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 길게 보내는 법 - 제1일 -

하늬바람200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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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11.02(화) 맑음 제1일


  07:10분 택시로 삼성동 공항 도심터미널에 가서 리무진 버스로 갈아타고, 올림픽대로를 질주하여 08:20분 여유있게 김포공항 집합장소에 도착하였다. 둘러 보아도 일행이 보이지 않기에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09:00시에도 일행이 나타나지 않아 초조 속에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으나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  불안이 커지고 있는데 09:15분 “하늬바람님은 17번 게이트 앞으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들리지 않는가! 놀라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 가보니 모두들 와 있고 연수원 관계자가 늦었다고 화를 내며 빨리 출입국신고서를 작성하라고 성화를 댄다. 속으로 화도 나고 “출발”이 이런가 싶었지만, 어쨋든 내 탓이라 꾹 참고 출입국신고서를 작성했다.

  알고 보니 리무진 버스가 내려준 장소가 2층이고 내가 기다렸던 조흥은행 앞은 3층이었다. 혼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착각을 하겠구나 하며 항공권을 받고 일행을 따라 출국심사대를 통과한 후, 출발시간까지 면세점들을 기웃거리다 비행기에 들어 갔다.

  11:20분 이륙하는 비행기는 대한항공 KE001, 목적지는 도쿄 나리타 공항, 좌석번호 37H, 창쪽에서 3번째로서 바깥이 보일까 말까하는 좌석이었다. 그러나 곧 구름 속, 이어 구름 위로 날아 지상을 내려다 볼 수 없기에 큰 아쉬움도 접었다. 항로가 스크린에 그려지고 각종 비행상황이 자막으로 나오는데 항로는 예상과 달리 강릉 쪽 동해로 나갔다가 남동 방향으로 직진, 속도 1,190km/h, 고도 11,000m, 기체 외부기온 -51°C. 비행시간 1시간 40분 예정.

  1시 무렵에는 일본의 숲과 논이 분명하게 보이고 도시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아마도 도쿄 동쪽 치바현 지방이리라 생각하며 듣던대로 조림의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다. 예정대로 도쿄 국제공항(나리타 공항)에 착륙하여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니 안내인 중년여성 우시오(羽尾)와 청년 남성 시바타(柴田)가 유창한 한국어로 환영인사와 자기소개를 한다. 둘다 한국에 유학했다는데 우시오는 아들이 고려대에 재학 중인 일한교류의 실천자라고 농담을 하는가 하면, 시바타는 한국인들이 자기를 ‘아저씨’ 심지어 ‘씨받이’라고 부르는데 총각이니 제발 그러지 말고 꼭 별명을 부르겠다면 ‘심봤다!’로 해 달라고 재담을 늘어 놓았다

  시내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일본식 주먹밥을 내놓았는데 기내식 식사 후 얼마되지 않아 식욕은 없었지만 삼각형 김밥이 색다르고 달리 할 일도 없었으므로 입에 넣다보니 기어이 다먹고 말았다.(이 삼각형 김밥이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삼각김밥이다) 생각보다는 산뜻하지 못한 고속도로 주변과 공장과, 가끔 활짝 펼쳐지는 바다를 왼쪽에 끼고 달리며 도쿄 디즈니랜드를 스치고 장대한 레인보우 브리지를 건너 시내에 진입하여 도라노몬(虎/門)이라는 표지가 있는 거리에 위치한 행선지 일한문화기금(日韓文化基金) 사무실 앞에 버스가 멈췄다. 어느 은행지점 건물의 3층을 쓰고 있었는데 한국 관계 도서로 꽉 채워진 서가들과 우리에게 나누어 주는 교육관계 자료, 지도 등 자료의 푸짐함과 세밀함에 저윽이 놀라워 했다. 이제 나는 될 수 있으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일본을 살피고 몸으로 느낄 것이다.

  식사시간까지 다소 여유가 있었으므로 가이드의 호의로 인근 도쿄 타워에 올라 중간높이의 전망대에서 시가지를 둘러보고 나오니, 어둠이 깃든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빛을 뿜는 타워의 조명이 과장컨대 환상적이다. 안내자의 말이 여성 조명 디자이너가 최근에 손본 것이란다. 이어 식당으로 향해 다다미가 깔린 일본 전통 식당에 두 줄로 마주 앉았다. 두 사람 사이마다 옮겨가며 무릎을 꿇고 그릇 하나 하나를 조용히 놓는 여자 종업원의, 우리에게는 낯설은 서비스를 마음속으로만 즐기며 차례로 나오는 음식과, 조금씩 견본으로 내놓은 것 같아 감질만 날 것 같은 반찬들을 음미하며 딱 한잔 술에 건배를 하고 비프스테이크까지 먹다보니 생각과 달리 배가 불렀다. 그런데 고기맛이 상당히 좋아 한우 아니 화우(和牛)냐 수입소냐는 물음이 떠올랐지만 참아두고 또 술이 모자란게 아쉬웠긴 하지만 훌륭한 첫 식사에 만족해 하였다.

  다시 버스로 밤거리를 달려 21:00시경 나의 나흘밤 숙소, 오사키(大岐)역에 있는 뉴오타니 인(New Otani Inn)의 1106호실에 여장을 풀었다. 방에 침대는 둘인데 사람은 하나다. 예상외의 좋은 대우에 대한 흐뭇함과 낯선 곳에서 혼자 잔다는 야릇함을 은근히 즐기며 일본 잠옷을 처음 입어보고 거울 앞에서 옷맵시를 잰 다음,  아내가 새로 사온 점퍼 등으로 편한 외출복으로 갈아 입고 나홀로 밤거리에 나서기로 했다. 망설이다가 안내자의 교통 설명과 지도를 참고로 JR(국철) 순환선을 타보기로 했다. 외국의 밤거리를 혼자서는 처음으로 나선다는 불안감과 설레임, 그리고 외로움을 누르며 호텔 프론트에 “코인 익스체인지 플리즈‘하며 1000엔자리 지폐를 내놓고 100엔짜리 동전으로 바꾼 다음, 호흡을 가다듬고 코 앞에 있는 오사키(大岐)역를 향해 걸음을 뗐다. 도전!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다시….

  지금부터 표지와 안내도는 나의 생존(?)과도 연결될 터이니 보고 또 보고 “보고 싶어도 보고 싶고…”한자로 씌여진 문자에 의지하여 불안스레 보니 순환선명은 야마노테선(山/手線) 일주하는데 2백 몇십엔. 행선지는? 그래 한바퀴를 거의 다 돌고 난 동경역이나 은좌역이 무난할 듯. 아무려면 어때 도쿄 도심을 일주하는 지상 전철이니 창밖을 내다보는 게 목적… 거꾸로 탄들 무슨 걱정?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서울에서 전철 늦게 타면 목적지에 닿지도 못한 채 내리라고 해서 추운 밤거리에서 떨었던 쓰라림을 여기에서 되풀이하다간 그냥 쓰라림 정도로 넘어가지 못한다. 택시가 보통 비싼게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살피니 나를 의식하지 않는 듯하여 우선 다행이다. 철로변이라 그런지 출발 북상 우회전 하는 전철 주변은 의외로 어두운 편, 사람은 붐비고 전철 안내도대로 역이 차례로 지나가 차차 안정을 찾으며 창밖을 살피다가. 이름만 귀에 익은 도쿄(東京)역 플랫폼에 내렸다. 끽연지역에서 태연히 담배를 피우는 젊은 여성을 곁눈질하며 천천히 88라이트 담배에 불을 당겼다. 바로 이 맛이야!

  곧 다시 승차하여 오사키역에 내려 전철 출구를 살피니 정산기라는게 있고 사람들이 돈을 넣기도 표를 꺼내기도 하여 궁금했지만 우선 무사히 출구를 빠져 나갈까 조바심하며 우리 전철표와 같은 크기의 표를, 우리 검표기 구멍보다 훨씬 커서 카드도 들어 갈 것 같은 검표기 구멍에 표를 넣자 여자 그림과 함께 “아리가토고자이마스”라는 문구가 나온다. 무사히 통과….

  첫 밤에 여자는 없더라도 술이라도 있어야 하겠기에 부근 수퍼를 찾아 용감히 들어서기는 하였으나 아무리 찾아도 술 비슷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어두운 밤거리를 차조심을 하며(차량 우측통행이니까 처음엔 혼동된다) 두 번째 수퍼에 들렀으나 또 없다. 마침내 입으로 도전…“익스규즈미 해브 유 와인 오어 리커? ”노우!“이래서 의문과 헛탕 속에 호텔에 돌아와 프론트에서 전화로 집과 통화하고 온수 샤워에, 냉수 마시고 잠을 청했다. 벌써 23:00시가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