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일본군의 본진이 설치된 부산포를 공격하다.
세차례에 걸친 출정에서 8회의 해상전투를 치르며 연전연승(聯戰聯勝)을 거두고 재해권을 거의 장악한 이순신은 적군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군선을 건조하고 화약무기를 양산하는 등 군비 확충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게 하여 8월 1일 여수에서 전라좌도수군(全羅左道水軍)과 전라우도수군(全羅右道水軍)이 합류했을 때 군선 수가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당시 52척보다 22척이 더 늘어난 74척에 이르렀던 것이다.
네번째 출정을 20일이나 앞두고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과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의 양수군(兩水軍)이 합류한 것은 연합선단의 기동훈련을 위해서였다. 경상도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수(金粹)가 공문을 보내 "왜군이 양산과 김해 등지로 내려오는데 도망치려는 것 같다."라고 전해오자 이순신은 8월 24일에 다시 출전명령을 내렸다.
판옥선(板屋船) 74척과 협선(挾船) 92척으로 이루어진 조선 삼도수군 연합선단(朝鮮三道水軍聯合船團)은 그날 남해 관음포에서 밤을 세우고, 이튿날 통영시 원량면 사량도에 이르러 원균과 합류한 뒤 그날 밤은 당포에서 보냈다. 26일에는 풍우가 세차 저녁 무렵에야 거제도에 이르렀고, 27일에는 창원시 웅천면 원포에서 밤을 보냈다.
28일까지 이렇게 동진하면서 적군을 찾아다니던 조선 수군은 8월 29일 낙동강 동족으로부터 바다로 나오던 적군을 발견하고 추격을 개시하여 아다케후네[安宅船] 4척과 세키부네[關船] 2척을 불태워 버렸다. 9월 1일 낙동강 하구를 지나 부산 쪽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물운대를 지나 화준구미에서 아다케후네[安宅船] 5척, 다대포에서 8척, 서평포에서 9척, 절영도에서 2척 등 총 24척의 적선을 격침시켰다.
이어서 부산진 동쪽 언덕 밑에 470여척에 이르는 일본 군선이 정박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조선 수군을 보자 일본 수군의 아다케후네[安宅船] 4척이 선두에서 돌격해왔다. 낙안군수(樂安郡守) 신호(申浩),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의 판옥선(板屋船)이 그들을 가로막고 포격하여 순식간에 격침시켰다.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등 일본 수군의 지휘관들은 조선 수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언덕과 해안가에서 포병들을 배치시켜 조선 수군을 향해 포탄을 쏘아 날리도록 했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전 군선을 뱀의 꼬리 모양으로 진을 치게 하여 부산의 포구와 바닷가의 포진(砲陳)을 향해 포격전(砲擊戰)을 전개하였다. 장사진(長蛇陣)을 쳐서 적군 포격의 사정거리를 피하고 되도록 많은 적의 군선을 파괴하려는 의도의 작전이었다.
적병들은 거의 다 군선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쳤으며 여섯 군데로 나뉘어서 어지럽게 조총을 쏘아댔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이미 여러차례의 해전을 통해 화포의 조준과 운용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포구에 정박시킨 일본의 군선 뿐만 아니라 언덕과 해안가의 일본 군사들에게도 포탄이 정확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은 아군에게도 매우 힘겨운 싸움이었다.
부산의 일본군은 이미 조선 수군의 진격 사실을 알고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조선 수군의 군선을 한 척도 격침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자군(自軍)의 군선 120여척이 파괴되고 불태워졌으며 병력도 3800여명이 폭살당하는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조선 수군도 전사자 6명, 부상자 25명의 피해를 입었으니 총 네차례의 출정 가운데 가장 치열한 전투가 바로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순신 휘하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장수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용맹을 발휘했던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이 이번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에서 전사한 것은 조선 수군에게 있어서 매우 큰 손실이었다.
해전이 끝난 뒤 여수 본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렸다.
'그 동안 네 차례 출전을 하고 수십번 접전을 펄쳐 모두 다 승첩했으나, 만약 장수와 사졸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 싸움보다 더한 것이 없겠습니다.
전일의 전쟁 때는 적선의 수가 많아도 70여척이었는데, 이번은 큰 적의 소굴에 정박한 적선 4백여척 속으로 군사의 위세를 갖추고 승리한 기세로 돌진하여 조금도 두려워 꺾임이 없이 종일토록 공격하여 적선 100여척을 깨뜨려 적군으로 하여금 가슴이 무너지고 머리를 움츠려 겁내어 떨게 하였으니, 비록 적의 수급(首級)을 벤 것은 없었으나 힘껏 싸운 공로는 먼저 번보다 훨씬 더하기에 전례에 따라 공로를 참작하여 등급을 마련하고 별기에 기록합니다.
(중략)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은 변란이 생긴 이후 충의심을 분발하여 적과 함께 죽기로 맹세하여 세번 싸움에서 늘 앞장섰고, 부산의 접전 때도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다가 적의 큰 철환을 이마에 맞아 전사하니 지극히 슬프고 가슴이 아픕니다.'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이리하여 4차의 출정에서 10여차례의 해전을 벌였으며 적선 총 193척을 격파하고 적군 2만 9천여명을 살상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이순신이 해상전투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함으로써 전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 만약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이순신이 없었다면.....?
만일 이순신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등장하지 않았다면, 아니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조선 수군 최고 지휘관의 직책이 이순신에게 맡겨지지 않았다면 전쟁은 7년이나 계속되지 않고 훨씬 일찍 끝났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조선왕조가 전쟁 발발 1~2개월만에 일본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을 것이며, 명나라도 안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본군은 1592년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이후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20일 뒤인 5월 3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국왕 선조(宣祖)는 불과 3일 전인 4월 30일에 거의 무방비상태인 서울에서 탈출했다. 따라서 일본군이 사나운 기세를 타고 그대로 추격했다면 선조는 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피난가기 전에 붙잡혔을 것이다. 아니, 임진강을 채 건너기도 전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일본군은 16일 동안이나 서울에 머물러 분탕질을 치다가 5월 19일에야 다시 북상했다. 이순신이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총 42척의 일본군 전함을 격침시킨 것은 5월 2일이었다. 이 적군 함대는 서해로 북상하여 병력을 보충하고 군수품을 보급하려던 배들이었을 것이다.
기다리던 해상보급이 수군의 참패로 무산되자 서울의 일본군들은 그대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5월 19일에 서울을 떠난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6월 15일에 평양을 점령하고,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도 함경도로 쳐들어가 두만강까지 이른다.
그러나 이들은 또다시 발이 묶여버리고 만다. 이는 5월 29일부터 6월 7일가지 벌어진 사천해전(泗川海戰), 당포해전(唐浦海戰), 제1차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율포해전(栗浦海戰)에서 72척의 일본군 군선이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에 의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서해를 거슬러 올라 대동강으로 들어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지원 병력과 보급 군수물자가 모두 수장되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군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쪽에서는 패전보고(敗戰報告)만 잇다라 올라왔다. 한산해전(閑山海戰)과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에 이어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에서도 대패했으니 이제는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귀국할 길조차 막혀버릴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조선으로 건너와 독전할 작정이었는데 조선 수군의 활약 때문에 바다를 건너올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조선으로 건너올 생각을 버리고 '조선 수군을 만나면 싸우지 말고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남해안 동쪽 일부를 제외한 80% 이상의 재해권을 조선 수군이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남해를 통해 곡창인 전라도를 장악하고, 나아가 서해로 북상하여 중부 이북을 공략하려는 일본군의 수륙병진(水陸竝進) 기도를 깨끗이 무산시킨 전략적 승리이기도 했다.
이후 일본군은 육전에서도 조선 관군과 의병들에게 패하게 되어 화평교섭에 응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황은 수년간 소강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순신의 전략전술은 작전해역의 사정과 적군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여 적군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유인하여 철저한 공격으로 섬멸하는 데 있었다. 그는 전공(戰功)을 인정받기 위해 적병의 수급(首級)을 베는 데에 신경쓰기보다는 적군의 병력과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일본의 군선을 한 척이라도 더 박살내기 위해 포격전(砲擊戰) 위주의 전투를 감행했으며, 상대적으로 견고한 조선의 판옥선으로 돌격하여 적선을 들이받아 파괴하는 전법을 썼다. 그리고 전투에는 총지휘관인 자신이 늘 앞장서서 위험을 무릅쓰고 군사를 지휘하는 대신 뒤로 물러서려는 장병들은 추호도 용서하지 않고 엄격한 군율로 다스렸다.
그것이 출중한 최고 경영자 이순신의 탁월한 지휘방침이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본이라는 국가와 이순신 개인의 전쟁이었다고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일견 타당성이 높다. 당시 조선의 조정이나 관군, 그리고 지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군대는 이 전쟁에서 기여한 공로가 별로 없었다. 결정적으로 일본군이 조선 정복을 포기하고 퇴각을 하게 된 것은 이순신, 이 단 한사람에 의해서였다.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전기』8.부산포해전과 진주성전투 ⑴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일본군의 본진이 설치된 부산포를 공격하다.
세차례에 걸친 출정에서 8회의 해상전투를 치르며 연전연승(聯戰聯勝)을 거두고 재해권을 거의 장악한 이순신은 적군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군선을 건조하고 화약무기를 양산하는 등 군비 확충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게 하여 8월 1일 여수에서 전라좌도수군(全羅左道水軍)과 전라우도수군(全羅右道水軍)이 합류했을 때 군선 수가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당시 52척보다 22척이 더 늘어난 74척에 이르렀던 것이다.
네번째 출정을 20일이나 앞두고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과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의 양수군(兩水軍)이 합류한 것은 연합선단의 기동훈련을 위해서였다. 경상도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수(金粹)가 공문을 보내 "왜군이 양산과 김해 등지로 내려오는데 도망치려는 것 같다."라고 전해오자 이순신은 8월 24일에 다시 출전명령을 내렸다.
판옥선(板屋船) 74척과 협선(挾船) 92척으로 이루어진 조선 삼도수군 연합선단(朝鮮三道水軍聯合船團)은 그날 남해 관음포에서 밤을 세우고, 이튿날 통영시 원량면 사량도에 이르러 원균과 합류한 뒤 그날 밤은 당포에서 보냈다. 26일에는 풍우가 세차 저녁 무렵에야 거제도에 이르렀고, 27일에는 창원시 웅천면 원포에서 밤을 보냈다.
28일까지 이렇게 동진하면서 적군을 찾아다니던 조선 수군은 8월 29일 낙동강 동족으로부터 바다로 나오던 적군을 발견하고 추격을 개시하여 아다케후네[安宅船] 4척과 세키부네[關船] 2척을 불태워 버렸다. 9월 1일 낙동강 하구를 지나 부산 쪽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물운대를 지나 화준구미에서 아다케후네[安宅船] 5척, 다대포에서 8척, 서평포에서 9척, 절영도에서 2척 등 총 24척의 적선을 격침시켰다.
이어서 부산진 동쪽 언덕 밑에 470여척에 이르는 일본 군선이 정박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조선 수군을 보자 일본 수군의 아다케후네[安宅船] 4척이 선두에서 돌격해왔다. 낙안군수(樂安郡守) 신호(申浩),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의 판옥선(板屋船)이 그들을 가로막고 포격하여 순식간에 격침시켰다.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등 일본 수군의 지휘관들은 조선 수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언덕과 해안가에서 포병들을 배치시켜 조선 수군을 향해 포탄을 쏘아 날리도록 했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전 군선을 뱀의 꼬리 모양으로 진을 치게 하여 부산의 포구와 바닷가의 포진(砲陳)을 향해 포격전(砲擊戰)을 전개하였다. 장사진(長蛇陣)을 쳐서 적군 포격의 사정거리를 피하고 되도록 많은 적의 군선을 파괴하려는 의도의 작전이었다.
적병들은 거의 다 군선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쳤으며 여섯 군데로 나뉘어서 어지럽게 조총을 쏘아댔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이미 여러차례의 해전을 통해 화포의 조준과 운용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포구에 정박시킨 일본의 군선 뿐만 아니라 언덕과 해안가의 일본 군사들에게도 포탄이 정확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은 아군에게도 매우 힘겨운 싸움이었다.
부산의 일본군은 이미 조선 수군의 진격 사실을 알고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조선 수군의 군선을 한 척도 격침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자군(自軍)의 군선 120여척이 파괴되고 불태워졌으며 병력도 3800여명이 폭살당하는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조선 수군도 전사자 6명, 부상자 25명의 피해를 입었으니 총 네차례의 출정 가운데 가장 치열한 전투가 바로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순신 휘하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장수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용맹을 발휘했던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이 이번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에서 전사한 것은 조선 수군에게 있어서 매우 큰 손실이었다.
해전이 끝난 뒤 여수 본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렸다.
'그 동안 네 차례 출전을 하고 수십번 접전을 펄쳐 모두 다 승첩했으나, 만약 장수와 사졸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 싸움보다 더한 것이 없겠습니다.
전일의 전쟁 때는 적선의 수가 많아도 70여척이었는데, 이번은 큰 적의 소굴에 정박한 적선 4백여척 속으로 군사의 위세를 갖추고 승리한 기세로 돌진하여 조금도 두려워 꺾임이 없이 종일토록 공격하여 적선 100여척을 깨뜨려 적군으로 하여금 가슴이 무너지고 머리를 움츠려 겁내어 떨게 하였으니, 비록 적의 수급(首級)을 벤 것은 없었으나 힘껏 싸운 공로는 먼저 번보다 훨씬 더하기에 전례에 따라 공로를 참작하여 등급을 마련하고 별기에 기록합니다.
(중략)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은 변란이 생긴 이후 충의심을 분발하여 적과 함께 죽기로 맹세하여 세번 싸움에서 늘 앞장섰고, 부산의 접전 때도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다가 적의 큰 철환을 이마에 맞아 전사하니 지극히 슬프고 가슴이 아픕니다.'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이리하여 4차의 출정에서 10여차례의 해전을 벌였으며 적선 총 193척을 격파하고 적군 2만 9천여명을 살상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이순신이 해상전투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함으로써 전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 만약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이순신이 없었다면.....?
만일 이순신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등장하지 않았다면, 아니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조선 수군 최고 지휘관의 직책이 이순신에게 맡겨지지 않았다면 전쟁은 7년이나 계속되지 않고 훨씬 일찍 끝났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조선왕조가 전쟁 발발 1~2개월만에 일본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을 것이며, 명나라도 안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본군은 1592년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이후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20일 뒤인 5월 3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국왕 선조(宣祖)는 불과 3일 전인 4월 30일에 거의 무방비상태인 서울에서 탈출했다. 따라서 일본군이 사나운 기세를 타고 그대로 추격했다면 선조는 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피난가기 전에 붙잡혔을 것이다. 아니, 임진강을 채 건너기도 전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일본군은 16일 동안이나 서울에 머물러 분탕질을 치다가 5월 19일에야 다시 북상했다. 이순신이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총 42척의 일본군 전함을 격침시킨 것은 5월 2일이었다. 이 적군 함대는 서해로 북상하여 병력을 보충하고 군수품을 보급하려던 배들이었을 것이다.
기다리던 해상보급이 수군의 참패로 무산되자 서울의 일본군들은 그대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5월 19일에 서울을 떠난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6월 15일에 평양을 점령하고,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도 함경도로 쳐들어가 두만강까지 이른다.
그러나 이들은 또다시 발이 묶여버리고 만다. 이는 5월 29일부터 6월 7일가지 벌어진 사천해전(泗川海戰), 당포해전(唐浦海戰), 제1차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율포해전(栗浦海戰)에서 72척의 일본군 군선이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에 의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서해를 거슬러 올라 대동강으로 들어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지원 병력과 보급 군수물자가 모두 수장되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군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쪽에서는 패전보고(敗戰報告)만 잇다라 올라왔다. 한산해전(閑山海戰)과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에 이어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에서도 대패했으니 이제는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귀국할 길조차 막혀버릴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조선으로 건너와 독전할 작정이었는데 조선 수군의 활약 때문에 바다를 건너올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조선으로 건너올 생각을 버리고 '조선 수군을 만나면 싸우지 말고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남해안 동쪽 일부를 제외한 80% 이상의 재해권을 조선 수군이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남해를 통해 곡창인 전라도를 장악하고, 나아가 서해로 북상하여 중부 이북을 공략하려는 일본군의 수륙병진(水陸竝進) 기도를 깨끗이 무산시킨 전략적 승리이기도 했다.
이후 일본군은 육전에서도 조선 관군과 의병들에게 패하게 되어 화평교섭에 응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황은 수년간 소강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순신의 전략전술은 작전해역의 사정과 적군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여 적군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유인하여 철저한 공격으로 섬멸하는 데 있었다. 그는 전공(戰功)을 인정받기 위해 적병의 수급(首級)을 베는 데에 신경쓰기보다는 적군의 병력과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일본의 군선을 한 척이라도 더 박살내기 위해 포격전(砲擊戰) 위주의 전투를 감행했으며, 상대적으로 견고한 조선의 판옥선으로 돌격하여 적선을 들이받아 파괴하는 전법을 썼다. 그리고 전투에는 총지휘관인 자신이 늘 앞장서서 위험을 무릅쓰고 군사를 지휘하는 대신 뒤로 물러서려는 장병들은 추호도 용서하지 않고 엄격한 군율로 다스렸다.
그것이 출중한 최고 경영자 이순신의 탁월한 지휘방침이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본이라는 국가와 이순신 개인의 전쟁이었다고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일견 타당성이 높다. 당시 조선의 조정이나 관군, 그리고 지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군대는 이 전쟁에서 기여한 공로가 별로 없었다. 결정적으로 일본군이 조선 정복을 포기하고 퇴각을 하게 된 것은 이순신, 이 단 한사람에 의해서였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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