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이 세계 전쟁사(戰爭史) 4대 해전에 포함되는 이유.
한산해전(閑山海戰)과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에서 이순신은 군사와 전함이 상대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지리적인 이점도 얻지 못했으나 여러가지 불리함을 딛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신기(神氣)의 전략과 전술을 발휘하여 적군의 대함대를 여지없이 무찔렀다. 이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으로 남해를 거쳐 서해로 북상하여 수륙병진(水陸竝進)을 하려던 일본군의 기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으며 일본 수군의 주력함대가 궤멸되자 평양성을 점령하여 지원 병력과 군수물자를 기다리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마침내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족주의사관(民族主義史觀)을 비판하고 국사해체론(國史解體論)을 주장하고 있는 국내의 일부 반민족사가(反民族史家)들은 이순신의 23회 승전(勝戰) 가운데 가장 높은 전공(戰功)인 1592년 7월 7일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이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해전(Salamis海戰), 1588년 칼레해전(Calais海戰), 1805년 트라팔가해전[Battle of Trafalgar]과 더불어 세계 전쟁사(戰爭史) 4대 해전에 당당히 포함된다는 이순신 관련 연구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이들은 세계 각국의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이순신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한산해전(閑山海戰) 따위는 가르치고 있지도 않으며 일본의 해전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순신을 존경한다는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 역시 그저 일본에 대한 역사적 우월감을 나타내기 위한 민족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유언비어(流言蜚語)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국내의 해군사관학교에서는 '교육'에 관해서는 일반 대학과 같은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146점의 '학점'을 이수해야 학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또 전공과목도 세분화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전공이 다르더라도 해전사(海戰史)는 공통 필수과목으로 규정되어 있다. 해전사(海戰史)에서 흔히 얘기하는 세계 3대 해전이 살라미스해전(Salamis海戰), 칼레해전(Calais海戰), 트라팔가해전[Battle of Trafalgar]이다. 물론 이것은 서양사(西洋史)의 시각에서만 다루어지는 세계 3대 해전이다.
여기서 '세계 3대 해전'을 '세가지의 큰 해전'이라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수많은 해전이 있었으나, 해전의 '역사적'흐름, 즉 '변환점'에 속하는 해전의 '축'을 의미한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해전(Salamis海戰)에서는 함선끼리 가까이 다가가 선원들의 육박전을 이끌어내던 기존 해전에서 함선의 앞 부분을 강하고 뾰족하게 만들어 상대의 함선에 충격을 가하여 전복시키거나 선원들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전술을 펼쳤고, 1588년 칼레해전(Calais海戰)은 함포를 사용하여 '집중포화'를 쓰는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해전사(海戰史)의 또 다른 변혁점을 보여주었고, 1805년 트라팔가해전[Battle of Trafalgar]은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의 함대 운용술의 극치를 보여준 해전이었다.
커다란 해전이 아닌, '역사적 해전 패러다임 변환 사건'들을 뽑아낸 것이 흔히 얘기하는 '세계 3대 해전'이다.
그런데 여기 슬그머니 한산해전(閑山海戰)이 '세계 4대 해전'에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학익진(鶴翼陣)을 사용한 것도 모자라 적군의 대장선에 대해 선공일점사(先攻一占射)를 하여 상대의 예봉을 꺾고, 무척이나 변화 무쌍한 함대 운용을 벌이며 '집중포화'를 시도한 화려한 전술이 구사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최무선(崔茂宣)은 1380년에 이미 선박에 독자적으로 개발한 화약무기를 장착했고,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서양보다 2백여년 앞선 군선의 함포 운용기술을 갖게 되었다. 칼레해전(Calais海戰)보다 2백여년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칼레해전(Calais海戰)이 적군 선단과 조우한 이후 전함 개별적 무차별 포격전을 전개했다면 한산해전(閑山海戰)은 완벽한 조직력에 기가 막힌 통솔력이 발휘된 최고의 해전이었다는 점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서양사학에서 내려온 '세계 3대 해전'에 한산해전(閑山海戰)이 뒤늦게 '4대 해전'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순전히 일본 덕분이다. 일본 해군은 1905년 쓰시마해전[對馬島海戰]에서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鶴翼陣)을 개량한 정(丁)자 형 진(陳)으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멸시켰다.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종결된 이후 일본을 통치하게 된 미국에서는 늘 하듯 일본을 통해 일본과 주변국의 정보(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모두 습득하게 된다. 그러면서 러시아와 미국의 해군을 고전하게 했던 일본 해군의 역사를 검토하던 중에 '이순신의 전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전공(戰功)이 '불패신화(不敗神話)'라는 경이로운 기록에 놀라고 그의 신출귀몰한 전술과 16세기에 그런 함포술(艦砲術)과 함대 운용능력을 갖춘 해군력이 조선에 존재했다는 사실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우리는 역사교육 시간에 '세계 4대 문명'이라는 것을 배운 적이 있다. 이 사관(史關)이 요즘은 스무군데가 넘는 문명이 존재했었다는 서술형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세계 4대 해전'은 해전사(海戰史)를 연구하는 군사학자들의 주장 중 하나이다.
아직도 '세계 3대 해전'으로 가르치는 국가도 있고, 영국과 독일, 미국, 한국 같은 경우에는 한산해전(閑山海戰)까지 포함시켜 '세계 4대 해전'으로 교육하고 있다. 또 미국 학계의 경우, 세계전쟁사(世界戰爭史)를 강의하는 교육자마다 다르게 가르친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경우 저렇게 '3대 해전'이니, '4대 해전'이니 그런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를 짚을 때, 3군데를 짚는가 4군데를 짚는가에 따라 다를 뿐이다. 심지어 1905년 쓰시마해전[對馬島海戰]까지 넣어 '세계 5대 해전'이라 짚는 역사학자도 있다.
그러나 '세계 3대 해전'이니 '4대 해전'이니 '5대 해전'이니 하는 용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한산해전(閑山海戰)은 세계 해전사(海戰史)에서 그야말로 백미(白眉)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 국적을 가진 역사학자이기 때문에 한산해전(閑山海戰)이 세계 해전사(海戰史)에서 가장 위대한 승전(勝戰)이라고 자화자찬(自畵自讚)하는 것이 아니다. 서양의 '전사(戰史)'를 모두 꿰고 있는 한국인들이 비교해 볼때, 한산해전(閑山海戰)의 가치가 훨씬 드높기 때문에 이것을 잘 알지 못하는 서양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순신을 존경한다는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했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들려오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일제강점기의 사료들은 당시 일본의 해군 지휘관이나 일본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이순신을 군신(軍神)의 예로 추모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순신의 23회 승전(勝戰)이 전 세계사 그 어떤 해전보다도 위대한 전공(戰功)이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은 사료(史料)가 말해준다. 5천년 역사 위에 제대로 된 사료가 거의 없어서 떳떳하게 중국과 신경전을 할 필요없이 세계에 내세울 민족의 영웅이 된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이순신이 세운 전공(戰功)에 관련된 '사료'가 무척이나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이 말하는 배후의 '논리적 추론이 가능한 사건들'은 우리가 떳떳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우리의 영웅 이야기라는 것이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비교평가 따위도 혹여 의심을 갖는 '민족주의에 의한 선입견'도 거론할 필요가 없다. 나폴레옹 1세(Napoleon I)가 유럽 대륙을 공포에 떨게 했던 배경은 탁월한 포격술(砲擊術)이었다. 포병부대 운용이 매우 뛰어났던 것이다. 허나 그러한 나폴레옹 1세보다 2백여년 전에, 그것도 육지가 아닌 바다 위에서 함대의 포격술(砲擊術)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 7년 전쟁 동안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고 연전연승(聯戰聯勝)을 거두었던 역사적 진실...
그것만으로도 우리 민족의 해전사(海戰史)에 대한 자부심은 충분하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순신을 존경한다고 발언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든, 유언비어(流言蜚語)이든, 이순신 장군은 그러한 유언비어론(流言蜚語論) 자체가 필요없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해군 제독이다.
믿었던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한산해전(閑山海戰)에서 완패를 당했다는 보고를 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크게 진노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수군 장수가 모두 이순신에게 패배함으로써 일본군의 전략에는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전군에 명령을 내려 두 번 다시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말고 앞으로 조선 수군과 마주치면 정면 승부를 피하면서 해안가에 성을 쌓고 수비만 하라는 명령을 하달하게 된다.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사전인 근세일본국민사(近世日本國民史)는 한산해전(閑山海戰)에 대해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에 대한 사형선고'라고 평가하였다.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전기』6한산도대첩 ⑵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이 세계 전쟁사(戰爭史) 4대 해전에 포함되는 이유.
한산해전(閑山海戰)과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에서 이순신은 군사와 전함이 상대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지리적인 이점도 얻지 못했으나 여러가지 불리함을 딛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신기(神氣)의 전략과 전술을 발휘하여 적군의 대함대를 여지없이 무찔렀다. 이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으로 남해를 거쳐 서해로 북상하여 수륙병진(水陸竝進)을 하려던 일본군의 기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으며 일본 수군의 주력함대가 궤멸되자 평양성을 점령하여 지원 병력과 군수물자를 기다리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마침내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족주의사관(民族主義史觀)을 비판하고 국사해체론(國史解體論)을 주장하고 있는 국내의 일부 반민족사가(反民族史家)들은 이순신의 23회 승전(勝戰) 가운데 가장 높은 전공(戰功)인 1592년 7월 7일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이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해전(Salamis海戰), 1588년 칼레해전(Calais海戰), 1805년 트라팔가해전[Battle of Trafalgar]과 더불어 세계 전쟁사(戰爭史) 4대 해전에 당당히 포함된다는 이순신 관련 연구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이들은 세계 각국의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이순신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한산해전(閑山海戰) 따위는 가르치고 있지도 않으며 일본의 해전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순신을 존경한다는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 역시 그저 일본에 대한 역사적 우월감을 나타내기 위한 민족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유언비어(流言蜚語)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국내의 해군사관학교에서는 '교육'에 관해서는 일반 대학과 같은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146점의 '학점'을 이수해야 학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또 전공과목도 세분화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전공이 다르더라도 해전사(海戰史)는 공통 필수과목으로 규정되어 있다. 해전사(海戰史)에서 흔히 얘기하는 세계 3대 해전이 살라미스해전(Salamis海戰), 칼레해전(Calais海戰), 트라팔가해전[Battle of Trafalgar]이다. 물론 이것은 서양사(西洋史)의 시각에서만 다루어지는 세계 3대 해전이다.
여기서 '세계 3대 해전'을 '세가지의 큰 해전'이라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수많은 해전이 있었으나, 해전의 '역사적'흐름, 즉 '변환점'에 속하는 해전의 '축'을 의미한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해전(Salamis海戰)에서는 함선끼리 가까이 다가가 선원들의 육박전을 이끌어내던 기존 해전에서 함선의 앞 부분을 강하고 뾰족하게 만들어 상대의 함선에 충격을 가하여 전복시키거나 선원들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전술을 펼쳤고, 1588년 칼레해전(Calais海戰)은 함포를 사용하여 '집중포화'를 쓰는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해전사(海戰史)의 또 다른 변혁점을 보여주었고, 1805년 트라팔가해전[Battle of Trafalgar]은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의 함대 운용술의 극치를 보여준 해전이었다.
커다란 해전이 아닌, '역사적 해전 패러다임 변환 사건'들을 뽑아낸 것이 흔히 얘기하는 '세계 3대 해전'이다.
그런데 여기 슬그머니 한산해전(閑山海戰)이 '세계 4대 해전'에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학익진(鶴翼陣)을 사용한 것도 모자라 적군의 대장선에 대해 선공일점사(先攻一占射)를 하여 상대의 예봉을 꺾고, 무척이나 변화 무쌍한 함대 운용을 벌이며 '집중포화'를 시도한 화려한 전술이 구사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최무선(崔茂宣)은 1380년에 이미 선박에 독자적으로 개발한 화약무기를 장착했고,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서양보다 2백여년 앞선 군선의 함포 운용기술을 갖게 되었다. 칼레해전(Calais海戰)보다 2백여년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칼레해전(Calais海戰)이 적군 선단과 조우한 이후 전함 개별적 무차별 포격전을 전개했다면 한산해전(閑山海戰)은 완벽한 조직력에 기가 막힌 통솔력이 발휘된 최고의 해전이었다는 점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서양사학에서 내려온 '세계 3대 해전'에 한산해전(閑山海戰)이 뒤늦게 '4대 해전'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순전히 일본 덕분이다. 일본 해군은 1905년 쓰시마해전[對馬島海戰]에서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鶴翼陣)을 개량한 정(丁)자 형 진(陳)으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멸시켰다.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종결된 이후 일본을 통치하게 된 미국에서는 늘 하듯 일본을 통해 일본과 주변국의 정보(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모두 습득하게 된다. 그러면서 러시아와 미국의 해군을 고전하게 했던 일본 해군의 역사를 검토하던 중에 '이순신의 전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전공(戰功)이 '불패신화(不敗神話)'라는 경이로운 기록에 놀라고 그의 신출귀몰한 전술과 16세기에 그런 함포술(艦砲術)과 함대 운용능력을 갖춘 해군력이 조선에 존재했다는 사실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우리는 역사교육 시간에 '세계 4대 문명'이라는 것을 배운 적이 있다. 이 사관(史關)이 요즘은 스무군데가 넘는 문명이 존재했었다는 서술형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세계 4대 해전'은 해전사(海戰史)를 연구하는 군사학자들의 주장 중 하나이다.
아직도 '세계 3대 해전'으로 가르치는 국가도 있고, 영국과 독일, 미국, 한국 같은 경우에는 한산해전(閑山海戰)까지 포함시켜 '세계 4대 해전'으로 교육하고 있다. 또 미국 학계의 경우, 세계전쟁사(世界戰爭史)를 강의하는 교육자마다 다르게 가르친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경우 저렇게 '3대 해전'이니, '4대 해전'이니 그런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를 짚을 때, 3군데를 짚는가 4군데를 짚는가에 따라 다를 뿐이다. 심지어 1905년 쓰시마해전[對馬島海戰]까지 넣어 '세계 5대 해전'이라 짚는 역사학자도 있다.
그러나 '세계 3대 해전'이니 '4대 해전'이니 '5대 해전'이니 하는 용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한산해전(閑山海戰)은 세계 해전사(海戰史)에서 그야말로 백미(白眉)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 국적을 가진 역사학자이기 때문에 한산해전(閑山海戰)이 세계 해전사(海戰史)에서 가장 위대한 승전(勝戰)이라고 자화자찬(自畵自讚)하는 것이 아니다. 서양의 '전사(戰史)'를 모두 꿰고 있는 한국인들이 비교해 볼때, 한산해전(閑山海戰)의 가치가 훨씬 드높기 때문에 이것을 잘 알지 못하는 서양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순신을 존경한다는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했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들려오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일제강점기의 사료들은 당시 일본의 해군 지휘관이나 일본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이순신을 군신(軍神)의 예로 추모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순신의 23회 승전(勝戰)이 전 세계사 그 어떤 해전보다도 위대한 전공(戰功)이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은 사료(史料)가 말해준다. 5천년 역사 위에 제대로 된 사료가 거의 없어서 떳떳하게 중국과 신경전을 할 필요없이 세계에 내세울 민족의 영웅이 된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이순신이 세운 전공(戰功)에 관련된 '사료'가 무척이나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이 말하는 배후의 '논리적 추론이 가능한 사건들'은 우리가 떳떳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우리의 영웅 이야기라는 것이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비교평가 따위도 혹여 의심을 갖는 '민족주의에 의한 선입견'도 거론할 필요가 없다. 나폴레옹 1세(Napoleon I)가 유럽 대륙을 공포에 떨게 했던 배경은 탁월한 포격술(砲擊術)이었다. 포병부대 운용이 매우 뛰어났던 것이다. 허나 그러한 나폴레옹 1세보다 2백여년 전에, 그것도 육지가 아닌 바다 위에서 함대의 포격술(砲擊術)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 7년 전쟁 동안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고 연전연승(聯戰聯勝)을 거두었던 역사적 진실...
그것만으로도 우리 민족의 해전사(海戰史)에 대한 자부심은 충분하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순신을 존경한다고 발언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든, 유언비어(流言蜚語)이든, 이순신 장군은 그러한 유언비어론(流言蜚語論) 자체가 필요없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해군 제독이다.
믿었던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한산해전(閑山海戰)에서 완패를 당했다는 보고를 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크게 진노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수군 장수가 모두 이순신에게 패배함으로써 일본군의 전략에는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전군에 명령을 내려 두 번 다시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말고 앞으로 조선 수군과 마주치면 정면 승부를 피하면서 해안가에 성을 쌓고 수비만 하라는 명령을 하달하게 된다.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사전인 근세일본국민사(近世日本國民史)는 한산해전(閑山海戰)에 대해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에 대한 사형선고'라고 평가하였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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