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전기』8.부산포해전과 진주성전투 ⑵

대모달2011.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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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제1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 승리

본래 일본군의 전략은 서울을 함락시킨 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평안도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함경도를 점령하고 수군은 황해를 거슬러 올라가 조선 전역을 석권하는 것이었으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연속 격파하고, 의병들의 저항으로 진로가 막히고 보급로가 끊어져 버려 전황은 지리멸렬(支離滅裂),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평양성을 공격한 것은 7월 17일이었다. 명나라의 요동부총병(遼東副總兵) 조승훈(祖承訓)은 뒤따라온 3천명의 군사와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이 거느린 조선 군사 3천여명을 합쳐 연합군을 편성하고 평양 북쪽 순안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왜장 유키나가의 계략에 바져 대패하고 평양성 탈환은 실패로 돌아갔다. 조승훈은 불과 수십명의 패잔병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도주했다.

그는 명나라의 조정에 '조선 군사들이 항복하는 바람에 대패했다'는 허위보고를 했다. 조선에서는 사신을 보내 전후 사실을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8월 20일에는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박진(朴晉)이 의병대장 권응수(權應銖)를 군관으로 삼고 정세아(鄭世雅)가 거느린 의병 5천여명 등 경상좌도 관내 16개 읍성의 군사 1만여명을 한데 모아 경주성 탈환에 나섰다. 첫번째 전투에서 6백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안강으로 후퇴했던 박진은 9월 7일에 재공격을 감행, 이장손(李長孫)이 개발한 화약무기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이용하여 적군을 격퇴시키고 마침내 경주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일본군은 진주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측근인 세이쇼 쇼타이[西笑承兌]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선으로 출정한 전군의 장수들에게 진주성 함락을 명령한다. 이순신의 함대에 막힌 해로 대신 육로로 북상길을 뚫기 위해 서남 해안의 전략적 요충지인 진주성을 공격하도록 했던 것이다.

9월 24일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하세가와 히데가쓰[谷川秀一] 등이 이끄는 일본군 2만명이 김해를 출발했다. 이들은 진주성 밖에서 창원을 지키던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유숭인(柳崇仁)의 부대를 격파하고 성을 포위했다.

진주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하는 3천 8백여명의 조선 관군이 진주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들은 불굴의 의지로 수성전(守城戰)을 펼치며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을 잘 막아냈다. 10월 5일부터 시작된 전투는 9일까지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다가 마침내 적군의 퇴각으로 싸움은 마무리되었다.

이날 성밖에서 김준민(金俊民), 정기룡(鄭起龍), 조경형(趙敬亨) 등이 거느린 의병부대와 관군이 적군을 압박하자 일본군은 후퇴하는 척하면서 진주성의 수비군을 유인하려고 했다. 김시민이 이런 잔꾀에 속지 않자 일본군은 야음을 틈타 총공격을 개시했다. 김시민은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과 더불어 정란으로 성벽을 타넘으려는 적병들을 막으며 분전(奮戰)하던 중, 적병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 적군이 모두 퇴각함으로써 조선 관군은 또 한차례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제1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는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복을 위한 또다른 전략을 무력화시킨 중요한 계기를 만든 승전(勝戰)이었다.

그 무렵 조선 관군은 평안도순찰사(平安道巡察使) 이원익(李元翼)이 평양에서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 권율(權慄)이 서울에서 각각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군과 맞서고 있었다.

이원익의 평안도 군사 1만 6천여명 가운데 병사 이빈(李彬)이 4천여명을 거느리고 순안에, 좌방어사 이일(李鎰)이 2천여명을 거느리고 강동에, 우방어사 김응서(金應瑞)가 1만여명을 데리고 강서에 각각 진치고 있었다.

권율의 전라도 군사 1만여명은 병사 선거이(宣居怡), 소모사 변이중(邊以中), 조방장 조경(趙儆), 의병대장 임희진(任希進), 변사정(邊士貞), 승군장(僧軍將) 처영(處英)과 더불어 수원 독산성을 근거로 서울 탈환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는 일본군 총사령관인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지키고 있었다. 12월에 히데이에는 권율의 군사들이 수원까지 올라와 일본군의 배후를 위협하자 이를 제거하고자 2만 군사를 거느리고 독산성을 포위, 공격했다. 하지만 권율은 정면대결을 피한 채 유격작전으로 맞서서 일본군을 괴롭혔다. 마침내 조선 관군의 습격과 추위에 견디지 못한 하데이에는 포위를 풀고 서울로 돌아가고 말았다.

명나라의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거느린 군사들이 압록강을 넘어온 것은 12월 25일이었다. 이보다 앞선 10일에는 유격대장 전세정(錢世幀)이 선발대 1천명을 데리고 왔고, 이여송이 중협대장 총병관 양원(楊元), 좌협대장 부총병 이여백(李如栢), 우협대장 부총병 장세작(張世爵)과 함께 4만 2천여명을 거느리고 와서 의주의 선조를 알현하고 28일에는 평양으로 내려갔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첫해가 기울고 해는 1593년 계사년으로 바뀌었다.

1월 2일, 이여송의 명나라 군대 주력군이 안주에 도착했고 4일에는 숙천까지 전진했다. 5일에 의주 조정은 평양성 탈환작전을 앞둔 대책회의를 열었다.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은 우방어사 김응서와 좌방어사 정희현(鄭希賢)에게 군사 8천명을 안겨 평양성 공격에 나서게 했다. 또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과 그의 제자인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이 거느린 승병(僧兵) 2천 2백여명도 참전토록 했다.

1월 6일,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은 평양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이틀 동안의 탐색전 끝에 8일에 연합군을 총공세를 펼쳤다. 상방간에 1만명의 사상자가 나오는 치열한 공방전은 9일 일본군이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필사적으로 퇴각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렇게 평양성을 탈환한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은 패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여 1월 19일에는 개성까지 남진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이 평양을 빼앗기고 서울로 퇴각하자 우키다 히데이에 등은 서울 이북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전면철수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황해도에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군과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의 제6군, 강원도에 있던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의 제4군 등 각지의 일본군 5만여명의 병력이 서울에 집결했다. 다만 함경도에 있는 가토 기요마사의 제3군 2만여명은 서울로 철수하지 않았다.

1월 25일 경기도 방어사 고언백(高彦伯)이 이끄는 조선 관군과 부총병 사대수(査大受)가 거느린 명나라 군사들이 파주까지 진격했고, 이여송은 개성에 입성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 군사 2만여명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했다.

1월 27일 벽제관전투(碧蹄館戰鬪)에서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의 총지휘를 맡은 이여송(李如松) 제독이 일본군을 얕잡아보고 망객현(望客峴)으로 진출했다가 고바야카와 다카가게의 전술에 말려들어 대패하고 말았다. 서울 탈환은 커녕 죽을 뻔한 위기를 맞이했던 이여송은 그 길로 말머리를 돌려 29일에는 개성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같은 날 함경도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의 제3군도 철군을 시작했고, 함경도의 의병대장 정문부(鄭文孚)가 길주성을 탈환했다.

◆ 행주대첩(幸州大捷)

벽제관전투(碧蹄館戰鬪) 다음에 벌어진 것이 행주산성(幸州山城) 싸움이었다.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서울 탈환작전을 개시하자 권율(權慄)도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에게 군사 4천명을 주어 광교산에 주둔시키고, 자신은 조방장 조경(趙儆), 승군장 처영(處英)과 함께 군사 2천 3백여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들어갔다.

2월 11일에 척후병이 달려와서 일본군 3만여명이 좌, 우익으로 나누어 공격해온다고 보고했다. 행주산성을 포위한 적군은 이내 공격을 개시했다. 권율은 현자총통(玄字銃筒), 승자총통(勝字銃筒), 화차(火車),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등 각종 화약무기를 준비해 놓고 무차별 사격으로 일본군의 돌격을 저지했다.

일본군의 제1대가 궤멸되자 제2대, 제3대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조선 관군과 승군은 권율의 탁월한 지휘 아래 필사적으로 싸워 적군을 물리쳤다. 한때 화살이 모두 떨어져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충청수사(忠淸水使) 정걸(丁傑)이 군선 두척으로 화살을 싣고 와 위기를 면하기도 했다.

화살이 모두 떨어지자 부녀자들이 총동원되어 앞치마에 돌을 날랐으니, 이것이 바로 '행주치마' 전설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 행주산성 안에 부녀자들이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날이 저물 무렵에는 경기수사 이빈이 수십 척의 군선에 군사와 식량 및 무기 등을 싣고 와 아군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이렇게 아침 여섯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쉴새 없이 계속된 적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조선 관군은 악전고투(惡戰苦鬪) 끝에 수적으로 압도적인 일본군을 모두 물리쳤다.

3만 대군으로 아무리 공격해도 성을 점령할 수 없자. 마침내 일본군은 포기하고 퇴각했다. 적군은 물러가면서 전사자들의 시체를 네 곳에 모아 놓고 불을 질렀는데 시체가 타는 냄새가 십리 밖까지 퍼졌다.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아군은 퇴각하는 적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130명의 목을 베고 730점에 이르는 군수장비를 노획했다.

불과 2천 3백여명의 군사로 열네배에 이르는 3만여명의 적군을 격퇴시킨 행주대첩(幸州大捷).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만여명이 넘는 전사자와 8천여명에 이르는 부상자가 나오는 피해를 입었으며, 총사령관인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도 왼쪽 허벅지와 옆구리에 화살이 박히는 치명상을 입었으니 참으로 엄청난 타격이었다.

이 행주대첩(幸州大捷)을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제1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와 더불어 왜란삼대첩(倭亂三大捷)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권율은 그야말로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조선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었다.

2월 27일, 행주산성에서 대패하고 서울로 퇴각한 일본군 수뇌부는 식량과 군수품 부족을 타개할 수 없으므로 부산까지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본국으로의 철수 여부는 부산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에 다르기로 했다. 며칠 뒤 서울에 들어온 가토 기요마사도 이 결정에 서명했다. 이들은 서울에 왔던 히데요시의 특사가 귀국하는 편에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연명하여 보냈다.

"태합(泰合) 전하(殿下)! 황공하오나 바다를 건너 조선에 오시는 계획은 연기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서울의 식량을 조사했더니 잡곡밥을 먹으면 4월 11일까지는 버틸 수 있습니다. 부산에 있는 식량을 4월 11일까지 서울로 올려오기는 불가능합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치는 일은 어려운 점이 있지만 신중히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겠습니다. 이 두 도를 치고 난 뒤 해변과 강변 등 식량 수송이 편리한 곳에 튼튼한 성을 쌓을 계획입니다. 그런 다음에 곡식이 여무는 계절을 택해 다시 진격하면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해에 오시는 일은 연기하시기를 거듭 요청합니다."

이에 대해 부산으로 철수해도 좋다는 히데요시의 답신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4월 8일이었다. 같은 날 서울 용산에서는 명나라의 유격장군 심유경(沈惟敬)과 일본 대표 고니시 유키나가가 강화를 위한 예비회담을 벌여 다음과 같은 사항에 합의했다.

'일본군이 부산으로 철수할 때에 명군은 이를 추격하지 않는다. 도중에 조선 관군이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도록 보장한다. 일본군은 철수하는 도중 살인과 약탈을 하지 않는다. 강화회담을 위해 명나라 사신을 일본에 파견한다. 일본군은 철수와 함께 두 왕자와 그 수행원들을 조선 측에 돌려보낸다.'

이에 따라 10만여명의 일본군은 4월 18일부터 서울에서 철군했다. 그러나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는 인질로 삼아 그대로 부산까지 끌고 내려갔다.

이여송은 그렇게 해서 4월 20일 서울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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