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권에 편입된 시기를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이사부가 우산국을 귀속시킨 512년(신라 지증왕 13)때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후 지금의 울릉도와 독도에는 신라의 문화가
계속 유입되었으며 현재까지 울릉도에서 발굴·출토되고 있는 유적·유물들은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되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문화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복이후 한반도 본토 문화의 활발한 유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독도는 일찍이 우산국의 일부였다가 지증왕 13년(512년) 울릉도와 더불어
신라에 의해 영유화되어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권에 편입되어,
우리의 고유영토로 존재해 왔던 것입니다.
아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卷4, 1145년) 원문 풀이.
至十三年 壬辰 爲阿瑟羅州軍主 謨幷于山國 謂其國人愚悍 難以威降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 抵其國海岸 詐告曰 汝若不服 則放此孟獸踏殺之 其人恐懼則降 "신라 지증왕13년(512년)에 이슬라주 군주로 이찬 벼슬에 있는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정복하게 하였으며, 이사부 등 신라의 군사들은 우산국 사람들의 위세를 목우사자(木偶獅子:나무로 만든 사자 인형)를 이용하여 꺽음으로서 결국 우산국 사람들로부터 항복받기에 이르렀다."
또 세종실록지리지 (1432년 편찬) 에 나오는 내용도 보자면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新羅時 稱于山國 "우산과 무릉(우릉)의 두 섬은 (울진)현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동해의 중요한 지리상 특징 중 하나는 바다 중앙에는 큰 섬이 ‘울릉도’와 ‘독도’ 두 섬밖에 없다는
사실이고, 울릉도 주변에는 몇 개의 큰 바위섬이 있는데 이들은 가까워서
날씨가 청명하지 않아도 매우 잘 보인다는 점 입니다.
오직 날씨가 청명한 경우에만 조그맣게 서로 보이는 섬은 동해에는
‘울릉도’와 ‘독도’ 밖에 없습니다.
위의 자료에서 보듯이 신라시대에는 ‘울릉도’(武陵島)와 ‘독도’(于山 島)를 합하여
‘우산국’(于山國)이라고 칭했다고 기록해서, 우산국이 ‘울릉도’와 '독도’를 영토로 한 고대부족읍락국가를 이루고 살았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산국’이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 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는 것은 영토상으로는 ‘울릉도’와 ‘독도 ’가 신라에 병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 기록중 우산도와 울릉도를 구분한 점은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과 함께 울릉도의
옛 명칭이 '우산'이였고 대한민국 옛 영토중 동해상에 위치한 섬은 울릉도 하나였다는 주장과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들고 있는 시마네현 고시 이전에는 독도의 주인이 없었다는 주장이 모두 허구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지금도 울릉도 성인봉(높이 984m)에서는 날씨가 맑으면 독도가 뚜렷이 보이고요. 위의 자료로 세종실록지리지에 표시된 ′우산′이라는 섬은 독도가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17세기부터 고지도에 표시된 울릉도 이외의 또하나의 섬이 지금의 독도(우산도)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17세기 말에는 일본정부에게서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재확인까지 받았는데요.
그 사실은 숙종실록에 이미 실려있습니다. 숙종 때는 독도를 '자산도' 라고 불렀는데요.
숙종실록의 기록에 따르자면
1693년(숙종 19) 일본 어부가 독도와 울릉도 근해까지 출현하여 어로 활동을 하므로, 동래 어부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고유 영토임을 확인받고, 일본 어부들의 울릉도와 독도 근해의 어로 활동을 금지토록 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매 3년마다 울릉도, 독도 지역을 샅샅이 조사하여 지도와 함께 보고토록 하였다.
라고 나와있습니다.
시대적 배경으로는
일본이 1592-98년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임진왜란 후 조선왕조의 통치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죽도(竹島ㆍ다케시마) 혹은 의죽도(磯竹島ㆍ이소다케시마)로
독도를 송도(松島)라 부르면서, 울릉도ㆍ독도 등지에서 몰래 고기를 잡거나
나무를 도벌하기 시작했습니다.
1614년(광해 6)에는 대마도주가 의죽도(울릉도)로 가는 길을 안내해 달라는 사신을 보내기도 해
우리 나라는 이를 거듭 물리쳐야 했고요. 그러나, 1618년(광해 10)에는
호끼슈(伯耆州) 요내꼬(米子)의 상인 오오따니(大谷), 무라까와(村川)가문이
에도의 도꾸가와막부(江戶 德川幕府)로부터 정식 면허(竹島渡海免許)를 받는 등
일본인의 울릉도ㆍ독도에 대한 침구는 계속되었습니다.
한편 정부의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어부들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어장인
울릉도ㆍ독도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계속하고 있었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1693년(숙종 19)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을
중심으로 한 동래ㆍ울산 어부 40여명이 울릉도에서 오오따니 가문의 일본어부들과
충돌하게 되었죠.
이로써 울릉도ㆍ독도의 영유권을 놓고 1699년(숙종 25)까지 약 6년간에 걸친 한일간의
외교 논쟁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논쟁은 울릉도를 죽도(竹島-다께시마)라 칭하고 마치 별개의 섬인양 하여,
울릉도 점령의 근거를 얻어내려 한 대마도주의 계략을 사서(史書)와 안용복의 증언 등을 통하여
간파한 조선 조정의 강력한 대응과, 일본에 건너간 안용복의 당당한 항의로
“이후 다시는 울릉도 등지에 왕래하지 않겠다”는 일본 막부의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종결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조선에서는 울릉도ㆍ독도 등지에 대한 순찰을 강화해 3년마다 한번씩
정기적으로 수토관을 파견하기로 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울릉도ㆍ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명치유신 후 일본이 제국주의적 팽창을 본격화하기 전까지
일본의 서쪽 경계를 오끼섬 까지로 한계짓게 되었습니다.
1696년 호끼주(伯耆州) 태수가 작성한 이소다께시마각서(磯竹島覺書)와
1785년 하야시(林子平)의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地圖), 1881년 기따자와(北澤正誠)가
작성한 竹島考證ㆍ竹島版圖所屬考 등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 주는 일본측 자료들인것입니다!!
일본측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건 정말 말도 않되는 겁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맨처음에 독도를 자기네들이 지배했다고 우긴 사건들도 다 위에 나와있는데
바로 도해먼허(어업면허 1618년), 마쓰시마(도해먼허 수여 1696년) 을 주었다고 해서 입니다.
도해면허는 외국 영해로 나가 고기를 잡을 때 막부에서 허가권을 주는 것인데
그 당시 일본의 배가 독도 근해에서 고기를 잡아 분쟁이 많이 일어났으며 그 분쟁을 없애고자
조선에서는 울릉도와 독도 주민을 철수 시키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걸 자기네들 맘대로 '지배' 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일제 강령기에 국토 침탈로 인해서 독도를 자기네 영토로 강제 편입 시키고
그에 따라서 일본 어업을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까지 와서 어업을 실행했습니다.
또 1999년도. 한일어업협정공동관리수역 협정 때 독도가 일본의 땅임을
한국이 인정했다고 억지주장을 피고 이것을 빌미로
시네마현 다케시마(독도)의 날 이 제정됬습니다.
하지만 그때 어업협정은 당시 EEZ(배타적경제수역)에 관해 분쟁을 하지 않고자
이루어진 조약으로 영토문제와는 별개였고, 그 전에도 독도는 그저 '대한민국 땅' 이였지
일본이 지배하는 땅이 아니였죠.
한마디로 그냥 '억지'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란 소립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본의 영토 기본방침을 공식성명한
'카이로 선언' 이라는 선언문이 있습니다.
영토문제를 두고 보자면 중요한 조항은 한국에 대한 특별조항이 있겠는데요.
이 특별 조항의 선언문은 바로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
라는 것으로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을 받았습니다.
이 때 당시 한국이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 될 때 영토문제에서 독도를 미 군정으로부터
한반도와 함께 합법적으로 인수 받았고 항복한 일본은
이 '카이로 선언' 에 무조건적인 수락을 하였으며
이후 '포츠담 선언'에서 이 조항이 또 한번 재확인 됩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독도와 함께 무력으로 '강탈' 당한 것이며 당연히 반환 되어야 했고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하고 선언문에 수락을 하였으므로
당연히 독도는 우리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독도가 일본 땅이였다면 '강탈'이고 '반환'이고 따위의 단어는 사용 안했겠죠?
밑에서 결정적인 증거들을 좀 더 보시겠습니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력 제41호 기록
일본인들의 끊임없는 울릉도 불법 입국과 정착을 방지하는 적극적 대책의 일환으로
지방행정체계를 개편하여 서양국제법 체계에서도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임을
또 한번 세계에 공표하게 된 기록입니다.
▲강원도 관찰사 서리가 참정대 신에게 올린 울도군수 沈興澤의 보고서와
대한제국 참정대 신의 지령문(1906)
일본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후, 동해에서 러시아 함대의 동태를 감시하는
해군 망루(望樓)를 독도에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이 때 마침 나카이(中井)라는
일본 어업가가 독도의 물개잡이 독점권을 독도 소유권자인 대한제국 황제에게
신청하려 하였고 일본 정부는 독도가 한국 소유 땅임을 알면서도
‘무주지’(주인 없는 땅)라고 전제하면서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름을‘다케시마’(竹島)로 하며
시마네현 행정소관으로 한다고 결정했죠. 그러나 일본은‘독도’가‘한국 영토’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 독도 영토편입이 세계에 알려질 것이 두려워
'관보'(언론)에 싣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독도는 1905년 1월 28일 이전에, 이미 서기 512년부터 한국 영토로서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유주지’였고, 따라서‘무주지’(주인 없는 땅)이기 때문에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는 일본 정부의 결정은 국제적으로 인정 받을 수 없는
불법적,무효의 결정이었죠.
위 증거는 울도 군수는 1906년 3월 28일에 비로소 일본의 독도침탈 사실을 알고
강원도 관찰사를 통해 중앙정부에 보고했으며, 대한제국 참정대신은 즉각
일본의 불법성을 규탄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4년 후인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제에게 병탄되어 버렸는데,
어차피 위에 말한 '카이로 선언' 에 따라 온 나라를 찾을 때 독도 또한 되찾게 되었죠.
▲이것은 18세기 경 한국에서 제작된 '여지도' 라는 지도입니다.
우라나라 전도와 팔도분도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지도 강원도 지역에는 울릉도 옆에 '독도' 가 나타나 있죠.
▲이 지도는 동국도(천하도) 라고 하는 지도로써
18세기 말에 제작 되었고 서쪽에 울릉도를 盃陵島로 우산도(독도)를 平山島로
표기하였으며 조선전기 지도를 계승하면서 서쪽에 울릉도와 독도가 그려진것이라네요.
▲이것은 조선팔도지도(팔도전도) 라는 지도로써
19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 졌으며 울릉도와 '우산' 이라고 표기 되어있습니다.
(우산 = 우산도, 독도, 송도, 우산국)
▲1696년 1월 일본측이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하고, 일본인의 독도 출어를
금지 하는 명령을 내렸고 그 전달서를 조선측에 보내왔습니다.
이것이 그 전달서.
▲일본 외무성과 태정관이 1869년에 조사사항으로 지령한 <獨島松島朝鮮附屬二相成候始末>의
항목과, 그에 대한 일본 외무성 관리들의 復命 내용.
일본에서 1868년 1월 도쿠가와 막부정권이 붕괴되고 새 메이지(明治)정부가 수립되자,
일본 새 정부의 태정관(총리대신) 과 외무대신은 1869년 12월 의무성 고관들을
조선에 파견하여 14가지 항목에 대한 내탐 조사를 하라 명령하였는데요. 그 가운데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가 조선 부속(朝鮮附屬)으로 되어 있는 시말' 을
★★독도는 왜 우리 땅인가★★(필독)
굉장한 스압이고 읽는데 인내심이
좀 필요 할진 모르지만 한국인이라면
한번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볼만
할 겁니다.
독도는 왜 우리땅일까?
역사적 근거부터 봅시다.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1145년)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조와 [열전] 이사부조 에
오늘날 우리가 독도로 인정하는 우산도에 대한 기록이 실려있습니다.
독도는 예나 지금이나 울릉도의 기록과 항상 함께 문헌에 나타나는데요.
삼국시대 이전에는 울릉도가 독립적으로 우산국(于山國)이라는 고대부족읍락국가를
이루고 살았는데 그 영역은 가시거리 내에 위치한 독도를 포함해 울릉도 주변의
소도서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문헌의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우산국 사람들은 그 지형 및 토양으로 보아
반어반농민집단 생활을 하여 왔으며, 내륙보다 낮은 문화 수준이었으나,
신라 사람과 언어가 통하고 왕래도 있은 듯하고,
우산국 사람들은 본토에 귀속되는 것을 거부하며 살아 왔는데, 신라의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 溟州)의 군주(軍主)로 있으면서 우산국을 신라에 귀속시켰습니다.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권에 편입된 시기를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이사부가 우산국을 귀속시킨 512년(신라 지증왕 13)때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후 지금의 울릉도와 독도에는 신라의 문화가
계속 유입되었으며 현재까지 울릉도에서 발굴·출토되고 있는 유적·유물들은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되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문화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복이후 한반도 본토 문화의 활발한 유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독도는 일찍이 우산국의 일부였다가 지증왕 13년(512년) 울릉도와 더불어
신라에 의해 영유화되어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권에 편입되어,
우리의 고유영토로 존재해 왔던 것입니다.
아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卷4, 1145년) 원문 풀이.
至十三年 壬辰 爲阿瑟羅州軍主 謨幷于山國 謂其國人愚悍 難以威降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 抵其國海岸 詐告曰 汝若不服 則放此孟獸踏殺之 其人恐懼則降
"신라 지증왕13년(512년)에 이슬라주 군주로 이찬 벼슬에 있는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정복하게 하였으며, 이사부 등 신라의 군사들은 우산국 사람들의 위세를 목우사자(木偶獅子:나무로 만든 사자 인형)를 이용하여 꺽음으로서 결국 우산국 사람들로부터 항복받기에 이르렀다."
또 세종실록지리지 (1432년 편찬) 에 나오는 내용도 보자면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新羅時 稱于山國
"우산과 무릉(우릉)의 두 섬은 (울진)현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의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서로 바라 볼 수 있다"
라고 나옵니다.
신라시대에는 우산국 이라 불렀다 합니다.
(※ 세종시대에는 울릉도를 ‘武陵島’(무릉도·우릉도, ‘武’의 중국 음은 ‘우’)
‘독도’를 ‘于山島’라고 불렀다.)
이 사실은 17세기부터 고지도에서 오늘날 ‘독도’의 정확한 위치에 있는,
울릉도 이외에 또 하나의 섬을 ‘우산도(于山島)’라고 부른 사실에서도 재확인 됩니다.
동해의 중요한 지리상 특징 중 하나는 바다 중앙에는 큰 섬이 ‘울릉도’와 ‘독도’ 두 섬밖에 없다는
사실이고, 울릉도 주변에는 몇 개의 큰 바위섬이 있는데 이들은 가까워서
날씨가 청명하지 않아도 매우 잘 보인다는 점 입니다.
오직 날씨가 청명한 경우에만 조그맣게 서로 보이는 섬은 동해에는
‘울릉도’와 ‘독도’ 밖에 없습니다.
위의 자료에서 보듯이 신라시대에는 ‘울릉도’(武陵島)와 ‘독도’(于山 島)를 합하여
‘우산국’(于山國)이라고 칭했다고 기록해서, 우산국이 ‘울릉도’와 '독도’를 영토로 한 고대부족읍락국가를 이루고 살았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산국’이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 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는 것은 영토상으로는 ‘울릉도’와 ‘독도 ’가 신라에 병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 기록중 우산도와 울릉도를 구분한 점은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과 함께 울릉도의
옛 명칭이 '우산'이였고 대한민국 옛 영토중 동해상에 위치한 섬은 울릉도 하나였다는 주장과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들고 있는 시마네현 고시 이전에는 독도의 주인이 없었다는 주장이 모두 허구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지금도 울릉도 성인봉(높이 984m)에서는 날씨가 맑으면 독도가 뚜렷이 보이고요.
위의 자료로 세종실록지리지에 표시된 ′우산′이라는 섬은 독도가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17세기부터 고지도에 표시된 울릉도 이외의 또하나의 섬이 지금의 독도(우산도)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17세기 말에는 일본정부에게서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재확인까지 받았는데요.
그 사실은 숙종실록에 이미 실려있습니다. 숙종 때는 독도를 '자산도' 라고 불렀는데요.
숙종실록의 기록에 따르자면
1693년(숙종 19) 일본 어부가 독도와 울릉도 근해까지 출현하여 어로 활동을 하므로, 동래 어부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고유 영토임을 확인받고, 일본 어부들의 울릉도와 독도 근해의 어로 활동을 금지토록 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매 3년마다 울릉도, 독도 지역을 샅샅이 조사하여 지도와 함께 보고토록 하였다.
라고 나와있습니다.
시대적 배경으로는
일본이 1592-98년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임진왜란 후 조선왕조의 통치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죽도(竹島ㆍ다케시마) 혹은 의죽도(磯竹島ㆍ이소다케시마)로
독도를 송도(松島)라 부르면서, 울릉도ㆍ독도 등지에서 몰래 고기를 잡거나
나무를 도벌하기 시작했습니다.
1614년(광해 6)에는 대마도주가 의죽도(울릉도)로 가는 길을 안내해 달라는 사신을 보내기도 해
우리 나라는 이를 거듭 물리쳐야 했고요. 그러나, 1618년(광해 10)에는
호끼슈(伯耆州) 요내꼬(米子)의 상인 오오따니(大谷), 무라까와(村川)가문이
에도의 도꾸가와막부(江戶 德川幕府)로부터 정식 면허(竹島渡海免許)를 받는 등
일본인의 울릉도ㆍ독도에 대한 침구는 계속되었습니다.
한편 정부의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어부들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어장인
울릉도ㆍ독도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계속하고 있었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1693년(숙종 19)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을
중심으로 한 동래ㆍ울산 어부 40여명이 울릉도에서 오오따니 가문의 일본어부들과
충돌하게 되었죠.
이로써 울릉도ㆍ독도의 영유권을 놓고 1699년(숙종 25)까지 약 6년간에 걸친 한일간의
외교 논쟁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논쟁은 울릉도를 죽도(竹島-다께시마)라 칭하고 마치 별개의 섬인양 하여,
울릉도 점령의 근거를 얻어내려 한 대마도주의 계략을 사서(史書)와 안용복의 증언 등을 통하여
간파한 조선 조정의 강력한 대응과, 일본에 건너간 안용복의 당당한 항의로
“이후 다시는 울릉도 등지에 왕래하지 않겠다”는 일본 막부의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종결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조선에서는 울릉도ㆍ독도 등지에 대한 순찰을 강화해 3년마다 한번씩
정기적으로 수토관을 파견하기로 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울릉도ㆍ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명치유신 후 일본이 제국주의적 팽창을 본격화하기 전까지
일본의 서쪽 경계를 오끼섬 까지로 한계짓게 되었습니다.
1696년 호끼주(伯耆州) 태수가 작성한 이소다께시마각서(磯竹島覺書)와
1785년 하야시(林子平)의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地圖), 1881년 기따자와(北澤正誠)가
작성한 竹島考證ㆍ竹島版圖所屬考 등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 주는 일본측 자료들인것입니다!!
일본측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건 정말 말도 않되는 겁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맨처음에 독도를 자기네들이 지배했다고 우긴 사건들도 다 위에 나와있는데
바로 도해먼허(어업면허 1618년), 마쓰시마(도해먼허 수여 1696년) 을 주었다고 해서 입니다.
도해면허는 외국 영해로 나가 고기를 잡을 때 막부에서 허가권을 주는 것인데
그 당시 일본의 배가 독도 근해에서 고기를 잡아 분쟁이 많이 일어났으며 그 분쟁을 없애고자
조선에서는 울릉도와 독도 주민을 철수 시키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걸 자기네들 맘대로 '지배' 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일제 강령기에 국토 침탈로 인해서 독도를 자기네 영토로 강제 편입 시키고
그에 따라서 일본 어업을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까지 와서 어업을 실행했습니다.
또 1999년도. 한일어업협정공동관리수역 협정 때 독도가 일본의 땅임을
한국이 인정했다고 억지주장을 피고 이것을 빌미로
시네마현 다케시마(독도)의 날 이 제정됬습니다.
하지만 그때 어업협정은 당시 EEZ(배타적경제수역)에 관해 분쟁을 하지 않고자
이루어진 조약으로 영토문제와는 별개였고, 그 전에도 독도는 그저 '대한민국 땅' 이였지
일본이 지배하는 땅이 아니였죠.
한마디로 그냥 '억지'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란 소립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본의 영토 기본방침을 공식성명한
'카이로 선언' 이라는 선언문이 있습니다.
영토문제를 두고 보자면 중요한 조항은 한국에 대한 특별조항이 있겠는데요.
이 특별 조항의 선언문은 바로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 라는 것으로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을 받았습니다.이 때 당시 한국이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 될 때 영토문제에서 독도를 미 군정으로부터
한반도와 함께 합법적으로 인수 받았고 항복한 일본은
이 '카이로 선언' 에 무조건적인 수락을 하였으며
이후 '포츠담 선언'에서 이 조항이 또 한번 재확인 됩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독도와 함께 무력으로 '강탈' 당한 것이며 당연히 반환 되어야 했고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하고 선언문에 수락을 하였으므로
당연히 독도는 우리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독도가 일본 땅이였다면 '강탈'이고 '반환'이고 따위의 단어는 사용 안했겠죠?
밑에서 결정적인 증거들을 좀 더 보시겠습니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력 제41호 기록
일본인들의 끊임없는 울릉도 불법 입국과 정착을 방지하는 적극적 대책의 일환으로
지방행정체계를 개편하여 서양국제법 체계에서도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임을
또 한번 세계에 공표하게 된 기록입니다.
▲강원도 관찰사 서리가 참정대 신에게 올린 울도군수 沈興澤의 보고서와
대한제국 참정대 신의 지령문(1906)
일본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후, 동해에서 러시아 함대의 동태를 감시하는
해군 망루(望樓)를 독도에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이 때 마침 나카이(中井)라는
일본 어업가가 독도의 물개잡이 독점권을 독도 소유권자인 대한제국 황제에게
신청하려 하였고 일본 정부는 독도가 한국 소유 땅임을 알면서도
‘무주지’(주인 없는 땅)라고 전제하면서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름을‘다케시마’(竹島)로 하며
시마네현 행정소관으로 한다고 결정했죠. 그러나 일본은‘독도’가‘한국 영토’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 독도 영토편입이 세계에 알려질 것이 두려워
'관보'(언론)에 싣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독도는 1905년 1월 28일 이전에, 이미 서기 512년부터 한국 영토로서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유주지’였고, 따라서‘무주지’(주인 없는 땅)이기 때문에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는 일본 정부의 결정은 국제적으로 인정 받을 수 없는
불법적,무효의 결정이었죠.
위 증거는 울도 군수는 1906년 3월 28일에 비로소 일본의 독도침탈 사실을 알고
강원도 관찰사를 통해 중앙정부에 보고했으며, 대한제국 참정대신은 즉각
일본의 불법성을 규탄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4년 후인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제에게 병탄되어 버렸는데,
어차피 위에 말한 '카이로 선언' 에 따라 온 나라를 찾을 때 독도 또한 되찾게 되었죠.
▲이것은 18세기 경 한국에서 제작된 '여지도' 라는 지도입니다.
우라나라 전도와 팔도분도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지도 강원도 지역에는 울릉도 옆에 '독도' 가 나타나 있죠.
▲이 지도는 동국도(천하도) 라고 하는 지도로써
18세기 말에 제작 되었고 서쪽에 울릉도를 盃陵島로 우산도(독도)를 平山島로
표기하였으며 조선전기 지도를 계승하면서 서쪽에 울릉도와 독도가 그려진것이라네요.
▲이것은 조선팔도지도(팔도전도) 라는 지도로써
19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 졌으며 울릉도와 '우산' 이라고 표기 되어있습니다.
(우산 = 우산도, 독도, 송도, 우산국)
▲1696년 1월 일본측이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하고, 일본인의 독도 출어를
금지 하는 명령을 내렸고 그 전달서를 조선측에 보내왔습니다.
이것이 그 전달서.
▲일본 외무성과 태정관이 1869년에 조사사항으로 지령한 <獨島松島朝鮮附屬二相成候始末>의
항목과, 그에 대한 일본 외무성 관리들의 復命 내용.
일본에서 1868년 1월 도쿠가와 막부정권이 붕괴되고 새 메이지(明治)정부가 수립되자,
일본 새 정부의 태정관(총리대신) 과 외무대신은 1869년 12월 의무성 고관들을
조선에 파견하여 14가지 항목에 대한 내탐 조사를 하라 명령하였는데요.
그 가운데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가 조선 부속(朝鮮附屬)으로 되어 있는 시말' 을
조사 하라는 명령항목이 있었습니다. 그때 당시 일본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太政官)과
외무대신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부속영토' 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내탐보고서가 1870년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 이고
이는 일본 외무성이 1930년대에 편찬한 '일본외교문서' 제 3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일본 외무성과 태정관이 1869~1870년에 일본 정부가 독도를
'조선의 땅' 임을 확인한 명백한 자료입니다.
▲이것은 1877년 일본 내무성이 태정관에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에
포함 시킬 것인가에 대한 '최종 결정 질품서'와 태정관이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 없는 곳이라고 결정하여 내려보낸 지령문을 첨가 기록한 '공문서' 입니다.
▲이것 또한 바로 위 자료와 동일한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과 관계 없는 영토' 라는걸 재확인한 공문서.
▲1737년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J. B. D'Anville)이 그린 '조선왕국전도'
다른 외국에서도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인걸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이 한국 영토를 영공에서 방위하기 위해
1950년 설정해서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한국방공식별구역'(韓國防空識別區域: KADIZ)
독도를 한국 영토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일본정부새기들 쳐들어온다는 꼬라지 보고 승질나서 찾아봤습니다.
이 외에도 여기 올리지 못한 증거들이 수두룩하게 쌓여있어요.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명백한 이유를 다 알고 있고
한국은 무조건 우리땅이라고 우기기만 한다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정확한 근거가 없습니다.
일본에서의 증거들도 다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명시되어있고
일본 땅이라는 증거들은 이 증거들 이후에 작성된겁니다.
한마디로 독도는 대한민국 우리나라 땅이 맞고
일본은 그저 우기는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는겁니다.
일본은 매번 이야기를 지어 내면서까지 갖고 싶어 하는 독도를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많은 명백한 증거가 수도없이 많은데
빼앗길껄 두려워하며 점점 일본의 계략에 빠지는지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독도 관련 문제들과 역사와 근현대사만 제대로 배워도
누구든지 제 3자가 '독도가 너네 땅이라는 이유와 증거를 대봐라' 라고 불시에 물어도
대답 할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일본은 사람마다 알고 있는 역사가 개개인마다 틀린 어이없는 경지에 있죠.
오히려 한국인이 '몰라도 우리나라 땅!' 하는것보다 더 무식하게 억지를 부리는 셈입니다.
원숭이들이 요새 방사능과 쓰나미를 먹고 발정이 나 있습니다.
우리도 같이 발정 나버리게 된다면 똑같은 원숭이 밖에 되지 못하는거에요.
역사를 함께 공부 하고 차분히 원숭이 조련사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