 대한 배신감. 그것의 표출이셨겠죠. 하지만 전 그 순간에 간신히 가지고 있던 삶의 희망을 놨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이 계시니까, 했었는데. 제가 태어나서 가장 힘들 때 믿을 사람도 하나 없고, 영원한 아군이라 생각했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에야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만 그때는 그게 불가능했습니다. 너무 서럽고 원망스러워서 그자리에서 바로 집을 뛰어나왔습니다. 그 후에 제가 간 곳은 청소년 쉼터였습니다. 거기서 몇개월 정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님 전화번호를 물었지만 모른다고 딱 잡아뗐습니다. 물론 그분들께서 진짜 믿었을 리는 없죠. 혹시나 절 아는 사람과 마주칠까봐 경남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지금 와서 반추해보면, 이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때의 저는 제 나름대로 망한 인생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보다는. 적어도 지금보단 나았어요. 저는 그곳 쉼터에 있는 언니들과 친해졌습니다. 좋은 언니들도 있었지만, 제게 영향을 준 언니는 소위 말하는 양아치에 날라리였습니다. 담배는 기본이었고, 손목 안쪽에는 장미 문신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언니에게서 담배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언니가 제게 28살 남자를 소개시켜줬습니다. 그냥 좋은 오빠 동생으로 지내던 차에 그 남자가 알바 하나 해보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남성 전용 마사지 센터. 뭐 그 비슷한 거라고 했습니다. 남성 전용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시급이 너무 쎄더라구요. 당시 저는 꾸미고 옷사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쉽게 승낙했습니다. 처음에 거기 사장이라는 사람이 절 유심히 보더니 내일부터 나오라고 했습니다. 저녁 8시부터 새벽 1시까지요. 쉼터 통금이 있기 때문에 저는 몇시간 일하지 않았습니다. 가게 느낌이 좀 이상하고 일하는 시간대가 늦어서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시급도 쎄고요. 하지만 직장인들이 회사 마치고 찾아와서 그런가보다 하고 그냥 넘겼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거기가 윤락업소더라고요. 처음에 저는 굉장히 망설였지만 제가 만져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돈이 계속 들어와서 계속 몸파는 일을 하게되었습니다. 하지만 나가는 돈이 더 많았습니다. 이제 진짜 대수건, 몸파는년이 되어버린 거죠. 그 와중에 저는 저랑 갑인 한 남자애를 만났습니다. 그애 엄마는 저와 같은 부류였고요. 미군을 상대하다 그 친구를 낳았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그앤 아버지 얼굴도 몰라요. 저는 그애에게 제가 하는 일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6개월 정도를 만났어요. 그리고 저는 임신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니겠지 .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테스트기도 안썼습니다. 그러다가 배가 점점 불러오니까 인정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최근에 한건 그애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애 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애랑 사귀면서 윤락업소는 그만뒀습니다. 그애를 불러서 말했습니다. 임신했다고. 근데 절 보고 정색을 하더니 자기 애인 증거대보라네요.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여러가지에서요. 그렇게 헤어졌다가 다시 문자가 왔습니다. 비겁하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저 애 낳았구요 책임 못질 거라는 거 알면서 낳았습니다 애정이나 죄책감 이런 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제 손으로 생명 끊는게 꺼림칙해서. 진짜 못된 년이죠. 바닥이라는 거 저도 압니다. 진짜 병신같아....... 애는 당연히 키울 능력이 안돼서 보냈습니다. 그 후로 그애랑 헤어지고 전 다시 업소에 다녔습니다. 이제 그거 아니면 돈을 벌 수가 없거든요. 한번에 몇십만원씩 벌다보니까. 알바를 해서는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한번 버릴 몸 두번은 못버리겠냐 하는 마음도 있었고요. 와중에 저는 남자를 세번 더 만났고 몇개월 간격으로 2번 임신을 더했습니다. 이번엔 애를 긁어냈어요. 도무지 그 출산 과정을 견딜 엄두가 안나서. 무서워서. 얼마 전에 TV를 봤는데 애를 낙태시키려고 하면, 끝까지 도망간다네요. 팔 다리를 움직여가면서. 배 안쪽에서. 살려고. 그거 보고 하루종일 울었습니다. 미안해서, 내가 병신같아서. 그리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차사고로요. 저 아버지 장례식에 안갔어요. 영안실에 얼굴도 안비췄다고요.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서? 절대 아닙니다. 그딴 감정, 몸파면서 다 잊어버렸어요. 결국 아버지가 제게 한 모든 것은 절 위해서였으니까요. 그걸 왜 그렇게 늦게 깨달았는지. 저같이 더러운 애가 아버지 영안실에 갈 면목이 없어서요. 진짜 거기 가면, 아버지 영혼이 제가 한 일을 모두 알 것 같아서. 그래서. 소식듣고. 일주일동안 울고. 입국하신 어머니 만나서 이제는 어머니랑 같이 삽니다. 어머니는 제 과거 모르시구요. 영원히 말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요즘도 가만히 있다보면 자주 멍하니 눈물을 흘리거나 죄책감에 몸무림칩니다. 요즘은 검정고시 공부하고 있습니다. 대학 가려구요. 제가 집나와서 . 잠깐동안은 해방감을 맛봤지만 결국엔 가장 부러운 게 학생이더라구요. 특히 17살 됐을 땐 야자하는 애들이 제일 부러웠어요. 지금까지 긴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6
여자로서 쓰레기. 바닥같은 인생. 저는 그걸 살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올해로 고3이 되는, 학교는 다니지 않는 빠른 94년생입니다.
제 지극히 개인적이고 수치스러운 이야기.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곳에 적는다는 걸 꽤나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렇게 글을 적는 이유는요,
누군가는 제 얘기를 들어줬으면 해서요.
저 지금 계속 눈물이 키보드 위에 떨어져서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미리 말하지만 전 정말 바닥이구요.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까 뭐부터 써야할지 모르겠네요. 별로 오래된 일도 아닌데 지나간 일을 떠올리려고 하니까 감정이 북받쳐 올라요.
물론 이 글이 묻힐 수도 있겠지만, 그럴 확률이 농후해 보이지만,
여태까지 남에게 들킬까 두려워했던 이야기를 이런 곳에 풀어놓았다는 것 자체로도 전 만족합니다.
여기에 올리는 순간, 제가 아는 누군가가 이 글을 볼 수도 있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글 중간에 구체적인 인물의 설명으로. 굳이 숨기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지금 보고 있어?
나 이렇게 힘들었다고. 이렇게 내 인생 꼬여버렸다고.
그럼 지금부터 쓰레기같은. 진짜 병신같고 못된 제 얘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중학교 2학년 열 네살 여름방학까지 저는 반에 꼭 하나씩은 있는 공부만 하는 범생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범생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던 것 같네요.
저는 정말 평범했습니다. 회사원 아버지에, 교사 어머니. 성적은 상위권이었습니다.
그 흔한 피씨방이나 찜질방, 노래방조차 가보지 못했습니다.
제 인생의 틀어짐, 그 시발점은 부모님의 이혼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크게 사이가 좋으신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저때문에 두분이서 살고 계셨죠. 그러다가 사소한 말싸움이 크게 번져서 이혼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두분이 이혼하는 게 너무 싫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 인생인데, 제가 뭐라고.
저는 아버지가 맡기로 되었습니다. 그렇게 3개월동안 아버지와 살았구요.
그렇게 아버지와 사는 것도 아버지가 재혼을 하시게 되면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중3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평소 좋아하던 남학생으로부터 고백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2분단 네번째 자리에서 저와 짝이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와 사귀게 되었고. 점점 공부를 등한시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게는 갈길을 알려주고 통제를 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혼자였거든요. 그맘때쯤에 어머니께서는 교사일을 그만두시고 친척들이 있는 LA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중3의 나이에 남자친구의 집에서 남자친구와 관계를 가졌습니다.
저도 좋아서 했습니다. 강간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까지지도 않았고, 바닥도 아니었지만 그냥 관계 때의 느낌이 궁금했습니다.
남자친구도 너무 좋았고 그냥 해달라는대로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 후에 일주일 쯤 지나고 학교에 가니 제가 수건란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제가 남자친구랑 했고, 그 전에도 경험이 많았다는 식으로요.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눈물이 다 났습니다. 저는 남자친구가 처음이었거든요?
남자친구에게 가서 따지니까 처음에는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 떼더군요.
계속 추궁하니까 나중에는 실토하더군요.
친구들한테 저랑 한 걸 자랑삼아 얘기했답니다. 그것도 아주 세세하게요.
그 후에는 선생님들도 절 이상하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여자애들은 대놓고 절 까고 더럽게 보고요. 그게 못견딜 정도였습니다.
남자애들은 제가 지나가면 휘파람을 불면서 음담패설을 했고 선생님들은 말리지 않았습니다.
전 한 순간에 수건년으로 찍혀버린 거예요.
여기에 다 적을 순 없지만.
생 지옥이었다는 거. 그거면 설명이 될까요?
더 떠올리고 싶지 않네요.
그때 쯤에 진지하게 자살도 고민해봤습니다.
하루에도 수백번 혀깨무고 죽을까. 진짜 수면제 많이 먹으면 죽을까. 농약이라도 마실까.
진짜 수천 수만 수억번을 고민한 것 같습니다.
결국 중학교는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약 한달 정도를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아버지께 전화를 했던지 아버지가 혼자 사는 원룸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학교에서 제 행실이 나쁘고, 불량하다는 소리를 들으셨던지 다짜고짜 제 뺨을 때렸습니다.
아버지로서는 믿었던 딸에 대한 배신감. 그것의 표출이셨겠죠.
하지만 전 그 순간에 간신히 가지고 있던 삶의 희망을 놨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이 계시니까, 했었는데.
제가 태어나서 가장 힘들 때 믿을 사람도 하나 없고, 영원한 아군이라 생각했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에야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만 그때는 그게 불가능했습니다. 너무 서럽고 원망스러워서 그자리에서 바로 집을 뛰어나왔습니다.
그 후에 제가 간 곳은 청소년 쉼터였습니다.
거기서 몇개월 정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님 전화번호를 물었지만 모른다고 딱 잡아뗐습니다. 물론 그분들께서 진짜 믿었을 리는 없죠. 혹시나 절 아는 사람과 마주칠까봐 경남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지금 와서 반추해보면,
이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때의 저는 제 나름대로 망한 인생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보다는. 적어도 지금보단 나았어요.
저는 그곳 쉼터에 있는 언니들과 친해졌습니다. 좋은 언니들도 있었지만, 제게 영향을 준 언니는 소위 말하는 양아치에 날라리였습니다. 담배는 기본이었고, 손목 안쪽에는 장미 문신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언니에게서 담배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언니가 제게 28살 남자를 소개시켜줬습니다.
그냥 좋은 오빠 동생으로 지내던 차에 그 남자가 알바 하나 해보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남성 전용 마사지 센터. 뭐 그 비슷한 거라고 했습니다.
남성 전용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시급이 너무 쎄더라구요.
당시 저는 꾸미고 옷사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쉽게 승낙했습니다.
처음에 거기 사장이라는 사람이 절 유심히 보더니 내일부터 나오라고 했습니다.
저녁 8시부터 새벽 1시까지요.
쉼터 통금이 있기 때문에 저는 몇시간 일하지 않았습니다.
가게 느낌이 좀 이상하고 일하는 시간대가 늦어서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시급도 쎄고요. 하지만 직장인들이 회사 마치고 찾아와서 그런가보다 하고 그냥 넘겼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거기가 윤락업소더라고요.
처음에 저는 굉장히 망설였지만 제가 만져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돈이 계속 들어와서 계속 몸파는 일을 하게되었습니다. 하지만 나가는 돈이 더 많았습니다.
이제 진짜 대수건, 몸파는년이 되어버린 거죠.
그 와중에 저는 저랑 갑인 한 남자애를 만났습니다.
그애 엄마는 저와 같은 부류였고요. 미군을 상대하다 그 친구를 낳았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그앤 아버지 얼굴도 몰라요.
저는 그애에게 제가 하는 일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6개월 정도를 만났어요.
그리고 저는 임신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니겠지 .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테스트기도 안썼습니다. 그러다가 배가 점점 불러오니까 인정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최근에 한건 그애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애 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애랑 사귀면서 윤락업소는 그만뒀습니다.
그애를 불러서 말했습니다. 임신했다고.
근데 절 보고 정색을 하더니 자기 애인 증거대보라네요.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여러가지에서요.
그렇게 헤어졌다가 다시 문자가 왔습니다. 비겁하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저 애 낳았구요
책임 못질 거라는 거 알면서 낳았습니다
애정이나 죄책감 이런 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제 손으로 생명 끊는게 꺼림칙해서.
진짜 못된 년이죠. 바닥이라는 거 저도 압니다. 진짜 병신같아.......
애는 당연히 키울 능력이 안돼서 보냈습니다.
그 후로 그애랑 헤어지고 전 다시 업소에 다녔습니다.
이제 그거 아니면 돈을 벌 수가 없거든요.
한번에 몇십만원씩 벌다보니까. 알바를 해서는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한번 버릴 몸 두번은 못버리겠냐 하는 마음도 있었고요.
와중에 저는 남자를 세번 더 만났고
몇개월 간격으로 2번 임신을 더했습니다. 이번엔 애를 긁어냈어요.
도무지 그 출산 과정을 견딜 엄두가 안나서. 무서워서.
얼마 전에 TV를 봤는데
애를 낙태시키려고 하면, 끝까지 도망간다네요. 팔 다리를 움직여가면서. 배 안쪽에서.
살려고.
그거 보고 하루종일 울었습니다.
미안해서, 내가 병신같아서.
그리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차사고로요.
저 아버지 장례식에 안갔어요. 영안실에 얼굴도 안비췄다고요.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서? 절대 아닙니다.
그딴 감정, 몸파면서 다 잊어버렸어요.
결국 아버지가 제게 한 모든 것은 절 위해서였으니까요.
그걸 왜 그렇게 늦게 깨달았는지.
저같이 더러운 애가 아버지 영안실에 갈 면목이 없어서요.
진짜
거기 가면, 아버지 영혼이 제가 한 일을 모두 알 것 같아서.
그래서.
소식듣고. 일주일동안 울고. 입국하신 어머니 만나서 이제는 어머니랑 같이 삽니다.
어머니는 제 과거 모르시구요. 영원히 말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요즘도 가만히 있다보면 자주 멍하니 눈물을 흘리거나 죄책감에 몸무림칩니다.
요즘은 검정고시 공부하고 있습니다. 대학 가려구요.
제가 집나와서 . 잠깐동안은 해방감을 맛봤지만 결국엔 가장 부러운 게 학생이더라구요.
특히 17살 됐을 땐 야자하는 애들이 제일 부러웠어요.
지금까지 긴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