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을 하는 아이(掌編소설)

풀내음200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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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이십여년 전에 구성해 보았던 아주 짧은 소설인 장편(掌編)소설입니다.

요즘 달리기를 하며 새삼 옛생각이 나서 옛글을 다시 올려 봅니다.

이십여년의 시차가 있으므로 요즘과는 맞지 않을 겁니다만... 함 읽어 보세요^_^

마라톤을 하는 아이(掌編소설)

마라톤이란 일종의 투기성을 띠는 운동이다.
머나먼 거리를 힘껏 뛰어가다 보면.. 이를테면 인사불성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그렇게 될 때 뛰고있는 사람은 자신이 뛰고 있는 목적과 사명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저 자신이 지금 뛰고 있다는 것, 그것 외에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왜 뛰고 있는지를 모두 잊어버리게 된다.
단지 나는 이제껏 계속 뛰어만 왔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뛰어야만 한다는 하나의 의무감, 그것만이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마라톤은 비로소 신성한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즉 이럴 때에야 비로소 스포츠라는 이름에 걸맞는 운동이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인간의 최고 한계점에서의 경기를 하는 것이고 일종의 자신의 한계점을 측정하는 수준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마라톤은 끝없는 인내와 투지를 요구하는 운동인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과 인간성과의 싸움일런지도 모른다.
그만큼 마라톤은 지구력을 요하는 운동이고 또 완성된 한 인간을 길러내는 훈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만큼 마라톤이란 고독한 운동이며 동시에 훈련이라고 봐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새벽 마라톤을 하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뛰기 시작한 나의 운동 습관이 잠시 움직이지 않으면 온몸이 근질거리게 해서 간혹 시간이 나면 그렇게 뜀박질을 해 대었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게으름이 많았던 대학생 시절에 평상시에는 뛰질 못했지만 방학이면 그래도 한동안 뛰어 다니는 부지런함도 간혹 보여왔었다.

새벽 네 시, 이제 막 통행금지가 해제된 시각엔 아직 샛별조차 뜨지 않은 때이다.
거리엔 간혹 수은 가로등만이 우뚝 서 있는 채 아무도 없는 곳을 혼자서 뛰는 첫 출발은 그야말로 상쾌함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첫출발이라는 언어 자체에만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발자국 소리만이 텅 빈 거리를 공허하게 울리던 상쾌함은 한 삼십분만 지나면 이내 투쟁으로 돌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 아무도 없는 깜깜한 공간을 홀로 뛰어가며 자신의 인내심과 투쟁을 벌인다는 것은 정말로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이 자주 들먹거리는 바로 그 고독으로 변해 가는 것이다.

 

그 무렵 나는 휘경동 근처에 살고 있었다.
자연히 번잡하고 공해가 많은 쪽을 피해서 어린이 대공원 쪽으로 코스를 잡고 뛰었다.
당시 집에서 대공원까지는 거의 한시간 가량 소요가 되는데 중량교를 건너서 우측으로 꼬부라져 한참을 달리면 하수 종말 처리장이 나오게 되는데 그 쪽 길은 비교적 단조로울 뿐만 아니라 신흥주택가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었으므로 길이 매우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또 그 하수처리장 위로 나있는 다리에서 나는 한번의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거기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뛰면 더욱 깨끗한 길이 나오게 되는데 이제 막 대공원조성 공사와 주변 도로의 조성공사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아차산의 마지막 줄기가 나오게 되는데 그곳도 이제 산을 절개한 마지막 공사가 정리단계에 들어가 있는 때였으므로 주변은 아직도 시골 냄새를 풍기는 논밭이 널려 있었고 더 진행을 하면 마지막 기착지인 천호대교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한강의 시원한 바람에 땀에 절은 나의 몸을 식혀줄 수 있었으므로 그야말로 환상의 코스를 잡았다고 보아도 될 코스였다.

 

그 때가 아마 내가 달리기를 시작한지 일주일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이제 막 8월에 접어든 더위는 그야말로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다.
그 복중에서 나는 이제 사투의 서장을 열며 하수 처리장이 눈에 막 들어오기 시작할 때였다.
한 이십여 미터 앞에 뛰어가고 있는 아이가 하나 보였다.
이제 초등학교 사오학년 쯤 되어 보이는 듯했다.
거리가 좁혀지면서 확실하게 보여지는 아이의 모습은 이제 막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힘이들어 보였는데 그저 보통 수준의 키에 온몸이 야위어 보였고 머리통만이 커다란 것이 마치 머리만을 위해 온몸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네 시 반이 채 못된 어둠 속에서 녀석은 마치 미진하기만 한 미동을 행하는 아메바 같은 미생물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제 오르막 길이 시작되는 하수처리장의 길목으로는 어둠 속에서 모가지만 길게 빼어 문 가로등들이 고개 너머로 사라져 가고 있을 뿐인 텅 빈 거리엔 꼬마와 나의 열기로써 모든 것들이 시들어가고 있는 듯 했다.
이상한 친근감에 이끌려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다리목까지 보조를 맞추어 갔다.
이제 서늘한 바람으로 열기를 식힐 차례다.
녀석이 나를 쳐다보며 슬며시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꼬마야! 많이 뛰었니?"
"예 태능까지 갔다 오는 길이예요"
녀석은 밭은 숨이 목구멍까지 치받고 있는 모양이였다.
여기 다리목에서 태능을 다녀오려면 나의 보조로도 거의 한시간 거리가 되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잠이 깨길래 나와 뛰었어요"
녀석은 아마 통금이 해제도 되기 전에 나와서 뛰었나 보았다.
"혼자 뛰니?"
"예! 저번에 학교에서 마라톤 선수를 뽑았는데 떨어지고 말았거든요.
그래서 다음에 또 뽑혀 보려고 뛰는 중이예요"
녀석은 묻지도 않은 말들을 술술 풀어 놓았다.
"학교는 어딘데?"
"바로 여기서 나가면 있어요"
"면목국민학교예요. 거기서 부반장이어요"
녀석이 계면쩍은지 뒷머리를 긁어대었다.
"아저씨는 학교 다니세요?"
"녀석아! 그냥 형이라고 불러. 응 나는 **대에 다녀"
"헤... 우리 앞집에 사는 누나도 대학교 다니는데..."
녀석은 또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시원한 바람이 열기를 거의 앗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녀석이 느닷없이 이야길 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찾기 쉬워요. 이리 들어가서 반장 집을 찾으면 돼요. 우리 집이 반장 집이거든요"
놈은 제법 우쭐거리는 폼을 잡더니 왼쪽으로 꼬부라져 들어갔다.
녀석은 한쪽 손을 올린 채 나를 향해 소리치고는 어둠 속으로 잠적해 버렸다.

 

그후 며칠간 녀석과 나는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
말하자면 나는 아주 훌륭한 동지를 얻은 격이였다.
녀석과 만나면서 내가 놀란 것은 녀석의 순발력이였다.
그렇게 바싹 마른 어린놈이 어떻게 그 먼 거리를 뛰어 다니며 그러면서도 또 거의 나와 보조를 맞출 수 있었는지 도통 믿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녀석에게서 무엇인가 배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녀석은 장래 희망이 법관이라고 말했다.
"형은 **대학 나와서 무엇을 할꺼예요?"
하지만 나는 달리 할말이 없었다.
"그럼 너는 무엇을 하러 뜀박질을 하지?"
"나는 말씀 드렸잖아요. 마라톤 선수가 될 거라고"
녀석은 그 나이 또래의 어린이답지 않게 예절이 발랐다.
그리고 녀석은 자신이 장남이라고 했다.

 

아마 그 때가 녀석과 만난 지 근 일주일이 되어갈 때였을 것이다.
나는 우연히 그 면목동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때의 그 행선 길이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친구 놈과의 만남을 위해 그 하수 종말 처리장 너머의 길을 걸었고 그 길을 걸으면서 나는 녀석이 살고 있는 동네를 보고야 말았다.
그쪽은 아주 조밀하게 밀집된 판자촌이였다.
모든 집들이라는 게 그저 간신히 몸을 뉘일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방들이 한두 칸씩 붙어있는 집들이 집과 집의 간격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서 늘어서 있었다.
나는 잠시 아연해져 있었다.
적어도 나의 상상력으로는 무엇인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묘한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둠 속으로 잠적해 가면서 "형 내일 또 봐요"하던 모습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아무튼 그 후로 나는 왠지 녀석을 조금씩 피하게 되었다.
아마도 나 혼자 쓰기에 그다지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용돈을 쓰고 있던 내가 녀석에게 말없는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녀석이 나에게 무엇을 먹고 싶다던가 아니면 배가 고프다던가 하는 따위의 말을 한 적도 없었다.
단지 그냥 나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틀 속에서 그것에 대한 의무감을 감수해 내기가 귀찮았기 때문이리라.

 

아마 그날부터 한 사나흘을 만나지 못했던 듯하다.
녀석이 부담스러웠던 나는 한 삼십 분 가량 늦게 출발하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닷새째 되는 날 녀석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다릿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형! 왜 요즘은 잘 안보여요?"
나는 그저 녀석이 하던 습관처럼 뒷골만 긁적이며 우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며칠동안 형이 안나오나하고 기다렸어요"
하지만 나는 녀석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더욱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서도 나는 계속 한 삼십분 가량 늦게 나왔고 결국 또 그 녀석과 매일같이 만났다.
물론 부담감을 느낀 나는 녀석과 만나면서 그리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부담을 느꼈다는 것이 옳다고 봐야겠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서 나는 녀석의 한 가족을 만나게 되었다.
예의 그 다리목 위에 녀석은 녀석보다 더욱 어린 작은 꼬마 아이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예닐곱살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는 코 밑에 누런 딱지를 남긴 채 형의 옷을 물려 입었는지.. 자신의 손끝까지의 길이보다 더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야! 인사해!"
녀석이 꼬마의 커다란 옷을 당기면서 윽박질렀다.
"아저씨가 대학생이야?"
"그렇게 말하는 게 아냐!"
녀석은 제법 어른스럽게 동생을 타이르며 한쪽 옆으로 끌어냈다.
"제 동생이어요"
녀석은 계면쩍게 웃으면서 뒷머리를 긁어댔다.
딴에는 철없는 동생이 부끄러웠나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나는 또다시 그 부담감을 생각하고 있었고 한편으론 그 길에는 상점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 저으기 안심을 하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녀석을 만나질 못했다.
나머지 며칠동안을 의도적으로 불규칙하게 시간을 내기도 했거니와 곧 방학이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후부터는 녀석을 보지 않아도 좋았으며 또 그 부담스런 속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에 좋았다.

 

그 후에 내가 다시 그 길을 뛰게 된 것은 겨울에 접어들어서였다.
운동을 하던 사람이 안하게 되면 늘 그런 현상이 찾아오듯이 학기말 고사를 치르고 방학에 접어들면서부터 온몸이 근질거려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겨울의 마라톤은 여름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특히 새벽에 뛰는 일은 더욱이나 큰 차이가 난다.
땅이 온통 얼어붙은 새벽녘의 가장 추운 시간에 잠을 자다가 빠져 나온다는 것도 어렵거니와 그런 풀리지 않은 몸으로 뛴다는 자체도 몹시 힘이든 노릇이다.
일단 귀찮음을 무릅쓰고 뛰다보면 몸에서 열이 나기 전에 우선은 발이 얼어들어온다.
이 꽁꽁 얼은 발이 얼어서 딱딱하게 굳어있는 겨울 땅을 밟으면 발에서부터 통증이 찾아오기 시작하며 그 다음은 얼굴이 당기기 시작한다. 그 통증이란 마치 보이지 않는 손들이 얼굴을 잡아당기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그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손을 호호 불어가며 뛴다는 것은 말하지 못할 어떤 쾌감 같은 기쁨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처음 며칠 동안은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뛴다는 하나의 생각만으로 뛰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하수처리장의 언덕에 올라 숨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강풍이 불어오던 날 마침내 나는 그 자그마한 마라톤을 하던 아이를 생각해 내었다.
그러나 녀석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기분이면서도 또 어느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했다.
그런 시간이 흘러갈수록 묘한 것은 녀석이 점점 보고 싶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보이질 않았고 이번엔 내가 그 다리 위에서 녀석을 기다려 보았지만 보이질 않았다.
물론 새벽의 추위가 오랜 시간을 기다리게 해 주지는 않았지만 날이 거듭될수록 녀석에 대한 궁금증은 점점 그 도를 더해만 갔다.

 

며칠이 그런 상태로 계속 흘러가 버리자 내 인내심이 바닥이 났는지... 꼬마 동지가 없어서인지 나는 그만 게을러지기 시작했다.
결국 근절거리던 몸도 어느 정도 풀어지기도 했거니와 새벽에 일어나는 자체가 귀찮은 나는 점차 안이한 쪽으로 생각이 기울게 되었고 결국에는 운동을 접고야 말았다.

 

당시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시기였다.
내가 행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들인지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게만 보여갔고 그렇게 방황을 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날도 나는 방안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안에서 뒹굴고 있다가 갑갑한 마음에 바람을 쐬고 싶어 무작정 거리로 나서 발걸음 가는 대로 걸었다.
그런 나의 발걸음이 이상하리 만치 자연스럽게 향하고 있는 곳은 그 마라톤을 하던 코스였다.
무심코 하수종말 처리장의 다리가 있는 언덕을 넘어서면서 나는 갑작스런 풍경에 눈을 다시 씻고 봐야만 했다.
눈앞에 있어야할 그 하수종말 처리장 너머의 예의 그 판잣집들이 하나도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판자집의 자리는 휑하게 비어있었고 그곳엔 철근들이 삐죽 삐죽 튀어나온 흉물스런 모습으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마도 아파트를 짓는 공사가 진행중인가 보았다.
아직 철거중인 몇 채의 집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조감도가  철거된 판자조각으로 이어지은 임시가옥을 거만스런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듯했다.
나는 다시 그 아이의 눈빛이 떠올라 찾아 봤지만 녀석은 종내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단지 그 임시 거택 안에서 쓰러지듯 낮잠을 자고 있는 낯 설은 아이들과 흙 묻은 연장들이 부엌에서 주인을 대신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직 철거중인 집에서는 허름한 복장의 인부들이 그나마의 돈벌이를 위해 자신의 집들을 철거하는데 동원된 듯이 보였다.

 

"형 나는 판사가 될 거예요"
나는 필시 녀석이 꼭 판사가 되어주리라고 믿어 주었다.
그리고 녀석은 그 길을 가기 위해 머나먼 마라톤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긴 글을 참고 읽어주신 혼사방 여러분들께 경의를 표합니다.마라톤을 하는 아이(掌編소설)