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촌 장관의 민비 발언 잘못된 것인가??

토론201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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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자료를 읽어보시고  각자의 의견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민비란 말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지금 대학교에 와서도 역사공부를 하고있는 한 한생입니다.

 

저는 밑의 교수님과 생각이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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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매체의 민비(閔妃) 미화, 어떻게 볼 것인가

 

                                                  채길순 명지전문대 교수 chea41@chollian.net

 

   -방송매체의 위력은 실로 상상을 초월한다. TV드라마 <명성황후>가 방영된 후 그 인기의 여파로 대형서점에 가면 명성황후에 대한 출판물이 수십 종이 쏟아져 나와 있다. 가히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다. 그러나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사실(史實)이 빠진 채, 픽션만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도 진실은 묻혀 버린 채 인기에 편승하여 한 몫 벌어 보자는 심리가 더 큰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아직까지 호칭마저도 온전치 못한 상황에서, ‘명성황후’로 미화되고 곡해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역사적 진실을 파헤치는 연구가 절실하게 필요하며, 이에 편집실에서는 ‘명성황후 신드롬’에 대한 유감의 글을 여기에 소개한다. 이 글에서의 ‘명성황후’에 대한 호칭을 각 필자의 표현을 그대로 살린 것임을 밝힌다. <편집실 주>

 

1. <명성황후>에 없는 ‘역사성’

 

몇 해 전 뮤지컬 <명성황후>를 관람했다. 큰 무대로 넘쳐나는 찬란한 조명과 인물들의 화려한 의상이 인상 깊었다. 그러나 오랫 동안 동학혁명을 역사와 소설로 접근해 왔던 필자로서는 씁쓸했다. 민비(閔妃)1)의 후반기 생애는 동학혁명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명성황후>에는 ‘역사’가 없었다. 민비의 죽음이라는 비극성에만 초점이 맞춰진 채 사실(史實)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작품 같았다. 그런 뮤지컬 ‘명성황후’가 1997년 한국 뮤지컬로서는 최초로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진출하여 전회 기립 박수와 좌석 매진 기록을 세웠고, 뉴욕 타임스로부터 “어떤 국적의 관객이건 감동하기에 충분하다”는 평을 받았다고 자랑한다. 요즘 <명성황후>가 TV드라마로도 방영되고 있지만 역시 ‘사실(史實)’이 빠진 채 공허한 비극적 픽션만 존재할 뿐이다. 역사적 진실을 교묘하게 피해 가는 전개 과정에 대해 사학계의 ‘한마디’쯤 있으려니 기대했으나 침묵하고 있다. 이 글은 그래서 씌어졌다.

 

 2. 민비 시해 사건

1895년 8월 20일 새벽 5시 30분. 광화문에서 갑자기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다. 왜 낭인배(浪人輩) 30여 명의 공격을 받은 조선인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궁궐 침입에 성공한 낭인배는 곧장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坤寧閤)으로 향했다. 곤녕합에 딸린 옥호루(玉壺樓)에 뛰어든 낭인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냈다.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짓밟고 칼로 찔렀다. 세 명의 궁녀들도 동시에 살해되었다. 낭인배 두목은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어 민비를 확인한 뒤 시신을 곤녕합 근처의 숲 녹원(鹿園)으로 끌어내도록 부하에게 명하고, 이어 시신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다른 시신들은 궁궐 밖으로 옮겨져 비밀리에 처리되었다. 이 때가 6시 5분경이었다.


   미국인 선교사 앨런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서둘러 고종을 알현했을 때는 7시였다. 미리 들어와 있던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고종에게 “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가 일으킨 반란”이라고 보고하였다. 몇 시간 뒤에 김홍집을 총리 대신으로 하는 친일 내각이 구성되었다.
   

은폐 기도에도 불구하고 곧 온 세상에 일본 미우라 공사의 만행이 알려졌고, 일본은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미국, 러시아, 영국 등 각국 공사들의 강경한 요구에 떠밀리게 되었다. 결국 일본은 미우라 공사를 비롯한 사건 관련자 47명을 본국으로 소환하여 재판에 부쳤다. 하지만 이듬해 1월 히로시마에서 열린 재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전원 무죄 석방되었다. 서구 열강들도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차츰 침묵했다. 이로써 치욕적인 ‘민비 시해 사건’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면 일본은 왜 민비를 시해했을까?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전리품으로 요동반도를 빼앗았다. 그러자 일본의 팽창을 염려한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가 요동반도를 돌려주라고 압력을 행사했다. 이 시기가 1895년 5월이었는데, 민비는 동학혁명군까지 잘 토척해 준 일본에 의해 정치적 제한을 받고 있었다. 이때 민비는 자신이 의지할 곳이 러시아라고 판단하고 박정양, 이범진, 이완용을 중심으로 하는 친러 내각을 출범시키고 은신 중이던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한 민씨 척족 16인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일본군 휘하에 있던 훈련대를 해산시킬 계획을 세웠다. 민비 시해를 계획해 오던 미우라 공사는 훈련대가 19일에 해산될 눈치를 채고 20일로 거사를 급히 앞당겼던 것이다. 마침 19일 밤 경복궁에서는 신임 주미전권공사로 발탁된 민영준(閔泳駿)의 축하연이 벌어졌다.


   하지만 민비의 친러 정책은 중대한 오판이었다. 왜냐하면 ‘삼국 간섭’이 민비가 생각했던 만큼 강력한 결속력을 지닌 것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3. 민비는 어떤 인물인가

 

민비는 1851년에 여흥 민씨 치록(閔致祿)의 딸로 태어났다. 여흥 민씨는 제3대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 제 19대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명문가였지만 당시는 몰락한 상태였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8세 때 부모를 여의고 고향 여주를 떠나 서울 친척집에서 자랐으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전해진다. 1864년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이 되자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대원군 이하응은 부패의 온상인 안동 김씨 일족의 세도정치를 뿌리뽑고 이름뿐인 왕권을 강화하여 쇠락해진 봉건왕조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대원군은 외척의 세도정치를 원천 봉쇄할 계산으로 한미한 집안의 고아 소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아 소녀’라는 점 때문에 왕비에 간택된 것이다. 1867년 고종의 나이 15세, 민 소녀가 16세 때의 일이었다. 


   민비가 평화롭게 책 읽는 일로 나날을 보내던 1868년, 왕의 총애를 받던 상궁이 완화군(完和君)을 낳으니 고종과 대원군은 손이 귀한 왕실에서 오랜만에 본 아들이라 크게 기뻐하였다. 왕자 생산에 선수를 빼앗긴 민비는 위기 의식과 함께 욕망의 화신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민비는 자신의 확고한 지위 확보를 위해 왕자를 낳아야겠다고 결심하는 한편 시아버지 대원군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야겠다고 작정했다. 1871년 11월, 드디어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며칠 뒤에 죽고, 3년 뒤에 두 번 째 아들 척(拓·뒤에 순종)이 태어났다. 이 과정에서 시아버지 대원군과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틈이 벌어졌고, 아들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여서 무당을 가까이하고, 전국의 명산 대찰에 아들의 장수를 기원하느라 엄청난 재물을 축냈다고 한다.


   1873년, 유생 최익현이 서원을 철폐하고 양반에게 세금을 내게 한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리자 민비는 이를 빌미 삼아 고종으로 하여금 섭정을 폐하고 친정(親政)을 선포케 하였다. 민비는 민승호, 민규호 등 민씨 일족을 대거 등용하여 요직에 앉힘으로써 고종의 친정(親政)이 아니라 모든 권력이 민비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이로써 10년에 걸친 대원군의 세도정치 혁파정책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이후 을미사변(1895)까지 약 20년 동안 조선은 민씨 집권기를 맞게 된 것이다.

 

4. 민비의 실정

 

<고순종실록(高純宗實錄)> 고종 32년(1895) 8월 20일 조에 의하면 민비가 곤녕합(坤寧閤)에서 세상을 떴다고 전하고, 그 다음날에는 “내(고종)가 왕위에 오른 지 32년에 정사와 교화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있는데 왕후(王后) 민씨가 자기의 가까운 무리들을 끌어들여 나의 주위에 배치하고 나의 총명을 가리우며 백성을 착취하고 나의 정령(政令)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고 탐욕과 포악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워졌다…”고 기록했다.


   비록 <고순종실록>이 일제에 의해 왜곡된 기록이라지만 민비에 대한 부정적 행적은 놀랍게도 당시 많은 야사(野史)들, 특히 매천 황현(黃玹·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일치하고 있다. 곧, 가까운 무리를 배치(민씨의 세도정치), 백성 착취(탐관오리), 벼슬을 팔고(매관매직),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고(민란 및 동학혁명) 등 당시 역사적 정황에 일치하고 있다. 


   이런 민비의 부정적 행각을 견디다 못한 민중들은 끊임없이 궐기하는 가운데 그 세를 키우고 이러한 열망이 농축되어 동학 민중들에 의해 거대한 화산으로 분출되었으니 동학혁명이다.

 

5. 동학혁명과 민비와의 관계

 

우리 역사에서 동학혁명(1894)이란 ‘백성’이 ‘민중’으로 잠을 깬 사건이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홍경래난(1811)에서부터 임술민란(1862)에 이르기까지 민중 봉기는 전국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같은 민란은 그때마다 주모자 처형으로 막을 내리게 되니 민중들은 한계를 절감해야 했다. 이처럼 안으로 봉건 지배층이 민중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 있을 때 일본 및 서구 열강의 침략은 민중을 한층 불안하게 하였다. 1860년 영·프랑스군에 의해 전통적 우방 청나라 수도 북경이 함락되더니, 조선도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강화늑약(1876)이 차례로 조인되어 본격적으로 청·러·일·미·불·영 등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렇게 나라가 안팎으로 혼돈에 빠져 있을 때 수운 최제우(崔濟愚) 선생에 의해 동학이 창도되자 민중들 속으로 들불처럼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동학은 민간신앙에 도교와 불교, 나아가 천주교의 사상까지 함유하고,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에 몇 차례에 거듭된 민란 실패를 통해서 얻게 된 현실적 요소를 반영하면서 현실 변혁사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1894년. 민씨의 부패 정치로 인해 ‘더는 살 수 없는 세상’에 이르러 마침내 동학 민중이 일어섰다. 


   4월 27일에 동학군이 전주성을 함락하고, 5월 5일에 조선 조정의 청병(請兵)에 따라 청군이 아산에 상륙한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날 일본군도 인천에 상륙하였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동학 지도자들은 5월 7일 서둘러 전주화약을 맺는다. 그러나 마침내 5월 27일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탈한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청나라 군사를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전리품으로 요동반도를 차지한다. 이런 회오리 속에 국권이 일본에게 유린되니 나라의 운명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9월 18일, 2세 교조 최시형의 명에 따라 조선팔도의 동학혁명군이 부패한 정권과 왜군(倭軍)에 대항하여 다시 기포한다.


   이 같은 동학혁명의 전개 과정은 민씨 일파의 부패한 정치 행로와 맞물려 있다. 흔히 동학혁명의 불을 당겼다고 보는 고부 군수 조병갑이나, 고부 안핵사로 파견되어 동학군을 과잉 진압함으로써 새로운 불을 지핀 장흥부사 이용태는 모두 민비의 매직(賣職)에 의해 임명된 인물들이었다. 특히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임으로써 일본 군대가 상륙하였고, 결국 청일전쟁은 온 국토가 유린되는 빌미가 되었다. 쇠약한 민씨 정권은 동학혁명군이 재기포했을 때 일본 군대에 동학혁명군 토벌(討伐)을 맡기게 되고, 일본은 그 전리품으로 조선의 민심 수습과 국권 탈취의 두 요건을 동시에 거머쥐게 될 ‘민씨 정권의 목’을 요구한다. 민비 시해 사건도 이 같은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민비의 삶이 어찌 동학혁명사와 분리되어 논의될 수 있는가.

 

6. 민비의 외교 정책

 

대원군으로부터 권력을 넘겨 받은 민비는 대원군의 쇄국정책 대신 문호개방책을 채택하였다. 1876년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규를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 수교를 맺었다. 조선에서 전통적인 청의 기득권을 지키고 서양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독주를 막아 보자는 계산에서였다. 이른바 오랑캐를 오랑캐로 물리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이다. 하지만 당시 민비가 맺은 조약은 뒷날 명백한 불평등조약으로 판명되었다. 


   이런 민비의 행적을 두고 “탁월하고 영민한 판단력으로 서양 여러 나라와 동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맺어 이이제이 정책으로 일본을 견제했다”고 그 외교력을 극찬하지만, 내 나라를 각축장으로 만드는 행위는 이이제이의 본래 면목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민비와 민씨 정권은 어느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개화 반대를 외치며 임오군란에 참가한 군중은 민비를 표적으로 삼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나 동학혁명군 모두 민비와 민씨 일파 타도를 외쳤다. 결국 어떤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한 민비는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동학혁명 때 민영준이 청나라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을 청하면서 보낸 편지 내용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저희 나라 전라도 관할에 있는 태인, 고부 등 고을에 사는 백성들은 습성이 사납고 성질이 교활해서 평소에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었습니다. 근래에 동학 교비(敎匪)들이 무리 만여 명을 모아 십여 고을을 공략하고……임오군란, 갑신정변 두 차례 내란에도 모두 중조(中朝) 병사의 힘을 입어 평정하였습니다……” 


   내 백성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는데 민비의 외교력을 칭찬해야 옳은가. 민비의 외교적 수완은 제 발등을 찍는 결과가 되었다. 가령 민비가 러시아 공사 베베르 부부와 가까운 사이였고, “왕비는 계속 보호받을 것”이라는 베베르의 말을 민비는 철썩같이 믿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관계일 뿐 러시아 정부의 기본 방침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앨런과 민비의 친밀 문제와 미국 정부의 조선에 대한 정책이 달랐듯이. 시해 당시 궁궐 시위대장 미국인 다이는 시위대 3,4백 명을 경복궁의 신무문(神武門) 길에 배치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못했다.

국모가 이런 착각에서 외교 정책을 펼쳤다면 어찌 그것이 영민함인가. 결국, 민비의 정치는 조선의 당면 과제인 자주적 근대화를 지향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바람과는 거리가 있었다. 민비가 집착한 것은 오직 왕권 강화와 왕실의 보존이었는데, 이는 자신의 명예와 부와 권력과 같은 세속적인 욕망을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7. 민비에 대한 평가에 대해

 

그 동안 문화 예술계에서 민비 시해 사건의 실상을 밝히는 일을 앞다투어 해 왔지만, 비극성 자체에만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민비가 집권한 20여 년 동안에 일어난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과 같은 사건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펴서 총체적 의미를 규명해야 한다.

민비는 누가 뭐래도 당시 부패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갑오일기>는 민씨 정권 당시 충청도 청풍 북노리에 사는 이면재(李冕宰)라는 가난한 선비의 기록인데, 민비가 충북 제천의 월악산 골짜기에서 벌인 어마어마하게 큰 피난 궁터 공사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부패한 민씨 일파의 실태와 동학혁명군의 움직임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지금도 현지에는 월악 궁터 주춧돌이 남아 있어서 당시 피난 궁터 조성 이야기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다만 우리는 당시 권력 핵심부의 부패 실상과 이를 응징하려는 민중들의 움직임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또, 민비는 원자를 얻기 위해 왜 상인에게 많은 왜전(倭錢)을 빌려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제물(祭物)을 뿌려서 탕진했으며, 모자라는 재물을 채우기 위해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았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리고, 민비가 과연 덕을 지닌 국모인가. 야사는 이렇게 전한다. 임오군란 때 난을 피해 천신만고 끝에 궁중을 빠져 나와 신행 행렬로 가장하여 한강을 건너 주막에 숨어 있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가마를 들여다보며 딱하게 여겨 “새색시가 민비인지 여우인지 고년 때문에 고생한다”는 말을 했는데, 민비는 이에 앙심을 품었다. 뒷날 환궁하여 그 여인을 찾아내라고 명하니 죽음 앞이라 모두 시치미를 뗐다. 결국 온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요즈음 민비의 입에 실리는 ‘백성’은 위선이고 허구다.

 

8. 역사적 평가는 사실을 바탕에 둔 총체적 해석이라야 한다.

 

필자는 지난 해 8월 모 주간 신문에 대중매체의 민비에 대한 미화를 경계한다는 인터뷰 내용을 게재한 적이 있었다. 대강, “민중적 합의에서 발발한 동학혁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민비에 대한 미화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역사 왜곡”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가 나간 뒤 필자는 민비를 옹호하려는 사람들로부터 벌떼 같은 공격을 받으면서 반증으로 민비의 실체를 정확하게 제시했다.

 

논쟁을 벌이면서 TV와 같은 대중매체의 영향이 얼마나 막강한가를 실감했고, 어떤 의미로는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중매체를 통해 전달된 민비의 이미지는 청순가련할 뿐만 아니라 위대한 국모였다. 역사의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동학혁명은 우리 역사에서 민중들의 가슴에 서슬 퍼렇게 살아서 3·1 운동과 광주학생 의거,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 등으로 오늘날까지 전통적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일제의 민비 시해 사건에 공분(公憤)은 하지만 민비에 대한 근거 없는 미화는 안 된다. 민비에 대한 미화는 구천을 떠도는 숱한 민중들의 원혼을 고려한, 역사의 총체적 의미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