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湖南) 의병항쟁(義兵抗爭) 민중 지도자 안규홍(安圭洪)

대모달2011.08.15
조회64

조선왕조 말기 이래 대한제국 시기를 거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과 그것을 이은 식민지 지배라는 민족수난의 극복을 위한 전후 50여년의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은 민족의 역량과 자주성을 보여준 끈질긴 투쟁의 산물이었다. 이 가운데 만주와 노령, 중국 관내에서 벌어졌던 무력대일항전(武力對日抗戰)은 일제(日帝)의 한반도 식민통치에 가장 큰 타격과 위협을 가한 구국투쟁(救國鬪爭)이었다. 이러한 재만(在滿) 독립군(獨立軍)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창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 발발을 전후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이 선도하였다고 생각한다.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의병(義兵)을 나라의 민군(民軍)이며 국수(國粹)라고 규정하였다. 그 뜻은 나라가 외적의 침략을 받아 위태로울 때에 정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그 즉시 충의정신(忠義精神)으로 일어나 종군(從軍), 유구한 역사와 소중한 문화적 발달에 뿌리를 둔 민족의 정신적 정화(精華)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병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번 봉기하면 국성(國性)으로 구현되어 수십년간에 걸쳐 침략자를 몰아낼 때싸기 사생취의(捨生取義)와 기의토적(起義討賊)을 계속한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왕조를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자국의 새로운 영토로 삼아 우리 민족을 수탈하려는 침략의 발톱을 세운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항거하여 끈질긴 투쟁을 벌였던 의병대장들은 셀 수도 없이 많지만 본문에서는 전해산(全海山), 심남일(沈南一)과 함께 호남(湖南) 지역의 의병항쟁(義兵抗爭)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항일투사(抗日鬪士)인 담산(澹山) 안규홍(安圭洪)에 대해 고찰(考察)하기로 한다.

안규홍은 1879년 4월 10일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牛山里) 택촌(宅村)에서 안달환(安達煥)의 세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7대조 까지 대대로 문무관직에 오른 양반이었으나 이후 벼슬길에 나가지 못해 그의 대에 와서는 거의 집안이 몰락, 비천한 신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는 지주집에서 어려서부터 머슴살이로서 생활하게 되었고, '담산(澹山)'이란 그의 호도 어린 머슴을 호칭하는 전라도 지방의 방언 '담살이'에서 유래하였던 것이다.

안규홍은 세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봉덕면(鳳德面)으로 이사하여 고종척(姑從戚) 되는 박제현(朴濟鉉)의 집에서 자랐다. 워낙에 집안 살림이 가난했던 만큼,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근의 염참봉(廉參奉) 집에서 머슴살이, 즉 노민(奴民)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러한 노민 생활을 통해 강인한 체력을 단련할 수 있었고, 15세 무렵에는 인근에서 벌어지는 씨름판을 휩쓸 수 있을 정도로 용력이 출중해졌다. 그는 또한 점차 장성해 가면서 강직한 성품과 의협심을 지니게 되었다.

한편, 당시 나라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매우 어지러워 지고 있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이후 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자국의 새로운 영토로 삼아 우리 민족을 수탈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 일제(日帝)는 청일전쟁(淸日戰爭)에 승리한 이후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을 탄압하더니,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고 러일전쟁(露日戰爭)을 종결지은 다음 1905년에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제 체결하고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정규군을 해산함으로써 한국의 정치적 예속화를 기도하였다. 경제적으로도 일본 상품의 대량 유입과 금융시장 지배를 위한 계획이 진행중에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토지점탈과 수산자원의 확보를 위하여 일본 농어민의 대량이주는 조선 농어민들에게 커다란 도전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안규홍도 이와 같은 일제(日帝)의 침탈 정책에 대해 심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1908년 2월 대일적개심(對日敵愾心)을 갖고 거의(擧義)를 위해 동지들을 규합한 안규홍은 처음에 도적들의 내침을 방어하기 위해 조직되어 있던 보성 법화사(法化寺)의 자위단(自衛團)을 주축으로 봉기할 생각을 하고 부근의 양반유지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자신의 신분 때문에 생기는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이에 안규홍은 강성인(姜性仁)의 의병부대에 투신하였다. 강성인은 본래 강원도에서 항일투쟁(抗日鬪爭)을 벌이던 자로, 일본군의 토벌작전(討伐作戰)을 피해 순천 부근으로 내려와 활동중이었다. 그러나 강성인의 의병부대가 주민들에게 피해를 많이 입혀 주변으로부터 신망을 잃게 되자 안규홍은 강성인을 총살하고 염재보(廉再輔), 손덕호(孫德浩) 등의 추대를 받아 의병대장에 취임한 뒤 부대를 재편하고 본격적인 항일전(抗日戰)을 준비하게 되었다.

안규홍(安圭洪)의 의병부대는 1908년 4월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동소산(桐巢山)에서 봉기한 이후 광양, 보성 등지를 중심으로 인근의 홍양, 여수, 돌산, 곡성, 남원, 구례, 장흥, 순창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서 일제(日帝)의 군경과 맞서 많은 전투를 벌였다. 안규홍의 의병부대는 4월 26일 보성에서 첫 전투를 치렀는데, 낙안(樂安)에서 파견된 헌병대를 파청(坡靑)에서 기습 공격하여 적병 3명을 사살하고 10여정이 넘는 총기(銃器)를 노획한 것이었다. 5월 1일에 일본군 헌병대는 의병들이 은거해 있는 대원사(大院寺)를 향해 접근해 왔다. 이에 의병들은 사찰 문루와 장벽에 의지하여 다가오는 일본군을 향해 사격을 가해 적병 8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안규홍 의병부대의 활동이 이처럼 활발해지자 도변정추(渡邊政秋) 소좌(少佐)가 이끄는 일본군이 동복(同福)을 수비하기 위해 그곳에 주둔하게 되었다. 안규홍은 평범한 농민으로 위장하여 이들의 활동상황과 규모 등을 정탐한 뒤 의병들을 운월치(雲月峙)에 매복시켜 놓고 일본군을 그곳으로 유인하여 기습 공격으로 격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30여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또한, 운월치에서 승리한 뒤 안규홍은 의병부대 본진을 귀환시킨 뒤 자신은 부하 2, 3명만을 데리고 일본군의 출동을 틈타 비어 있던 일본군의 군영을 불살라 버렸다. 이와 같은 안규홍의 집요한 공격을 받게 되자 도변정추(渡邊政秋) 소좌는 하는 수 없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그곳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말았다.

그러나 안규홍 의병부대는 얼마 뒤 거의(擧義) 이후 최대의 시련을 맞이하였다. 1908년 5월 19일 서봉산 전투(棲鳳山戰鬪)에서 일본군의 포위공격을 받고 참모장 나창운(羅昌運)을 비롯한 의병 25명이 전사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서봉산에서 참패를 당한 안규홍은 일단의 의병을 거느리고 두달 남짓 남해의 섬으로 가 전력을 회복할 때까지 운둔생활을 하였다. 그 뒤 8월경에 석호산(石虎山)에서 흩어진 의병들을 모아 재기하였다. 이 때에는 토착농민들과 심남일(沈南一), 안재찬(安載瓚) 등 인근에서 활동하던 의병대장들이 후원을 해와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재기에 성공한 안규홍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 해 8월 초순에는 광양으로 진군하여 이 지역의 어업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어민들을 살해하였고, 이어 일본군 측량대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한편 곳곳에서 일제(日帝)의 조아(爪牙)로서 주민들을 괴롭히는 일진회(一進會) 소속 관리들을 찾아내 처단하는 활동도 벌였다. 또한 9월 13일에는 순천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가령치(加嶺峙)로 유인하여 총격전을 벌였으나, 선봉장 이영삼(李永三), 이관회(李寬會), 유격장 안택환(安宅煥) 등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 뒤 1908년 12월 말경 안규홍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받들고 혹한을 피하기 위해 이듬해 봄을 기약하고 잠시 부대를 해산한 뒤 겨울 동안 은둔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는 확고한 지휘체계와 군기가 엄히 유지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으리라 추측된다.

이듬해 3월 이들은 약속대로 다시 모여 의병항쟁(義兵抗爭)을 재개하였다. 그 동안 안규홍은 의병을 해산하고 상경하라는 고종(高宗) 황제의 밀칙(密勅)을 받기도 하였으나, 이것이 의병항쟁을 방해하려는 일제(日帝)의 간계임을 간파하고 이르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는 이 무렵 호남행군소대장(湖南行軍所大將)이라는 이름하에 의병들을 통솔하였다.

안규홍의 의병부대는 3월 8일 전해산, 심남일 등의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펼쳐 남평(南平) 거성동(巨聲洞)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하여 적병 70여명을 사살하는 승리를 거두고 이를 필두로 이후 그해 4월까지 보성, 강진, 화순 등지를 진군하며 도처에서 일본 군경 및 부일(附日) 매국노, 일본 어민들을 살상하여 그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

안규홍 의병부대의 활발한 유격작전(遊擊作戰)으로 호남 지역에 정착하려던 일본 민간인들이 크게 두려워하자,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는 그해 4월에 광주와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2개 대대 병력을 차출하고 9월에는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을 시작하여 보다 적극적인 의병항쟁근절책(義兵抗爭根絶策)을 추진하였다.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 두달 동안 펼쳐진, 전남 지역의 의병대를 초토화시키기 위한 이 작전에는 보병 2개 연대, 공병 1개 소대를 비롯해 군함 수척, 해군 11정대 등이 동원되었다. 일시에 대병력을 동원해 포위망을 구축한 뒤 점차 이를 좁히면서 그 지역 안에 든 의병들을 완전히 섬멸하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부석재(富石材) 대좌(大佐)가 이끄는 보병 제2연대는 안규홍 의병부대를 전담하여 토벌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석재 대좌는 안규홍의 신원을 파악하고 그 부모처자에게 귀순을 종용케 하는 공작을 벌이면서 작전준비를 완료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작전을 눈앞에 두고, 안규홍은 그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해 8월 29일 밤에 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여기서 그는 의병의 소규모 병력으로 일제(日帝)의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에 정면으로 대항하기 어렵다고 판단, 의병부대 해산을 명령하게 된다. 그러나 유격장 임창모(林昌模)는 최후의 순간까지 일제(日帝)에 항거할 결심을 하고 이후에도 의병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뒤 흑석산(黑石山)에서 헌병대의 공격을 받고 부자가 함께 몰살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의병부대를 해산한 안규홍도 봉기 초부터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부장 염재보(廉再輔), 우익장 정기찬(鄭基贊) 등과 함께 1909년 9월 25일 헌병대에 피체되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은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노민(奴民)의 미천한 신분을 극복하고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의병을 일으켜 신출귀몰한 유격작전(遊擊作戰)으로 도처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 한때 명성을 드날렸던 안규홍(安圭洪) 의병대장은 이처럼 일제(日帝)의 잔악한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으로 피체되어 이듬해 5월 5일 형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