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월권행위
이순신이 고금도에 주둔하여 순천을 본거지로 한 적군의 동태를 주시하며 조선 수군의 전력을 증강하고 있는 동안 육지에서는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 마귀(麻貴), 동일원(童一元) 등이 울산과 사천에 있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대를 공격하고, 유정(劉艇)은 순천 예교에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한편 지난해 10월에 서해를 건너온 명나라 수군 5천명도 7월 16일에 고금도에 이르렀다. 명나라의 수군 도독은 진린(陳璘)이었다. 그런데 진린은 성격이 매우 난폭하고 오만무례한 자였다.
그는 다른 명나라 장수들과 마찬가지로 무지 무식한데다가 헛된 자만심에 가득 차 강화도에서부터 조선 백성과 관리들을 짐승 다루듯이 했으며, 심지어는 6월 26일 국왕 선조가 몸소 배웅하는 자리에서도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로 찰방 이상규(李相奎)의 목을 노끈으로 묶어 질질 끌고 다니는 야만적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이처럼 무지막지한 자였으므로 유성룡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장차 이순신의 작전에 큰 지장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진린을 특별히 대접하여 화를 내지 않게 하라" 는 특별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안 이순신은 군사들로 하여금 사슴과 멧돼지와 물고기들을 많이 잡아오도록 하고 술도 넉넉히 마련토록 하여 풍성한 잔치 준비를 하고 진린을 기다렸다.
명나라의 군선들이 고금도 앞바다로 들어오자 이순신은 전함들을 거느리고 나가 성대한 환영식을 베풀며 맞이했다. 그리고 본영으로 안내하여 미리 준비한 음식을 진린을 비롯한 명나라 장졸들이 배가 터지도록 먹여주었다. 배가 부르니 심통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은 역시 골칫거리였다. 진린이 군령권을 행사한답시고 번번이 작전을 방해하는 바람에 이순신이 원하는 대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는 노량해전(露梁海戰) 직전까지 이어졌다.
이순신은 그때마다 조정에 그런 사정을 보고했으나 워낙 무능하고 무기력한 조정이라 시원한 해결책이 있을 턱이 만무했다. 이 문제 또한 최고 경영자 이순신 혼자의 힘으로 타개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이 맞서 싸워야만 할 적이 또 하나 더 는 셈이었다.
진린이 고금도에 도착한지 이틀이 지난 7월 18일에 적선 100여척이 녹도에 침범했다는 정찰 보고가 들어왔다. 이순신과 진린이 즉각 함대를 이끌고 출동했지만 금당도에 이르렀을때 적선들은 이미 추격권을 벗어나 멀리 달아난 뒤였다. 24일에는 이순신과 진린이 운주당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명나라 군관 하나가 들어와 진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오늘 새벽에 적군을 만났는데, 조선 수군이 적선 6척을 나포하고 60여명의 적병을 참살했으나 우리 명나라의 수군은 풍세가 불순하여 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진린이 화를 내며 술잔을 내던지고, "저 놈을 끌어내라!" 하고 화를 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이순신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진 도독, 고정하시오. 진 도독은 대명국(大明國)의 대장으로서 멀리 이곳까지 왜적(倭敵)을 토벌하러 오시지 않았소? 그러니까 이 진중에서 승리한 것은 모두 진 도독의 공로라고 해야 옳지요. 지금 우리 수군이 얻은 왜적(倭敵)의 수급(首級)은 모두 진 도독에게 드리겠소이다. 이제 진 도독이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되어 승전보(勝戰報)를 귀국의 황제께 보고하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소?"
그러자 진린의 얼굴이 금세 펴지면서 이순신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 이미 중원에서부터 장군의 명성을 많이 들었소! 지금 보니 장군에 관한 칭찬이 하나도 거짓이 아니었구려!"
이순신은 그날 녹도만호 송여종이 포획한 적선 6척과 적병의 수급(首級) 69개를 모두 진린에게 주었다. 진린은 그것을 서울에 있는 명군 총사령부로 보냈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런 사정을 조정에 따로 보고하였으므로 조정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뒤에도 이순신은 출동하여 아무 전과가 없는 진린에게 전공(戰功)을 나누어 주어 그의 교만하고 포악한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타고난 천성은 어쩔 수 없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가자 그들의 천박한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명군의 행패는 힘없는 백성들에게도 가해져 약탈과 强姦 따위가 빈번히 벌어졌다. 여러 차례 타이르고 항의할 때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만 했지 나아지는 기색이 없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 따끔하게 버릇을 가르쳐 놓아야겠다고 작정한 이순신은 하루는 부하들에게 명군 진영 인근의 민가와 시설물들에 대해 철거령을 내렸다. 또한 중요한 물자는 모두 배로 옮기게 하고 자신의 의복과 침구까지 배에 싣도록 했다.
소란이 벌어지자 진린이 이순신에게 부하를 보내 무슨 일인가 알아오게 지시했다. 이순신이 이렇게 전하라고 일렀다.
"우리나라 군사와 백성은 귀국 대장이 온다는 말을 듣고 마치 부모가 오신 듯이 우러러보았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귀국 군사들이 행패를 부리고 약탈하는 것을 일삼기 때문에 백성들이 살 수 없어서 모두 다른 곳으로 피하려고 한다. 그래서 나도 대장으로서 혼자만 여기 있을 수 없으므로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진린이 허둥지둥 달려와서 이순신의 손을 잡고 백배사죄했다. 이순신이 없으면 혼자 싸워 전공(戰功)을 세울 자신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이야기가 본국에 들어가면 자신의 목이 달아나게 생겼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이렇게 진린을 굴복시켜 결국 명나라 수군 장졸들의 행패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이순신의 고매한 인품과 탁월한 통솔력과 넓은 학식이 이 무지막지한 중국인 장수까지 감동시켜 나중에는 자기 부하의 처벌권한까지 넘겨주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명나라 수군 장졸들도 이순신 장군을 저희 상관보다 더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
진린은 나중에는 이순신에게 지휘권까지 양보하였고, 이순신을 부를 때에도 꼭 이야(李爺)라는 존칭을 썼다. 또한 걸핏하면 이런 말도 했다.
"이야(李爺)는 조선같이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에 살 인물이 아니오. 나와 같이 명나라로 들어갑시다. 같이 황상(皇上) 폐하(陛下)를 모시고 벼슬살이를 합시다."
이순신은 진린의 말을 듣고 그저 조용히 웃어 보일 뿐이었다. 뒷날 진린은 선조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순신을 가리켜 '경천위지지재(經天緯地之才)'요, 보천욕일지공(補天浴日之功)'이니 하며 자신의 존경심을 표현했다.
노량해전(露梁海戰)이 벌어지기 전인 1598년 11월 16일에 진린은 자국 황제에게 이순신을 천거하는 상소문을 써서 본국에 보냈는데, 그 내용이 명국문록(明國文錄)에 실려 있다.
'폐하, 이 전란이 끝나면 즉시 조선의 수군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부르소서. 그로 하여금 북쪽의 오랑캐를 견제토록 하소서.. 이순신 통제사는 능히 우리 명(明)의 후환을 없애줄 것이라 신(臣) 진린(陳璘)은 굳게 믿사옵니다....'
이순신이 만일 평범한 인물이었다면 진린의 위세에 눌려 자신의 뜻대로 적군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범상한 장수가 아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능히 해결의 길을 찾을 줄 알았던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그는 참으로 '조선같이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 에서 살기에는 아까운 비범한 인물이었다.
◆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의 왜교 성(倭橋城) 공격.
정유년 연말부터 무술년 연초까지 계속된 울산성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명군 총사령관 양호(楊鎬)는 사로병진(四路竝進)이란 작전을 추진했다. 사로병진이란 중로에 이여매(李如梅), 동로에 마귀(麻貴), 서로에 유정(劉艇), 그리고 수로에 진린(陳璘)이 각각 사령관이 되어 4개 방면에서 수륙합동작전을 펼쳐 일본군을 섬멸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가운데 중로대장 이여매는 이여송(李如松)의 친동생인데 이여송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 후임으로 가고 동일원(童一元)이 그 자리를 맡았다.
이들 사로군은 무술년 8월 18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진린은 이들 육로군에 한 달 앞선 7월 16일에 서해를 남하하여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합세했던 것이다.
여기서 울산성전투(蔚山城戰鬪)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켜 충청도 직산싸지 북상했던 일본군은 수군이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패배하자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진격을 포기한 일본군은 부산으로 퇴각했다.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우군은 10월 중순에 양산까지 후퇴했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대는 울산으로 후퇴했다. 또 그동안 전라도를 휩쓸며 분탕질을 치던 좌군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를 순천에 있는 왜교 성(倭橋城)에 주둔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진주에서 부산에 이르는 해안의 18개 왜성으로 퇴각했다.
이에 따라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은 그해 연말까지 대부분의 병력을 경상도로 집결시켰다. 그리고 12월 22일에 울산성 공격을 개시했다. 연합군은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조선 관군 1만명, 경리 양호 휘하의 명나라 군사 3만 8천명 등 모두 4만 8천명이었다. 당시 울산성에는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군사 1만 6천명이 잇엇다. 원래 울산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때 서생포에 나가 있다가 총공격을 받자 급히 달려왔다.
공방전(攻防戰)이 장기화되자 성안의 일본군은 군량이 떨어져 벽의 흙을 뜯어 먹고, 식수가 없어서 말의 피를 마시거나 자기 오줌을 받아 마시기까지 이르렀다. 해가 바뀌자 남해안 각지에 주둔하고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다 히데이에 등이 이끄는 일본군 2만여명이 구원차 달려와 연합군을 역포위했다.
1월 4일,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은 총공세를 펼쳤으나 끝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했다. 전후 10여일에 걸친 울산성에서의 공방전은 이렇게 쌍방에서 2만여명의 막대한 인명피해를 남기고 끝났다. 명군 수뇌부는 울산성 함락의 실패 이유를 수군이 바다에서 일본 지원군을 막지 못한데 있다고 판단했다. 이순신이 본영을 고하도에서 고금도로 이진한 것은 울산성전투(蔚山城戰鬪) 직후였다. 본진을 서해에서 좀더 남동쪽 남해안으로 전진 이동한 것은 순천의 적군을 막는 한편 다시 재해권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해 8월 18일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킨 최고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사카에서 62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전쟁의 원흉 히데요시의 죽음은 자연히 전쟁의 양상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 히데요시의 죽음은 극비에 부쳐졌고, 일본 조정의 중신회의에서 조선 출정군의 전면 철군이 결정되었다. 이 결정 도한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 장수들에게 극비로 전달되었다.
그러나 세상이 비밀은 없는 법. 히데요시의 죽음은 결국 조선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 마침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은 적군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로 결정하고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사로병진(四路竝進) 작전이었다. 동로군은 제독 마귀와 부총병 오유충(吳維忠)이 이끄는 명군 2만 4천명과 김응서가 이끄는 조선 관군 5천 5백명 등 총 2만 9천 5백명으로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의 왜군 1만 5천명이 지키는 울산성을 공격키로 했다. 중로군은 제독 동일원과 부총병 장방(張榜)이 이끄는 명군 3만 4천 4백명과 경상우병사 정기룡(鄭起龍)이 이끄는 조선 관군 2천명 등 총 3만 6천 7백명으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왜군 8천명이 지키고 있는 사천성을 공격토록 했다. 서로군은 제독 유정(劉艇)과 부총병 이방춘(李芳春)이 이끄는 명군 2만 6천명과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조선 관군 1만명 등 총 3만 6천명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 1만 3천 7백명이 지키는 순천 동남쪽 왜교 성(倭橋城)을 공격토록 했다.
한편 수로군은 수군도독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 5천명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 1만 6천여명이 서로군의 왜교 성(倭橋城) 공격에 맞춰 해상에서 적군을 공격키로 했다.
9월 17일, 중로군이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 중로군은 합천을 떠나 삼가를 거쳐 19일에 전주에 입성했고, 22일에는 곤양을 점령하고 28일에는 사천 구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0월 1일, 일본군 주력부대가 지키고 있던 사천 신성을 공격하다가 대패하여 중로군은 합천을 지나 상주까지 퇴각했다.
9월 21일, 동로군은 경주에 집결하여 명군은 울산성으로, 조선 관군은 동래성으로 향했다. 조선 관군은 분전하여 동래성을 탈환했으나 명군은 또다시 울산성 공략에 실패하여 10월 6일에는 영천까지 물러났다.
8월에 서울을 떠나 전주에 도착한 서로군의 주장 유정은 군사를 다시 좌협, 우협, 중협의 3로로 나누어 좌협군은 남원, 구례, 광양으로 진격토록 했고, 우협군은 남원, 순창, 낙안으로 진격토록 했으며, 중협군은 남원, 곡성, 순천으로 진격하여 9월 19일에 왜교 성(倭橋城)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수로군도 서로군과 수륙합동작전을 위해 9월 15일에 고금도 본영을 출발하여 나로도, 방답, 여수, 하개도를 거쳐 20일에는 왜교 성 앞 10리 지점의 유도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 조명연합수군(朝明聯合水軍)의 전력은 조선 수군 전함 85척, 명나라 수군 전함 25척, 기타 협선 등 총 187척이었다.
왜교 성 앞바다는 수심이 얕아서 크고 무거운 조선 수군의 주력전함 판옥선이 마음대로 돌격할 수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적군은 500여척의 군선을 육지 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신성포에 숨기고 있었으며, 그곳으로 이르는 수로에믐 말뚝을 박 아두었기에 진입이 매우 어려웠다. 또 밀물을 타고 가까스로 진입하면 적병들이 양쪽 고지에서 내려다보며 조총을 마구 쏘아댔다.
10월 2일,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대대적인 수륙협공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적군의 기습공격으로 명나라 군사 8백여명이 전사했고, 수군도 밀물을 타고 돌격해 적병들을 많이 죽였으나 피해도 컸다. 격전 중에 사도첨사(蛇渡僉使) 황세득(黃世得) 등이 전사하고 제포만호(薺浦萬戶) 주의수(朱義壽), 사량만호(蛇梁萬戶) 김성옥(金聲玉), 남해현령 유형(柳珩), 진도군수(珍島郡守) 선의문(宣義文), 강진현감 송상보(宋尙甫) 등이 적군의 총탄에 맞아 부상당했다.
그 이튿날 야습을 가해 초저녁부터 자정까지 적군과 싸웠는데, 썰물에 걸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명나라 군선 39척이 역습당해 수백명이 전사하고 진린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10월 6일, 사천성을 공격하던 중로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서로군 사령관 유정은 전의를 잃고 군사를 순천으로 철수시켰다. 이에 따라 수로군도 9일에 고금도로 회군했다.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전기』13.마지막 전투 노량해전 ⑵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월권행위
이순신이 고금도에 주둔하여 순천을 본거지로 한 적군의 동태를 주시하며 조선 수군의 전력을 증강하고 있는 동안 육지에서는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 마귀(麻貴), 동일원(童一元) 등이 울산과 사천에 있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대를 공격하고, 유정(劉艇)은 순천 예교에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한편 지난해 10월에 서해를 건너온 명나라 수군 5천명도 7월 16일에 고금도에 이르렀다. 명나라의 수군 도독은 진린(陳璘)이었다. 그런데 진린은 성격이 매우 난폭하고 오만무례한 자였다.
그는 다른 명나라 장수들과 마찬가지로 무지 무식한데다가 헛된 자만심에 가득 차 강화도에서부터 조선 백성과 관리들을 짐승 다루듯이 했으며, 심지어는 6월 26일 국왕 선조가 몸소 배웅하는 자리에서도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로 찰방 이상규(李相奎)의 목을 노끈으로 묶어 질질 끌고 다니는 야만적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이처럼 무지막지한 자였으므로 유성룡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장차 이순신의 작전에 큰 지장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진린을 특별히 대접하여 화를 내지 않게 하라" 는 특별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안 이순신은 군사들로 하여금 사슴과 멧돼지와 물고기들을 많이 잡아오도록 하고 술도 넉넉히 마련토록 하여 풍성한 잔치 준비를 하고 진린을 기다렸다.
명나라의 군선들이 고금도 앞바다로 들어오자 이순신은 전함들을 거느리고 나가 성대한 환영식을 베풀며 맞이했다. 그리고 본영으로 안내하여 미리 준비한 음식을 진린을 비롯한 명나라 장졸들이 배가 터지도록 먹여주었다. 배가 부르니 심통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명군 장수와 병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순신이 최고라고 칭찬했다. 진린도 만족스러워 이순신의 환대에 감사했다.
하지만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은 역시 골칫거리였다. 진린이 군령권을 행사한답시고 번번이 작전을 방해하는 바람에 이순신이 원하는 대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는 노량해전(露梁海戰) 직전까지 이어졌다.
이순신은 그때마다 조정에 그런 사정을 보고했으나 워낙 무능하고 무기력한 조정이라 시원한 해결책이 있을 턱이 만무했다. 이 문제 또한 최고 경영자 이순신 혼자의 힘으로 타개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이 맞서 싸워야만 할 적이 또 하나 더 는 셈이었다.
진린이 고금도에 도착한지 이틀이 지난 7월 18일에 적선 100여척이 녹도에 침범했다는 정찰 보고가 들어왔다. 이순신과 진린이 즉각 함대를 이끌고 출동했지만 금당도에 이르렀을때 적선들은 이미 추격권을 벗어나 멀리 달아난 뒤였다. 24일에는 이순신과 진린이 운주당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명나라 군관 하나가 들어와 진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오늘 새벽에 적군을 만났는데, 조선 수군이 적선 6척을 나포하고 60여명의 적병을 참살했으나 우리 명나라의 수군은 풍세가 불순하여 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진린이 화를 내며 술잔을 내던지고, "저 놈을 끌어내라!" 하고 화를 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이순신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진 도독, 고정하시오. 진 도독은 대명국(大明國)의 대장으로서 멀리 이곳까지 왜적(倭敵)을 토벌하러 오시지 않았소? 그러니까 이 진중에서 승리한 것은 모두 진 도독의 공로라고 해야 옳지요. 지금 우리 수군이 얻은 왜적(倭敵)의 수급(首級)은 모두 진 도독에게 드리겠소이다. 이제 진 도독이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되어 승전보(勝戰報)를 귀국의 황제께 보고하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소?"
그러자 진린의 얼굴이 금세 펴지면서 이순신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 이미 중원에서부터 장군의 명성을 많이 들었소! 지금 보니 장군에 관한 칭찬이 하나도 거짓이 아니었구려!"
이순신은 그날 녹도만호 송여종이 포획한 적선 6척과 적병의 수급(首級) 69개를 모두 진린에게 주었다. 진린은 그것을 서울에 있는 명군 총사령부로 보냈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런 사정을 조정에 따로 보고하였으므로 조정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뒤에도 이순신은 출동하여 아무 전과가 없는 진린에게 전공(戰功)을 나누어 주어 그의 교만하고 포악한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타고난 천성은 어쩔 수 없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가자 그들의 천박한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명군의 행패는 힘없는 백성들에게도 가해져 약탈과 强姦 따위가 빈번히 벌어졌다. 여러 차례 타이르고 항의할 때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만 했지 나아지는 기색이 없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 따끔하게 버릇을 가르쳐 놓아야겠다고 작정한 이순신은 하루는 부하들에게 명군 진영 인근의 민가와 시설물들에 대해 철거령을 내렸다. 또한 중요한 물자는 모두 배로 옮기게 하고 자신의 의복과 침구까지 배에 싣도록 했다.
소란이 벌어지자 진린이 이순신에게 부하를 보내 무슨 일인가 알아오게 지시했다. 이순신이 이렇게 전하라고 일렀다.
"우리나라 군사와 백성은 귀국 대장이 온다는 말을 듣고 마치 부모가 오신 듯이 우러러보았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귀국 군사들이 행패를 부리고 약탈하는 것을 일삼기 때문에 백성들이 살 수 없어서 모두 다른 곳으로 피하려고 한다. 그래서 나도 대장으로서 혼자만 여기 있을 수 없으므로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진린이 허둥지둥 달려와서 이순신의 손을 잡고 백배사죄했다. 이순신이 없으면 혼자 싸워 전공(戰功)을 세울 자신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이야기가 본국에 들어가면 자신의 목이 달아나게 생겼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이렇게 진린을 굴복시켜 결국 명나라 수군 장졸들의 행패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이순신의 고매한 인품과 탁월한 통솔력과 넓은 학식이 이 무지막지한 중국인 장수까지 감동시켜 나중에는 자기 부하의 처벌권한까지 넘겨주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명나라 수군 장졸들도 이순신 장군을 저희 상관보다 더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
진린은 나중에는 이순신에게 지휘권까지 양보하였고, 이순신을 부를 때에도 꼭 이야(李爺)라는 존칭을 썼다. 또한 걸핏하면 이런 말도 했다.
"이야(李爺)는 조선같이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에 살 인물이 아니오. 나와 같이 명나라로 들어갑시다. 같이 황상(皇上) 폐하(陛下)를 모시고 벼슬살이를 합시다."
이순신은 진린의 말을 듣고 그저 조용히 웃어 보일 뿐이었다. 뒷날 진린은 선조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순신을 가리켜 '경천위지지재(經天緯地之才)'요, 보천욕일지공(補天浴日之功)'이니 하며 자신의 존경심을 표현했다.
노량해전(露梁海戰)이 벌어지기 전인 1598년 11월 16일에 진린은 자국 황제에게 이순신을 천거하는 상소문을 써서 본국에 보냈는데, 그 내용이 명국문록(明國文錄)에 실려 있다.
'폐하, 이 전란이 끝나면 즉시 조선의 수군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부르소서. 그로 하여금 북쪽의 오랑캐를 견제토록 하소서.. 이순신 통제사는 능히 우리 명(明)의 후환을 없애줄 것이라 신(臣) 진린(陳璘)은 굳게 믿사옵니다....'
이순신이 만일 평범한 인물이었다면 진린의 위세에 눌려 자신의 뜻대로 적군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범상한 장수가 아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능히 해결의 길을 찾을 줄 알았던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그는 참으로 '조선같이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 에서 살기에는 아까운 비범한 인물이었다.
◆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의 왜교 성(倭橋城) 공격.
정유년 연말부터 무술년 연초까지 계속된 울산성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명군 총사령관 양호(楊鎬)는 사로병진(四路竝進)이란 작전을 추진했다. 사로병진이란 중로에 이여매(李如梅), 동로에 마귀(麻貴), 서로에 유정(劉艇), 그리고 수로에 진린(陳璘)이 각각 사령관이 되어 4개 방면에서 수륙합동작전을 펼쳐 일본군을 섬멸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가운데 중로대장 이여매는 이여송(李如松)의 친동생인데 이여송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 후임으로 가고 동일원(童一元)이 그 자리를 맡았다.
이들 사로군은 무술년 8월 18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진린은 이들 육로군에 한 달 앞선 7월 16일에 서해를 남하하여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합세했던 것이다.
여기서 울산성전투(蔚山城戰鬪)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켜 충청도 직산싸지 북상했던 일본군은 수군이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패배하자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진격을 포기한 일본군은 부산으로 퇴각했다.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우군은 10월 중순에 양산까지 후퇴했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대는 울산으로 후퇴했다. 또 그동안 전라도를 휩쓸며 분탕질을 치던 좌군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를 순천에 있는 왜교 성(倭橋城)에 주둔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진주에서 부산에 이르는 해안의 18개 왜성으로 퇴각했다.
이에 따라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은 그해 연말까지 대부분의 병력을 경상도로 집결시켰다. 그리고 12월 22일에 울산성 공격을 개시했다. 연합군은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조선 관군 1만명, 경리 양호 휘하의 명나라 군사 3만 8천명 등 모두 4만 8천명이었다. 당시 울산성에는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군사 1만 6천명이 잇엇다. 원래 울산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때 서생포에 나가 있다가 총공격을 받자 급히 달려왔다.
공방전(攻防戰)이 장기화되자 성안의 일본군은 군량이 떨어져 벽의 흙을 뜯어 먹고, 식수가 없어서 말의 피를 마시거나 자기 오줌을 받아 마시기까지 이르렀다. 해가 바뀌자 남해안 각지에 주둔하고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다 히데이에 등이 이끄는 일본군 2만여명이 구원차 달려와 연합군을 역포위했다.
1월 4일,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은 총공세를 펼쳤으나 끝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했다. 전후 10여일에 걸친 울산성에서의 공방전은 이렇게 쌍방에서 2만여명의 막대한 인명피해를 남기고 끝났다. 명군 수뇌부는 울산성 함락의 실패 이유를 수군이 바다에서 일본 지원군을 막지 못한데 있다고 판단했다. 이순신이 본영을 고하도에서 고금도로 이진한 것은 울산성전투(蔚山城戰鬪) 직후였다. 본진을 서해에서 좀더 남동쪽 남해안으로 전진 이동한 것은 순천의 적군을 막는 한편 다시 재해권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해 8월 18일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킨 최고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사카에서 62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전쟁의 원흉 히데요시의 죽음은 자연히 전쟁의 양상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 히데요시의 죽음은 극비에 부쳐졌고, 일본 조정의 중신회의에서 조선 출정군의 전면 철군이 결정되었다. 이 결정 도한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 장수들에게 극비로 전달되었다.
그러나 세상이 비밀은 없는 법. 히데요시의 죽음은 결국 조선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 마침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은 적군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로 결정하고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사로병진(四路竝進) 작전이었다. 동로군은 제독 마귀와 부총병 오유충(吳維忠)이 이끄는 명군 2만 4천명과 김응서가 이끄는 조선 관군 5천 5백명 등 총 2만 9천 5백명으로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의 왜군 1만 5천명이 지키는 울산성을 공격키로 했다. 중로군은 제독 동일원과 부총병 장방(張榜)이 이끄는 명군 3만 4천 4백명과 경상우병사 정기룡(鄭起龍)이 이끄는 조선 관군 2천명 등 총 3만 6천 7백명으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왜군 8천명이 지키고 있는 사천성을 공격토록 했다. 서로군은 제독 유정(劉艇)과 부총병 이방춘(李芳春)이 이끄는 명군 2만 6천명과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조선 관군 1만명 등 총 3만 6천명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 1만 3천 7백명이 지키는 순천 동남쪽 왜교 성(倭橋城)을 공격토록 했다.
한편 수로군은 수군도독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 5천명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 1만 6천여명이 서로군의 왜교 성(倭橋城) 공격에 맞춰 해상에서 적군을 공격키로 했다.
9월 17일, 중로군이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 중로군은 합천을 떠나 삼가를 거쳐 19일에 전주에 입성했고, 22일에는 곤양을 점령하고 28일에는 사천 구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0월 1일, 일본군 주력부대가 지키고 있던 사천 신성을 공격하다가 대패하여 중로군은 합천을 지나 상주까지 퇴각했다.
9월 21일, 동로군은 경주에 집결하여 명군은 울산성으로, 조선 관군은 동래성으로 향했다. 조선 관군은 분전하여 동래성을 탈환했으나 명군은 또다시 울산성 공략에 실패하여 10월 6일에는 영천까지 물러났다.
8월에 서울을 떠나 전주에 도착한 서로군의 주장 유정은 군사를 다시 좌협, 우협, 중협의 3로로 나누어 좌협군은 남원, 구례, 광양으로 진격토록 했고, 우협군은 남원, 순창, 낙안으로 진격토록 했으며, 중협군은 남원, 곡성, 순천으로 진격하여 9월 19일에 왜교 성(倭橋城)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수로군도 서로군과 수륙합동작전을 위해 9월 15일에 고금도 본영을 출발하여 나로도, 방답, 여수, 하개도를 거쳐 20일에는 왜교 성 앞 10리 지점의 유도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 조명연합수군(朝明聯合水軍)의 전력은 조선 수군 전함 85척, 명나라 수군 전함 25척, 기타 협선 등 총 187척이었다.
왜교 성 앞바다는 수심이 얕아서 크고 무거운 조선 수군의 주력전함 판옥선이 마음대로 돌격할 수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적군은 500여척의 군선을 육지 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신성포에 숨기고 있었으며, 그곳으로 이르는 수로에믐 말뚝을 박 아두었기에 진입이 매우 어려웠다. 또 밀물을 타고 가까스로 진입하면 적병들이 양쪽 고지에서 내려다보며 조총을 마구 쏘아댔다.
10월 2일,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대대적인 수륙협공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적군의 기습공격으로 명나라 군사 8백여명이 전사했고, 수군도 밀물을 타고 돌격해 적병들을 많이 죽였으나 피해도 컸다. 격전 중에 사도첨사(蛇渡僉使) 황세득(黃世得) 등이 전사하고 제포만호(薺浦萬戶) 주의수(朱義壽), 사량만호(蛇梁萬戶) 김성옥(金聲玉), 남해현령 유형(柳珩), 진도군수(珍島郡守) 선의문(宣義文), 강진현감 송상보(宋尙甫) 등이 적군의 총탄에 맞아 부상당했다.
그 이튿날 야습을 가해 초저녁부터 자정까지 적군과 싸웠는데, 썰물에 걸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명나라 군선 39척이 역습당해 수백명이 전사하고 진린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10월 6일, 사천성을 공격하던 중로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서로군 사령관 유정은 전의를 잃고 군사를 순천으로 철수시켰다. 이에 따라 수로군도 9일에 고금도로 회군했다.
왜교 성 공격 실패로 전황은 다시 소강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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