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지하철에서 하품하던 당신

ㅁㄴㅇㄹ2011.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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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30분.

 

버스에서 내려 구로디지털단지 역에 들어서니

 

곧 열차가 도착한다는 알림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귀차니즘에 다음 열차를 기다렸겠지만

 

왠지 시간을 낭비하는 느낌이 들어 살짝 뛰어 열차를 탔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열차가 한산해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얼마나 갔을까, 당산 근처였던가.

 

눈을 붙이고 있다가 도착지가 다가온 고로 눈을 떴는데

 

바닥까지 내려오는 긴 회색 치마가 보였다.

 

남자가 가장 싫어하는 여자의 패션이라는 긴 치마.

 

배꼽 근처까지 끌어올려 입은 긴 치마의 허리 언저리에는

 

치마만큼이나 길고, 약간 윤기가 없는 머리카락이 자리하고 있었다.

 

긴 머리, 긴 치마.

 

 

나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내 앞을 가로막은 긴 치마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작지만 살짝 쳐져 선해보이는 눈과 칼날처럼 오똑한 코, 조금 큰 입.

 

그리고 입술.

 

입술이 지나치게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그녀는 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마치 초원의 사자가 포효하듯

 

큰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내뱉기 시작했다.

 

뭘까, 이 느낌은..

 

남들 앞에서 입을 벌려 하품하는 것은 결례라고 배우며 자라온 나는

 

묘령의 아리따운 아가씨가 호숫가의 하마 마냥

 

사정없이 입을 벌려 하품을 하는 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회색 일색의 복장에 약간 헝클어진, 엄청 긴 머리칼.

 

원숙미를 갖기 전의 헬레나 본햄 카터를 보는 듯 하다고 할까..

 

퇴폐적이지 않지만 어딘가 느슨한 느낌.

 

곧 목적지인 합정역이 되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또 다시 커다랗게 입을 벌려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나는 문이 열리기 직전까지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어떤 아주머니는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민망해진 나는 황급히 내렸지만, 회사까지 걸어오는 내내 그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하품을 하던 큰 입과 지나치게 아름다운 입술.

 

 

일상에 지쳐 어느샌가 남루하게 변한 내 모습이

 

이렇게 분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